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103 편
종교적 체험의 실체
.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 1934년
103:0.1 인간의 참된 종교적 반응은 모두, 예배 보조자가 일찍부터 베푸는 봉사로 후원을 받고, 지혜 보조자의 검열을 받는다. 인간의 첫 초월 mind 자질은 우주 창조 영의 성령 안에서 personality가 회로로 연결되는 것이다; 신성한 아들들이 수여되거나 조절자가 있기 훨씬 전에 이러한 영향은 인간의 윤리관, 종교관, 영성을 확대하도록 작용한다. 파라다이스 아들들 수여에 이어, 해방된 진리의 영은 인간이 종교적 진리를 인식하는 능력을 확장하도록 큰 기여를 한다. 거주 세계에서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생각 조절자는 인간이 가진 더 높은 유형의 종교적 통찰력을 개발하는데 참여한다. 생각 조절자는 유한한 생명존재가 무한한 신(Deity), 우주 아버지의 확실성과 신성을 믿음으로 엿볼 수 있는 우주의 창이다.
인류 종족의 종교적 성향은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명백히 자연적 기원을 가진다; 원시 종교는 그 기원이 진화에 있다. 자연적인 종교적 체험이 계속 진행됨에 따라, 정기적인 진리의 계시는 행성이 느리게 진행되는 과정에 간간이 끼어든다.
오늘날, 유란시아에는 네 종류의 종교가 있다:
1. 자연 종교, 곧 진화 종교.
2. 초자연 종교, 곧 계시 종교.
3. 실제의 종교, 곧 현재 종교로, 서로 다르게 자연 종교와 초자연 종교가 혼합되어 있다.
4. 철학적 종교들, 인간이 만들었거나 철학적으로 생각해 낸 신학적 교리, 그리고 이성으로 창조된 종교들.
1. 종교에 담긴 철학
103:1.1 사회적 또는 인종적 집단 내에서 종교적 체험의 통일성은 개개인 안에 거주하는 하나님 분신의 동일한 본질에서 비롯된다. 사람 안에 있는 이 신성은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이타적인 관심을 유도한다. 그러나 personality는 독특하기 때문에―어느 두 필사자도 같지 않다―따라서 어떤 두 인간도 그들의 mind에 살아있는 신성한 영의 인도와 충동을 비슷하게 해석 할 수는 없다. 인간 집단은 영적 통일성을 체험할 수 있지만, 철학적 통일성은 결코 이룰 수 없다. 이러한 종교적 사고와 체험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은 20세기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종교에 대해 500개가 넘는 정의를 제시한 사실로 나타난다. 실제로, 인간은 누구나 자기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솟아나는 신성한 충동에 대하여 자신의 체험적 해석으로 종교를 정의하며, 따라서 그러한 해석은 독특하고 다른 모든 인간의 종교 철학과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한 필사자가 동료 필사자의 종교 철학에 완전히 찬성할 때, 그 현상은 이 두 존재가 철학적ㆍ종교적 해석의 유사성에 관련된 문제들에 관하여 비슷한 종교적 체험을 겪었음을 가리킨다.
너의 종교는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문제이지만, 너의 종교 생활이 자기중심적―한정되고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으로 되는 것을 막을 목적으로, 너는 방대한 다른 종교적 체험을 (서로 다르고 다채로운 필사자들의 다양한 해석을) 이해하는 지식을 얻어야 한다.
합리주의는 종교가 처음에 어떤 것에 대한 원시적인 신념에 출발하여 다음에 가치를 추구한다고 가정할 때 잘못이다. 종교는 일차적으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며, 그 다음에는 해석적 신념 체계가 형성된다. 사람들은 신념에 대한 해석보다 종교적 가치, 즉 목표에 동의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이것이 종교가 가치와 목표에 대해서는 합의하면서도 상충되는 수백 가지의 충돌하는 신념과 교리를 유지하는 혼란스러운 현상을 설명해 준다. 이는 또한 특정한 사람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포기하거나 바꾸는 상황에서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종교는 종교적 신념의 급진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 신학은 종교를 만들지 않는다; 종교가 신학적 철학을 만들어 낸다.
종교인들이 많은 잘못된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종교가 무효화되지 않는 것은, 종교는 가치의 인식에 기초하고 있으며, 개인의 종교적 체험인 믿음에 의해 검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체험과 종교적 사상에 기초한다; 신학은 그 체험을 해석하려는 정직한 시도이다. 이러한 해석적 신념은 올바를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으며, 진리와 오류가 혼합된 것일 수도 있다.
103:1.6 영적 가치를 인식하는 체험은 이념을 초월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식이라고 부르기로 선택한 이 “감각,” “느낌,” “직관,” 또는 “체험”을 지칭할 수 있는 단어는 어떤 인간 언어에도 없다. 인간 안에 거주하는 하나님의 영은 personal 하지 않다―조절자는 prepersonal이다. 그러나 이 훈계자는 가치를 제시하고 신성의 풍미를 발산하며, 이는 가장 높고 무한한 의미에서 personal이다. 하나님이 personal이지 않다면, 의식을 가질 수 없고, 의식이 없다면, 그는 인간 이하가 될 것이다.
