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는 중세기 예루살렘의 성지순례 중 쉬어가는 숙소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 명칭이 19세기 아일랜드의 수녀들이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가난한 환자를 수녀원으로 데려가 임종준비를 시키면서 임종의 집으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된다. 현대적 의미의 호스피스는 1967년 영국의 ‘시실리 손더스’ 박사가 ‘성 크리스토퍼 호스피스’를 설립하고 이곳에서 말기 환자의 고통에 대하여 통증치료 등 전인적 치료를 시행하면서 호스피스 치료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비교적 일찍 강릉의 ‘갈바리’ 의원에서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이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최초라 한다. 외국도 그러했지만 우리나라 역시 호스피스 활동은 종교계에서 처음 시작한 셈이다. 의료계에서는 1982년 가톨릭대학교 의대에서 호스피스 팀을 처음 구성하였고 그 이후 몇몇 대학병원, 종합병원 등에서 호스피스 병동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겨우 작년에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일부 종교기관에서 하는 봉사활동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호스피스는 죽음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 삶의 완성을 이루는 곳이다. 암병동 로비
필자는 작년 중앙일보를 통하여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가 운영하는 모현 의료센터에 대한 기사를 접하고 그곳을 방문했다. 갈바리 의원을 운영한 수녀회는 1971년 포천에서도 가정방문 간호로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하였고 2006년 현재의 장소에 호스피스 의료센터를 건축하였다. 모현(母峴)은 어머니의 언덕이란 뜻으로 어느 스님이 지어주셨다고 한다. 분당에서 1시간 30분 예정으로 출발하였으나 거의 2시간이나 걸려 센터에 도착하였다. 포천시에 도착하여 시민 두 사람에게 모현 의료센터의 위치를 물어 보았으나 두 사람 모두 처음 듣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래서 우선 포천 성당을 방문한 후 근처에 있는 센터를 찾을 수 있었다. 외지에도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한 의료센터가 현지 사람에게 생소한 것이 참 의문이다. 그만큼 홍보가 되지 않은 탓이리라. 나중에 수녀님께 여쭈니 양로원이라고 하면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아마 이곳에서 노인요양원도 운영하기 때문인가 보다.
오전 9시 30분에 센터에 도착하니 손 카리따스 수녀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갑자기 입원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고 나가더니 한참 있다가 돌아 왔다. 어제 밤에 입원한 환자인데 곧 임종을 할 것 같아 환자에게 성사를 주기위해 신부님을 수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가까이에 신부님이 계시지 않아 할 수 없이 6군단 군종 신부에게 부탁했단다. 그러나 이런 수녀님의 노력해도 불구하고 환자는 곧 영면을 하고 말았다. 가족들의 오열이 시작되자 운명 후 1시간 동안은 환자가 들을 수 있으니 소리를 낮추어 달라고 해서 진정을 시켰다. 센터에 도착하자마자 어수선한 분위기에 놀랐으나 운명을 앞둔 분들이기 때문에 언제 무슨 일이 닥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현 호스피스 센터의 전경
수녀님에게 시설 전반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병실은 모두 19개로 1인실, 2인실, 4인실이 있는데 방문하는 날 현재 환자가 모두 10명이 입원해 있었다. 의사 2명, 간호사 7명, 간호조무사 2명, 물리치료사 1명, 사회복지사 2명 그리고 자원봉사자 100여명이 이들을 돌본다고 한다. 환자의 평균 재원일수는 20여일 내외다. 즉 20여 일간 이곳에서 입원해 있다가 운명을 하는 셈이다. 짧게는 앞의 환자처럼 하루 만에 사망하는 경우도 있고 어느 분은 퇴원 후 집에서 가료하다가 다시 입원하기도 한다.
카리따스 수녀님의 안내로 시설을 둘러보았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이어서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건축물 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창을 크게 내어 자연채광을 많이 이용한 건물이다. 수녀님들이 얼마나 청결하게 운영하는지 병원 특유의 냄새도 없었다. 이곳의 특징은 환자가 원하면 휠체어를 이용하거나 침대에 누워있는 채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데 이 경우 의사가 몸소 야외에 있는 환자를 찾아 진료를 한다고 한다. 의사가 중심이 된 게 아니라 환자가 중심이 된 진료이다.
아름다운 건물로 지정받은 기념패
의료원장인 정극규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호스피스에 관한 일반인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한다. 호스피스 하면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삶을 완성하는 것이 호스피스의 진정한 의미라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단순히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환자의 정신적 고통을 감소시키고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원목수녀님이 상주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입원환자가 종합병원에서 오는 분은 불과 10%도 안 되고 주위의 소개로 이곳을 찾는다고 안타까워한다. 정 원장은 의료기술의 발달로 현재 암 환자의 고통을 95%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의료현장에서는 의사들이 정확한 내용과 정보를 파악하기 보다는 습관적인 치료를 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정 원장의 회진시간에 함께 병실을 돌아보았다. 모두 10명의 환자 중 한 분은 수면 중이었고 나머지 한 분은 의식이 없는 듯 했다. 이 분을 제외하고는 적어도 겉으로는 모두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정 원장은 한분 한분의 상태를 세심히 살피고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81세난 할아버지가 어제 밤에는 잘 잤다고 하자 정 원장은 왜 그런지 아냐고 묻는다. 바로 고통이 없기 때문이란다. 사람들이 암이나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그 자체보다 그것으로 인한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데 이곳의 환자들은 어느 정도 고통은 완화된 것처럼 보인다. 환자 중 한분은 우리나라 토목기술의 권위자라 하는데 정 원장이 그것을 애기 해주며 격려를 해 주자 환자가 겸연쩍어 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환자들의 좋았던 과거를 떠 올리며 그것을 화제로 삼는 것도 좋은 치료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음 앞에서는 사회에서 잘 나갔던 사람이나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가 평등하다.
