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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큰 스님 첫 번째 방문 – 제자의 토굴 터에 대해 최대의 평가
그리고 5월 30일 하동에 있는 우리 토굴에 오셨다. 당시 나는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에 있는 시골 집 한 칸을 빌려 토굴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큰스님을 모실 형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구봉사에 부탁하여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셨다. 큰스님은 아무데서나 음식을 드시지 않기 때문에 구봉사에서는 채식을 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수 있었다.
당시 앞으로 수행 도량으로 쓰기 위해 땅을 구입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큰스님을 모시고 그 터를 보러 가기로 했다. 지금은 차길이 나 있지만 당시만 해도 비포장인 흙길의 좁은 산길을 걸어서 힘들게 올라가 터에 다다랐다. 사실 우리나이로 77살이신 큰스님에게는 아주 힘든 산행이었지만 마다하시지 않고 함께 가 주셨다.
“이런 자리는 도시락 싸가지고 다녀도 찾기 어렵다.”
아주 극찬을 해주셨다. 내 나름대로 우선 작은 토굴과 차밭을 일군 뒤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자리 잡게 되면 집중적으로 수행에 들어가기 위해 마련한 터가 좋은 터라고 해서 마음속으로 정말 기뻤다.
이 도량을 만나게 된 동기는 특이하다. 내원사 선방에서 결제수행 중에 여러 가지 경계가 나타났는데, 결제기간 중에는 물어볼 곳이 없었다. 마침 같이 수행하던 스님께서 지리산에 수행력이 깊은 친척스님이 계시니 결제가 끝나면 함께 가보자고 했다. 결제가 끝난 뒤 지리산 악양이란 곳을 왔는데 마치 어머니 품속 같은 느낌이 드는 산자락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마침 시골 허름한 빈집이 있어 빌려서 산에 올라가 캐온 황토로 쥐구멍을 막고 살았다.
해제 후 함께 온 비구니 스님의 친척 스님께서는 이곳 지리산에 많은 명당 터를 보러 다녔다. 우리가 이곳 금선암 터에 왔을 때, 이 터의 주인 스님께서
“어? 오늘은 터가 왜 이러지?”
하시며 터 정상 쪽을 바라보시며 합장을 하셨다. 나는 ‘명당 터에 오면 이렇게 합장을 하는 것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합장을 하였다. 그랬더니 바로 백회를 통해 전봇대 크기의 통로가 생기면서 밝은 광명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다른 분들은 이 터 여러 곳을 둘러보러 다니는데 나는 ‘여기가 명당이라는데 좌선을 좀 하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풀숲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잠시 앉아 있으니 단전에 황금 달이 생기더니 황금 달 속에 산삼이 걸렸다. 그러더니 “너로 하여금 현몽케 하리라!” 하는 소리가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신기한 일도 다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경계에 집착하면 마가 된다는 「선종어록」을 봐왔기에 그 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뒤 정말 꿈을 꾸었다. 윤기 나는 회색 코끼리 두 마리가 나타났는데 아버지 코끼리가 앞장서 가면서 철부지 아들 코끼리가 잘 따라 오는지 뒤돌아보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들 코끼리가 촐랑거리며 따라오자 아버지 코끼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앞장서갔다. 그렇게 세 번을 돌아보셨는데 잘 따라오자 안심하고 앞장서 가는 꿈이었다. ‘꿈이란 꿈 일뿐이다.’고 생각하며 마음에 두지 않았다. 훗날 이 터가 내 소유가 되었을 때 하늘이 법계에서 꿈에 보여주시고 이 터를 주셨다는 것을 알았다.
내원사에서 선방결제를 마치고 해제비로 받은 총 재산 5만원과 걸망 하나만 메고 이곳 지리산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리에서 6년 동안 탁발하여 알뜰히 정기적금을 넣고 열심히 차를 만들어 저축한 자금으로 내가 꿈에서 바라던 땅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 땅을 구입하고 훗날 열심히 일하며 금선암 토굴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지리산에 들어 와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세워진 서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좋은 터에 불사를 하여 훌륭한 선지식들에게 지도받으며 무문관을 겸한 수행 도량을 이루어, 도반들과 더불어 이생 안 난 셈 치고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불조의 혜명을 이어 만 중생을 이롭게 하리라!’
‘업력보다 원력이 커야 큰일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이런 큰 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참고 인욕 할 수 있었고, 그런 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부처님 가피도 입을 수 있었다. 그런 증과는 땅을 구입할 때부터 이미 나타났다. 내가 하동 포교당에 잠깐 머무르며 기도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보살님 한 분이 오시더니 당신 기도도 올리고 싶다고 하였다. 기도를 해 가는 과정에서 당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내가 수행 터를 구입하기 위해 정기적금을 넣고 있다는 애기도 나왔다.
