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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의 그림 속 길을 간다 (53) 압구정 ②] 압구정 아파트가 삼켜버린 ‘닥나무 섬’ 저자도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압구정 구지(舊址)를 나선다. 나서는 길에 강변 쪽 11동, 12동 지역을 돌아보고 나온다. 이 동들 바깥쪽으로 둑을 쌓아올리고 올림픽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겸재의 압구정도를 보면 이 지점은 아마도 갈수기에는 모래펄이 되었다가 비라도 좀 오는 철에는 물길이 되었을 것이다. 겸재의 압구정도 두 점 모두 압구정이 있는 높은 대(臺) 아래는 한강 물길이다. 74동 앞은 그랬던 것이다.
이 곳에 집 지을 터를 만드느라 한강에 오래오래 자리 잡았던 저자도(楮子島)가 애꿎게 수난을 당했다. 잠시 후에 이야기하겠지만 저자도를 파서 이 땅을 메우고 아파트를 세운 것이다. 요즈음 같이 환경에 눈뜬 세상이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 왜관수도원 소장본 압구정도와 같은 위치를 찾아 동호대교로 오른다. 동호대교는 전철용 철교와 자동차 도로 중심 다리다. 그러다 보니 동호대교를 걸어서 건너는 이는 거의 없다. 압구정역과 옥수역을 잇는 3호선 전철이 있는데 굳이 전철과 자동차길 옆 한 뼘 인도를 건널 이유는 없다. 그러나 오늘은 왜관수도원 소장본 압구정도를 이해하기 위해 동호대교로 오른다. 동호대교를 알리는 기념석이 서 있다. 이런 것이 여기 있었구나. 사실 동호(東湖)라는 호수는 어디에도 없다. 옛사람들은 강폭이 넓고 유속(流速)이 느린 강의 부분 부분을 호(湖)라 불렀다. 행주산성 앞은 행호(幸湖), 서강 앞은 서호(西湖), 용산강 앞은 용호(龍湖)라 부르는 것처럼 이곳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유역을 예부터 동호(東湖)라 불렀다.
강이 지천(支川)을 만나면 유속이 느려지고 유역(流域)이 넓어지면서 퇴적층이 쌓인다. 난지도도 그렇게 만들어졌고 이곳 저자도(楮子島)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다리 위에서 겸재의 그림(그림 1)을 보면서 강 상류와 중랑천 방향을 바라본다.
겸재의 그림 속 압구정은 물가 둔덕 위에 서 있다. 두 채의 결코 작지 않은 팔작지붕 건물이 상류 방향과 하류 방향에 자리 잡았고 물가에는 반송류(盤松類)의 소나무 네 그루, 뒤로는 금강송(金剛松)으로 보이는 헌칠한 소나무 한 그루가 멋을 부리고 있다. 아래채에는 버들류로 보이는 나무들이 물가에 자리 잡아 조화롭게 보인다. 집 뒤 내지(內地) 쪽으로는 백성들 집으로 보이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하다. 앞 동호에는 작은 돛배 하나 떠 있는데 그 뒤로 보이는 희끗한 물길이 중랑천이다.
그림 속 2로 표시된 봉우리는 그 앞 살곶이다리로 보이는 다리로 볼 때 한양대 뒷산일 것 같고, 좌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무학대사의 전설이 전해지는 무학봉일 것이다. 표시 3은 응봉산으로 보인다. 4쯤 되는 위치를 입석포(立石浦)라 했다. 5는 서울시민의 숲(전에는 뚝섬경마장)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곶교(箭串橋: 살곶이 다리) 앞 땅이라 하여 전곶평(箭串坪)이라 부르던 사냥터이자 말목장이었다. 이제는 그 위로 강변북로와 성수대교가 지나간다. 멀리 용마산이 보인다(표시 1). 좌우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망우산과 아차산이다. 이제는 높디높은 주상복합 건물 사이로 손톱만큼 보인다.
앞 동호(東湖)에는 필자가 푸른 선으로 표시한 것처럼 한강과 중랑천 두 물길이 만난다. 두 물길이 만난다 해서 ‘두물+개’라 했는데 소유격 ‘의’에 해당하는 사이시옷 ‘ㅅ’을 넣어 ‘두뭀개’가 된 후 다시 두뭇개가 되었다 한다. 기록 문화가 한자로 주로 이루어지던 조선시대에는 두뭇개를 표현할 한자가 없다 보니 豆毛浦(두모포)와 같은 방법으로 기록하였는데 ‘두 물’이 ‘콩 털’이 되는 웃지 못 할 결과가 되었다. 경조오부도와 같은 옛 지도나 기록은 이런 결과의 산물이다.
