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02년 3월 16일 (토요일) 오후 3시∼7시
장 소 : 울산문화예술회관 2층 강당
강 사 : 이상일 교수( 1995년 중앙대학교 대학원 순수사진전공)
저는 지금부터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하려고 하는 사진 이야기는 물론 여러분들께서 이미 알고계시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아주 낯선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지금 하려고 하는 바는, 제가 알고있는 사진에 대한 것을 힘껏 설명해보려는 것일 따름입니다.
사진은 아시는 것처럼 빛으로 그리는 그림입니다. 이 단순한 언어의 해석에는 아주 중요한 사진의 본질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빛은 말 그대로 물리적이며 자연적인 속성을 가르키는 말이고, 그림이라는 단어에는 그리움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먼저 쓰여진 빛이란 그 지시하는 의미가 너무 광범위하고 해석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사실 저는 여러분들께 이 빛에 대해서 잘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빛의 속성을
사진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빛을 통해서는 사진의 제작 뿐 만이 아니라, 사물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풀어말하자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본다는 하는 것은 그 사물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반사되어진 빛의 덩어리를 우리의 눈이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좀더 사진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마치 카메라의 구조가 그러한 것처? ?우리의 눈은 렌즈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고, 이 렌즈(강낭콩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란 말 그대로 '보는통로'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사진에서 이야기되는 빛의 문제란 단순히(?) 물리적인 어떤 속성만도 아니고, 그 자체가 일련의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로인해 만들어지는 어떤 상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여기서 그리움에 대한 설명을 하기전에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아시죠? camera가 방이라는 본래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camera의 원어는 cameraobscura 즉 '어두운 방'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카메라라는 말은 어두운 방을 뜻하며, 이러한 의미의 단어가 형성이 된 것은 희랍시대로부터 입니다. 어느날 할일이 없는 학자들인지는 이해하시겠지요. 당시의 귀족 내지는 학자들이란 엄연한 신분보장이 되어있는 계급의 사람들이고, 따라서 지적인 토론을 하는 것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었던 것같습니다. 따라서 이처럼 할 일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하는 것을 school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학교의 어원은 바로 할 일없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는 것이지요. 여하튼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여타한 토론을 하고 있던 그날밤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는 나무잎 사이로 비춰진 달의 모습이 땅바닥에 도립된 실상을 맺는 것을 누군가가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평범한 사람들 같으면 그대로 지나칠 수도 있는 이 순간의 상을 그들은 예사롭지않게 보였고, 이러한 현상을 다음날 낮에 큰 방을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방을 아주 어둡게 만든다음 어느 한 벽에 구멍을 뚫고 그 반대의 벽에 생기는 상을 관찰 해보니 놀랍게도 전날 밤에 보았던 것처럼 반대의 풍경이 도립의 실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이렇게 해서 알게 되었던것입니다. 어떤 강한 빛이 작은 구멍을 통과하면 그 반대의 벽에 꺼꾸로된 상을 맺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상이 맺히기 위해서는 그 방이 반드시 어두워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놀랍지 않으셔요? 이러한 작은 관찰의 결과로 우리는 지금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들은 cameraobscura를 가지고 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들은 이 cameraobscura 를 가지고 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관찰이 우리 인간의 삶을 바꾸어 놓은 것이 비단 이 cameraobscura 뿐만은 아닙디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빛과 관계가 있는 예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서 일을 하던 아르키메데스는 오래된 파피루스를 정리하다가 재미있는 문헌을 발견합니다. 그 파피루스에는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룩소아 luxor에서 발견이 된 것인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매년 하지가 되면 그 곳에서는 바닥에 세워놓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없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르키메데스는 이 문헌의 이야기를 그대로 간과하지 않고 자신이 살고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같은날 정오에 바닥에 막대기를 세워놓고 관찰을 하였고, 그 결과 문헌의
정보와는 그림자의 길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즉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같은 날에 약7도정도의 그림자가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것이지요. 아르키메데스는 사람을 사서 알렉산드리아에서부터 그곳까지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걷게 하였고, 그 결과 그 곳이 알렉산드리아에서부터 약 800Km떨어진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 결과를 가지고 우리가 살고있는 이 지구가 평평한 땅이 아니라 둥근 모습을 하고있다는 사실과(만일 지구가 둥글다면 같은날의 막대기 그림자가 두곳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요.) 그 둘레가 약 4만 km정도가 된다는 사실을 연역해 내었습니다. (둥근원의 각도는 360도이고 그림자가 나타난 각도가 약 7도니까 800에다가 360을 7로 나눈수를 곱하면 약 4만km가 나오는 것이지요.) 어떠셔요? 그 오랜 옛날에 이미 이러한 정확하고도 분명한 사실을 어떤 고학적인 도구없이 탐구해 내었다니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계산해 보시지요.