2. 종교와 개인
103:2.1 종교는 인간의 mind에서 작용하며 인간 의식에 나타나기 전에 이미 체험에서 실현된다. 아이는 출생을 체험하기 전에, 약 아홉 달 동안 존재해 있는다. 그러나 종교의 “출생”은 갑작스럽지 않고, 오히려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태어나는 날”이 있다.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다시 태어나야”한다―영으로 태어나야 한다. 많은 육체적 출생이 “폭풍 진통”과 기타 비정상적인 “분만”으로 특징지어지듯이, 많은 정신적 탄생에는 많은 정신적 고통과 현저한 심리적 동요가 동반된다. 영적 출생이 다른 것은 의식적인 노력과 긍정적이고 개인적인 결단 없이는 종교적 발전이 일어나지 않으며, 영적 체험의 향상과 함께 최고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자연스럽고 정상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종교는 결코 수동적 체험, 부정적 태도가 아니다. “종교의 탄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정신적 갈등, 감정 억압, 기질적 동요의 결과로, 삶 속에서 나중에 발생하는 종교적 사건을 특징짓는 소위 개종 체험과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
부모에 의해 자신이 사랑의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는 의식을 가지고 성장한 사람들은, 오직 심리적 위기, 감정적인 격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감을 이룰 수 있었던 동료 인간들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계시된 종교의 씨앗이 싹트는 인간 mind의 진화적 토양은 일찍이 사회적 의식을 형성하는 도덕적 본성이다. 아이의 도덕적 본성의 초기 자극은 이성, 죄책감, 또는 개인적 자부심과는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공정, 공평, 친절―동료들에게 유익한 봉사―을 베풀려는 충동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초기 도덕적 각성이 길러질 때, 종교적 삶이 비교적 갈등이나 격변, 위기 없이 점진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아주 일찍부터 자신의 자아 추구와 이타적 충동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하며, 많은 경우 그러한 도덕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과제에서 초인적인 도움을 구하는 결과로 하나님-의식에 대한 첫 번째 체험을 얻을 수 있다.
아이의 심리는 본래 긍정적이지 부정적이지 않다. 많은 이간이 부정적인 이유는 그렇게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긍정적이라고 할 때, 이는 아이의 도덕적 충동, 생각 조절자의 도착을 알리는 mind의 힘들을 의미한다.
103:2.6 잘못된 가르침이 없으면 정상적인 아이의 mind는 죄와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부정적 방향 보다는, 종교적 의식이 출현하면서 도덕적 올바름과 사회적 봉사를 향한 긍정적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종교적 체험의 발전에는 갈등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인간의 의지는 불가피한 결정, 노력하는 작용이 항상 존재한다.
도덕적 선택에는 많든 적든, 도덕적 갈등이 보통 따른다. 아이의 지성 속에서 맨 처음에 생기는 바로 이 싸움은 이기심의 욕구와 이타심의 충동 사이에 생긴다. 생각 조절자는 이기적 동기를 가진 성격의 가치 기준을 무시하지 않지만, 인간의 행복을 얻는 목표에 이르고, 하늘나라의 기쁨에 이르는 것으로서, 이타심의 충동을 조금 더 우대하도록 작용한다.
도덕적인 존재가 이기적인 충동에 직면했을 때 비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원초적인 종교적 체험이다. 어떤 동물도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러한 결정은 인간적이면서도 종교적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식의 사실을 수용하고 인간 형제애의 기초인 사회 봉사의 충동을 나타낸다. 지성이 자유 의지의 행위로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선택할 때, 그러한 결정은 종교적 체험을 이룬다.
하지만 아이가 도덕적 능력을 충분히 개발하여 이타적인 봉사를 선택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그는 이미 강하고 잘 통합된 자아적 성향을 형성하게 된다. 이 사실은 바로 “높은” 본성과 “낮은” 본성, 즉 “죄의 옛 사람”과 “은혜의 새로운 본성” 사이의 투쟁 이론을 낳게 된다. 정상적인 아이는 인생 초기에 이미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인간은 자아 충동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타적 의지는 자신 외부의 어떤 영향, 즉 하나님과 연결짓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이러한 판단이 맞는 경우가 많다. 모든 비자아적 욕구는 실제로 내면의 생각 조절자의 인도에서 비롯되며, 이 조절자는 하나님의 분신이다. 영 훈계자의 충동은 인간 의식 속에서 이타적이고 동료를 생각하는 충동으로 실현된다. 적어도 이것이 어린 mind의 근본적인 초기 체험이다. 성장하는 아이가 personality의 통합에 실패하면, 이타적 충동이 과도하게 발달하여 자기 복지에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다. 잘못 판단된 양심은 많은 갈등, 걱정, 슬픔, 그리고 끝없는 인간의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3. 종교와 인류
103:3.1 원시 종교의 진화적 기원에는 영, 꿈, 기타 다양한 미신에 대한 믿음도 한 몫을 했지만, 씨족이나 부족의 연대 정신의 영향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집단 관계에는 초기 인간 정신의 도덕적 본성에서 이기적-이타적 갈등에 대한 도전을 제공한 정확한 사회적 상황이 존재했다. 원시 호주인들은 영에 대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종교를 씨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종교적 개념은 처음에는 동물로, 나중에는 초인간이나 신으로 인격화되는 경향이 있다. 토테미즘적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아프리카 부시맨과 같은 열등한 종족도 자기 이익과 집단 이익의 차이, 세속적인 가치와 신성한 가치를 원시적으로 구분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 집단이 종교적 체험의 근원은 아닙니다. 인류의 초기 종교에 대한 이러한 모든 원시적 기여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참된 종교적 충동은 이타적인 의지를 활성화하는 참된 영적 존재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 여전히 사실이다.