왕의 매 사냥터 응봉은 서울 최고 경승
오늘은 압구정 옛터에서 출발하여 옛 독서당이 기대었던 터전 매봉산까지 가 보려 한다. 지방자치단체는 개나리꽃 명소인 한강가 응봉산에서 시작하여 남산까지 이어지는 도심 속 공원을 이은 트레킹 코스를 개발해 놓았다. 이 지역 사람들 아니면 잘 모르는 길이다. 필자는 4월초 개나리가 만발할 때면 이 길을 한 번씩 걷는다. 4월 초 3호선 압구정역에서 전철을 타고 옥수역으로 향하는 동호대교 위에서 바라보면 노오란 개나리가 온 산을 덮은 응봉산을 만난다. 이 노선을 타는 이들은 감탄을 하고 대부분 한 번 가보고 싶어 한다. 내년에는 꼭 한 번 걸으시기를 권한다. 기왕이면 겸재의 압구정도와 독서당계회도를 핸드폰에 담고 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오늘 걷기 참고 지도는 지자체의 지도(지도 1)와 경조오부도(지도 2)이다. 압구정역에서 출발, 현대아파트 74동 앞 압구정 옛터를 거친 후 동호대교를 건너 강변으로 내려간다. 경조오부도에는 이 주변에 豆毛浦(두모포)와 尼舍(니사)가 기록되어 있다. 니사란 비구니 승려들이 거주하는 절이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4개의 비구니 승방이 있었다. 창신동의 청룡사(새절승방), 보문동의 보문사(탑골승방), 옥수동 미타사(두뭇개승방), 석관천의 돌곶이승방이 그곳이다. 니사로 기록된 이곳 두뭇개승방은 지금도 ‘종남산 미타사’로 비구니 승려들의 수행도량으로 남아 있다.
우측에는 한강을 끼고 좌측으로는 노란 개나리가 온 산을 덮은 달맞이봉을 보며 상류 방향으로 걷다 보면 중랑천 합수 지점에 닿는다. 좌로 보이는 바위 봉우리가 응봉산이다. 개나리가 지천이다. 중랑천을 따라 오른다. 궁금한 분은 살곶이다리까지 다녀오면 좋다. 흔히 살곶이다리(전곶교: 箭串橋)라 하는데 경조오부도에는 제반교(濟礬橋)라 기록되어 있다. 돌을 가지런히 잘 다듬어 놓아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 이 다리는 2011년 보물 1738호로 지정되었다. 세종2년(1420년) 건설을 시작하여 공사를 쉬기도 하였는데 성종 14년(1483년) 완공하였다. 정종과 태종은 이곳에 와서 사냥하기를 즐겼는데 그 중에는 매 사냥도 있었다 한다. 태조 성종 간 100여 년 사이에 150여 회의 매 사냥을 했다 하니 초기 무인 기질이 강했던 임금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나리산 응봉(鷹峰)을 오르기 위해서는 중랑천 물길 가에 있는 응봉역을 경유하여 간다.
응봉산 정상의 향기를 일컬어 “전교심방(箭郊尋芳)”
코로나19 세상이다 보니 응봉산을 오르는 길에는 플래카드도 재미 있다.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보는 것이다 … 사회적 거리두기”.
개나리가 온 산을 채웠다. 산 정상에는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를 세워 놓았다. 예부터 응봉산 주변은 명승이라서 여러 정자의 기록이 보인다. 연산군(燕山君)이 지어 놀이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게 하사되었다는 황화정(皇華亭), 살곶이(箭串)에 있었다는 낙천정(樂天亭), 두모포에 있었는데 본래 제안대군의 집이었다는 유하정(流霞亭), 신정왕후 조대비가 태어날 때(1808, 순조 8년) 두 마리 호랑이가 문 앞을 지켰다는 쌍호정(雙虎亭) 등이다.
응봉산 정상에서 보는 한강 주변 조망은 압권이다. 예부터 이 지역의 봄 향기는 전교심방(箭郊尋芳)이라 하여 한양의 십승(十勝: 10곳 명승)의 하나였다. 이곳을 자주 찾았던 월산대군의 시 한 수 읽고 가자. 그는 저 아래 보이는 서울 숲을 말을 타고 봄 맞아 나간 듯하다. 함께할 술친구 찾아.
