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종교의 다원화에 관한 책을 주로 찾아보고 있다. 깊이 읽지는 않고, 어떤 책들이 있나 살펴봤다. 지식인이라 불렸던 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봤다. 거기서는 무신론자이면서,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길 좋아하는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이런 종교관을 갖고 있다. 삶을 잘 사는 데 도움이 되니 종교를 믿고 싶은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개신교인은 내가 볼 때 종교를 좀 이상하게 믿고 있는 듯하다. 무신론자가 볼 때 예수의 가르침은 사랑이었다. 그런데 개신교인은 관용과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난 종교를 믿지 않기로 했다.
내가 종교를 믿고 싶은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이것은 정신의학자 스캇 펙의 책에서 읽은 것이다. 그는 심리치료의 끝이 종교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내게 던졌다. 그의 내담자들을 살펴보니 무신론자는 종교를 고민하는 사람이 되고, 치유가 잘 끝낸 종교인들은 회의론자가 되곤 하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4단계 종교론이 나오지만 이것은 부차적인 이야기이다.
우연히 오늘 서점에서 알게 된 책이 관용에 관한 것이었다. 3, 4권의 책이 인상적이었는데 모두 관용의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왜 한국 기독교인들은 열려 있지 않은가? 이런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믿지 말라고 해도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다. 스스로 예수님 같은 사랑의 자세를 보여주지 않는데, 말로만 믿으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내가 종교를 믿고 싶어졌던 이유도, 훌륭한 작가 선생님으로부터 깊은 사랑과 아량과 관용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난 이것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관심이 이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른 중반에 교회를 내 발로 찾아간 것이다.
이때 이후로 나를 종교로 끌어당긴 분이 없다. 아니 한 분이 계신데, 그분은 바로 나의 정신과 선생님이다. 선생님이 종교를 믿는지 혹은 어느 종교를 믿는지 난 알지 못한다. 그런데 선생님의 열려 있는 모습에서 난 영감을 받고는 했다. 그래서 조금씩 종교에 관심이 생긴 것이었다.
최근에 법륜 스님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종교 다원성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된다. 비교종교학이란 주제도 알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신화학자이자 비교종교학자가 조지프 캠벨이다. 이분은 젊어서 깊은 독서와 탐구를 했다. 난 이런 태도를 존경하고, 믿을 것이다.
종교는 그냥 믿기만 한다고 종교관이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종교에 관심을 갖고, 탐구심 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하며 자신을 깊이 성찰하면 좋을 것이다. 나 역시 끊임없는 탐구를 할 것이기에, 종교를 믿고 싶은 가능성을 열어 두었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인의 모습을 알기에, 이것은 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어떠한 대접을 받는지 보면 잘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종교 기관에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법정 스님도 말하고 있듯이 종교 그 자체가 제도화 되는 순간 변질될 수 있다. 종교의 순수한 기능이 상실되는 것이다. 종교는 다시 말하지만, 우리 삶을 더욱 깊게 하고,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갖게 하기에 믿고 싶은 것이다. 한국의 종교는 이러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기에, 당분간 난 믿지 않기로 했다.
명동성당에서 법정 스님이 설법을 하셨다. 이런 정신이 지금 한국의 종교인에게 필요하다. 이것이 모독으로 들리는 사람은 진정한 종교인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진정한 종교인은 사랑을 할 것이고, 자비를 실천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종교의 개념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종교인인 것처럼 한국 종교는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
앞으로 정신과 선생님과 상담하며 나의 정신적 태도가 변하지 않는 이상, 난 종교를 믿을 생각이 없다. 내가 유일하게 믿고 있는 분이 지금은 나의 심리상담가 선생님이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그만큼 열린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김신웅 행복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