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흔히 이 작가를
"마르케스"라고 하는데 이는 커다란 잘못이다.
이름이 가브리엘(Gabriel)이고
성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이다.
가보(Gabo)는 지인들이 부르는 애칭.
☞ 『백년 동안의 고독』 가계도
우리에게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 잘 알려져 있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ía Márquez 는 작품의 대중화를 꾀하면서 폭 넓게 일반 독자들을 확보하면서도 동시에 비평가들에게는 소설의 새로운 서술 방법 등을 통한 미학을 제공한 몇 안되는 현대 작가 중의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서구 문학사에서 극단적 실험성으로 인해 '소설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던 서구 문학계에 '소설의 소생'이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그의 소설 세계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말이 보여주고 있듯이 사실주의란 말이 내포하고 있는 재현성. 역사성과 '마술적'이란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글쓰기의 실험성을 포함한다. 즉, 이는 단순한 기록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중남미 현실을 보여주는 다양성을 융합, 통합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보르헤스와 더불어 금세기 후반의 세계 문학사를 바꾼 인물이다. 특히 그의 대표작 『백년 동안의 고독』 이후 세계 문학은 탈바꿈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 세계는 그의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계를 띠고 있다. 그의 삶은 소설적이고 그는 삶 속에서 소설을 창조한다. 이것은 왜 우리가 그의 삶과 소설을 살피고 연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된다.
1. 유년 시절: 미래의 소설을 향한 꿈의 세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전기를 다루고 있는 많은 잡지와 책은 그가 1928년 3월 6일에 콜롬비아의 대서양변에 위치한 아라카타카라는 마을에서 아버지인 가브리엘 엘리히오 가르시아와 어머니인 루이사 산티아가 마르케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이 지역은 후에 끊이지 않는 폭우로 인해 홍수가 나며, 무더운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카리브해의 열대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그의 모든 작품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의 작품 세계는 민중과의 유대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도 이 카리브해의 세계에 대한 매혹을 보여주는데, 이는 보고타가 위치한 콜롬비아의 안데스 지역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는 이 도시를 "오후 여섯 시의 분위기처럼 회색 빛이고 차가운 도시"라고 부르고 있다. 이 무더운 마을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귀신 이야기를 해 주면서 그를 전율에 떨게 했으며 미신을 신봉하는 외할머니인 트랑킬리나 이과란 코테스와 그를 서커스에 데려가고 끊임없이 시민 전쟁 이야기를 해주던 외할아버지인 니콜라스 마르케스 이과란 사이에서 성장했다.
그가 태어난 후 얼마 안되어 그의 부모는 리오아차의 전신국으로 발령을 받아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외할아버지 집에 맡기고 이사를 간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1926년까지 살게 될 이 기간 동안 아라카타카는 "가난하고 더러우며 따분한 일상생활"로 가득 찬 분위기로 표현된다. 또한 후에 마콘도라는 상상적 모델이 되는 이 작은 마을은 신화적 과거와 기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외할아버지는 천일 전쟁(1899-1902)후에 아라카타카에 도착하여 정착한다. 그 당시 그 집은 거대하고 온갖 기억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구석구석마다 신비스런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집이 후에 그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요소이다. 이런 점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쓰려고 했지만 끝을 맺지 못했던 첫 번째 소설을 '집'으로 이름 붙이려 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라 보여진다. 게다가 1950년 7월 3일에 발표된 「부엔디아의 집」이라는 글에서 볼 수 있듯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오랜 동안 『백년 동안의 고독』의 무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마콘도란 상상적 마을로 형상화될 아라카타카와 풍성하고 신비스런 외할아버지의 집을 통해 『백년 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부엔디아 가계를 소설화하는 소재를 발견한다. 또한 그의 외할아버지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대령들의 가계(家系)를 형성하는 일화를 이야기해 준다. 이것은 손자의 기억 속에서 『낙엽』에 등장하는 대령,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의 대령,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과 심지어는 유령과 같은 족장 등으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자기의 남편과 사촌이었던 외할머니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그 지역의 옛 영화를 회상하는 이야기와 전설 등을 말해 준다. 이는 후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환상적으로조차 보이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서술하게 하는 방식을 통해 재구성된다. 이 시기를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멋진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외조부모들에게는) 환영으로 가득 차 커다란 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풍부한 상상력과 미신을 신봉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석구석마다 죽은 사람들과 그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오후 6시 이후에는 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공포로 가득 찬 멋진 세계였지요.