이야기가 조금 다른 곳으로 빗나갔습니다.
카메라에 대한 것과 지구에 대한 이야기는 만나봅고 좀더 자세히 나누기로 하고, 다시 사진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번에는 그림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림이라는 말 속에는 그리움이라는 뜻이 들어있는데, 이 그리움이라는 뜻이 들어있는데, 이 그리움은 아시는 것처럼, 두가지의 입장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미 알고있는 것의 그리움이고, 다른 하나는 알고싶은 것의 그리움입니다.
즉, 일반적인 입장에서의 그리움이란 이미 자신이(인간이 혹은 동물이 혹은 어떤 생명체가)경험한 어떤 사물 또는 형상이 그 곳에 존재하지 앟는다는 사실에 대해 돌이켜 보고자하는 욕구로서의 그리움이 하나있고, 다른 하나는 비록 경험하지 않은 사실이더라도 상상에 의해 그리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보다 명확한 상을 이미 의식속에 간직하고 그러한 대상을 만나지기를 욕구한다고 생각되어지고, 후자의 경우에는 막연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상상에 의지해서 그 상상이 만들어내는 상을 의식속에 가지고 있게 마련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이 두개의 그리움의 형태는 그 갈래가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 압축해서 본다면, 자신의 의식(뇌)속에 가지고 있는 상을 다시금 보고자 애쓰는 마음 또는 행위를 우리는 그리움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사진의 중요한 요소인 보는 문제에 상당히 깊숙하게 도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은 결국 보는 행위와 무척이나 긴밀한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이는 단지 사진이 현실의 대상을 담보하여 제작되어진다는 의미 뿐만이 아닙니다. 사진이 만들어지는 것은 여러분들께서도 가끔은 경험하시겠지만 두가지의 여행중 하나의 형태를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밖으로의 여행'과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진의 행위를 이 첫번째 카테고리인 밖으로의 여행에 국한해서 이해하고 있습니다마는 이 밖으로의 여행은, 사진이 가지고 있는 기록적인 측면이나, 새로운 사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저널리즘적인 힘, 그리고 나아가서는 아무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만이 경험한 대상들을 사진화하여 보여 주고자하는 충격주의적인 충동이 중추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형태의 사진들은 따라서 받아들이가 쉽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기가 용이하기 때문에 많은 취미생활자나 소위 아마츄어로서의 작가가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제 개념으로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아마츄어라는 이름으로 작업을 하고 계시는 작가?란 거의가 취미 생홀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아마츄어와 취미 생활과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어떤 장르의 예술이든 프로페셔널한 작가와 아마츄어 그리고 취미생활자로 구분된다고 생각되어지는데, 프로란 그것으로서 자신의 생존을 해결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목숨을 걸게 마련이고 그 일이 스스로 뿐만이 아니라 고객의 만족에도 깊이 관여되기 때문에 질에 대해서도 담보해야하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 꼭 그 장르의 질을 높이 지니고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예컨데 동네에서 사진관이나 현상소를 운영하시는 분들이 사진에 프로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분들의 사진에 대한 이해가 꼭 높다고만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취미생활자란 말 그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여가의 시간을 선용하기 위해 그 장르를 택해 작업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부류의 사람들에게 여하한-장르, 사회-적인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주로 꾀하는 작업이란 자신의 건강이나 취향에 와닿는 것, 또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기위한 것이외에는 그 장르에 대한 깊은 학습을 전혀?하려 하지않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그분들의 모습에 어떠한 질타도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분들이 스스로 취미생활자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다면요.
