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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 柳 마 을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장달수)
조대(措大) 비속어 쪼다에 대한 용례
오건 선생의 덕계집을 보다가 한강 정구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 정 조대(措大) 도가(정구의 자)라 하여 조대에 대한 용례를 찾아 보았다.
우복선생이 지은 서애 선생 행장에는 조대라는 미칭을 사용하고 있다
빈도는 조대(措大)께서 뜻이 확고하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와서 한번 시험해 본 것입니다. 이 뒷날에 반드시 큰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아래 본문 참조
장달수
조대(措大)의 용례
1 가난한 선비
원문의 ‘措大’는 가난한 선비를 이르는데, 원래는 큰일을 조치할 수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가의대부 평안도병마절도사 증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훈련원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백공의 시장〔嘉義大夫平安道兵馬節度使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訓鍊院事五衛都摠府都摠管白公謚狀〕 | 강한집(江漢集)
2 조대(措大)
빈사(貧士)의 칭호로, 보통 서생을 가리킨다.
한벽당기〔寒碧堂記〕 | 어우집(於于集)
3 조대(措大)
조대는 서생(書生)을 말한다. 큰 일을 조치할 수 있다는 뜻으로, 서생의 미칭(美稱)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이원옥(李元玉)과 정계원(鄭啓遠)을 말한다.
4 조대(措大)는 빈한한 선비를 가리키는 말로, 빈사(貧士)나 빈유(貧儒)와 같은 뜻의 말이다.
이 감역 만사〔李監役 輓〕 | 병산집(屛山集) | 2015
5 조대(措大)
가난한 서생을 말한다. 초태(醋駄)에서 유래한 말이다. 어떤 선비가 가난하여 식초를 지고 동네를 돌면서 팔아 생계를 꾸리던 데서 비롯되었다.
진일선생전〔眞逸先生傳〕 | 허백당집(虛白堂集)
6 조대(措大)
청빈한 선비를 가리키는 말로, 빈사(貧士)나 빈유(貧儒)와 같은 뜻의 말이다.
연해(沿海)의 군현을 모두 돌아보고 두류산(頭流山 지리산(智異山)의 별칭)에 들어가 쌍계사(雙溪寺)와 신흥사(神興寺)를 구경한 기행록〔歷盡沿海郡縣 仍入頭流 賞雙溪神興紀行錄〕 | 제호집(霽湖集)
7 시골 …… 조대(措大)
조대는 선비를 뜻하는 말이다. 송나라 석연년(石延年)의 시 〈홍매(紅梅)〉에 “복사꽃인가 하였더니 푸른 잎이 없고, 살구꽃인 줄 알았더니 파란 가지가 있도다.〔認桃無綠葉 辨杏有靑枝〕”라고 읊었는데, 소식이 이 시를 두고 “지극히 비천하니 시골 서당의 말이다.〔村學堂中語〕” 하였다. 《事文類聚 後集 卷28 梅花》
문체의 간삽(艱澁)함과 간이(簡易)함에 대해〔文體之艱易〕 | 무명자집(無名子集)
8 예전 …… 선비이니
원문의 ‘의구동가조대(依舊東家措大)’는 원래 동가구(東家丘), 즉 동쪽 집의 공구(孔丘)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 공자의 서쪽 이웃에 살던 한 어리석은 자가 공자가 성인인 줄을 모르고 “저 동쪽 집의 공구를 내가 안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孔子家語 本姓解》
거병서와 제사〔去病書題辭〕 | 존재집(存齋集)
9 조대(措大)
빈한(貧寒)한 선비, 또는 사류(士類)를 말한다. 선비가 우뚝이 사민(四民)의 으뜸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니, 여기서는 사미헌 자신을 가리킨다.
황동보에게 주다〔與黃同輔〕 | 사미헌집(四未軒集)
10 조대(措大)
청빈한 선비를 가리키는 말로, 빈사(貧士)나 빈유(貧儒)와 같은 뜻이다.
제경에게 답함〔答濟卿〕 | 향산집(響山集)
11 조대(措大)
청빈한 선비를 가리키는 말로, 빈사(貧士)나 빈유(貧儒)와 같은 뜻의 말이다.