1936년에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와 같이 멋진 시기는 끝이 난다. 그리고 여덟살 때 대서양변에 위치한 바랑키야에 있는 예수회 계통의 학교에 입학한다. 또한 보고타 근교 도시인 시파키라의 국립 중등학교에서 장학생으로 고등학교 교육을 마치게 된다. 당시의 보고타는 그의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은 질식할 것같은 슬픈 이미지를 남긴다. 그는 "보고타 사람들은 어둡고 나는 그 도시가 내뿜는 분위기 속에서 질식할 것만 같았습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시파키라 중등학교의 기숙사에서 '돌과 하늘파'풍의 시를 쓰면서 처음으로 문학을 경험한다. 이러한 시에 대한 관심은 특히 『순박한 에렌디라와 포악한 할머니의 믿을 수 없이 슬픈 이야기』의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는 대다수의 단편에서 정교하고 선명한 필체로 서술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며, 또한 『족장의 가을』에서도 실험적인 풍부한 언어의 형식으로도 표출된다. 그는 방학 때마다 그의 부모와 형제들이 살고 있던 수크레 지방으로 여행을 한다. 보고타에서 수크레로 가기 위해서는 막달레나 강으로 여행을 해야 하는데, 이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메메 부엔디아가 아버지와 같이 여행하는 장면의 주요 소재로 처음으로 사용되며,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여행에서도 나타나고 그의 가장 최근작인 『미로 속의 장군』에서도 볼리바르를 통해 현시화된다.
2. 기자 생활과 『백년 동안의 고독』 이전의 소설: 절박한 사회 현실의 체험
1947년에 그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콜롬비아 국립대학에 입학한다. 그 해에 그는 「세 번째 체념」이라는 단편을 쓰고 그의 단편을 읽어 본 에두아르도 살라메아가 자신이 관여하고 있던 콜롬비아 양대 일간지 중의 하나인 《엘 에스펙타도르》에 게재한다. 이 단편 이후 계속하여 이 신문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열 편의 단편을 더 출판하는데 이 열 편의 단편은 후에 작가가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유명해 진 다음에 『푸른개의 눈』이란 이름의 단편집으로 출간된다.
1948년 4월 9일 보고타에서 '보고타소'라고 불리는 자유당과 보수당간의 정치 투쟁인 '콜롬비아 폭력 사태'가 일어났을 때,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보고타에 있었고 그는 자기가 살고 있던 거리가 불타는 것을 목격한다. 이 폭력 사태는 그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며, 또한 '콜롬비아 폭력 사태의 소설'에 관한 이론적 성찰을 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이 보고타소는 즉각적으로 그에게 피해를 끼친다. 그는 다니고 있던 콜롬비아 국립대학이 휴교가 됨으로써 그 당시 그의 가족이 살고 있던 카르타헤나로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공부를 하면서 의사이자 작가인 마누엘 사파타 올리베야의 소개로 《세계 El Universal》란 신문의 기자로 일을 하게 된다.
1950년에 바랑키야에서는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미 보고타에서 안면이 있던 플리니오 아풀레요 멘도사와 함께 평생 동안의 친구가 될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알폰소 푸엔마요르, 알바로 세페다 사무디오와 헤르만 바르가스였다. 또한 그들과 함께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로부터 도망나온 스페인 대학의 교수였던 라몬 비녜스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카탈루냐의 현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들로 구성된 단체는 소위 '바랑키야 그룹'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들에 의해 당시 주변문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대서양변 해안 문학이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선구 El Heraldo》란 신문에 「기린」이란 칼럼에 글을 쓰게 된다. 이 시기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낙엽』을 탈고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로사다 출판사에 보내지만, 그 출판사는 이 작품을 출판하기를 거부한다.