마지막으로 아마츄어란 이 양쪽의 문제를 함께 떠안고 있는 부류라고 생각되는데, 이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생존의 문제는 어떠한 것으로 해결하고 있던지간에 자신이 하고자하는 작업의 '동기부여'를 스스로 발생시키는 부류이고, 또 작업을 통해단지 자신의 여가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여타의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전하려 애쓰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아마츄어작가들은 질에 있어서나 작업을 하는 태도에 있어서 단지 자신의 도그마에 빠져있기보다는 그 장르의 역사적인,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흐름에 대한 관심과 그에 다르는 학습의 책임을 함께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주위에 이러한 작업태도에 대한 분류가 확실치않기 때문에 소위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쉽게 택하는 방법이고 따라서 마치 이러한 밖으로의 여행이 사진의 전형적인 틀인것처럼 이해되어지는 점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지요. 이러한 밖으로의 여행 못지않게 중요한 갈래가 안으로의 여행작업입니다. 이 안으로의 여행은 상당히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유는 바로 자신과의 부단한 싸움?이 그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다는 문제란 그곳에 가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때 발생하는 '봄의 문제'는 그 본 사실을 어떻게 잘 전달할 것인가가 우선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만 단정지을 수 없는 많은 문제가 이 밖으로의 여행에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그 평균적인 작업의 속성을 논하자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 하지만 누군가가 사진을 가지고 안으로의 여행을 하려한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인식구조와 태도 그리고 그 인식이 지향하는 문제를 먼저 설정하려 애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본다고 하는 것과 인식되어지는 것과의 관계가 우선되겠지요. 이점이 바로 상상의 그리움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학술적인 논증을 들어 증명하고 싶지는 않습
니다마는, 앞에서도 말씀 드린 것처럼, 보는 것이란 눈으로부터 시작하여 뇌에서 종결되어지는 이미지 전달 수단의 결정입니다. 즉, 어떤 사물을 우리가 본다는 것은
그 사물에 반사되어진 빛의 덩어리를 동공을 통해 각막에 상을 만드는 것이요. 이 상은 단지 그 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신경을 통해 뇌속에 저장되어있는
경험의 어느 부분에 충격을 주어 그 충격이 뇌 혹은 의식에 상으로 그려지게 하는 일련의 사고행위가 바로 본다는 행위의 완결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뇌의 어느 부분에 어떻게 언어가 아니라 상으로 우리가 본 사실과 그 본 것을 통해 이루어내는 아우라aura 또는 그 2차의미를 형성하는지 사실 저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 스스로 의 경우가 그렇고, 개략의 지식을 통해 알고 있는 결과 역시도 그러하다는 것과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잘 모르겠습니다.
