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정情
박 시 윤
그날도 오빠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고 있었다.
“저놈은 뭘 먹여도 때깔이 안나. 딴 집 아들처럼 밥살이라도 올라주면 얼마나 좋겠노! 저래 약해빠져서 종손 노릇 제대로 하겠나. 밥을 먹을 때는 여유롭게 무게를 잡고 먹어야 양반의 기품이 살아나는 기라. 서둘러서도 아니 되고 너무 늦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 밥의 예절인데, 퍼뜩 고개 들지 못 하것나.”
밥의 예절을 삶의 숙제처럼 꼿꼿이 지켜내려는 아버지가 밥상 앞에서 지청구를 하신다. 생쌀처럼 바싹 마른 오빠는 먹는 것에 비해 쉽게 살이 불지 않았다. 잔병치례로 코피를 일삼아 쏟는가 하면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아 남한테 맞고 오는 일이 잦았다. 흔히 말하는 왕따였다. 오빠는 5대 종손으로 태어나 누구보다 크고 화려해서 훗날 아버지의 제사상 정도는 거뜬히 차려 올려야 하는 자리에 있었음에도, 늘 비실대며 축 처져 있었다. 그런 오빠가 측은한 탓일까, 아버지는 늘 오빠를 나무라면서도 우리들 몰래 오빠의 그릇에 밥 한 술씩 더 얹어주곤 하셨다.
그 해 늦봄, 가뭄이 유난히도 심했다. 논을 이웃하여 흘러가던 심장과도 같던 큰 강이 바닥을 드러냈고, 목마름에 허덕이며 쩍쩍 금이 갔다. 턱턱 숨이 막히던 더위는 푸르던 나무들까지 쓰러지게 했다. 논바닥이 바싹바싹 타 들어갈 무렵 아버지는 모가 말라 죽을까 봐 집에도 오지 않으셨다. 그나마 조금의 물이 남아있는 인근 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서로 자기 논에 물을 끌어 대겠다는 어른들의 멱살잡이가 있던 밤, 오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개구리가 미친 듯이 울고, 밤 매미가 눈치 없이 울어 댈 때 어머니의 가슴 또한 가뭄 진 논처럼 타들어 갔다.
어머니는 나를 앞세워 오빠를 찾아 나섰다. 오빠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 구석에 책가방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 오빠의 흔적은 묘연했다. 경지정리가 한창이던 그 시절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터졌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어린이 유괴 사망사건이 있던 무렵이었다. 마을사람들은 간간히 ‘낯선 사람을 보았다’ ‘오빠가 유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말들을 뱉어댔다.
4남매 중 유독 아버지를 따랐던 오빠다. 아버지의 취기가 싫고 잔소리가 싫어 아버지 곁에 다가설 수 없을 때, 오빠는 물기 서린 밥풀처럼 끈적하게 아버지 곁에 붙어 다녔다. 약해빠진 놈이라 잔소리를 들어도 아버지와 겸상을 하고, 잠을 잤던 오빠였다. 아버지가 잠이 든 머리맡엔 늘 물 한 주전자씩 떠다 놓곤 하던 오빠는 누구보다 아버지의 목마름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뜬눈으로 밤을 새운 어머니가 부엌 아궁이 앞에서 꺼억꺼억 우셨다. 가마솥 뚜껑이 열리고 보얀 밥이 김을 올리며 어머니의 시야를 흐려 놓았다. 밥을 뜨던 어머니가 훔치는 눈물의 양은 끓어 넘치는 밥물보다 많았으리라. ‘아직도 오빠가 돌아오지 않았구나.’ 나도 어머니를 따라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한참을 울던 어머니는 밥 한 대접을 꾹꾹 눌러 담고는 아랫목 담요 아래 묻었다.
안방에 있어야 할 아버지도 없었다. 꼭두새벽부터 어디를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마당 귀퉁이 아버지의 자전거 뒷자리가 싸늘히 식고 있었다. 늘 밉다 해도 자전거의 뒷자리는 오빠의 자리였다.
한참 시간이 지났을까.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아버지가 등에 오빠를 업고 다급히 달려왔다. “물! 물 가져 온나! 퍼뜩!” 사라졌던 오빠다. 식은 밥처럼 하얗게 핏기가 없는 오빠를 눕히고 아버지가 볼을 때리며 바늘로 열손가락을 땄고, 그제야 오빠가 눈을 떴다. 가뭄에 시들어가는 어린 모처럼 오빠도 시들어 있었다. 살포시 눈을 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며칠을 병원에서 잠만 잤다.
오빠가 발견된 곳은 논두렁이었다. 밤새 어른들이 논물로 멱살잡이를 할 때 오빠는 작은 체구로 다른 논으로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물꼬를 차단하고, 수로를 따라 몇 개의 논을 지나 가장 아래에 위치한 우리 논까지 물을 끌고 왔다. 그리고는 우리 논 물꼬를 트고 그 큰 논 가득 물을 채웠다. 혹여 다른 사람이 우리 논의 물꼬를 막을까 봐 밤을 새워 논을 지키다가 자신도 모르게 의식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수액을 꽂은 오빠의 가뭄 진 몸에도 촉촉이 물이 들어차고 있었다. 어머니는 보얀 밥물을 오빠의 입에 흘려 넣었다. 혈색이 돌아온 오빠는 새파랗게 키를 키우는 모가 되어 아버지의 자전거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도 오빠는 밥그릇에 달라붙은 밥풀같이 아버지 뒤에 달라붙어 있었다.
무수히 많은 날을 아버지와 겸상을 한 오빠는 그날도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밥그릇 제일 첫술을 오빠의 밥그릇에 올려 주었다. 머쓱하게 쳐다보던 오빠의 입 속으로 다시 폭폭 밥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하루하루 오빠는 물오른 청년으로 자라가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가 말없이 빈속으로 일어났다. 항상 먹고 난 밥그릇은 깨끗해야 한다며 한 톨의 밥알도 용납지 않던 아버지. 아버지의 논밭을 헤집고 다니던 청춘이 낯선 종이 위로 꾹꾹 붉은 도장밥을 남겼다. 아버지는 그렇게 친구의 사업 보증을 섰고 결국 모든 전답을 남의 손에 넘겨야 했다.
모의 끝에 나락이 알을 키울 무렵, 오빠는 여전히 아버지의 물주전자 채우기에 신경을 썼다. 며칠 동안 곡기를 끊은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봉해버린 봉투의 입구처럼. 붉은 도장밥을 맛있게 찍어대던 그날처럼 오빠는 아버지가 누워있던 방을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며 아버지의 말벗이 되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아버지 곁에서 오빠는 그렇게 물이 올랐다. 먹는 듯 마는 듯 생명을 키우는 물처럼.
당신 죽으면 제사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 달라고 취기가 오르면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요즘은 물 한 그릇 정성스레 올려주면 그만이라 하신다. 당신의 곁에서 늘 잔잔한 물결처럼, 좀처럼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오빠가 고마운 건지 장손의 손을 부여잡고 말없이 당부하신다. 오래토록 마르지 않는 샘처럼 부자지간의 보이지 않는 정 또한 서로의 가슴에 은근히 스며들어 작은 샘을 이루었나 보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물이 보약이다. 지금 아버지 곁에서 늘 아버지의 안색을 살피며 효도하는 오빠 내외가 고맙다.
아버지 실수로 지금은 남의 소유가 된 땅이지만 올해도 오빠가 질펀히 누워 물을 지켰던 논두렁의 벼는 잘 익어 가는지 참 궁금한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