이 당시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수크레에서 알게 된 한 여인을 카르타헤나에서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여인은 약사의 딸로 수차에 걸쳐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메르세데스 바르차였다. 후에 이 여인은 그의 아내가 되어 평생을 그와 함께 한다. 그때 그와 그의 친구들은 이 여인에게 '성(聖)스러운 악어'란 별명을 지어 주며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는 "나일강 뱀의 은밀한 미를 소유한 소녀"로 표현된다. 또한 그는 자기 어머니와 함께 아라카타카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집을 팔기 위해 아라카타카로 여행을 한다. 이 여행에서 그는 유년 시절에 보았던 멋지고 황홀한 세계였던 아라카타카와는 달리 이제는 황폐하고 가난에 찌들린 세계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후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에덴 동산과 같은 마콘도가 폐허화되는 과정을 그리게 하는데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1954년에 카르타헤나에서 알게 된 후,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하나가 되었던 알바로 무티스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보고타로 돌아가서 《엘 에스펙타도르》에서 다시 일하라고 설득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신문기자로서의 활동은 후에 그가 작가로 변신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는 그에게 주로 저널리즘적인 문체와 수사법을 배우게 하는 동기가 된다. 그는 《엘 에스펙타도르》에 1955년 2월부터 4월까지 칼다스란 구축함의 표류와 생존자인 루이스 알레한드로 벨라스코의 인생의 변천사에 대해 글을 쓰는데 후에 이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뗏목에서 열흘간 표류하고, 조국의 영웅으로 추앙 받으며 미의 여왕들에게 키스를 받고 널리 알려져 갑부가 되었으나 그 후 정부의 미움을 받아 영원히 잊혀진 표류자의 이야기』로 출판된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보고타에서 그의 첫 번째 소설이자 포크너의 영향이 다분히 보이는 『낙엽』이 출판된다. 출판 직후 그는 《엘 에스펙타도르》지의 유럽 특파원으로 로마로 간다. 이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로하스 피니야 독재 정권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헤어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로마 영화 실험 센터'에 등록한다. 그의 영화에 대한 관심 역시 그의 작품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가 파리에 있을 때 로하스 피나야 정권은 《엘 에스펙타도르》신문을 폐간시키며, 이로 인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일자리를 잃게 된다. 파리에서의 가난에 찌들린 힘든 기간동안 그는 중편이지만 대작으로 꼽히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집필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쓰기 전에 그의 머리 속에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수크레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다른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출처를 밝히지 않는 삐라가 중상 모략과 험담을 일삼으면서 주민들 사이에 많은 재앙을 일으키면서 이 마을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이 소설은 1962년에 『불행한 시간』으로 출판된다. 이 소설의 집필 과정에서 한 작중인물이 강력히 부상한다. 그는 다름 아닌 대령이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대령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먼저 쓰게 되고, 이 작품은 2년후인 1958년에 《신화》라는 잡지에 게재된다.
그후 그는 친구인 아풀레요 멘도사와 함께 사회주의 국가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1957년 말에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로 돌아와서 페레스 히메네스 독재의 몰락을 목격하게 되며, 이 당시의 이미지는 『족장의 가을』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1958년 3월에 그는 메르세데스 바르차와 결혼하기 위해 바랑키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그녀와 함께 《순간》지에 일하기 위해 베네수엘라로 간다. 이 당시에 쓴 그의 기사들은 『행복한 무명 시절』이란 제목으로 1973년에 출판된다. 그리고 1962년도에 출판될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들을 쓰기 시작한다. 1958년 말에 특정한 정치적 성향을 띠지 않았던 그를 좌익으로 활동하게 만든 쿠바 혁명이 일어난다. '에베르토 파디야' 사건으로 말미암아 1970년 이후 대부분의 중남미 작가들이 쿠바에 등을 돌린 것과는 반대로, 그의 쿠바와 카스트로 체제에 대한 충성은 점점 더해 간다. 또한 1959년 2월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그의 친구인 아풀레요 멘도사는 보고타에 '중남미 통신'이라는 사무실을 열고 쿠바에 콜롬비아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뉴스를 보내는데 전념하고 또한 콜롬비아에서 다른 외국 통신사들이 보내는 쿠바에 대한 무절제한 뉴스 대신 쿠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잡지를 출판하려고 노력한다.