변무소(辨誣疏) | 사계전서(沙溪全書)
12 조대(措大)
청빈한 선비를 가리키는 말로, 빈사(貧士)나 빈유(貧儒)와 같은 뜻의 말이다.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서애(西厓) 유 선생 성룡(柳先生成龍)의 행장(行狀) | 우복집(愚伏集)
13 조대(措大)
빈사(貧士)의 칭호.
송시열이 스승 김장생을 변호하자 답하다 | 숙종실록(肅宗實錄) | 1987
14 조대(措大)
가난한 선비를 이르는데, 큰 일을 조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검(恭儉) | 성호사설(星湖僿說)
165조대(措大)
가난한 선비들을 이름.
섭향고(葉向高) | 성호사설(星湖僿說) |
조대(措大)의 용례
정 조대 도가 에게 보내는 서신〔與鄭措大 道可 書〕 -덕계 오건
지금 형제가 서로 뛰어나서 화락하고 기쁜 것을 생각하니, 사람의 마음을 매우 흡족하게 하네. 다만 그대가 지금 가는 것은 아마도 때가 아닌 듯하네. 비유하면 얌전한 처자가 저자로 나가자마자 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보는 것과 같네. 비록 순결하고 순수하여 흠잡을 수 있는 하자가 없기 때문에 그 광채가 선명하여 모습이 크게 드러나겠지만, 아마도 어둡게 감추는 뜻은 아닌 것 같네.
그러므로 지난달 20일쯤에 그대가 서울로 가려는 뜻이 있다는 것을 듣자마자 편지 한 통을 급히 보내, 나의 견해를 개진하여 북쪽으로 가는 행차를 만에 하나라도 저지하기를 바랐으나, 성산(星山)에 서신이 도착하니 그대는 이미 그 전날 출발하였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옹졸하고 우활한 견해이네. 대장부의 거동은 푸른 하늘의 밝은 태양 같아서 거두고 놓음에 각기 도리가 있으니, 멈추어도 감출 수 없고 움직여도 드러낼 수 없네. 또한 어찌 시집온 지 3일 된 신부 같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대는 이 관문을 통과하여 스스로 처신할 길을 도모하고, 완전한 지위를 차지하여 마음이 너그러워 구애되는 것이 없는데, 오히려 서울과 지방을 한 번 출입하는 사이에 어찌 얽매이겠는가. 감히 무염(無鹽)이 이미 시험한 추악함으로 고야자(姑射子)를 막아서 그가 재능과 지혜를 드러내지 않기를 바랐으니, 내가 스스로 헤아리지 못한 것을 잘 알게 되었네.
한벽당기〔寒碧堂記〕 어우 유몽인
‘한(寒)’은 무엇인가. 대나무이다. ‘벽(碧)’은 무엇인가. 모래사장이다. 당(堂)의 이름을 ‘한벽(寒碧)’이라 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 땅에 대나무와 모래사장이 있기 때문이다. 대나무와 모래사장을 ‘한벽’이라 호칭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두보의 “대나무 차갑고 모래 푸른 완화계(浣花溪)”라는 시에서 취한 것이다. 누가 살고 있는가. 조대(措大) 정시(鄭時)이다.
