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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처사(황정민)와 이몽학(차승원)이 대동계원이 보는 앞에서 혈전을 벌이는 장면. 정여립을 죽인 이몽학과 응징에 나선 황처사의 대결은 누구의 승리로 끝날까? |
이준익 감독이 또 한 편의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이름 하여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번 영화는 창작 시나리오는 아닙니다. 1996년 대한민국 만화문화대상 저작상을 받은 박흥용 화백의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일찌감치 원작의 영화화를 기다린 원작만화 팬들이 적임자로 이준익 감독을 손꼽았다는데, 이건 아무래도 수사(修辭) 같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원작을 5년 동안 이리저리 만지작대면서 원작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시대상을 반영한 역사물로 확장했다고 합니다. 정여립과 임진왜란의 시대인 선조 연간 조선시대의 사회상과 정치상을 풍자한 영화를 만든 것이죠.
이 영화에는 4명의 주목할 만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맹인검객 황처사(황정민), 혁명가 이몽학(차승원), 혁명가의 연인인 기생 백지(한지혜), 세도가의 서자인 견자(백성현)가 중심인물입니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정여립’과 ‘대동계’에 대한 기본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정여립은 서인으로서 이이와 성혼(成渾)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가 죽자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 편에 서면서 이이·성혼·박순(朴淳)을 비판합니다. 정여립이 신념을 바꾸자 서인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고, 선조의 눈 밖에 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합니다.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하던 정여립은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해 ‘대동계’를 조직합니다. 대동계는 신분의 제약없이 가입을 허가했으며, 보름마다 한번씩 무술훈련을 하는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다가 1587년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원을 이끌고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합니다.
정여립은 계속해서 황해도 안악, 해주, 운봉을 왕래하면서 명망가와 교유하면서 대동계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합니다. 그러나 1589년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정여립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면서 정여립은 서인들의 손에 의해 비극적인 생애를 마칩니다.
정여립은 신비한 인물입니다. 우선 그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확인되지 않습니다. 또한 대동계를 이용해 혁명을 꾀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조선 중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이른바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시초입니다. 기축옥사로 1000여 명이 죽고, 동인세력은 크게 약화됩니다. 이때 죽은 1000명은 당시 조선사회의 싱크탱크였다고 보면 됩니다. 나라의 동량주들을 몰살시켜버린 겁니다. 나라의 인재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나라꼴이 어땠겠습니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이런 시대상을 배경으로 합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포스터. |
자, 그러면 영화로 돌아와서...
황처사와 이몽학은 정여립의 동지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몽학이 혁명의 날을 앞두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정여립을 죽입니다. 이몽학은 정여립을 대신해 혁명의 깃발을 세웁니다. 그러나 정여립의 죽음을 의심하던 황처사는 이몽학을 쫓으며 이몽학의 혁명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이유가 불분명합니다.
서인의 권력가 한신균의 서자인 견자는 의지가 분명합니다. 한신균과 그의 가족이 이몽학에 의해 몰살당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견자는 황처사를 만나 이몽학을 향한 복수의 칼을 갈게 되는 것이죠. 또한 이몽학의 연인 백지는 이몽학에게 버림받고 그를 증오합니다. 두 사람의 행동은 분명하지요.
그러나 혁명을 통해 왕을 꿈꾸는 이몽학에게 역모의 깃발을 내리라는 황처사의 끈질길 주장은 좀 이상합니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있는 주장이 없습니다. ‘진정한 칼잡이는 칼 뒤에 몸을 숨기는 법’이라는 정도의 논리를 앞세워 혁명을 포기하라는 건데요, 이 점은 이 영화의 흠입니다.
아무튼 황처사와 이몽학의 쫓고 쫓기는 대결과 복수의 뜨거운 바람이 이몽학의 연인 백지를 만나는 순간, 일시에 터져버린 연애감정 사이에서 방황하는 견자의 스토리라인이 영화를 끌어갑니다. 황처사와 이몽학의 대결, 이몽학과 견자의 대결은 영화의 재미를 더해줍니다.
몇 가지 문제점...
우선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 조정대신들과 선조임금(김창완)의 기가 막힌 정치놀음 장면입니다. 이준익 감독이 지나치게 희화한 게 약간 눈에 거슬립니다. 조선왕조의 당쟁사화는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감독은 조선시대의 정치인들을 아주 처참할 정도로 무익한 인물들로 그려놓았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정치현실을 빗대어보려고 의도적으로 연출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이 조선왕조를 꿰뚫는 통찰력과 그 시대를 비판하는 철학이 부재한 상태에서 단지 정치를 풍자하기 위한 연출이었다면 조금 신중했어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 다음은 견자입니다. 견자를 보면서 ‘왕의 남자’의 이준기가 떠오르더군요. 이준기가 ‘왕의 남자’에서 왜 주목받는 인물이었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견자는 이준기의 아류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점은 이준익 감독이 무척 공을 들인 게 아닌가 하는 냄새가 풀풀 났습니다.
그렇게 보니까, 어쩐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왕의 남자2’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이 부분은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이에 대한 판단은 관객의 몫일 테니까요.
▲이몽학의 연인인 기생 백지(한지혜)를 사랑하게 된 견자(백성현). 부모의 원수 이몽학을 찾아가는 길에 백지는 걸림돌입니다. 백지의 목에 칼을 겨누며 떠나라고 외치는 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를 보는 내내 황정민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맹인검객 연기를 참 잘했습니다. 목소리의 톤도 좋았습니다. 그에 비해서 차승원의 연기는 매우 경직됐습니다. 이몽학이라는 캐릭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혁명가를 코믹하게 표현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너무 평범한 연기를 한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기생역할을 한 한지혜의 연기는 평면적이었고, 견자역을 한 백성현의 연기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영화에서 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장난이 아닙니다. 어쩌면 4명의 배우 가운데 가장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보여줘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분노, 애증, 연민, 허무 따위의 감정 연기를 경력이 짧은 젊은 연기자가 완벽하게 소화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준익 감독은 사극을 3개 연출했습니다. 전쟁과 웃음을 보여준 ‘황산벌’, 비극과 사랑을 보여준 ‘왕의 남자’, 그리고 인간사의 교차하는 희비극을 보여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지금까지 만들었던 영화 가운데 가장 치열하고 뜨거운 작업이었다”고 이준익 감독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영화로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문제는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 개봉은 4월 28일(수)이고요, 런닝타임은 111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