자! 이러한 것이 보는 문제에 관한 것이고, 이 보는 것이 이처럼 의식고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라면 위에서 이야기한 인으로의 여행이 어떠해야 하는지(물론 원칙적으로는 밖으로의 여행을 포함합니다.)좀더 상세히 이해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필요로하는 것은 본 것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어떠한 시, 지각적 경험을 하였느냐와 그 경험을 어떻게 운용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목적에 알맞게 가지고 갈 것인가가 더욱 우선되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문제는 우리가 단지 사진을 하는 목적이 사진을 제작하는데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진의 제작이 자신의 삶과 깊게 고리지워져있다는 사실과, 그 고리의 정중에 우리의 사진적인 목적이 내재되어있다는 사실과 그 고리의 정중앙에 우리의 사진적인 목적이 내제되어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과 제가 사진을 제작하려고 하는 것이 단지 멋진 풍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함이 아니라면, 그리고 사진을 바라보게되는 관람자가 단지 자신이 가보지못한 풍경이나 대상의 정보를 그 사진의 통해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움을 키워나가야 함과 그 그리움이 어떠한 의식의 지평을 지니고 있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렇게 막연하다 할만큼 추상적인 언어로만 말씀을 드리게되면, 그리고 이렇게 길게 부연하여 설명을 드리게 되면 대부분의 머리속에 서서히 쥐가나고 있거나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혹은 무슨 사진에 대한 설명이 이다지도 복잡하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또 때로는 실제로 사진은 사진이지 철학이아니라고 하면서 고개를 저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께 그동안은 제나름대로의 명쾌하고 정확환 답변이나 저의 생각을 많이 강요해왔습니다. 그리고 효과도 있었구요. 하지만 아직 여러분들께 제가 한가지 확답받지 못한 사실 때문에 위의 이야기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는 유보하겠습니다.>
자! 저는 지금까지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해석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시는 이해의 정도는 만나뵙고 확인하기로하고 이제부터는 좀더 구체적인 사진만들기에 대해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모든 작업은 결과적으로 본다면 형식과 내용이라는 두개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예술에 국한된것이 아닐라 어떠한 일이든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에 있어서도, 밥을 지을때도, 장사를 하거나 공부를 할때도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때 잘 살펴 헤아려야 하는 것은 이 형식과 내용이 둘이 아니랄 하나라고 하는 사실과, 우리의 언어 전달이나 의식의 전개가 그 시간적인 속성 때문이 이 두 부분을 둘처럼 말하고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장의 사진을 만들거나 한 끼니의 밥을할때도 그 내용을 이루는 것과 어떻게 그것을 담아내는가에 걸쳐있는 형식적인 것이 함께 문제시 된다는 말입니다. 다분히 상식적인 수준의 말씀입니다마는,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둘의 문제가 하나인 것을 이제는 모두가 잘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작업을 하게될때 종종 이부분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는 너무 형식적인 문제만을 치우쳐 중시하거나, 반대로 너무 내용적인 것에만 치우쳐 생각을 전개시키게 되면, 후자의 경우에는 다른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 십상이고, 전자의 경우에는 너무 가시적인 것에만 치우쳐 가벼웁다는 평을 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보기에만 그럴듯한 사진이라서 혹은 너무 자의적인 해석만을 한 사진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외면하는 그런 사진을 만들어본 분들이라면 저의 이 이야기를 잘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둘 어느것도 아니고, 보다 적극적인 자신의 '의지개입의 부족함'을 극복하려 애쓰는 것이 가장 필요로 하다는 것입니다. 언듯 난해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이 형식과 내용이 50대50으로 한 작업속에 균등하게 표현된 경우는 없다고 확신합니다.(이렇게 말씀드리면 위에서 한 이야기와 상충하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시는 분이 계시겠지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제 진짜 이야기는 위의 경우 즉, 그 내용과 형식의 치우침 때문에 얻게 되는 부정적인 측면보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그 절충을 꾀하려 하면서 치루게 되는 대가가 더욱 손해라는 말입니다. ) 지금까지 무수한 예술이 있고, 또 앞으로도 있겠습니다마는 언제나 이 두개의 축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또는 그 시대에 따라 때로는 형식이 때로는 내용이 더욱 중요한 우위를 점하면서,투쟁하면서 인간의 문화역사는 진행되어왔다고 생각합니다. 뿐 만이 아니라 두개로 나뉜 것처럼 보이는 형식과 내용의 문제는 직접 깊숙하게 작업을 하다보면 둘이 아니라 넷인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즉 내용에 다시 내용과 형식이 그리고 형식에 다시 형식과 내용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예컨데 사진의 경우에 있어서, 그 사진을 이루는 형식에는 카메라의 종류로부터 촬영한 각도, 거리감, 화면의 구성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이 때 이 모든 요소들이 단지 하나의 형식이라는 단어로 귀속된다기보다는 이러한 요소를 사용해야하는 작가의 선택의지, 즉 그의 작업태도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이지요.
카메라 포맷의 설정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왜? 어떤 사람은 35mm카메라를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대형 카메라를 사용하게 되나요? 그리고 이러한 카메라를 가지고 어떠한 대상앞에서 일정한 거리와 각도 그리고 노출 방법을 통해 자신이 표현하고자하는 소재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려한다면 그의 형식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작가 의지가 삽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떠셔요? 동의 하십니까?
