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1.
가지나물
정월대보름에는 오곡밥과 묵은 나물이 주인공이다. 이듬해에 먹을 나물을 봄부터 여름 동안 내내 삶아 말렸으니 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의 땀방울과 손끝이 이룬 정성을 나는 안다. 해마다 반복되는 과정을 눈여겨봤으니 말이다. 고사리, 곤드레나물, 참나물, 취나물, 피마자나물, 토란대나물, 가지나물, 고구마순나물, 호박고지, 고춧잎, 애호박, 시래기 등이 정월대보름을 풍요롭게 하는 나물들이다. 묵은 나물에도 향이 있다. 믿기지 않을 테지만 그윽한 단맛을 호흡한 적도 있다.
어릴 때 생각이 난다. 시커먼 나물을 종류별로 물에 불리고 씻어 삶아 볶은 어머니의 보름나물이 그때는 별로였다. 이제 나이가 들어 입맛도 바뀌나 보다. 지금은 숨어 있는 향까지 느끼니 나이 든 증거이리라. 심심하게 약한 간을 하면 더 맛있다. 어머니를 대신해 아내가 보름나물을 준비한다. 그 마음과 손끝이 어머니 못지않다. 그리운 어머니의 나물 맛이 아들에게도 나와 같은 세월이 필요한지 물어는 봐야겠다.
시골살이도 나름 매력적이다. 더군다나 아침형 인간이면 나무랄 데가 없다. 여명으로 어스름한 새벽이면 밭일하기에 적합하다. 따가운 볕이 없을뿐더러 기온도 하루 중에서 가장 선선하기 때문이다. 호박밭에서는 수꽃을 따서 암꽃의 암술에 수정시키는 일은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다. 채소밭에 물을 주며 아침 운동을 대신한다. 아침 먹고 쉬고, 점심 먹고 쉬고, 온종일을 쉰다. 날이 저물 녘에는 어슬렁거리며 텃밭과 비닐하우스를 한 바퀴 돌아 자그마한 수확의 기쁨도 만끽할 수 있다. 해넘이를 즐기는 여유로움도 만만치 않다. 가끔은 그 해넘이에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니도 함께한다.
익히 들은 이야기가 있다. 호박 모종 네댓 개와 가지 모종 서너 개면 여름내 호박과 가지만 먹는다더라. 정말 그랬다. 자고 나면 가지가 주렁주렁 달리고 호박잎 아래 숨어 사는 귀여운 놈들이 반가이 맞아준다. 먹다 먹다 질리면 보름나물을 준비한다. 말린 가지나물이 두 봉지나 된다. 고구마순나물과 호박고지, 고춧잎도 마음만 먹으면 잘 삶아 따사로운 볕에 바싹하게 말릴 수 있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했다. 미리 준비해 두면 근심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서경(書經)> 열명편에 나오는 말이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말이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변수가 다양해서 쉽지는 않다. 죽고 사는 문제라면 반드시 유비(有備)해야 한다. 반년이나 지난 후에나 먹을 보름나물을 유비무환에 빗대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정성을 아는 터라 결코 가볍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 또한 그리움인가.
첫댓글 사람도 그립지만 음식이 더 그립다
아닌가? 사람이 그리워서 음식을 핑계 삼는가?
닭이 먼전지 닭알이 먼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