자연의 경이와 신비, 즉 비성격(impersonal) 마나(☞)를 믿는 원시 신앙은 후일의 종교가 나타날 것을 예시한다. 그러나 조만간 진화하는 종교는 개인이 사회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얼마큼 개인적 희생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더 행복하고 더 풍족하게 만들기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궁극에 종교는 하나님과 사람의 봉사가 되도록 정해졌다. ☞ 마나(mana):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 주민들이 믿는 대자연의 힘.
종교는 인간의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설계되었지만, 오늘날 인간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많은 종교는 이를 수행하는데 무력해졌다. 환경이 종교를 지배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모든 시대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체험은 신학적 교리나 철학적 이론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와 사회적 의미에 대한 감정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종교는 마법의 요소가 도덕적 개념으로 대체됨에 따라 유리하게 진화한다.
인간은 마나, 마법, 자연 숭배, 영혼에 대한 두려움, 동물 숭배 등의 미신을 통해 진화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적 태도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씨족의 집단 반응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후 이러한 의식들은 중심을 잡고 정립되어 부족의 신념으로 발전하였으며, 결국 이 두려움과 신념은 신들로 인격화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종교적 진화 과정에서 도덕적 요소는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 내면의 하나님을 향한 충동은 항상 강력했다. 그리고 이 강력한 영향은―하나는 인간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성한 것인데―1천 가지의 파괴적 성향과 적대심 때문에 무척 자주 파멸의 위협을 받았는데도, 시대의 변천에 걸쳐 종교가 살아남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
4. 영적 친교
103:4.1 사회적 행사와 종교 모임의 특징적인 차이점은 세속모임과는 대조적으로 종교는 친교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인간의 교제는 신성한 친교의 느낌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집단 예배의 시작이다. 일반적인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가장 초기 형태의 사회적 교감이었고, 초기 종교들은 의식행위에 희생된 일부를 숭배자들이 먹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심지어 기독교에서도 주님의 만찬은 이러한 교감 방식을 유지한다. 교감 분위기는 이기적 자아와 깃드는 이타적 영 훈계자 간의 갈등 속에서, 신선하고 위로가 되는 휴식의 시간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인간의 형제 사랑이 솟아나게 되는, 하나님의 임재를 수행하는-참된 예배로 가는 전주곡이다.
원시인은 신과의 교감이 중단되었다고 느꼈을 때, 보통 어떤 형태의 희생제를 통해 속죄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다. 의로움에 대한 갈망은 진리의 발견으로 이어지며, 진리는 이상을 증진시킨다. 이로 인해 개인 종교인들에게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우리의 이상은 기하학적 진보로 성장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우리의 이상에 부응하는 능력은 산술적 진보로만 향상되기 때문이다.
죄책감을 느끼는(죄의식이 아닌) 것은 영적 교감이 중단되거나 도덕적 이상을 낮추는 데서 온다. 사람의 가장 높은 도덕적 이상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그러한 곤경에서 벗어난다. 사람은 자기의 가장 높은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바랄 수 없지만, 하나님을 찾고, 점점 더 그를 닮아가는 목표에 충실할 수 있다.
예수는 희생제와 속죄 예식을 모두 쓸어버렸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언함으로써, 우주의 모든 거짓된 죄의식과 고립감을 파괴했다; 생명존재-창조자의 관계는 자식과 부모의 기초 위에 놓여 있다. 하나님은 인간 아들 딸에게 사랑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한 친밀한 가족 관계의 정당한 부분이 아닌 모든 의식은 영원히 폐지된다.
아버지 하나님은 인간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실제 미덕이나 자격에 근거하지 않고, 아이의 동기―생명존재의 목적과 의도―를 인정하는데 있다. 이관계는 부모-자식 연대감에 기반하며, 신성한 사랑에 의해 작용한다.
5. 이상의 기원
103:5.1 초기의 진화적 mind는 주로 감정적인 두려움에서 유래한 사회적 의무와 도덕적 책임의 감각을 형성한다. 사회봉사에 대한 더 적극적인 충동과 이타주의 이상은 인간의 mind에 깃드는 신성한 영의 직접적인 자극에서 비롯된다.
타인에게 선을 행하려는 이 이상, 즉 자신의 이기심을 포기하고 이웃을 위해 무언가를 희생하려는 충동은 처음에는 매우 제한적이다. 원시인은 자신과 매우 가까운 사람들, 자신에게 친절히 대하는 사람들로만 이웃으로 여겼다. 종교적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이웃의 개념은 씨족, 부족, 국가를 포함하도록 확장된다. 그리고 예수는 이웃의 범위를 인류 전체로 확장시켰고, 심지어 적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모든 정상적인 인간의 내면에는 이 가르침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말해주는 무언가가 있다. 이 이상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이론적으로는 그것이 옳다고 인정한다.
모든 사람은 사심 없고 이타심을 가지려는 이 보편적 인간 충동이 도덕적인 것임을 인정한다. 인본주의자는 이 충동의 기원을 물질 mind의 자연스러운 작용으로 돌린다; 종교인은 필사 mind가 가진 참으로 사심 없는 충동이 생각 조절자가 안에서 영적으로 인도하는 반응이라고 더 정확하게 인식한다.
