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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 계절을 탄다. 평소엔 지극히 평범한 산이 계절에 따라 유난히 돋보이는 산이 있다. 설악산이나 지리산처럼 들꽃, 계곡, 단풍, 설경까지 갖추고 사계절 모두 아름답다면 그 산은 명산이다.
충남 금산 군북면 일대에 걸쳐 있는 보곡산은 이 땅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산이다. 밋밋하고 계곡도 없다. 하지만 딱 한번 눈부시게 빛나는 시기가 있다. 4월이다.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10월의 피날레를 장식하듯 보곡산은 산벚꽃이 하얀 폭죽을 터트리며 4월을 황홀하게 마무리한다.
5년전 4월에도 '보곡산 산꽃술래길'을 걸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 비를 맞으며 걸은 산꽃술래길은 풍경이 유난히 선명했고 비를 머금은 산꽃은 더욱 화려했던 기억이 잔상(殘像)처럼 남았다. 그 때를 못잊어 산꽃 개화시기에 맞춰 길을 떠났다.
추부 IC에서 나와 군북면쪽으로 방향을 틀어 보곡산골로 접어들면 절정을 지나고 있는 벚나무가 사열하듯 서있다.긴 벚꽃의 행렬은 여느 시골길에도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보곡산골 벚꽃은 주변의 산세와 목가적인 풍경 때문인지 시신경을 자극할만큼 아름다웠다. 아마도 이날 바람때문에 꽃비처럼 흩날려서 인지도 모른다.
보곡산밑 마을입구에 주차한뒤 안내판을 보니 '랜선으로 떠나는 비단고을 산꽃축제'를 소개하면서 4월엔 '꽃사태'가 난다고 했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솔깃했다. 보곡산골은 1천만평방미터에 달하는 전국 최대의 산벚꽃 자생군락이다. 산벚꽃 뿐만 아니라 소담스럽게 꽃을 피운 조팝나무, 산딸나무, 병꽃나무, 생강나무도 산비탈에 지천으로 깔렸다.
길 들머리엔 '오늘 여기 오길 잘했다'는 문구가 씌어진 세련된 안내판이 서있다. 그 앞을 지나면서 그런 마음이 들길 진심으로 바랬다.
우리 일행은 1코스(나비꽃길^4km), 2코스(보이네요길^7km), 3코스 (자진뱅이길^9km)중 가장 긴 자진뱅이길을 선택했다. 보곡산 산판길을 크게 한바퀴 휘돌아 걷는 코스다. 길은 의외로 한적했다. 완만한 오르막길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산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거친 동해바다의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그 바람에 꽃내음을 머금은 공기가 알싸하게 코끝을 스쳤다.
산꽃술래길은 지금은 용도폐기된 임도를 활용한 코스다.
초입의 오르막을 지나면 산중턱의 산판길은 부드럽고 고즈넉하다.
에스라인으로 이어진 산판길을 타고 걸어가면 주변 산에 산벚꽃이 폭죽처럼 펼쳐져 있어 장관을 연출한다. 길 중간 중간에 꽃으로 장식한 커다란 나무액자프레임을 세워놓은 포토존도 설치해놓았다. 생뚱맞긴 해도 금산군의 성의가 가상하다. 길에서 만나는 산뜻하게 핀 산딸나무와 병꽃나무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계절은 산의 모습도 바꾼다.
7년전 친구의 소개로 3월초에 처음 걸었던 평이하고 삭막했던 길이 4월에 이처럼 달라질 수 있는걸 보면 자연은 참 신비롭다. 사시사철 화장도 하지않은 수수한 아낙네가 4월만 되면 모처럼 화사하게 차려입고 봄나들이 나선 분위기랄까. '방창(바야흐르 화창한)' 보곡산 산꽃술래길이 그렇다.
김용택 시인은 시 방창(方暢)에서 산벚꽃에 취한 남정네의 심정을 드러냈다.
시인은 "산벚꽃 흐드러진 /저 산에 들어가 꼭꼭 숨어 / 한살림 차려 미치게 살다가 / 푸르름 다가고 빈 삭정이 되면 / 하얀 눈이 되어 그 산위에 흩날리고 싶었네"라고 노래했다. 아마도 그 산은 보곡산일터다.
산벚꽃은 서서히 지고 있었다. 한주만 지나면 보곡산자락을 하얗게 채색했던 산벚꽃도 입춘에 눈녹듯이 꽃잎을 떨구고 다시 수수한 얼굴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방창한 봄날 3시간 여 동안 그 순하고 화사한 길을 걸으면 젊은 날의 연서(戀書)처럼 계절이 떠나고 세월이 흘러도 불현듯 떠오를 것이다. 4월만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