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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계시록!(19) : 위로의 사명으로 살라!”
+ 본 문 : 요한계시록 10장 1절 - 11절 (신약 408쪽)
1 내가 또 보니,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3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4 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5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아멘!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0장은, 요한계시록 7장과 마찬가지로 삽입된 장입니다.
그래서 7장과 10장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7장에서 일곱 인에 대한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말씀을 주신 것이라면,10장은 일곱 나팔을 설명하시다가 삽입 된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두 장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7장이 우리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이 땅에서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시고, 기쁨을 주실 그 날이 있다는 소망을 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0장은 그 은혜를 경험한 우리가, 받은 은혜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사명을 회복하고,
그 사명을 가지고 다시 한 번 더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라는, 힘과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11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4장 1절과 짝을 이룹니다. “이 일 후에 내가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아멘! -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극심한 고통 중에 있을 때 이리로 올라오라.
땅에서 절망만 보지 말고 천상 교회의 아름다운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을 담아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0장에서는 다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조화를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요한계시록 4장에서 천상교회로 올라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7장의 천국의 자리가,
아무리 은혜롭고 위로가 되고 행복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 위에만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위로를 받았니? 은혜를 경험했니? 치유를 체험했니?
그래 위로 받았고, 은혜 받았고, 치유 받는 체험을 했으면, 이제 다시 세상으로 나가 사명 감당해라.”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0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지금 예배드리다가,
은혜를 받고, 사랑을 받고, 위로와 격려를 받고, 치유를 받았으면 세상으로 나가서 나누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 앞에 올라와 은혜를 받았고, 사랑을 받았고, 위로와 격려를 받았고, 치유 받았으면,
세상으로 내려가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올라옴과 내려감이 조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제 다시 저 세상으로 내려가서 네 사명을 감당하라. 말씀을 선포하라.” 고 하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참으로 지키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아무리 계산하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초대교회 성도들 입장에서는, 이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무장한 로마 군인들을 힘없는 교회가 무슨 수로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절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길 수 없다고 절망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이길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를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충돌하는 것이 인간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국 누구의,
생각이 옳았는지,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생각이 옳았는지 사람의 생각이 옳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지나온 2천여 년의 역사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옳으셨습니다.
핍박당하고 숨어 다니던 연약한 교회가, 당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던 대 로마제국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믿는다면, 부정적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 예수를 믿는 너에게 아직도 희망이 있다.” 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생각으로 덧입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을 바라볼 때, 이 말씀이 너무나 큰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됩니다.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은 로마의 압제 앞에 절망하던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전혀 희망이 없습니다. 이미 기독교의 이미지는 개독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영향력을 잃었습니다.
목회자들의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사건은 연일 보도되고 있고, 하나 되어야 할 교회는 싸웁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그 모습들은 고스란히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습니다. 교회안의 성도들도 연약합니다.
죄 사함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십자가의 복음과 영생과 천국을 가져다주는 부활의 복음을 믿기보다는,
우선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이 더 중요하기에, 예배도, 기도도, 말씀이 없는 나약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건들기만 해도 너무나 쉽게 시험 들고,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고, 불신앙의 세계로 빠지고 맙니다.
이런 우리 한국교회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예수 복음이 어떻게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끝났다. 안 된다. 아무런 희망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하소연하는 기도를 드리는, 그런 저에게, 예수님은 책망을 하시면서,
“그게 무슨 소리냐? 희망이 있다. 내 옆구리가 터져 흐르는 물과 피로 세워진 내 교회가 아니냐?
내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죄 값을 대신 치르고 구원한 성도들이 아니냐? 내가 쉽게 포기할 것 같으냐?
내가 포기하지 않았으니 아직도 희망이 있다. 그러므로 너는 네 자리에서 일어나 너의 사명을 감당하라.