조대는 서울 사람이다. 그 선친(정지승(鄭之升))은 시로 일세에 명성이 높았으며, 일찍이 회계산(會稽山)에 은거하여 재주를 팔지 않았다. 자호를 회계산인(會稽山人)이라 하였다. 조대는 어려서부터 기개가 뛰어나 어려운 때를 만나자 역시 금성산(錦城山)에 은거하였다. 산에는 수많은 한죽(寒竹)이 있고 푸른 모래사장 한 줄기가 있어 당에서 조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의 이름을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대저 차가운 것은 하나가 아니다. 바람과 달과 물과 돌 등 그 이름이 수천 수백 가지인데, 굳이 대나무로 이름을 붙인 것은 어째서인가. 푸른 것은 하나가 아니다. 하늘과 구름과 산과 바다 등 그 이름이 수천 수백 가지인데, 굳이 모래사장으로 이름을 붙인 것은 어째서인가. 조대와 두보는 출처가 서로 비슷하며, 사는 곳도 임시 거처로 동일하고 그 땅도 금성(錦城)으로 동일하다. 당 또한 완화(浣花)의 초당과 동일하며 시 또한 나그네로 노닐며 회포를 풀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니, 흥취가 비슷한 점을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조대는 천백 곡(斛)의 찧은 벼와 키질한 오곡을 소유하고 있으니 분명 빈한하지 않은 선비인데도 그 차가움을 사랑한다. 또 분대(粉黛)와 비자(緋紫) 수십 줄을 소유하고 있으니 그 색 또한 푸른 것에 그치지 않는데도 그 푸름을 사랑한다. 조대는 두보가 소유한 것을 소유하고 있고 두보가 소유하지 않은 것도 소유하고 있다.
아! 사람들은 단지 차가운 것이 차갑고 푸른 것이 푸른 줄만 알 뿐 차갑고 푸르다는 두 글자가 시에서 나온 것임은 알지 못하니 그 흥취를 알기에 부족하다. 또 사람들은 단지 시의 흥취가 대나무와 모래사장 두 물건에만 있는 줄 알 뿐 그 흥취가 그 기운과 색깔에서 나온 것이 아님은 알지 못하니, 그 흥취가 절로 일어난 것임을 알기에 부족하다. 그 흥취가 대나무와 모래사장과 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나의 가슴 속에서 절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군자가 노래하였다.
꼿꼿한 수만 그루 대나무 / 亭亭萬竹
그 기운이 책에 스며드네 / 氣侵書帙
면면히 이어지는 평평한 모래사장 / 綿綿平沙
그 색깔이 개울에 비친 달에도 이어지네 / 色連溪月
누가 이 당을 지었는가 / 孰營是堂
시로써 당의 이름을 붙였네 / 堂以詩名
대대로 시 지으며 은거하니 / 世隱於詩
진실로 집안의 명성 이었네 / 允繼家聲
금성은 우뚝 우뚝 / 錦城嵯嵯
금수는 깊고 깊네 / 錦水深深
차갑고 푸른 것은 / 寒耶碧耶
주인의 흉금이라네 / 主人之襟
그 노래를 들으며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있어 그 당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 물건을 보지도 않았으나 글을 지어 기록하였다. 기록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고흥(高興) 유몽인(柳夢寅)이다.
寒者何?竹也。碧者何?沙也。堂之名寒碧何?以其地有竹沙也。竹沙之稱寒碧何?取杜子“竹寒沙碧浣花溪”者詩也。孰居之?鄭措大時也。措大,京師人,其先君詩名高一世,嘗隱於會稽山不售,自號會稽山人。措大自幼稚富氣槪,値時之難,亦隱於錦城山。山有萬竿寒竹一帶碧沙,可挹於一堂,堂之名於是乎得之矣。
夫寒者非一,有風也、月也、水也、石也,千百其名,而必曰竹,碧者非一,有天也、雲也、山也、海也,千百其名,而必曰沙者何?措大與杜子出處相近,居同於避寓,而地同於錦城,而堂同於浣花之草堂,而詩同於旅遊之遣懷,宜夫取興之似之也。
然而措大有搗玉揚珠千百斛,是士之不寒者,而猶愛其寒。有粉黛緋紫數十行,是其色不止於碧,而猶愛其碧。是措大有杜子之所有,而又有杜子之所未有也。
吁!人徒知寒者寒碧者碧,而不知寒碧二字之出於詩,不足以識其趣也。人徒知詩之趣在竹沙二物,而不知其趣之不於氣不於色,不足以識其趣之所自來也。其趣之來不竹不沙不詩,而其不自吾方寸間乎?於是,君子歌之曰:“亭亭萬竹,氣侵書帙。綿綿平沙,色連溪月。孰營是堂,堂以詩名。世隱於詩,允繼家聲。錦城嵯嵯,錦水深深。寒耶碧耶,主人之襟。” 有聽其歌而愛其名者,不入其堂?不見其物,而文以記之,記之者何人,高興柳夢寅也。