그러나 자아-의지와 자아를-넘어선 의지 사이에서 생기는 이 초기의 갈등에 대한 인간의 해석을 항상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비교적 잘 통일된 personality가 자아의 갈망과 싹트는 사회의식 사이의 다양한 갈등을 중재할 수 있다. 자아는 자기의 이웃만큼 권리를 가지고 있다. 둘 중의 어느 것도 개인적 관심과 봉사에 대한 독점적인 요구권을 갖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간의 가장 초기 형태의 죄책감이 생긴다.
인간의 행복은 오직 자아의 욕망과 더 높은 자아(신성한 영)의 이타적 충동이 통합적이고 감독적인 personality의 통일된 의지에 의해 통합되고 조율될 때 이루어진다. 진화적 인간의 mind는 항상 감정적 충동의 자연적 확장과 영적 통찰―참된 종교적 성찰―에 기반한 이타적 충동의 도덕적 성장 사이를 판단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에 늘 직면한다.
103:5.6 자아를 위해서, 그리고 최다수의 타아를 위해서 똑같은 이익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시간과 공간의 틀 속에서 반드시 만족스럽게 풀 수 없는 문제를 제시한다. 영원히 산다면 그러한 적대 관계는 해결될 수 있지만, 짧은 인생에서 이것은 해결될 수 없다. 예수는 이렇게 그러한 역설을 언급하였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누구든지 하늘나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그 목숨을 찾을 것이다.”
이상을 추구하는 것―하나님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죽기 전과 후에 이어지는 노력이다. 죽음 이후의 삶은 필사 존재와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 이 삶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좋은 일이 앞날의 삶을 향상하는 데 바로 기여한다. 진정한 종교는 자연사의 문을 거치는 결과로서 사람에게 부여되는 미덕, 고귀한 성품의 모든 미덕을 얻는다는 헛된 희망을 북돋음으로 도덕적 태만과 영적 게으름을 조장하지 않는다. 참된 종교는 필사자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모든 필사자의 소득은 첫 단계에서 살아남는 불멸의 체험을 강화하는 데 바로 기여한다.
사람의 모든 이타적 충동이 단지 본성적 무리 본능의 발달일 뿐이라고 배울 때, 이것은 인간의 이상주의에 치명적이다. 그러나 자신의 혼에 대한 이 더 높은 충동이 필사 mind에 깃드는 영적 세력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은 고귀하고 힘차게 에너지를 얻는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 안에 영원하고 신성한 무언가가 살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깨달을 때 자신을 초월하고 자신을 넘어설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초인간 기원을 가졌다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우리의 이상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증명하고, 우리의 이타적 확신, 인간의 형제 사랑에 대한 감정을 만든다.
사람은 자기의 영적 영역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필사 인간은 전능한 하나님의 엄격한 통치에 복종하는 힘없는 종이 아니며, 기계론적 우주 결정론에서 희망 없는 숙명에 희생되는 자도 아니다. 인간은 가장 참되게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설계하는 자이다.
103:5.11 인간은 압력에 의해 구원을 받거나 고귀하게 되지 않는다. 영적 성장은 진화하는 혼 속에서 일어난다. 압력은 personality를 비뚤어지게 만들 수 있지만, 결코 성장을 자극하지 않는다. 교육적 압력조차도, 비참한 체험을 막는 데 부정적으로 도움이 될 뿐이다. 영적 성장은 외부 압력이 최소일 때 가장 크게 이루어진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는 말씀처럼, 인간은 가정, 지역사회, 교회, 국가의 압력이 가장 적을 때, 가장 잘 발전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보하는 사회에서 가정, 사회 기관, 교회, 국가의 역할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그 집단의 요구를 충족했을 때, 그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의 진리와 종교적 체험의 사실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종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격려받아야 한다. 종교 집단의 안정성은 영적인 통일에 달려 있으며, 신학적 획일성에 있지 않다. 종교 집단은 자유로운 생각을 즐길 수 있어야 하지만, "자유 사상가"가 될 필요는 없다. 살아 있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인간의 형제 사랑을 인정하며, 모든 교리적 압박을 감히 제거할 용기를 가진 교회에는 큰 희망이 있다.
6. 철학적 조율
103:6.1 신학은 인간의 영 상태에 따른 행동과 반응을 연구한다; 개인적인 표현에서는 항상 심리학과 어느 정도 결합되어야 하고 체계적인 묘사에서는 철학과 결합되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 신학은 항상 너의 종교를 연구한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심리학이다.
인간이 외부에서 우주에 대한 연구와 조사에 접근하면, 그는 다양한 물리 과학들을 만들어낸다; 그가 자신과 우주를 내부에서 연구할 때는 신학과 형이상학의 기원이 된다. 이후 철학의 예술은 이러한 두 가지 정반대의 접근 방식에서 나타나는 많은 불일치를 조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통해 발전한다.