春郊細草如華茵 봄철 교외 여린 풀은 꽃자리 같은데
春風載酒尋遊人 봄바람에 술을 싣고 놀 친구 찾아가지
朝乘駿馬踏靑去 아침 준마 타고 들에 다니다가
日暮醉歸空惜春 해질녘 취해 오면 공연히 아쉬운 봄
(이하 줄임)
응봉에서 이 시 한 수 읽으니 공연히 나도 봄이 아쉽구나. 아쉬운 봄 잠시 접고 핸드폰에 담아온 겸재의 압구정도를 보며 압구정동을 바라본다. 간송 소장본의 각도와 가까운 위치일 것이다(사진 1). 이 그림은 이곳 응봉에서든가 또는 중랑천 건너 서울숲 끝쯤 되는 곳에서 바라본 압구정 그림이다. 응봉산 정상에는 그곳에서 찍은 조망도가 있는데 각도가 겸재의 그림과 거의 일치한다. 필자가 그림에 번호를 써 넣었는데 아시는 바와 같이 1은 압구정이다. 우뚝 언덕 위에 울타리가 견고하고 팔작지붕의 건물이 예사롭지 않다. 그 앞쪽으로는 규모가 좀 작은 듯 보이는 맞배지붕의 두 건물과 조금 아래쪽에 또 한 채의 한옥이 보인다. 앞쪽 백성들의 집으로 보이는 집들이 보이는데 둥근 초가가 아닌 각진 지붕들이다. 그림을 위해 둥근 초가를 일부러 이렇게 그린 것인지? 아니면 실제 이런 집들이 존재했는지 궁금하다.
저자도는 압구정 되고 상림은 잠실 되고
조금 더 상류 쪽으로 오르면 또 하나의 별장촌이 나타난다(표시 2). 지금의 한양아파트와 청담동 빌라들이 있는 곳이다. 수백 년 전 조선시대에 압구정동, 청담동의 강가 높은 지역은 별장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앞 강가는 모래톱이 길게 강으로 뻗어 나와 있다. 앞서 말한 대로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면서 유속이 느려져 생긴 모래사장 퇴적층이다. 물놀이하기에 더없이 좋았을 것이다. 조금 더 상류에는 이렇게 쌓인 섬 저자도(楮子島)가 있었다(표시 3).
이제 그림 뒤로 보이는 산들을 보자. 4는 아마도 남산일 것이다. 5는 신라호텔에서 한남대교 방향으로 오다 보면 좌로 보이는 매봉산으로 여겨진다. 이 산 동쪽 기슭에 독서당이 자리했었고 그 아래로 옥수역과 두뭇개 니사(尼舍) 미타사가 지금도 있다. 그러면 4와 5 사이 정상에 나무가 자라는 봉우리는 무엇일까? 아마도 지금은 통신 탑이 서 있는 남산 동봉일 것 같다. 실제 높이는 남산 주봉보다 낮지만 원근의 시차(視差)로 저리 그린 것 같다.
6은 삼성산, 7은 관악산이다. 8은 우면산인데 강남 아파트 너머로 지금도 잘 보인다. 9는 위치로 볼 때 청계산이다. 그러면 저 먼 산줄기 10은 무엇일까? 맑은 날 응봉에 올라 압구정동을 바라보면 아파트 넘고 넘어 저 멀리 산줄기가 보인다. 수원의 광교산과 이어지는 백운산 줄기다.
서울의 산꾼들이 긴 산줄기를 탈 때 하는 것이 광청종주다. 수원대 근처에서 시작하여 광교산 ~ 백운산 ~ 청계산을 이어 넘어 양재동 화물터미널로 내려오는 약 27km의 산길이다. 조금 더 미치면 아예 우면산과 관악산까지 잇는데 이쯤 되면 산에서 날을 밝히며 걷는 길이다.
강북의 불수사도북(불암산 ~ 수락산 ~ 사패산 ~ 도봉산 ~ 북한산)과 함께 서울의 양대 종주산행 길로 한가닥 하려면 도전해야 면(面)이 서는 길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필자가 찍은 사진에는 이들 산줄기가 선명하지 못하다.
응봉을 떠나기 전 동쪽 성수대교 방향을 바라본다. 지금의 압구정 아파트촌은 이곳에 있었던 저자도(楮子島)가 아니었으면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지도 2의 경조오부도에서 보이듯 지금의 성수대교로부터 그 상류에는 저자도라는 모래와 자갈로 만들어진 크나큰 퇴적 섬이 있었다. 그 상류로는 조그만 무동도(舞童島)가 있었고 또 그 상류에는 지도에 桑林(상림)으로 표시된 뽕나무밭 잠실이 있었다. 이 상림이 개발된 것이 지금의 잠실 대단지 지역이다. 그런데 잠실은 번영한 반면 저자도는 사라지는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중국 사신의 필수 코스 ‘한강 유람’
조선초 저자도는 태조의 이복형제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1348~1408)의 소유였다 한다. 이후 세종 대에 왕실 소유가 되었는데 세종은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했고, 공주는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물려주었다. 중국 사신이 오면 빠지지 않는 스케줄이 한강 뱃놀이였는데 그 구간이 저자도에서 양화도까지였다.