1960년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로 건너가 그 곳에서 1년간 머무른다. 그리고 부지국장의 신분으로 뉴욕에 있는 '중남미 통신' 사무실에서 근무한다. 미국에 있으면서 그는 포크너 소설의 소재가 된 미국 남부 지역을 여행한다. 그리고 이 지역이 콜롬비아의 해안 지역과 매우 흡사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비평가들이 마콘도와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를 연구하면서, 그의 작품에서 포크너의 영향을 강조하게 된다.
피델 까스뜨로와 가르시아 마르케스
하지만 관료주의적 사고 방식에 식상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일에 사표를 내고 자기 가족과 함께 멕시코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에 전념하고 싶어한다. 그곳에서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함께 동시대의 멕시코 작가인 환 룰포의 단편에 기초한 첫 번째 시나리오를 쓴다. 이 작품은 『황금닭』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또한 후안 룰포(Juan Rulfo)의 소설인 『페드로 파라모』의 시나리오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라는 단편 이외에는 소설창작에 그리 큰 활동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3. 『백년 동안의 고독』과 『족장의 가을』
이와 같이 1962년 이후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아무 작품도 출판하지 않는다. 그는 당시까지 썼던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 침묵의 기간을 작가로서 성숙하기 위한 시간으로 삼고 있었다. 그는 이런 자아 성찰을 통해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다. 그는 인터뷰에서 어떻게 이런 기적을 이룰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아카풀코로 가족과 함께 운전하면서 가는 동안 갑자기 자신이 청년기 때부터 쓰고자 했던 대하소설의 구조가 떠올랐다. 그는 당시의 장면을 이렇게 말한다. "너무 완전히 생각이 나서 거기에서 타자수에게 첫 장의 단어 하나 하나를 구술했었으면 했습니다". 그의 아내인 메르세데스에 의하면, 그는 이러한 욕망을 억제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글을 쓰기 위해 틀어 박혔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6개월 정도면 이 소설을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소설을 끝내고 보니 18개월이란 세월이 흘러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기간동안 메르세데스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의 자동차를 팔았지만, 그래도 돈이 모자라 그에게 말하지 않은 채 빚을 지고 있던 상태였다.
1967년 6월에 드디어 『백년 동안의 고독』이 출판된다. 이 소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수드아메리카나(Sudamericana) 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었을 때, 이미 독자들은 이 소설을 상당히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문학잡지는 이미 이 소설의 일부분을 게재한 상태였고,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읽어보라고 건네준 제 1장을 읽고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아무런 주저함 없이 이 소설을 극찬하고 있었다. 이 소설의 성공은 문학 비평가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즉시 그 반응이 일어났다. 재판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이 소설을 번역. 출판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이탈리아에서 키안치아노 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에서는 최고의 외국 소설로 결정되었다. 미국 비평은 이 소설을 1970년의 최고 소설로 선정했으며, 1971년에 콜럼비아 대학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1972년에는 중남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베네수엘라의 로물로 가예고스상을 수상하는데, 여기에서 받은 상금을 '사회주의 운동MAS'이라는 좌익 단체에 기증한다.
『백년 동안의 고독』이 출판되고 한달 후 카라카스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페루의 소설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알게 된다. 이후 급격히 발전된 그들간의 우정은 몇 년 후에 아무런 뚜렷한 이유 없이 급속도로 냉각된다. 그 당시 바르가스 요사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관한 가장 자세하고 심도 있는 연구서인 『살신(殺神)의 역사』를 쓰지만, 그들간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이 책의 재판을 허락하지 않는다.
1967년과 1975년 사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살게 된다. 이 기간에 그는 『순박한 에렌디라와 포악한 할머니의 믿을 수 없이 슬픈 이야기』와 베네수엘라에서 쓴 기사를 모아 『행복한 무명 시절』이란 책을 출판한다. 그러면서 오래 전부터 쓰고자 했던 또 다른 소설을 쓰는데 전념한다. 이는 바로 중남미 독재자에 관한 소설이었다. 『족장의 가을』이란 소설은 마침내 1975년에 출판된다. 이 소설은 구체적인 독재자를 소재로 다룬 것이 아니라, 19세기부터 존재해 왔던 여러 독재자들의 이미지를 종합하여 독재자의 원형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는 그의 모든 작품을 다시 출간하며, 그 동안 썼던 모든 단편들을 한 권에 수록한 『단편 모음집』을 출판한다.