종교는 영적인 관점, 인간 체험의 내면성을 깨닫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인간의 영적인 본성은 그에게 바깥에 있는 우주를 안에서 보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따라서, 순전히 personality가 체험하는 내면의 견지에서 볼 때, 모든 창조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이 자신의 물리적 감각과 관련된 mind 인식을 통해 우주를 분석적으로 검사할 때, 우주는 기계적이고 에너지-물질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실체를 연구하는 기법은 우주를 뒤집어보는데(inside out) 있다. ☞ 우주를 뒤집어 보는 것 : 우주를 내부의 세밀한 구조나 본질에서 접근하는 것이며, 이렇게 보면 우주가 기계적이고 에너지-물질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논리적이고 일관된 우주에 대한 철학적 개념은 물질주의나 영혼주의(spiritism)(☞) 가설 위에 세울 수 없는데, 이 두 사상 체계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때 모두 왜곡된 우주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물질주의는 우주를 뒤집어 본 것이며, 영혼주의는 외부에서 보이는 우주를 내면에서 본 것이다. 따라서 인간 철학의 안내와 신성한 계시의 조명 없이 과학이나 종교만으로, 그 자체로서 우주적 진리와 관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 영혼주의 (spiritism)은 사후 세계의 존재와 그와 관련된 현상들에 대한 믿음을 연구하는 사상이나 종교적 체계를 말한다.
103:6.6 인간 안에 있는 영은 항상 자아-실현을 위해 mind의 작용과 기법에 의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실체에 대한 인간의 외적 체험은 그 체험하는 personality의 mind 의식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영적이고, 물질적인, 인간 체험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은 항상 mind의 작용과 연관되며, 의식적 실현은 mind 작용에 의해 조건화된다. 인간은 mind에서 물질을 체험한다; 사람은 혼 속에서 영적 실체를 체험하지만, mind에서 이 체험을 의식하게 된다. 지성은 필사자가 겪는 체험의 총합에 대해 조화시키고, 항상 조정하고 제한한다. 에너지-물질과 영적 가치, 이 두 가지는 의식의 mind 매체를 통해 해석되면서 색깔이 입혀진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조화로운 조율을 이루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중간 영역에 있는 '모론시아 세계'에 대한 완전한 무지 때문이다. 지역 우주는 세 가지 실체가 명시되는 단계로 구성된다: 물질, 모론시아, 영이다. 모론시아의 접근 방식은 물리 과학의 발견과 종교의 영적 작용 사이의 모든 차이를 없애버린다. 이성은 과학의 이해 기법이다; 믿음은 종교의 통찰 기법이다; 모타는 모론시아 수준의 기법이다. 모타는 불완전한 성장을 보완하기 시작하는 초물질적 실체인 감수성으로, 모타의 물질적 측면인 지식-이성이며, 본질적 측면은 믿음-통찰력이다. 모타는 물질적 personality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다양한 실체 인식을 초월철학으로 절충하는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물질적 육체의 삶에서 생존한 체험이 전제되어 있다. 많은 인간은 과학과 종교라는 넓게 분리된 영역 사이의 상호작용을 조정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 왔다; 형이상학은 이 잘 알려진 간극을 메우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시도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형이상학은 빛을 비추기보다는 혼란을 야기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형이상학은 모론시아 모타의 부재를 보완하려는 인간이 시도한 헛된 노력을 나타낸다.
형이상학은 실패인 것이 입증되었다. 사람은 모타를 파악할 수 없다. 계시는 물질세계 안에서 모타의 진리 민감성이 부재하는 것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기법이다. 계시는 진화하는 구체에서 이성으로 개발된 형이상학의 혼란을 권위있게 분명히 밝힌다.
과학은 인간의 물리적 환경, 에너지 물질의 세계를 연구하려는 시도이다; 종교는 사람이 영적 가치가 있는 우주를 체험하는 것이다; 철학은 널리 분리된 개념들의 발견들을 정리하고 우주를 향한 합리적이고 통일된 태도와 같은 것으로 연관시키려는 인간의 mind 노력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 계시로 분명해진 철학은, 모타가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모타를 대신하는, 인간의 이성의 대용품―형이상학―이 붕괴하고 실패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활동한다.
옛날 사람은 에너지 단계와 영 단계를 구별하지 않았다. 수학적인 것과 의지가 있는 것을 처음으로 분리하려고 애쓴 것은 보라 인종과 그 안드 종족 후계자들이었다. 점점 더 문명화된 인간은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한, 초기 그리스인과 수메르인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리고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철학은 영 개념과 에너지 개념 사이에 항상 벌어지는 틈에 다리를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간의 시간에서 이런 분리들은 Supreme(최상위) 안에서 하나가 된다.
103:6.11 상상력과 추측이 과학의 경계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과학은 항상 이성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이성이 안정감을 주고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종교는 항상 믿음에 의존한다. 그리고 자연과 영적 세계의 현상들, 과학과 종교의 현상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항상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과학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 종교에 대한 희미한 유지, 그리고 형이상학의 실패한 시도로부터, 인간은 철학의 뼈대를 구성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현대인은 물질과 영 세계 사이의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형이상학적인 연결고리의 붕괴와 육체적이고 영적 사이의 모론시아 격차를 메우는 형이상학의 실패가 아니었다면 자신과 우주에 대한 가치 있고 매력적인 철학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사 인간에게는 모론시아 지성과 물질에 관한 개념이 부족하다; 그리고 계시는 우주에 대한 논리적 철학을 세우기 위하여, 그 우주에서 확실하고 안정된 자기 자리를 만족스럽게 이해하기 위하여, 인간이 무척 긴급히 필요한 이 개념 자료의 부족을 메우는 유일한 기법이다.