東坡志林/卷一 作者:蘇軾 北宋
措大喫飯
有二措大相與言志,一云:「我平生不足惟飯與睡耳,他日得志,當飽喫飯,飯了便睡,睡了又喫飯。」一云:「我則異於是,當喫了又喫,何暇復睡耶!」吾來廬山,聞馬道士嗜睡,於睡中得妙。然吾觀之,終不如彼措大得喫飯三昧也。
유중오(柳重吾) 지(榰) 에 대한 제문 중에서 –갈암 이현일
나는 천성이 용렬하고 게을러 / 下交疎慵
쉰 살이 되도록 한미하게 지내다가 / 五十措大
만년에 외람되이 발탁이 되어서 / 晩叨拔擢
조정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 厠跡班行
계곡 장유의 상소문 중에서
신과 같은 사람은 체격이 가냘프고 용모가 누추하여 보통 사람보다도 훨씬 못하니, 설령 속에 아름다운 요소를 온축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밖으로 드러나기에는 부족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더구나 내면과 외면이 서로 부합되고 있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니 혹시라도 중국 사람이 신을 보고서 비웃으며 모멸하여 말하기를, “동국(東國)엔 정말 사람도 없구나. 이 보잘것없는 조대(措大 빈약한 서생(書生)의 뜻)를 보내 우리를 맞게 하다니.”라고 한다면, 어찌 성조(盛朝)의 수치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감당해 낼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계곡 장유의 시
뛰어난 인재들 각축을 벌이면서 / 多士角觜距
과시(科試)에서 먼저 깃발 뽑으려 다투는데 / 文場爭拔幟
명성 날리는 일 누가 바라지 않으랴만 / 佳名衆所慕
배경이 든든해야 좋은 일 성취되지 / 擇陰成好事
그런데 빈사(貧士)가 거듭 장원을 하였으니 / 措大重取雋
지우(智愚)를 막론하고 고무되는 건 물론이요 / 鼓舞無愚智
뒷날 판서 정승 선발할 때도 / 他時卿相選
자주 이 경력이 적용이 되리 / 往往由此致
문생인 유 조대가 집으로 돌아감에 허 선생에게 부치다-급암 민사평
제비와 기러기처럼 서로 떨어진 지 벌써 몇 년 / 燕雁相違已數年
몇 번이나 남쪽 바라보며 홀로 근심했던가 / 幾回南望獨悠然
어찌 단계의 냇물로 굳게 차단할 필요가 있나 / 何須固閘丹溪水
구슬퍼라 끊어진 줄을 이을 사람이 없구나 / 惆悵無人續斷絃
웅연범주도(熊淵泛舟圖)에 대한 기 –미수 허목
금상 13년 4월에 권 공산(權公山)이 권 저작(權著作)ㆍ권 조대(權措大) 두 사람과 함께 석록(石鹿)의 산속 집으로 늙은이를 찾아왔기에 적적하던 중에 마음을 툭 터놓고 며칠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눈 내리는 밤 내각에 음식을 내리시어 삼가 은례를 기술하다-다산 정약용
멧돼지 배를 가르고 곰고기를 구웠다면 / 山猪割肪熊爇爒
넙치 말린 포에다가 고등어도 겸하였는데 / 比目之腊重脣鯖
여러 가지 선미를 다 말하기 어렵구나 / 種種仙妙難具述
청빈한 선비 입이 황홀하여 놀랄 따름 / 頓令措大口吻驚
궁중에서 음식 하사 그 유례가 극히 적어 / 內家宣饌例絶少
척리 훈가 그들만이 영광 받아 뽐냈는데 / 戚里勳家誇獨榮
우송집 서(友松集序) -다산 정약용
내가 옛날 화순(和順) 지방을 노닐 적에 겨우 한 사람을 얻었으니 곧 우송일사(友松逸士) 김공(金公)이 그분이다. 그 지체는 주졸자(走卒者 심부름하는 하인)의 형이요, 그 지위는 조대(措大 청빈한 선비)요, 그가 죽은 지는 1백 80년이요, 그 자손은 나무하고 풀베는 농사꾼이나, 그 스승은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의 호)요, 그 벗은 정우복(鄭愚伏 우복은 정경세(鄭經世)의 호)ㆍ이지봉(李芝峯 지봉은 이수광(李睟光)의 호) 등이요, 그 풍도를 우러르고 의리를 사모하며, 마음으로 좋아하고 정성으로 복종하여 남긴 저작들을 찾아 모아 혹시 없어질까 염려한 이는 진사(進士) 조태서(曺台瑞)씨이다.