환자들의 생전의 모습들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호스피스 기관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작년 중앙일보를 통해 보도된 원로작곡가 조 념 할아버지(당시 86세)에 대한 얘기를 듣기 위해서다. 그분은 일제 강점기에 도쿄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에 곡을 붙이기도 했던 1세대 작곡가이다. 그분은 폐암으로 입원 중이었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곳의 환자들을 위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해 주었다. 원목수녀인 백 마리안느 수녀님이 '그 분은 말씀도 조용히 하셨으며 참 점잖은 분이셨다'고 전하며 나의 겉 모습이 그분을 닮았다고 추켜 준다. 수녀님이 농담도 잘 하시네. 아무튼 내가 존경하는 분을 닮았다니 기분은 좋다. 거짓말이라도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좀 해도 되지 않을까. 할아버지의 아들이 그분을 위하여 바이올린을 켜기도 했는데 수녀님이 ‘할아버지, 아드님이 바이올린을 켜주니 좋으시죠?’ 하니 아직 멀었다고 손사래를 치셨단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항상 어린 아이일 뿐이리라. 아쉽게도 조 념 할아버지도 20여일 이곳에 계시다가 돌아 가셨다. 그분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
작곡가 조 념 선생님의 프로필
백 마리안느 수녀님은 이곳에 입원하신 분들을 모시고 소풍을 가기도 한다고 전한다. 그리고 생일잔치도 벌인다. 옛부터 아픈 사람들의 생일 때에는 잔치를 하지 않는다고 얘기라도 하면 ‘그럼 언제하지요?’ 하고 반문한다. 지금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는 것이다. 환자들은 의외로 생일잔치를 좋아 한다. 그리고 환자가 자기의 배우자를 위하여 생일잔치를 하기도 한다. 환자들을 중심으로 이런 가족행사를 하다보면 평소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가족끼리 화해하는 기회도 된다. 이들을 위하여 음악연주봉사를 하러 오는 분들도 있다. 이곳에서 발행하는 월보를 보니 5월에는 봉사연주가 3회 예정되어 있었다.
모현의료센터를 후원해 주신 분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명판
독립시설형의 호스피스기관에 대한 의료수가가 낮아 모현 의료센터는 1년에 약 2억원 정도 적자를 보고 있다. 적자는 후원금 등으로 보전을 하는데 장애아나 불우이웃에 대한 후원금보다 말기환자를 위해 내 놓는 후원금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 후원을 하는 분들도 환자가 죽으면 그냥 없어지고 마는 그런 곳에는 후원을 잘 하지 않는 모양이다. 외부기관에서 자원봉사를 오기도 한다. 예를 들면 대우증권에서는 지점별로 돌아가며 한달에 한번씩 방문하여 유리창을 닦아주고 명일동 성당에서는 목욕봉사를 하러 온단다. 특히 목욕은 이들에게 중요한데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목욕 후에는 환자의 기분이 좋아진다. 그만큼 치료효과도 있으리라. 그러나 일반병원에서는 목욕시키기를 꺼려하여 두세 달 만에 목욕을 하는 환자도 있고 최장 일곱 달 만에 목욕을 한 분도 있단다.
기도실 전경. 환자가족이 울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환자들을 위하여 많은 사람이 애를 쓰지만 부득이한 일로 즉시 환자의 요구를 들어 주지 못한 경우가 있다. 그 중 백 마리안느 수녀가 뼈아픈 얘기를 들려준다. 어린 환자가 노래를 불러 달라고 졸라서 지금 너무 바쁘니 내일 노래 연습을 한 후 불러 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다음 날 가보니 어린 환자가 사망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내일은 없다고 한다. 어린 환자의 청을 들어주지 못했던 그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는가? 이렇듯이 환자를 돌보는 가족 못지않게 의료인들과 자원봉사자들도 돌보던 이들이 운명을 하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울적하다고 한다. 그래서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를 위한 위로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모현의료센터의 수녀님들과 보봐스 병원을 방문했다.
요즈음 네 사람 중 하나가 암에 걸리고 세 사람 중 하나가 암으로 사망한다. 이렇듯 암은 이제 흔한 병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암은 정복되지 않은 병이다. 우리도 언제 암으로 고통을 받고 사망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활동은 너무 미흡한 실정이다. 의료수가가 낮아 종합병원에서는 기피하거나 마지못해 운영하는 과목이다. 우리 지역 가까이에 있는 보봐스 병원에서도 호스피스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나 노인요양병원은 호스피스 기관으로 지정받을 수 없다는 법규 때문에 올해 병동을 34베드에서 10베드로 줄였다고 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호스피스 제도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지만 말고 자신이나 가족의 일처럼 여겨서 현실화할 것은 현실화하고 문제점을 주위에 알리고 대안을 강구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여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모현의료센터 후원계좌: 국민은행 219-01-0173-857 )
글 백만기 (2009.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