계시는 진화 인간이 모론시아 간격을 메우는 유일한 희망이다. 모타의 도움 없이, 믿음과 이성은 합리적 우주를 파악하고 연구할 수 없다. 모타의 통찰력이 없이, 필사 인간은 물질 세계의 현상에서 선ㆍ사랑ㆍ진리를 분별할 수 없다.
인간의 철학이 물질세계를 향하여 상당히 기울어질 때, 이성주의나 자연주의가 된다. 철학이 영적 수준으로 기울어지면 이상주의나 신비주의가 되기도 한다. 철학이 형이상학에 기댈 정도로 불행할 때, 철학은 끝없이 회의적이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지난 시대에, 사람의 지식과 지적 평가의 대부분은 이 세 가지 파악의 왜곡 중 하나에 빠졌다. 철학은 감히 직선 모양의 논리로 실체에 관한 해석을 예측하지 않는다. 철학은 결코 실체가 타원 모양으로 균형된 것, 그리고 모든 관계 개념이 본질적으로 굽어진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필사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철학은 과학의 이성에, 종교의 믿음에, 계시에 의한 제공된 진실된 통찰에 논리적으로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통합에 의해 인간이 적당한 형이상학을 개발하지 못한 것과 모론시아 모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상할 수 있다.
7. 과학과 종교
103:7.1 과학은 이성에 의해, 종교는 믿음에 의해 유지된다. 믿음은 이성을 전제로 하지 않지만 이성적이며, 논리와는 무관하지만 건전한 논리에 의해 장려된다. 믿음은 이상적인 철학으로도 길러질 수 없다; 실제로 과학과 함께 믿음은 철학의 근원이다. 인간의 종교적 통찰력인 믿음은 계시를 통해서만 확실히 전해질 수 있고, 영(spirit)이신 하나님의 영적 조절자의 계심과 함께 필사 personal 체험에 의해서만 확실히 높아질 수 있다.
참된 구원은 물질적 식별에서 모론시아 접촉의 영역을 거쳐 영적 상관관계의 높은 우주 상태로 필사자 mind가 신성한 진화를 하는 기법이다. 그리고 지상의 진화에서 물질적 직관적 본능이 이성적 지식의 출현에 앞서듯이, 영적 직관의 통찰력 발현은 모론시아와 영적 이성 및 체험의 나중 출현을 예고한다. 이 하늘의 진화는 일시적 인간의 잠재성을 실제로, 영원한 신성을 가진 인간, 파라다이스 최후자로 전환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상승하는 인간이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해 내면으로, 그리고 파라다이스를 향해 나아갈 때, 그는 또한 물질 우주에 대한 에너지 이해를 위해 외부로, 우주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지상 생활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지역우주와 초우주로 상승하는 체험에서 에너지 변형과 물질 변형에 대한 연구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지만 신(Deity)은 통합이며, 신 통합은 우주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영적 가치를 담을 뿐만 아니라 우주 통제자와 파라다이스 섬의 에너지 사실을 또한 인식하고, 한편 이 두 단계의 우주 실체는 합동 행위자의 mind 관계에서 완전히 서로 관련되고, 유한 수준에서는 솟아나는 신(Deity) Supreme Being 안에서 통합된다.
과학적 태도와 종교적 통찰력의 통합은 체험적 철학의 중재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는 파라다이스로 상승하는 인간의 오랜 체험의 일부이다. 수학의 근접성과 통찰력의 확실성은 모든 체험 수준에서 Supreme의 최대 성취에 이르기 전까지 mind의 논리적인 조화로운 작용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과학적 측면과 종교적 측면이 모두 진리에 지배받고, 어떤 결론에 도달하든 진리가 이끄는 대로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personality가 아니라면 논리는 과학의 발견과 종교의 통찰을 조화시키는 데 결코 성공할 수 없다.
103:7.6 논리는 철학의 기법이며, 철학의 표현 방법입니다. 참된 과학 영역에서 이성은 항상 진정한 논리에 순응한다; 참된 종교 영역에서 믿음은 내적 관점에서 논리적이지만, 과학적 접근의 외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믿음이 다소 근거가 부족해 보일 수 있다. 외부에서 내면을 바라보면 우주는 물질적으로 보일 수 있으며, 내면에서 외부를 바라보면 동일한 우주는 완전히 영적이라고 보일 수 있다. 이성은 물질적 인식에서 자라나고, 믿음은 영적 인식에서 자라나지만, 계시로 강화된 철학의 중재를 통해 논리는 내면적 관점과 외면적 관점을 모두 확증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과학과 종교의 안정화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철학의 논리와 공통으로 접촉함으로써 과학과 종교는 서로에 대해 점점 더 관용을 가지게 되고, 점점 더 의심이 줄어들게 된다.
발전하는 과학과 종교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깊이 있고 두려움 없는 자기 비판과 진화적 상태의 불완전성에 대해 더 크게 인식하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의 교사들은 종종 지나치게 자만하고 독단적이다. 과학과 종교는 자신의 사실에 대해서만 자기 비판적일 뿐이다. 사실의 단계를 벗어나는 순간 이성은 사라지거나 거짓 논리의 동반자로 급격히 변질된다.
진리―우주적 관계, 우주 사실 및 영적 가치에 대한 이해―는 진리의 영의 사역을 통해 가장 잘 파악될 수 있으며, 계시에 의해 가장 잘 비판될 수 있다. 그러나 계시는 과학이나 종교를 창시하자 않으며, 그 기능은 과학과 종교를 진리의 실체와 조화시키는 것이다. 계시가 없거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인간은 항상 형이상학이라는 헛된 시도로 의존해 왔고, 형이상학은 진리의 계시나 모론시아 personality의 모타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적 대체물이 된다.