그러면 이길 수 있다. 그러면 이길 수 있다.” - 우리는 지금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10장을 통해,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 비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9절입니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으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오늘 본문 11절에서 우리에게 감당하라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비법은 말씀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 크게 깨달았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우리교회가 여기까지 부흥하고 성장하게 된,
밑바탕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심령부흥을 위한 말씀사경회,
말씀부흥회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말씀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말씀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회에서 심령부흥을 위한 말씀사경회, 말씀부흥회, 성경공부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심령부흥을 위한 말씀사경회, 말씀부흥회와 성경공부의 자리를 마련해도 성도들이 모이지를 않습니다.
공 예배인 주일 오후예배, 수요예배마저도 반 토막 났습니다. 주일 낮 예배 말씀이 말씀의 전부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씀을 먹지 못한 성도들이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무슨 기적이 일어나겠습니까?
무슨 축복을 받겠습니까? 어떻게 세상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의 살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정을 저지르고, 사고를 치고, 서로 싸우고, 비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험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말씀을 안 먹으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 제가 허공에다 대고 설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저 자신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자리를 둘러보십시오.
지금 다 어디 갔습니까? 지금 다 어디 있을까요? 이 현실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을 말씀이 9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준엄한 하나님의 말씀 9절을 다함께 봉독합니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시가 이르되 갖다 먹으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하나님의 말씀을 안 먹으면 목사라도, 장로라도, 권사라도, 집사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목사들이 왜 사고를 칩니까? 말씀을 안 먹으니까 그렇습니다. 장로 때문에 시끄러운 교회가 있습니다.
그건 장로를 잘못 뽑은 게 아닙니다. 적어도 성도들이 장로로 뽑아 줄 때는, 그때는 잘 했습니다.
그런데 장로가 된 후에 말씀을 먹지 않으니까 자동으로 기도도 안 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없는 장로,
사고 칠 수밖에 없고, 교회 안에서 목에 힘주고, 그래도 안 알아주면 교회를 쌈판 만드는 겁니다.
안수집사 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먹고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절대로 교회에 불만 없습니다.
직분 받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래 믿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말씀을 먹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영을 받고, 그 능력으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먹으라.” 는 말씀에 요한이 순종했더니,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로, 순종하여 그 말씀을 먹었더니 말씀이 입에 꿀과 같이 달았습니다.
10절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아멘!
우리가 이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신앙생활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꿀같이 달다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까? 언제였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꿀 송이 같이 달디 답니까?
시편 119편 105절의 꿀 같은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아멘!
여러분! 요즘처럼 캄캄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정말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 발의 등이 되고 빛이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라는 시편 119편 103절,
말씀이 내게 체험되어질 때에 비로소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빛이니이다.” 가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뻐하며 예배를 오래 드려도, 하나님의 말씀이 꿀 같이 단 것을 체험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등불이 되고, 빛이 되는 능력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도 같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강권합니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아멘입니까?
이 말씀의 순서를 보면, 가는 것이 먼저입니까? 먹는 것이 먼저입니까? 당연히 먹는 것이 먼저입니다.
먼저 내가 말씀을 먹고, 그 말씀이 내 안에서 꿀 송이처럼 달 때, 사명을 가지고 가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파하는 선지자 노릇, 복음 전하는 전도자의 노릇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고, 찬양하는 것도 중요하고, 심지어 말씀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말씀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밥을 먹어야 힘을 얻고, 무슨 일인가 할 수 있듯이 영의 양식인 말씀을 먼저 먹어야 합니다.
인간은 믿을만한 존재가 못 됩니다. 말씀을 먹지 않고 말씀을 소홀히 하는 순간 끝장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말씀에 은혜 받았습니다.” 하면서 기뻐하고 제게 힘을 주지만,
내가 먼저 말씀 안 먹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않는 순간 모든 것은 무너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사실 예레미야,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인생에 개입하시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례미야 1장 6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아멘!
이 말씀에서 내가 깨달은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에게 말씀이 임하면,
그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슬프게 합니다. 나는 이렇게 어수룩한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감당합니까?
예레미야가 딱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레미야에게 한 가지 처방을 내려주십니다.
