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플리트(Split) = 크로아티아
서기 295년,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는 은퇴를 결정한다. 로마 제국 역사상 황제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고향인 살로나(현 솔린) 근처에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한다. 바로 크로아티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스플리트다. 궁전을 짖는데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곳에서 지낸 세월은 6년이 전부였다. 그는 311년(66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로마의 통치자들은 6세기 후반까지 이 궁전을 사용했다. 7세기가 되자 수많은 피난민들이 궁전으로 몰려 오기 시작했다.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의 침략으로 살로나가 완전히 폐허로 변했기 때문이다. 당시 살로나에는 6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었다. 궁전의 성벽 안으로 들어 온 피난민들은 비로소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었다. 피난민들은 살로나로 돌아 가지 않았다. 그대로 스플리트에 주저 앉아 버린 것이다.
스플리트 관광은 리바(Riva) 거리에서 부터 시작된다. 노천 카페 앞으로는 많은 좌석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성수기에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자리에 앉기조차 힘든 곳이다. 고요한 바다와 수많은 갈매기들. 길가의 야자수 나무 아래에는 벤치까지 마련돼 있다. 잔잔한 바다와 항구를 떠나는 한 척의 유람선. 고요함의 정점을 찍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보이지 않는다. 1700년의 세월 속에 화려했던 궁전은 심하게 변형되어 버린 것이다. 조금 남은 성벽을 기둥으로 카페와 집들이 지어져 있다. 자세히 관찰해야지만 보인다. 청동문을 통해 들어 가면 바로 지하궁전(Cella)이 나온다. 황제가 사용했던 궁전의 아래층이다. 이곳은 식당과 홀, 물건을 저장하는 저장소 등 48개의 방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기념품 판매소가 자리 잡고 있다. 바로 “꽃보다 누나”에서 김자옥이 음악에 맞춰 춤추던 곳이다. 지하궁전을 나오면 포럼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포럼은 여러가지 행사 또는 회의를 하던 장소였다. 황제의 알현실(Vestibulum)은 황제가 기거하던 아파트 앞에 지은 건축물이다. 그런데 알현실 천장이 뻥 뚤려 있다. 마치 로마의 판테온 천장을 보는 듯 했다. 이곳에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카펠라로 부르는 달마치아의 민속음악이다. 사람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어떤이는 CD를 구입하기도 했다.
그린 마켓은 사과, 복숭아, 귤 등 각종 과일과 채소를 파는 재래시장이다. 채소의 종류도 다양했다. 양파, 홍당무, 파, 대파, 감자, 고구마, 브로콜리 외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채소도 많이 보인다. 모두는 아니지만, 직접 재배한 농작물을 파는 상인도 있다. 생선가게에서는 낙지, 오징어, 새우, 고등어 등 싱싱한 수산물을 판매하고 있다. 스플리트의 그린 마켓과 생선가게에서 파는 채소나 생선은 가격이 모두 저렴하다. 궁전의 북쪽 문인 금문 앞에는 그레고리 닌(Gregory of Nin) 주교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8.5m(28피트) 높이의 동상은 왼손은 성경책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르키고 있는 모습이다. 그레고리 주교는 크로아티아의 역사적 수호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닌의 주교였던 그는 926 년 크로아티아어(슬라브)를 사용해 예배를 드렸다.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당시 바티칸에서는 모든 예배는 라틴어로 들여야 한다는 지침이 있던 때였다. 이후 그레고리 주교는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됐다. 현재 그의 동상은 크로아티아의 여러 도시에 세워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중요한 동상이 스플리트에 세워진 동상이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동상의 엄지 발가락을 만지며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믿는다. 아기를 낳거나 결혼할 때도 사람들은 동상 발가락을 문지르고 문지른다. 유독 엄지 발가락만 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이유다.
이교도를 믿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의 황제 중에는 기독교인들을 가장 박해한 황제였다. 당시 동부 로마 제국을 다스리던 갈레리우스도 이교도 숭배자였다. 황제의 사위이기도 했던 갈레리우스는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을 늘 두려워 했다. 당시 로마 군인들 중에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들을 말살하자며 계속해서 황제를 부추겼다. 황제의 입장에서도 기독교들의 이교 숭배 참여 거절은 그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303년 2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인 박해를 위해 칙령을 공표한다. 모든 성경책은 압수되여 불태워지고 관직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모두 강등됐다. 또한 주교, 장로, 부제는 모두 체포되어 투옥되고 고문 당했다. 당시 고문은 불로 지지기, 채찍질 하기, 집게를 사용하는 등 모두 끔찍한 고문이었다. 후에는 배교를 장려하기도 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 성경을 내놓는 사람도 많았다. 마지막 칙령에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만 해도 사형에 처해졌다. 메소포타미아, 페니키아, 프랑스, 이집트 등 로마 제국의 대부분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이 순교했다. 그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으며 박해는 309년까지 지속됐다. 그러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된 것이다. 궁전에는 원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석관을 모신 웅장한 사원이 있었다. 7세기에 기독교인들은 황제의 석관을 부셔버리고 사원은 성당으로 개조시켰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축물 중 하나인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이다. 성 도미니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로 살로나에서 참수당한 성인이다.
글, 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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