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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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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26대 고종, 조선의 실질적 마지막 왕, |
>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 고종에 이어 순종이 즉위하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고종이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이미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보호조약이 이루어졌고 또한 그가 일본의 강권에 의해 퇴위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경술국치를 보았고 다시 9년을 더 살며 일본의 식민통치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느나라든 망국의 상 황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조선의 멸망 과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백년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 사건들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영왕,고종의 넷째 아들이며 귀인 엄씨 소생으로 순종의 이복 동생이다. 1897년에 태어났으며 1900년 8월에 영왕에 봉해 졌고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이 해 12 월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어 순종이 폐위되자 왕세제로 격하 되었다. 1920년 4월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의 맏딸인 마사코와 정략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리었으나 일본에 머문 채 귀국하지 못했다. 일본에 강제 체류하는 동안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 며 일본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을 지내기도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어 환국하고자 하였으나 국교 단절 및 국내 정치의 벽에 부딪쳐 귀국이 좌절되었다. 한편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황족의 특권이 상실되고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하여 1963년까지 일본에서 보냈다. 그 후 1963년 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부인 이방자와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당시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도 1966년 오랫동안 수권하던 심신장애자 재활원인 자행회, 1967년에는 그의 아호를 빌린 신체장애자 훈련원 명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하지만 지병으로 1970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은 후 부인 이방자는 영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 교육시설인 자혜학교, 1982년 신체장애자 교육시설인 명혜학교 등을 설립하며 그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그는 부인 이방자 여사에게서 진과 구, 두 아들을 얻었으며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 구는 현재 생존해있다. 능은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있으며 1989년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 함께 묻혔다.
고종의 셋째 아들로 귀인장씨 소생이며 순종의 이복 동생이고 영왕 이은의 이복 형이다. 1877년에 태어났으며 15세가 되던 1891년에 의화군에 봉해지고 1893년 9월 김사준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렸다. 1894년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승을 축하하는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 해 10월에 귀국하 였다. 이듬해 5월에는 특파대사에 임명되었으며 8월에는 특파대사 자격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1900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였고 같은 해 8월에 의왕에 봉해졌다. 의왕, 1905년 4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적십자총재가 되었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의 전협, 최익환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중 그 해 11월 만주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여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해방과 6.25를 경험한 뒤 서울 사가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1955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슬하에 우 와 건, 두 아들을 두었다. |
고맙습니다.
쏠쏠한 재미 좋은글 사랑합시다.
전주향교/鶴田/옮김/한문희총대장 감사합니다.
 본래의 마음,자유인 한문희총대장, 백두대간의 전설 자유인 백두대간종주대한문희총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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