또 내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 어떠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표현하고자하는 내용에 알맞는 소재의 선택과 그를 통해 보여주고자하는 의미의 전달을 위해 때로는 두개의 소재를 동시에 촬영해야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에는 그 소재를 이루는 근간이 무엇인가를 알기위해 (또는 적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그 소재의 표면에 나름의 의미부여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내용의 구심점과 표면의 모습이 함께 구성되어져야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의 궁극적인 의미가 정확하게 vision화 되기위해서는 그러한 내용을 꾸려나가는 구성의 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생각하는 내용과 형식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입니다.
물론 전제 되어야하는 것은 기술적인 숙련입니다. 이 기술이라는 것 역시도 형식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틀입니다. 어떠한 훌륭한 생각도 그것이 표현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술적인 부분을 간과해서는 아니되고 또 어떠한 경우에라도 이 기술적인 부분을 통과해야만이 예술에 도달할 수 가 있슴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일 것입니다. 일찌기 서양에서는 희랍시데에 이부분 즉, 예술과 기술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내려놓았습니다. 즉 당시의 techne란 예술에 다름이 아니었고, (예술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 이 techne를 이루는 세가지 요소가 있다고 보았는데, 첫째는 자연에 의해 제공되는 질료, 둘째는 전통에 의해 전수되는지식, 그리고 셋째는 작가 자신의 작업에 의해 수행되는 작업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기술techne은 단지 기능적인 면만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것, 그리고 자신의 작업행위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이 기술을 예술과 다름이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지요.(물론 객관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예술 또는 미의 정의를 전제로 말입니다. ) 그리고 이처럼 서양 뿐만이 아니라 우리 동양에서도 이 기술과 예술에 대한 미적 정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장자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람인데, 장자는 '포정해우'라는 우화를 통해서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개하자면, 어느 날 혜왕은 자신의 성에 아주 소를 잘 잡는 백정이 있다는 말 소문대로 어찌나 소를 잘 잡는지 마치 소와 사람이 하나가 되어 춤을 추는 듯이 보이더랍니다. 한참을 소와 씨름하던 백정이 그 움직임을 멈추니 정말로 소가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그리고 가죽과 심줄은 나름대로 와르르 무너지듯이 분류가 되더랍니다. 해서 왕이 어찌하여 너는 그처럼 소를 아름답게 해체 할 수 있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처음에 삼년간을 소를 잡을 때에는 마치 소가 산만하게 보여서 어디서부터 칼을 대야 좋을지 몰랐었고, 따라서 늘 칼을 새것같이 갈아 소를 잡아도 칼이 뼈에 부딪치고 심줄에 걸려 매번 그 칼이 무디어졌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삼년을 소를 잡으니 그 때는 소가 소만해져서 그럭저럭 소 속에 살과 뼈를 가름할 수가 있게 되었고, 따라서 한 달에 한번 정도만 칼을 갈아도 소 잡는데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에는 소가 소로 보이지 않고 마치 물처럼 여겨져 칼이 가는 길을 애써 생각지 않아도 절로 살과 심줄과 뼈를 가름할 수가 있게 되었고, 이는 틈이 없는 칼날로 틈이 있는 소를 베는 모양이 되어 수년 동안을 소를 잡았으나 아직도 방금 간 칼처럼 날이 서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동양에서 이야기하는 기機, 예藝, 도道,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양에서는 기술을 거처 예술로 그리고 예술을 거쳐서 도로 향하게 된다고 모든 일을 보았던 것이지요. 따라서 서양의 경우와는 다소 다릅니다마는, 여하튼 동양이나 서양 모든가 이 기술에 대한 의미를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고, 특이나 동양에서는 그 기술을 지나서야 비로서 예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으며, 예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아니라, 그 예술을 딛고 여하한(도의) 경지에 이를 때 비로서 훌륭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지요. 이 모두가 지금으로부터 수백년 혹은 수천년전에 있어던 생각인지라 다소 그 효용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실련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사진을 만들고 가르키면서 느낀점은 지금도 위의 예과 그다지 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 지금 이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게되는 것이괴, 이 기술의 연마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쉬운일은 아닙니다. 