물질 세계의 과학은 인간이 그의 물리적 환경을 통제하고, 어느 정도 지배할 수 있게 한다. 영적 체험의 종교는 사람들이 과학 시대의 복잡한 문명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형제애의 근원이다. 형이상학, 아니 더 확실히 계시는 과학과 종교의 발견을 위한 공통의 만남의 장소를 제공하며, 이런 분리된 상호의존적인 사고의 영역을 과학적 안정과 종교적 확실성의 잘 균형 잡힌 철학으로 연관시키려는 인간의 시도를 논리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필사자의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절대로 증명할 수 없다; 과학과 종교 모두가 가정에 바탕을 둔다. 모론시아 수준에서 과학과 종교의 가정은 모타의 논리에 의해 부분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최대의 영적 수준에서, 유한한 증명의 필요는 실제하는 실체 체험 이전에 점차 사라진다; 그럼에도 유한을 넘어서는 많은 것들이 여전히 증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103:7.11 인간 사고의 모든 구분은 인간에게 부여된 mind의 구성적 실체 감수성에 의해, 입증되지는 않았더라도 특정 가정에 기반을 두고 받아들여진다. 과학은 물질, 움직임, 생명이라는 세 가지의 실체를 가정하면서 그 자랑스러운 추론 과정을 시작한다. 종교는 Supreme Being―mind, 영, 우주, 이 세 가지의 타당성을 가정하는데서 출발한다.
과학은 수학의 사고 영역이 되고, 공간의 시간에서 에너지와 물질을 다룬다. 종교는 유한하고 일시적인 정신뿐만 아니라 영원과 초월의 영도 다루려 한다. 이러한 두 극단의 우주 인식이 유사한 해석을 낳게 하려면 오랜 모타 체험이 필요하다. 일곱 Master Spirits의 회로에는 에너지와 영의 분산이 최대로 조화되어 있다; Supreme 신 안에서 에너지와 영이 처음으로 통합되고, 첫째 근원 중심, '스스로 계신 이'의 무한 속에서 최종으로 통합된다.
이성은 물리적 세계의 에너지와 물질에 대한 체험에 관한 의식의 결론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믿음은 영적 의식의 유효성을 인식하는 행위로, 이는 다른 인간적 증명에 의해 입증될 수 없는 것이다. 논리는 믿음과 이성이 통일되어 통합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며, 이것은 필사 존재를 구성하는 mind 자질, 사물, 의미, 가치에 대한 선천적인 인식에 기초한다.
생각 조절자의 존재는 영적 실체의 실제 증거를 제공하지만, 이 존재의 유효성은 바깥 세계에 증명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깃드심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만 증명될 수 있다. 조절자에 대한 의식은 진리에 대한 지적인 수용, 선에 대한 초월지성의 인식, 사랑에 대한 personality의 동기 부여에 기반을 둔다.
과학은 물질세계를 발견하고, 종교는 그것을 평가하며, 철학은 과학적 물질 관점과 종교적 영적 개념을 조화시키면서 그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역사는 과학과 종교가 완전히 일치할 수 없는 영역이다.
8. 철학과 종교
103:8.1 과학과 철학 모두 이성과 논리를 통해 하나님의 가능성을 가정할 수 있지만, 오직 영에 이끌리는 개인의 종교적 체험만이 그러한 최상의 personal 신(Deity)의 확실성을 확증할 수 있다. 이러한 살아 있는 진리의 현현 기법에 의해 하나님의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가설이 종교적 실체가 된다.
하나님의 확실성에 대한 체험 혼란은 개인과 인종에 따라 그 체험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관계성에서 발생한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할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토론은 지적이고 철학적이기 때문에 서로 다르고 종종 혼란스러울 정도로 잘못된 경우가 많다.
선하고 고결한 사람은 아내를 깊이 사랑할 수 있지만, 부부 사랑의 심리학에 대한 만족스러운 서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수 있다. 반면,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사람은 그런 시험을 가장 잘 통과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대상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통찰력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그 사랑의 실체나 성실성이 무효화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즉 하나님을 알고 사랑한다면, 과학의 의심스러운 암시, 논리의 비약, 철학의 가설, 하나님 없이 종교를 만들려는 선의의 혼들의 영리한 제안에 의해, 그러한 체험의 실체가 어떤 식으로든 축소되거나 훼손되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
하나님을 아는 종교인의 확신은 의심하는 물질주의자의 불확실성에 의해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불신자의 불확실성은 체험적으로 믿는 자의 깊은 믿음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의해 강력히 도전받아야 한다.
103:8.6 철학이 과학과 종교 모두에 가장 큰 도움이 되려면, 물질주의와 범신주의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오로지 personality의 실체―변화 가운데 영구한 것―을 인식하는 철학이 사람에게 도덕적 가치가 있을 수 있으며, 물질과학과 영적 종교를 다루는 이론 사이에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다. 계시는 진화하는 철학의 약점을 보상한다.