권요신(權堯臣) 기(夔) 에게 답함 -다산 정약용
우리들은 모두 빈한하고 담박하며 시세에 어두워 비록 지위가 공고(公孤)에 이르렀더라도 다만 하나의 노숙한 조대(措大 선비)일 뿐이니, 진실로 그의 문장과 언론이 모범이 될 만하다면 어찌 서로 종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사람 됨됨이가 어떠한가 만을 볼 따름입니다. 주신 편지에 의(義)와 이(利) 두 글자를 공정하게 분석하셨으니 진실로 그 요강(要綱)을 터득했다고 하겠습니다.
절구에 차운하다 –백운거사 이규보
술과 안주 심히 보잘것없어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 盃盤甚薄赧顔多
그래도 쓸쓸한 대로 선비의 집이기는 하네 / 猶作蕭然措大家
가난한 집 문 앞은 사람들이 외면하는데 / 羅雀門前人北首
그대 아니면 누가 다시 들려 주겠는가 / 非君誰肯再經過
자경(子敬)과 집중(執中) 두 현제(賢弟)에게 부치다 -명재 윤증
어느 날 무슨 일이 면전에 닥쳤을 때 / 一朝事到面前時
망연자실 후회한들 때는 이미 늦는다네 / 回首茫然悔無及
학사 이름 얻기는 점점 어려워질 게고 / 學士身名似轉艱
선비 정신 지키는 공부 또한 시급한 것 / 措大工夫又方急
학문에 몰두하길 시를 써서 권하노니 / 題詩相與勉優游
벌레처럼 평생토록 칩거한단 말은 말길 / 莫謂長作寒蟲蟄
김조대(金措大) 광(桄) 에 대한 만사 –명재 윤증
풍채가 아름다운 그 아우에 그 형으로 / 風標奕奕弟兄間
바닷가에 은거하여 백란처럼 살았었지 / 海曲幽棲似伯鸞
독 속에 술 있으면 가난해도 즐거웠고 / 有酒樽中貧也樂
세상사 영위 않아 늙도록 한가했지 / 無營世上老因閑
헛된 영화 어찌 꼭 내가 누려야만 하랴 / 浮榮豈必吾身享
앞으로 후손들이 여경을 보게 되리 / 餘慶應從後嗣看
무엇보다 가을 강에 줄이 끊긴 기러기가 / 最是秋江斷行鴈
외롭게 돌아오는 것이 못내 슬프다오 / 不堪孤影獨飛還
공검(恭儉)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가난한 자는 배우지 않아도 검소하고, 미천한 자는 배우지 않아도 공손하다.”는 말은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른다. 지금 항간에 하인들과 가난한 조대(措大)들이 배고픔을 잘 견디고 지나치게 공손한 것이 꼭 옳은 일만 해야겠다는 관심이 있어서 그렇겠는가? 청렴한 자는 자기 몸만을 잘 지키고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의롭지 못한 일을 부끄럽게 여기므로 옛말에 “부인의 행동이요 시골의 보통 사람일 뿐이다.”라고 한 것이니 비록 높여 줄 만하나 군자의 일에는 비겨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옛날 특출한 대부가 출세하여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잘 보호하여 그 혜택이 천하 후세에까지 미치게 된 것이 일찍이 이 공손함과 검소함에서 힘입어서 시작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진실로 공손하고 검소하고 청렴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자로서 세상에 쓰이지 못한 이는 혹 있으나, 교만하고 사치하고 탐욕스럽고 분수를 모르는 자로서 능히 나라를 잘 다스린 자는 있지 않았다. 이는 변경할 수 없는 공론이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는 유술(儒術)과 사공(事功)이 둘로 갈리어 서로들 헐뜯고 나무란다. 경생(經生)과 학사(學士)들이 주먹만 쥐고 책상 앞에 꿇어앉아 글이나 읽으면서 천하의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그릇된 것이다.