예례미야 1장 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아멘! 이렇게 말씀을 주시니 예레미야가 변했습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아멘!(렘 15:16)
이렇게 변한 예레미야는 후에 하나님께서 크게 쓰는 사역자가 되었고, 눈물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엄청난 사역자가 된 그 비결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먹으면 진짜 사역자가 됩니다. 말씀이 인생의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됩니다.
닉 부이치치를 아십니까? 팔과 다리가 없는 장애를 가진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합니다.
8살 이후로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전 세계에 희망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도 하고, 예쁜 아이도 낳았습니다.
누가 그 인생을 그렇게 가치 있게 바꾸었습니까?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 시작하니 그 인생이 변했듯이, 우리도 말씀을 먹으면 변합니다.
둘째로, 말씀을 먹었더니 입에 꿀과 같이 달았으나 그 배에서는 썼습니다.
오는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아멘!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는 그렇게 꿀같이 달고 좋았는데, 왜 배에서는 그렇게 썼을까요?
사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와서 예배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듣거나, 아니면 읽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켜 행하면 복이 있느니라.” - 복을 받기까지 지켜 행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읽거나 들은 그 말씀을 실천하고 적용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실천하다보면 쓴 맛을 봅니다.
그래서 실천하고 적용하는 순종은 어렵습니다. 받은 말씀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버겁습니다.
그래서 읽거나 들은 말씀이 소화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소화가 안 되고 배에서 쓴 말씀이지만, 순종하면 말씀의 능력이 크게 나타납니다.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을 잘 하는 순서로,
설교한다면 저는 열 번째 순서 안에도 들 자신이 없습니다. 담임목사이니까 그냥 설교하는 것이지,
우리 교회에 믿음 좋은 성도님들이 참 많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가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저도 자극을 받고 정말로 노력 많이 합니다.
성경을 읽거나 들을 때, 그 말씀이 꿀 송이 같이 달기는 쉽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달디 단 꿀송이 같은 은혜 받은 그 말씀이 배에는 쓸 만큼, 지켜 행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정말로 믿고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돈을 떼먹고 도망갔습니다.
큰 배신감 때문에 불면증이 올 수 있습니다. 고발이라도 해서 감옥에 보내면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배신한 저 불쌍한 인생은 물론 그 가족은 어떻게 되나 싶어 고민하다가 소송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용서합니다. 이것이 배에는 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이 결국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믿습니까?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날 거래처 사람과 회식자리에서 자꾸만 술을 권하더랍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인 그분이 “저는 교회를 다닙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그랬더니 거래처 사람이 “그러면 거래가 끊어질 텐데...” - 그래도 끝까지 술을 안 마셨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보호해주셔서, 하나님이 그 거래처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거래가 안 끊어졌을까요? 아닙니다. 달고 단 꿀송이 같은 말씀을 먹었더니 그 배에서는 썼습니다.
진짜로 거래처의 거래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는데 말입니다.
얼마나 낙심했겠습니까?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중국 거래처가 뚫렸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만, 이처럼 은혜 받은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그 배에서 쓴 경험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 순종에는 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 꿀송이 같은 말씀으로 은혜를 받았고,
사랑을 받았고, 위로와 격려를 받았고, 치유 받았으면,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 사명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 입에 꿀송이 같이 단 말씀의 체험으로만 살면 안 됩니다. 말씀을 삶 속에서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 말씀이 소화가 안 될 만큼 배에는 쓸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지켜 행하면, 초대 로마교회 성도님들이,
핍박과 죽음을 각오하고 순종했던 말씀의 능력이, 대제국 로마를 정복했던 것처럼 반드시 이기게 됩니다.
우리, 말씀의 능력 없이 무기력하게 살지 맙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힘냅시다. 강해집시다.
더 이상 무기력한 교회가 되지 맙시다. 더 이상 마귀에게 굴복당하고, 세상 조롱거리가 되지 맙시다.
나약한 장로가 되지 맙시다. 나약한 집사, 나약한 권사가 되지 맙시다. 나약한 성도가 되지 맙시다.
제발 강해집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제발 강해집시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강하고 담대한 우리교회와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