매년 새로운 사진적인 기술과 방법이 세계사진계에 소개되고 있습니다마는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모든 기술은 다 알 수는 없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께서 사진을 대하시면서 나름대로의 목적설정을 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사진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이 단순하고 원초적인 질문을 끝내지 않으시고 카메라를 둘러메신다면,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시련다면, 그분은 위에서 전제한 세개의 카테고리중 취미생활자의 범주에 자신을 위치시켜야 할 것입니다. 다시말하자면 여가를 선용하기위해 또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사진을 이용하고 계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사진을 하는 부류들중 이분들이 가장 편안하고 즐거우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들은 아무리 오랫동안 사진기를 매고 다니셔도 언제나 바깥의 모습을 적당히 사진적으로 옮기는 일 이외에는 어렵다고 단정할수가 있습니다. 필요로하는 것이 내용이든 형식이든 그에 관계없이 스스로의 작업 목적을 설정하시고 그에 따르는 사고의 상을 늘 의식속에 지니고 있거나 지니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예술은 그의 도구가 될수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여러분들께 서는 부디 카메라를 가지고 무너가 그럴듯하거나 훌륭한 풍광을 노려보는, 그런 힘들어간 자세를 취하시기 보다는, 이 도구를 통해서 주변의 이야기나 0黴탔?일기 또는 가족의 일상사를 담담하게 서술하는 그런 태도를 취하시기를 권합니다.
절대로 여러분들은 사진을 마치 점령해야하는 어떤 고지로 생각하시지 마시고, 늘 소유하고 다니시는 필기도구나 생각을 펼쳐보이는 노트라고 여겨주시라는 것이지요. 또 어떠한 경우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같이 흡족스러운 어떤 것을 생산하는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깨달아 주셨으면 싶습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카메라를 메고 짬짬히 시간을 내어, 온 힘을 기울여, 찍고 찍고 또 찍으신다해도 그저 여러분들은 여전히 어떤 틀안에서 헤메고 계실 것입니다. 혹 재수?가 좋아 그럴듯한 사진 몇장을 만드셨다해서 주변 사람들이 잠시는 박수 치실런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그냥 그런것이고, 어쩌면, 진정으로 여러분들이 사진을 통해 하셔야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사는 모습을 기록하는 것이괴, 그를 통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재해석 하는데 일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들어 사진공업은 눈부신 비약을 이루었습니다. 특히나 카메라 부분에 있어서의 성장은 지금 우리의 문명이 발달한 그 이상으로 발전되었다고 생각되어지는데, 이러한 발전으로 특이할 만한 일은 카메라의 구조가 매우 편리해지고 간단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에(불과 20여년전에 ) 공원이나 유원지에서 카메라를 목에 메고 놀러온 사람들에게 사진찍기를 요청하던 그런 사진사가 있던 시절만해도 사진을 찍는다는 것 자체가 기술이요, 자랑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노출을 계산할 줄알아야했으며, 핀트를 일일이 손으로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린아이들뿐 만이아니라, 심지어는 원숭이나 개들조차 카메라의 셧터를 누룰 수 있을정도이고, 그렇게 눌리워진 셧터는 그것으로서 선명하고 맑은 사진을 만들어내는 모든 기술적 조건을 갖춘것과 다르지않은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 여러분들께서 가지고 계시는 카메라의 절반정도는 그럴 것이라 믿습니다. 이러한 공업의 발달은 따라서 근래에 들어 이상한 현상을 야기시켰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께서도 이미 몇번이고 경험하셨겠지만)그것은 사진을 다소나마 공부 하거나 관심을 갖는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더욱 발달된 간편해진 카메라보다는, 수동으로 그러니까 일일이 손과 경험을 가지고 작동시켜야하는 카메라가 좀더 수준높은 도구이고 이처럼 복잡한 도구로 작업을 해야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있다고 생각하는 듯 싶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카메라, 예컨데 라이카M6와 같은 비싸고 손을로 작동되는 카메라를 사신 분들은 실제로 그 카메라를 자주 사용하시기 보다는 자주 닦고 어루만지시는데 시간을 소비하시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싼 값도 값이려니와 무엇보다도 작동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손쉽게 들고 작업하게 되지않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러한 카메라들은 작업을 위한 도구라기 보다는 보이는 도구로 전략하게 마련입니다. 이상하지 않으셔요? 모순된다고 생각하지않으셔요?