“땅이라는 것은 언제 팔려버릴 지도 모르고, 또 땅값도 얼마나 오를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금 만기가 된 뒤 몇 년 뒤에 사는 것보다 대출을 받아서 사고 그 돈을 갚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듣고 보니 세상물정을 잘 아는 보살의 말이 백번 옳았다. 문제는 은행에 잡힐 담보 하나 없고 걸망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 은행에서 돈을 대출해 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보살은 남편에게 적금대출을 위한 보증을 서 달라고 부탁하여 그 덕 분에 적금대출을 받아 미리 땅을 사서 그곳을 일구며 대출금을 갚아갈 수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은 내가 불사를 하는 목적이 앞에서 본원력 때문이라는 것을 아신 부처님의 가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큰 스님을 모신 뒤 바로 그 해인 2000년부터 큰스님이 좋은 자리라고 짚어주신 터에 거리에서 탁발을 하고 차를 만들어 저축한 돈 만큼씩 불사를 시작 하였다. 토목공사와 건축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이곳 불사를 이룩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시작했다.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찻길 없는 좁은 흙길을 포크레인이 올라와 터 작업을 할 때 생긴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 수없이 반복한 시행착오, 생전 처음 해보는 토목공사와 건축 같은 힘든 노역이 이어졌지만 정말 치열하게 일했다. 황무지를 개척하는 일이였으니....
그때 마을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불도저였다. “불도저 스님” “불도저 스님”이라고 해서, “불도저 스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찻길 없는 길을 밀고 올라가 길 없는 길을 만들어낸 스님이라 하여 붙여진 별명이란다.
토목공사 때 포크레인 기사가 담을 쌓으면서 시골 논둑이나 쌓아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일을 하는 바람에 여름장마철에 담이 무너져 내려 버렸다. 그때부터 토목공사 공부가 시작되었다. 담도 아무나 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주변에 큰 사찰인 화엄사로 달려갔다. 담을 쌓아 놓은 것이 달랐다. 종무소에 가서 물어보니 화엄사의 모든 돌담은 인간문화재가 담을 쌓는다는 것이다. 2000년 당시 인간문화재 하루 일당이 20만 원이였다. 돈은 걱정해야 했지만 담은 잘 무너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이 쌓여진 돌담이었기에! 담을 다시 쌓으려고 하니 돌이 모자라 주변에 돌 있는 밭주인 허락을 얻어 돌을 실어 나르는데 400m 근처에 절 비구 스님께서 반출허가 없이 돌을 실어 나른다고 면사무소 . 경찰서 . 군청 기자에게 신고를 했다. 면사무소에서 나와 신고가 들어 왔으니 돌을 제자리로 가져다 놓으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포크레인과 차를 불러 제자리로 가져다놓았다.
신고한 스님께서 자기 절에서 400m 밖에 안 떨어진 곳에다 절을 짓고 있으니 화가 나서 심장병이 걸릴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둘 중에 하나가 죽어나가야 된다고 한다.
그 구업으로 비구 스님께서는 내가 이 도량으로 이사 들어오던 날 새벽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돌아가신 이후 그 스님 절 쪽을 바라보게 되면 그 스님이 떠오르며 들려오는 소리가 ‘두고 보자!’ ‘두고 보자! 하는 소리와 함께 분노에 찬 기운이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나모아미따불” 염불을 해주며 극락왕생을 기원해주었다. 그렇다고 바로 천도가 되어 편안해진 것 같지는 않았다.
4) 큰스님의 두 번째 방문
돈 되는 대로 우선 합판으로 조립형태의 집을 지어 도량을 정리 해가며 바쁘게 지내느라 관정 큰스님께서 한국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법회에 동참할 마음을 못 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거제도 오송암 스님께서 전화로 관정 큰스님께서 우리 절에 와보고 싶어 하신다고 하셨다. 신도가 없어 법회를 주관할 입장도 못되고 해서 큰스님을 모실생각조차 못하고 있는데 당신께서 손수 오시겠다는 것이다.
2002년 7월 3일 오송암 스님께서 큰스님을 모시고 통(역)거사님과 함께 오셨다. 처음 길도 없는 곳에 땅만 사놓은 상태에서 와보신 큰스님께서 두 번째 방문해 주신 것이다. 오송암 스님께서는 다음날 모시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다. 큰스님께서는 제가 신도 한 명도 없이 불사를 하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전 세계를 돌아다녀 봤지만 신도 도움 없이 불사를 하는 것은 처음 본다.”
큰스님께서 오셨는데 공양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통역거사님께 물으니 당신이 중국식으로 준비하겠다고 해서 나는 보조만 했다. 큰스님께서 통역거사님께 번거롭게 따로 상을 보지 말고 한 상에서 다 같이 먹자 하신다며 상을 하나만 보라고 했다. 그렇게 큰스님께서는 격식을 차리지 않는 소탈한 분이셨다. 지금 생각하건데 큰스님께서는 황무지에 처음 터를 닦아 불사를 하는 이곳 터를 법력으로 정화해주시려고 오셔서 하룻밤을 묵고 가시지 않으셨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신기하게도 큰스님이 오셨다 가신 뒤, 언제부턴가 이곳 도량불사를 방해하다 돌아가신 스님의 ‘두고 보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5) 불사 때문에 흘러간 15년, 이제 시간이 없다.
