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교회 왕권신수설과 프로테스탄트
권현익 (2022.03.21.10:16)
앞선 글에서도 밝혔듯이 “왕권은 하나님께 나온 것이니,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왕의 권위에 절대 순복해야 한다.”는 프랑스의 ‘왕권신수설’ㅡ다른 나라의 경우는 잘 모르기 때문ㅡ은 로마교회에서 나온 것이다. 로마교회가 이것을 주장한 가장 큰 까닭은 왕의 권위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왕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는 그 거룩한 행위를 행하는 로마교회가 세운 왕에게 절대로 순복해야 하며, 왕 역시 로마교회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왕 대관식을 주도하는 로마교회가 대관식을 조건으로 왕에게 받아내는 선서가 있는데, 그 하나는 “왕은 로마교회의 절대 수호자가 돼야 하며, 동시에 이단들을 철저히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선서에서 말하는 최대 이단은 개신교회다. 그러므로 ‘개신교회’와 ‘왕권신수설’은 상호 모순 관계다.
만일 왕이 하나님 앞에 맹세한 이 선서를 어길 시, 교황은 왕이 거주하는 수도나 그 국가 전체에 ‘성무금지령’을 내린다. ‘성무금지령’이 내려지게 되면 그 나라에서 고해성사, 유아세례, 결혼식, 장례식, 미사와 같은 사제들 모든 활동이 중단된다. 고해성사가 중단되면 그 나라 모든 국민은 죄를 가진 채 죽기 때문에 천국에 절대로 갈 수 없게 된다. 유아세례가 중단되면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가 없으며, 사제가 집례하는 결혼식이 중단되면 신랑은 첩을 데리고 사는 꼴이 되고, 그 자녀들은 사생아가 되기 때문에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없게 된다. 종부성사 또는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게 되면 산 자로 계속 남아 있어 그는 세금의 의무를 계속 감당해야 했다. 이처럼 교황에게 ‘성무금지령’을 받게 되면 그 국가의 모든 행정은 중단되고 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더 무서운 것은 교황이 내리는 ‘왕의 출교’이다. 출교된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기에 그의 신하들은 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도 되고, 왕의 재산이나 권력을 빼앗아 가져도 된다. 출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왕을 직접 살해하는 것이다. 앙리 3세가 그러했고, 앙리 4세가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는 로마교회로부터 이런 살인이 저질러진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결론으로, 왕권신수설은 왕의 권위가 아닌 로마교회의 절대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는 왕의 권위를 인정하되, 그 역시 하나님의 절대 권위 아래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틀리게 되면 언제든지 항명하고 저항(protest)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 가운데 많은 목사가 ‘로마교회 식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데, 이는 신학교에서 교회사 가르침이 부족한 연유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사를 살펴보라!
로마 황제의 우상숭배 강요에 목숨을 걸고 반대한 유일한 사람들이 초대교회 신자들이 아닌가? 로마교 교황의 미신적인 잘못된 신앙 앞에 저항하며 펜을 들고 칼을 들었던 사람들이 개혁교회가 아니었던가? 반면 잘못된 권력자인 히틀러나 일본 왕의 요구 앞에 침묵했던 목사들이나 신자들이 역사 가운데 두고두고 욕을 먹는 까닭이 무엇인가? 잘못된 권력 앞에 입을 열어 외쳐야 할 때 침묵했기 때문이다. 왜? 자신의 생존이 공의나 공정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시대의 흐름이나 정치(나라의 향방)에 침묵하는 것은 경건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개신교회의 가장 중요한 protest를 멈춘 비겁자요 하나님의 절대 뜻보다는 눈에 보이는 권력자에게 무릎을 꿇는 배교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과는 무관한 현실도피일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불의와 불공정에 항명하고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는 자들이 바로 프로테스탄트들이었다. 불의한 권력에 항명하고 저항하는 것이 우리 프로테스탄트들 기본자세인 것이다.
*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서울: 세움북스, 2019)’와
‘{기욤 파렐과 종교개혁} (서울: 크리스천르네상스, 2021)’를 쓰신
권현익 목사님 {페북} 담벼락에서 옮겨옵니다.
* 제목 <로마교회 왕권신수설과 프로테스탄트>는 제가 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