이러한 모순된 생각에 대한 답을 우리는 자주 하는 장기나 바둑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잘 알 수가 있는데, 이 게임의 도구는 매우 단순합니다. 오직 검은 돌과 흰돌 그리고 넓은 판위에 가로 세로로 줄만이 그어진 그위에서 사람들은 때로 인생을 논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주를 논하기도 합니다. 즉, 도구의 간편성이 바로 게임의 간편성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아무리 카메라의 메카니즘이 단순하다고 하더라도 그 도구를 이용하여 무엇을 생산해내는냐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깊은 사고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카메라와 지적 생산물인 사진과의 알레고리가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하셔야하는 사진적 생산활동 역시 이처럼 단순한 도구인 카메라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엮어내야하는 것은, 바로 지금 여러분들께서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지, 그리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표현을 위해 경험을 축적하고 다듬어오신 그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종종 사진의 가장 원천적인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차적인 소재가 자연일 수도 있고, 건축물일 수도 있기는 합니다마는 결과적으로 사진이 표현해내는 포괄적인 의미의 끝은 사람사는 것에 대한 작가 나름대로의 해석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들리실지 모릅니다마는 사진을 가지고 너무 무거운, 혹은 아름답다고하는 경관에만 매달리지마시고 오히려 주변의 사람사는 모습으로부터 시작하시면, 이를 통해 다듬어진 관찰과 학습이 시간이 지난후에는 더욱 깊은 삶의 해석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진의 작업이 진행 될 때에야 비로서 오랫동안 사진을 가지고 씨름을 하고, 학습해 온 자체가 후회되지 않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만일 그렇치 않다면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기술적인 약간의 지식과 오랜 여행으로 얻어진 건강?이외에는 아무런 소득도 없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아! 만일 제가 이런 식으로 사진을 지금까지 해왔다면 저는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구요?.....
자!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진에 대한 것을 사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다 이야기 할 수없는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지요. 무엇인들 그렇치않겠어요. 하지만 나름대로 결론지어본다면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어떤 것을 인화지위에 옮기는 과정만이 사진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속에 담겨져있는 일련의 생각들을 밖으로 표현해 내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서 부단히 스스로의 의식에 원하는 만큼의 학습을 부여해가는 과정이 바로 사진하는 행위가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사진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그리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 그리움이란, 의식속에서 만들어진 상이고, 우리 인간은 이러한 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상상할 수가 있으며, 따라서 그 상상의 외현화가 바로 사진의 중심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저는 지금 여러분들이 이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저의 부탁에 의해 입을 벌리신 것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하지않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저의 생각속에서 한번도 뵌일이 없는 여러분들을 상상할 수가 있고, 또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러한 여러분들과 내심의 소통을 할 수 있으며, 어쩌면 이러한 저의 상상을 언제고 사진으로 표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체적인 여러분들의 모습을 통해서건 아니면 저의 자화상을 통해서건 말입니다.
사진에 대한 열정 하나로 이 곳까지 오셔서 이렇게 관심을 기울리고 계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이제 여러분들께서는 지금까지 사용하고 계시던 언어와는 너무도 다르고 신비한 무엇인가를 '봄'으로서 이해하고 그 이해를 전달 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 하나를 더 소유하실 준비가 되신 것입니다. 다만 영어의 공부가 그렇고 독일어의 공부가 그러한 것처럼, 그 과정이 매우 어렵고 지독히도 난해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들은 막 성문종합영어를 시작하신 정도라는 것을 상기하신다면 그다지 고통스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사진적 공부가 질이 낮다는 뜻이 아니라, 어려운 외국어 공부를 시작 했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