그리고 나의 불사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불사는 정말 험난한 길 이었다. 내가 이 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힘에 겨워 벌써 튕겨나가지 않았겠나 싶다. 오솔길 하나 있는 터를 사서 이루어 나아가야 했으니!
스님이라 하지만 육신은 여자의 몸이니 육신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몸 상태가 좋을 때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원력만 있으면 몸은 따라온다고 몸을 혹사 시키고, 몸이 혹사당해 지쳐 가누지 못하면 이 몸으로 어덯게 원력을 이룰까 좌절하고,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희망과 절망을 수없이 오갈 때마다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고뇌하는가?’하고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원력이 왜 그대에게 고뇌가 되어야 하는가? 원력은 원력일 뿐 고뇌의 대상도 아니고 원력은 마음이 하는 것이지 몸이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고는 몸이 아프면 원력을 못 이룰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몸과 마음을 분리하는 수행을 해나갔다.
처음부터 감당하기 힘들던 큰 틀의 구상을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분수에 맞게 조금씩 이루겠다는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 졌다.
어려운 상황 현실에 직면해 고통을 느끼는 것은 그러한 상황을 통해 수행해야 할 것이 아직 남아있어 그 상황을 맞이하는 것이다. 경계에 부딪칠 때 표면에 떠오르는 생각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면 그에 따른 감정을 정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서로가 서로를 흔들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앙금이 떠오르지 않으면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트라우마(상처)가 있는지 알지 못할 때도 있다. 번뇌가 올라올 때 알아차리고 정화할 수 있기 때문에 번뇌 즉 보리라 하는 것이다.
팔만사천 가지 번뇌의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결국에 고가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작은 마음인 에고의 생존법칙이다. 우리는 늘 작은 마음에 붙들린다. 많은 생을 거듭하면서 생긴 상카라는 조건에 의해서 드러나면 그때가 바로 정화 할 때임을 알아차리고 그 일어난 생각에 혐오도 증오도 자학도 회피도, 그 어떠한 생각도 따라가지 않고 평정심으로 바라보면 “상카라(업)는 무상하여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카라들이 일어나 뿌리 뽑힐 때, 그 소멸이 행복이로다.” 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염불수행이 되었던 그 어떤 수행을 하든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바탕이 되어야함을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보왕삼매론의 말씀이 생각난다.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원력을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을 수행으로 삼고 보살행으로써 보리심이 증장되어 가는 것인데 뒤바뀐 생각 속에 살아가니 진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탐 . 진 . 치 삼독이 멸할 때까지 마음은 고통 속에 사는 것이다.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하는 어느 노래 가사처럼.......
관정 큰스님께 절을 올리면 누구에게나 해주시는 말씀이 계셨다.
“복과 지혜가 구족하시길 기원합니다.”
지혜보다 복덕이 앞에 있는 것을 보면 복덕자량이 증장되지 않으면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갈 수 없기에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다음 단계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는 티베트 불교 일화가 생각난다.
‘그렇게 뒤돌아볼 틈도 없이 뛰어온 시간들 속에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죽도록 일은 해봤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죽을 힘을 다해 수행은 해보지 못했다. 요즈음은 이런 생각을 하며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그렇다 이제는 더 이상 한눈을 팔 시간이 없다. 이제는 그동안 공부했던 것을 정리하여 조도 수행법 속에 늘 주 수행법으로 생각 되었던 나모아미따불 염불수행에 힘을 가해야 한다. 지구환경도 생각하며 우리 다함께 인간정토를 구현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공부해온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관정 큰스님의 정토선 염불을 하던 한 스님이 천안이 열리면서 몰려오는 엄청난 변화를 감당하지 못해 어쩔 줄 모르던 것을 보고 내심 크게 겁을 먹은 적이 있었고, 신통이 먼저 열리면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제 ‘알아차림’ 공부를 통해 헛된 모습에 끌려가지 않을 만큼 기초를 닦은 것은 앞으로 수행하는데 큰 주춧돌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정토선 염불은 → 자성염불 → 일념 → 무념이라는 단계가 있고, 또 각 단계를 스스로 체크할 수 있다는 것이 뛰어나고 안전한 것이 장점이다. 큰 스님에게 들었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마음을 넘어서 이제 내가 그런 단계들을 직접 체득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가장 큰 홍법임을 믿는다. 관정 스님의 법을 전하는 전도사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깨달아 본보기가 되는 것이 큰스님에게 대한 보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함께 자연청정 생명청정 광명으로 영원한 빛이 되어
이 사바가 바로 인간정토이기를 발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지구사랑 생명사랑!
나의평화 세계평화 나모아미따불~!!!
지리산 금선암에서 굉천(2015년 3월)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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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무량공덕 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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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