또한 저자도는 기우제와 출정하는 병사들의 전송 행사를 하는 곳이기도 했다. 일성록의 기록에 보면, “1차 기우제는 삼각산(三角山), 백악산(白嶽山), 목멱산(木覓山), 한강(漢江)에서 행하고, 2차 기우제는 용산강(龍山江), 저자도(楮子島)에서 행한다”는 기록이 있다.
청담동 하면 떠오르는 로데오거리와는 달리 지금의 청담동 강변 쪽에는 닥나무로 밥벌이를 하는 닥점이라는 마을이 있었다는데, 그 원료기 되는 닥나무를 저자도에서 길렀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섬 이름에 닥나무 저(楮)가 들어간 것이리라. 크기는 1941년 발간된 경성부사(京城府史)에 “총면적이 36만 평”이라 했으니 작지 않은 섬이었다. 홍수가 지면 섬은 줄어들었고 갈수기에는 물이 줄어 섬은 청담동 쪽 육지와 연결되었다 한다. 이런 섬이 1963년 뚝섬 제방공사로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또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저자도의 모래와 자갈로 한강 매립공사를 시행하니 이때 저자도는 사라졌다. 그렇게 조성된 땅 위에는 도로와 아파트가 건설되었다. 이 섬에는 오래 전부터 백성들이 거주했고 백제 때에도 이 섬을 활용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심수경의 정념어린 저자도 방문기
저자도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많은 기록들이 전해진다. 그 중 심수경(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을 살펴보련다.
동호(東湖)의 저자도(楮子島)는 절승(絶勝)이다. 전조(前朝 고려) 때 정승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며 시를 읊었는데,
十里平湖細雨過 10리 잔잔한 호수에 이슬비 지나는데
一聲長篴隔蘆花 갈대꽃 저편 한 가닥 피리 소리
直將金鼎調羹手 직접 쇠솥(나라)에 국(정치) 끓이던 손으로
還把漁竿下晩沙 돌아와 늦은 저녁 낚시를 내리네
單衫短帽繞池塘 홑적삼 단모(短帽)로 연못을 도는데
隔岸垂楊送晩涼 저 언덕 수양버들 저녁 양기(凉氣) 보내 오네
散步歸來山月上 산보에서 돌아오니 산 달은 뜨고
杖頭猶襲露荷香 지팡이 끝 연꽃 향은 더욱이 맺혀 있네
시 또한 흥취가 좋다. 봉은사(奉恩寺)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 몇 해 전에 내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 할 때에 타고 간 배를 저자도 머리에 정박하고 봉은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강가 어촌에 살구 꽃이 만발하여 봄 경치가 더욱 아름답기에, 배 안에서 시를 지었다.
東湖勝槪衆人知 동호의 승경은 모두들 알고 있는데
楮島前頭更絶奇 저자도 앞은 더욱 기이하네
蕭寺踏穿松葉徑 절 길은 솔 사이 길게 난 길이고
漁村看盡杏花籬 어촌은 보아하니 온통 살구꽃 울타리일세
沙暄草軟雙鳶睡 모래밭 따슨 풀은 연해 오리 한 쌍 잠들었고
浪細風微一棹移 물결은 잔잔 바람은 솔솔 돛배 한척 흘러가네
春興春愁吟未了 봄 흥취 봄 수심 미처 읊기도 전에
狎鷗亭畔夕陽時 압구정 언덕엔 석양이로군
지금 40여 년이 지났는데 다시 가서 구경을 못하니, 가물거리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겠도다. 압구정은 저자도의 서쪽으로 몇 리 떨어져 있는데, 재상 한명회(韓明澮)가 별장을 지어 또한 이로써 유명하다.