만약 천하 사물(事物)의 이치를 소상히 알고 고금의 사변(事變)을 널리 궁구하여서, 시대에 따라 알맞게 하여 시원스레 결단하기를 법에 맞추지 못한다면, 장차 무엇으로 위란(危亂)을 바로잡고 도탄(塗炭)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겠는가? 이러므로 선비가 평소에 글을 읽고 도(道)를 말할 적에 모름지기 천하의 일을 경륜할 것을 생각하여, 등용되더라도 오직 일을 만나서 틀림이 있을까 두려워해야만 바야흐로 썩은 선비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사기를 읽다가 국난을 당했던 대목에 이르러서는 모골이 송연하고 심담이 막혀서 자신이 그 속에 놓여 있는 것 같다.” 하였으니, 마음가짐을 이같이 해야만 선비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 보아도 격치(格致)로부터 곧바로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위아래가 연결된 것이니, 어찌 일찍이 이 공검(恭儉)과 염치(廉恥)에만 그치겠는가?
이 글을 자세히 보면 그가 조대(措大) 때부터 기상(氣像)과 의미(意味)가 이미 이와 같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나중에 이르러서는 양연(楊漣)이 스물네 가지 죄목을 열거하여 상소(上疏)할 때에 여럿이 이르기를, “마땅히 이 기회를 타서 승리를 결정지을 수 있을 것이라.” 하고 모두 섭향고의 조력이 있기를 희망하였다.-섭향고
시를 읊는 서생의 주린 배 꾸룩대고 / 措大幽吟枵腹鳴
산굽이 오랜 집은 기울어져 가누나 / 山阿老屋任欹傾
그래도 날을 잡아 닭 잡을 약속했고 / 猶占勝日烹雞約
새봄을 맞이해 소식 오길 기다렸지 / 好趁新春候鴈聲
즐거운 날 주인 손님 나눌 게 무어랴 / 樂意何煩賓主別
풍속이 순후해 모두 행실 절로 맞네 / 淳風都在疾徐行
밤을 새워 서로의 진심을 얘기하세 / 須將款曲終今夕
세상사야 늘 바뀌는 뜬구름 같은 것 / 世事浮雲慣閱更
서생의 가는 노정 먼 줄은 잘 알거니 / 情知措大行程遠
하늘가 날개 펴 한번 날기 기대한다 / 揷翅天陲待一揚
선비가 움츠려 있더라도 마음은 웅비하니 / 措大雌伏心雄飛
꿈속의 혼은 왕왕 천지 사방을 두루 다닌다 / 夢魂往往歷四極
동으로 임하여 신선 산의 꼭대기를 굽어보고 / 東臨俯視戴山額
북으로 달려 나래치는 붕새를 실컷 구경하리라 / 北走縱觀摶扶翼
난새 봉황 타고서 구천으로 오르고자 하니 / 欲乘鸞鳳騰九天
대사헌 황공 행장〔大司憲黃公行狀〕 -성호
돈암(遯菴) 황공(黃公)의 휘는 섬(暹), 자는 경명(景明)이고, 또 다른 호는 식암(息菴)이며, 그의 선조는 창원인(昌原人)이다. 고려(高麗)의 대상(大相) 석주(石柱)의 후손이다. 증조 휘 희성(希聖)이 풍기(豐基)로 이사하였다. 조부 찬성(贊成) 휘 사우(士祐)와 선고(先考) 동지돈녕부사 휘 응규(應奎)는 모두 현달하였다. 선비(先妣)는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병조 판서 휘 계손(繼孫)의 손녀이자, 의빈부 도사 휘 수려(壽旅)의 딸이다
중략
공은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서 본래 스승으로서의 자질이 있었다. 조대(措大 선비) 때부터 쌓인 학문은 이미 거칠지 않았고, 조정에 들어가서는 현달한 벼슬을 하고 관수(官守)와 언책(言責)은 모두 충심을 다할 줄 알았다
우암 송시열이 율곡의 문묘 배향 상소 중