9. 종교의 본질
103:9.1 신학은 종교의 지적인 내용을 다루고, 형이상학(계시)은 철학적 측면을 다룬다. 종교적 체험은 종교의 영적인 내용이다. 종교의 지적 내용에 신화 같은 변덕과 심리학적 망상이 있고, 형이상학의 잘못된 가정과 자기 기만의 기법이 있으며, 종교의 철학적 내용인 정치적 왜곡과 사회 경제적 변질에도, 개인 종교의 영적 체험은 여전히 진정하고 유효하다.
종교는 단순히 생각에 국한되지 않고, 감정, 행동, 그리고 생활과 관련이 있다. 생각은 물질적 삶과 더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주로 이성과 과학의 사실들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지만, 비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진리에 의해 지배될 수 있다. 신학이 아무리 환상적이고 오류가 많더라도, 개인의 종교는 온전히 진정하고 영원히 참되다.
최초 형태의 불교는 유란시아의 진화 역사 전체를 통해서 생겨난, 비록, 하나님이 없는 최선의 종교 중의 하나이지만, 믿음이 발전되면서 무신론으로 남겨지지 않았다. 믿음이 없는 종교는 모순된 종교이다; 하나님이 없는 것은 하나의 철학적 모순이고 지적인 어리석음이다.
자연 종교의 마법적이고 신화적인 기원이 나중에 나타난 계시 종교와 예수 종교의 완전한 구원의 복음을 무효화하지는 못한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종교에서 마법의 미신, 환상적 신화, 전통적 교리의 속박을 제거했다. 그러나 초기의 마법과 신화는 초물질적 가치와 존재의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나중에 더 우수한 종교로 나아가는 길을 매우 효과적으로 준비했다.
종교적 체험은 순전히 영적인 주관적 현상이지만, 그러한 체험은 우주들의 우주의 객관적 실체인 가장 높은 영역에 대한 긍정적이고 살아있는 믿음의 태도를 수용한다. 종교 철학의 이상은 인간이 우주의 무한한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에 조건 없이 의존하도록 이끄는 그런 믿음-신뢰이다. 이러한 진정한 종교적 체험은 이상주의적 욕망의 철학적 대상화를 훨씬 초월하여 실제로 구원을 당연시하고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종교의 특징은 최상의 신에 대한 믿음, 영원한 생존에 대한 희망, 특히 동료에 대한 사랑이다.
103:9.6 신학이 종교의 주인이 될 때, 종교는 죽는다; 종교는 생명이 아니라 교리가 된다. 신학의 사명은 단지 개인이 영적 체험을 스스로-의식하도록 돕는 것이다. 신학은 종교의 체험적 주장을 정의하고, 명확히 하고,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종교적 노력을 구성하는데, 마지막 분석에서는 살아있는 믿음에 의해서만 검증될 수 있다. 우주의 높은 철학에서, 지혜는 이성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연합하게 된다. 이성, 지혜, 믿음은 인간의 가장 높은 성취이다. 이성은 인간을 사실의 세계, 사물에 대해 소개한다; 지혜는 인간에게 진리의 세계, 즉 관계를 소개한다; 믿음은 인간을 신성의 세계, 영적 체험의 세계로 인도한다.
믿음은 이성이 갈 수 있는 데까지 아주 기꺼이 이성을 데리고 철학의 한계 끝까지 지혜와 함께 나아간다; 다음에 믿음은 감히 진리의 유일한 동반을 받으면서, 무한하고 결코 끝이 없는 우주여행을 시작한다.
과학(지식)은 이성이 타당하고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내재된(보조 영) 가정에 기초한다. 철학(조율된 이해)은 지혜가 타당하고 물질적 우주가 영적인 것과 조율될 수 있다는 내재적(지혜의 정신) 가정에 기초한다. 종교(개인적 영적 체험의 진리)는 믿음이 타당하고 하나님을 알고 도달할 수 있다는 내재된(생각 조절자) 가정에 기초한다.
필사 삶의 실체를 완전히 깨닫는 것은 이성, 지혜, 믿음, 이 세 가지의 가정을 점진적으로 기꺼이 믿는 태도에 있다. 그러한 삶은 진리에 자극받고, 사랑이 지배하는 삶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존재한다는 것을 물질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객관적 우주 실체의 이상이다.
이성이 옳고 그름을 인식할 때, 그것은 지혜를 나타낸다; 지혜가 옳고 그름, 진실과 오류 중 하나를 선택할 때, 그것은 영이 이끄는 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mind, 혼, 영의 기능은 항상 밀접하게 결합되고 기능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 이성은 사실적 지식을 다룬다; 지혜는 철학과 계시를 다룬다; 믿음은 살아있는 영적 체험을 다룬다. 진리를 통해 인간은 아름다움에 이르고, 영적인 사랑으로 선의 높이까지 올라간다.
103:9.11 믿음은 단순히 신성한 존재에 대한 신비로운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이어진다. 믿음은 감정적인 결과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참된 종교는 만족스러운 감정일 뿐 아니라, 믿고 아는 체험이다.
종교적 체험에는 영적 내용에 비례하는 실체가 있으며, 그러한 실체는 이성, 과학, 철학, 지혜, 그리고 인간의 모든 다른 업적을 초월한다. 그러한 체험의 확신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종교적 삶의 논리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지식의 확실성은 초인적이다. 만족은 절대적으로 신성하고, 용기는 불굴이며, 헌신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충성은 최상이며, 운명은 최종이다-영원하고, 궁극적이며 우주적이다.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