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영 묵상노트] 요한복음 6장과 신학의 만남9
요한복음 6장 30절-34절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우리는 바로 앞에서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위하여 있는 양식을 위해서 하라”,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다시 질문을 하자, 주님의 답변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인자”,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인치신 자”의 의미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주님의 주님 되심”을 점증적(漸增的)으로 무리들에게 가르치시고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구절 역시, 앞서 언급한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강화(講話)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무리들은 주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 하시자, 이제 30절에서 이들은 “믿을 수 있도록 표적(σημεῖον)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주님,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들은 얼마 전 광야에서 떡을 떼신 주님의 권능을 알 고 있었을 터인데, 그들은 31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세의 지도아래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었던 것을 들먹이며, “믿고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서 믿겠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주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모세보다 위대하시다면, 모세의 이적보다 더 큰 이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일”이라고까지 몰아붙인다. 왜냐하면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믿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의 말을 받아서, 3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게 하신 분은 너희들이 말하는 모세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셨음을 다음과 같이 확인시킨다. 즉, 너희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사실 광야 40년 생활 중에 만나를 먹었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만나를 먹은 사람들도 죽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표적의 규모가 아니라 그 의미의 심각성을 깨닫는 것이라는 점을 이들은 간과하고 있었다(눅 16:29-31). 그리고 나아가 모세와 예수님 모두 하나님의 표적에 의하여 보증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양자 모두 귀 기울여야 하며, 믿어야 하는데 아직 여기까지 그들은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계신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좀 더 수준을 높여서 32절 하반 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늘로부터 오는 “참(ἀληθινόν) 떡”에 대하여 말씀을 하신다. 즉, 이 떡은 “하나님의 떡”으로,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먹었던 떡은 육신의 삶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었지만,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영생하는 떡”은 못 되었다. 그런데 3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제 “참 떡”이 하늘로부터 내려 왔는데, 이것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ζωὴν διδοὺς) 떡, 조금 더 앞질러 말하면 바로 앞서 보았던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의 떡”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여기까지 무리들에게 설명을 하였는데, 무리들은 또 생각이 엉뚱한 곳에 머무르고 있다. 즉 이들은 이 떡에 대하여 진정한 의미를 아직 모른 채, 그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Κύριε, πάντοτε δὸς ἡμῖν τὸν ἄρτον τοῦτον)라고 한다. 이는 마치 우물가의 여인을 주님께서 만났을 때, 이 여인은 매일 그것도 사람의 눈을 피하여 한 더위인 정오에 나와 물을 긷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임을 알기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요 4:15). 특히 이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40년간 지속되었던 만나와 달리 그것을 계속하여 “항상”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중에 아직도 주님을 “생명의 떡” 되신 분이 아니라, 이 무리들과 같이 육신의 안위를 위한 마치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분으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주님께 바라고, 고대하며 간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항상”(πάντοτε) 주소서라고 이들이 말한 것처럼, 항상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주님이 필요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는지? 성경이 본래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그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한 채, 그냥 나의 입맛에 맞게 재단을 하여 결국에는 “내가복음”을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가 지금 본 것처럼, 무리와 주님과는 아직 너무나 큰 간극(間隙)을 보이고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서 바라는 마음과 우리의 생각이 너무나 다르지 않는지 돌아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