“마음이 이미 빠졌으면 변형의 여부는 논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문성공이 변형하지 않은 것은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의 변론에 갖추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문성공이 입산(入山)할 때의 시서(詩序)를 보아도 더욱 즉시 분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성공과 고승(高僧)의 문답을 살펴보면 고승이 반드시 조대(措大)라고 말했다. 조대는 곧 선비를 일컫는 말인데 이미 변형을 하였다면 의당 승(僧)의 칭호로 불렀을 것이니, 어찌 조대라고 불렀을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문성공을 구산(龜山)과 비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비록 장재(張載)와 주희(朱熹)의 일을 가지고 말해 보아도 현격한 차이가 없다. 중신(重臣)이 차자(箚子)에서 말한 변통의 설에 대해서는 이미 중조(中朝)에서 시행한 것이 있고 또 선정(先正) 신(臣) 조헌(趙憲)의 논이 있으니, 무릇 성문(聖門)에 죄를 얻고 도통(道統)에 합당치 못한 자를 빼 버리는 데 무슨 의심이 있겠는가. 마땅히 빼 버려야 하는데도 빼지 않은 사람이 없지 않으니, 원(元) 나라의 허형(許衡)이 바로 그 사람이다. 문성공이 일찍이 허형이 원 나라에 벼슬한 것은 실절(失節)이 아니라 실신(失身)이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중화를 중히 여기고 오랑캐를 가벼이 여기는 춘추 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말이다.”
우복 정경세가 지은 서애 선생 행장에
관(冠)을 쓸 나이가 되어서는 관악산(冠岳山)에 있는 무너진 암자 속으로 들어가 깨끗하게 소제한 다음 부지런히 공부하였는데, 남자 종 한 명을 그곳에 머무르게 하고서 밥을 짓게 하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글을 읽고 하늘을 우러러 생각하였는데,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부지런히 하였다. 어느 날 밤이 아주 깊었을 때 누군가가 담벼락을 치는 소리가 있었는데도 공은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 어느 날 중 한 사람이 밤을 틈타 갑자기 앞에 와서는 말하기를, “홀로 빈산에 살고 있으면 도적이 무섭지 않은가?” 하니,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사람은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니, 그대가 도적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그대로 앉아 태연자약하게 글을 읽으니, 중이 절을 하고 말하기를, “빈도는 조대(措大)께서 뜻이 확고하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와서 한번 시험해 본 것입니다. 이 뒷날에 반드시 큰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비 내리는 날 복사나무를 옮겨 심다가 숙진(叔眞)의 시가 있어 차운하여 화답하다 -남추강
선비의 청빈함은 황벽과 얼음 같으니 / 措大淸寒蘗與氷
종일토록 문이 닫혀 찾는 벗도 없구려 / 閉門終日更無朋
봄 동산 가랑비에 복사나무 옮겨 심으니 / 春園細雨移桃樹
꽃 피어 무릉도원 되기를 기다릴까 함일세 / 擬待開花作武陵
생고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 복재 부군의 행록 중-향산 이만도
좋은 세상에 높은 점수로 급제한 것도 과분한 터에 / 名時高第已踰分
옥당의 좋은 벼슬까지 누렸네 / 況又登瀛是好官
오색구름 속에 베개 베고 눕고 / 五色雲中携枕卧
삼청의 달빛 아래 책을 보았네 / 三淸月下把書看
오활하게 공맹(孔孟)을 말하여 시속을 놀래고 / 迂談鄒魯驚流俗
공경히 요순(堯舜)을 외어서 성은에 보답했네 / 欽誦唐虞報聖恩
한낱 서생의 공명 이만하면 족하니 / 措大功名於此足
얼른 전원으로 돌아가야지 / 且須早早賦田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