東湖楮子島絶勝也。前朝政丞韓宗愈爲別業退老。其詩曰。十里平湖細雨過。一聲長篴隔蘆花。直將金鼎調羹手。還把漁竿下晩沙。單衫短帽繞池塘。隔岸垂楊送晩涼。散步歸來山月上。杖頭猶襲露荷香。詩亦好矣。奉恩寺在島西一里許。昔年余於湖堂賜暇時。乘舟泊島頭訪寺而還。江邊漁村。杏花盛開。春景正佳。舟中有作。東湖勝槩衆人知。楮島前頭更絶奇。蕭寺踏穿松葉徑。漁村看盡杏花籬。沙暄草軟雙鴛睡。浪細風微一棹移。春興春愁吟未了。狎鷗亭畔夕陽時。今過四十年餘。而無復往賞。不勝其依依也。狎鷗亭在島西數里故相韓明澮別業亦以勝名.
환상처럼 아름다웠다던 청담동~봉은사 길
500년 전 심수경은 옥수동 매봉산 기슭 독서당에서 사가독서 할 때 지금의 옥수역 근처 두뭇개 쯤에서 배를 타고 저자도에 배를 묶어 두고 청담동을 지나 봉은사에 놀러 갔다 온다. 아마도 물이 줄어 저자도에서 청담동 언덕 오르기는 어려움이 없었나 보다. 지금 개념으로 보면 갤러리아 백화점쯤에서 청담동 명품거리를 지나 수도산 봉은사에 다녀온 것이다. 살구꽃이 만발했던 그 시절의 청담동. 심수경의 시를 보면 강가 살구꽃 마을을 지나 소나무가 터널 같이 길을 만들었던 그날을 심수경은 40년이 지난 뒤에도 잊지 못하고 있다. 상상해 보면 살구꽃이 울타리마다 피어오른 강마을 지나 소나무가 터널을 이룬 절길, 500년 전 그 시절이 아련하다.
엘리트들 모아 독서시키던 독서당
상념을 떨치고 버티고개 앞 한남동 매봉산을 향해 출발이다. 길은 대부분 도시 속 공원으로 이어져 있다. 응봉산 공원 ~ 독서당 공원 ~ 대현산 공원 ~ 응봉공원 ~ 응봉근린공원 ~ 매봉산이다. 두 시간이 미처 걸리지 않는 길이다. 길 중간 중간에는 남산 가는 방향 표시가 되어 있다. 대부분이 근린공원 길이라 피로감도 들지 않는다.
드디어 서울방송 고등학교 지나 매봉산에 도착한다. 정상에는 정자가 잘 가꾸어져 있다. 이곳은 서울에서 몇 안 되는 해맞이 명소다. 정월 첫 날에는 새해 일출을 보러 보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이곳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며 겸재의 압구정도 배경이 되는 곳들을 조망한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저자도가 있었던 성수대교 부근, 서울숲, 응봉, 옥수역, 독서당이 자리했던 매봉 동쪽 기슭, 그리고 배경이 되는 산들….
또한 중종 때 그린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 중종 26년경)와 보물로 지정된 선조 때의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 선조 3년경)는 압구정쯤 되는 위치에서 독서당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라서 압구정 앞 한강과 옥수동, 금호동, 매봉산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렇다면 독서당은 무엇 하던 곳이었을까? 정리되어 있는 자료를 원용하여 살펴보자.
세종(世宗) 때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자기 집에서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라는 것을 시작했는데 다시 이를 보완하여 삼각산(三角山) 진관사(津寬寺)에 머물며 독서하게 하는 상사독서(上寺讀書) 제도를 도입했다 한다. 젊은 엘리트 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국가적 배려였다.
세조 때에는 집현전의 폐지로 없어졌다가, 성종 때에 서거정(徐居正)의 건의를 받아들여 용산(龍山)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하였고, 연산군 때에 일시 폐지되었는데 중종 원년(1507)에 다시 개설하여 우선 정업원(淨業院)에 설치하였다 한다. 10년 뒤(1517)에 두모포(豆毛浦)의 정자를 수리하여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이름 하였으니 이곳이 두 점의 독서당계회도에 그려진 독서당의 모습이다. 오늘 마지막으로 오른 매봉의 동쪽 기슭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 후 정조(正祖)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면서 그 기능을 규장각이 계승하게 되었다. 독서당에 들어간 이들은 엘리트 중 엘리트로서 국가의 중추가 되었기에 그들끼리 더욱 단단히 뭉쳤고 계회도 같은 그림도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 남아 있는 동호독서당의 위치는 옥수동 244번지 동쪽 부군당(府君堂) 자리라는데(옥수동 레미안 아파트 안) 접근성을 고려하여 옥수동 극동아파트 단지 입구에 유지를 알리는 안내석을 세워 놓았다.
이제 매봉산에서 압구정 앞 한강을 내려다보며 겸재의 압구정도를 마무리한다. (다음 호에 계속)
제674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4.29 09: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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