『족장의 가을』은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즉각적으로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한 비평가가 있었는가 하면, 이 소설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내 놓은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비평가는 이 소설을 너무 내용적으로 축소하여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작품은 독재자의 신화뿐만 아니라, 언어 형식적 측면에서도 1970년대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4. 정치 기자의 생활과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족장의 가을』을 출판한 후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다시 멕시코에 자신의 거처를 정한다. 또한 1976년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칠레의 피노체트가 권좌에 있는 한 더 이상 소설을 출판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그는 이미 1973년에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피노체트에 의해 붕괴되었을 때, "칠레 민중은 미제국주의의 하수인인 당신들과 같은 범죄자 집단이 통치하게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쓴 전문을 칠레 군부에게 보낸다. 이러한 사실은 작가의 명성이란 책임감을 의미하고 더욱 더 사회 참여를 의미한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작가는 무기로서 단지 펜만을 갖고 있으며, 글은 계속 쓰지만 출판을 하지는 않겠다는 이 의지는 칠레의 군사 독재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투쟁 방법이기 때문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렇게 선언한 것이었다. 그후 수년간 그는 정치 활동에만 전념한다. 가령 브뤼셀에서 열린 중남미의 다국적 기업에 관한 러셀 심판소(1976년), 자유와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람들의 인권 회복을 위한 아베아스Habeas재단의 창설 (1979년)뿐만 아니라, 콜롬비아에서 정치적 이유로 구속된 수감자와 고문에 대해 고발하고 아르헨티나에서 실종된 사람들과 쿠바의 정치범들을 위해 수많은 활동을 벌인다. 출판 거부를 선언한 이후, 그는 정치와 관계된 많은 글을 쓴다. 맥브라이드 보고서인 「세계 정보의 새로운 체제」를 작성하고, 1981년 5월 21일에는 사회주의 대통령인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다. 또한 1984년 8월 26일에는 콜롬비아 정부와 게릴라 그룹이 조인한 평화 협정을 기념하기 위해 예술인들의 모임을 주도한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직업이었던 저널리즘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는 콜롬비아에서 출판된 정치 잡지인 《대안(代案)Alternativa》(1974-1980)의 편집 고문을 맡으면서 33편의 글을 쓴다. 또한 앙골라, 베트남, 모잠비크와 중남미 여러 국가에 관한 르포를 쓰며, 쿠바에 관한 책도 준비하고 중남미와 유럽의 여러 간행물에도 기사를 쓴다.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문학은 저널리즘과의 사랑 행위'라는 개념에 입각한 글쓰기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이 기간동안 "현실과의 접촉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정치적인 기사를 쓰면서 이 5년(1976년-1981년)을 보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1979년부터 유럽 속의 중남미 인들을 소재로 한 단편을 쓰게 되는데 이 단편들은 1992년에 『이방의 순례자들』이란 제목으로 출판된다.
1980년까지만 해도 피노체트 정권이 무너지지 않는 한 소설을 출판하지 않겠다고 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결정은 지켜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1981년 4월에 이 약속을 깨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출판한다. 이 책은 스페인, 아르헨티나, 멕시코, 콜롬비아에서 모두 백만부가 출판됨으로써 중남미 출판사에 또 다른 기록을 세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칠레인들은 내가 이러한 결정을 했을 때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용했으며 그 결과도 그러했지만 이를 계속하여 유지한다는 것은 이제 정치적으로 볼 때 부정적인 면이 더 많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견이 나보다 그들의 상황을 더 잘 아는 사람들의 말이고 나는 칠레인들보다 더 칠레적이 될 수는 없읍니다. 여하튼 나는 피노체트는 오랜 기간동안 권좌에 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내 책이 그보다 훨씬 더 오래동안 지속될 것입니다." 또한 그는 "비평가들은 내가 중남미 마술적 사실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나는 내가 현실감각을 갖고 있는 유일한 시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내 사실주의는 피노체트가 몰락하지 않았고 그리고 지금 몰락하지도 않으며 언제 몰락할지는 모른다고 말하기 때문에 내 책을 출판합니다. 그 당시 이와 같은 약속을 했던 것은 정치적으로 유용했읍니다. 하지만 지금은 출판이 더 정치적으로 유용합니다. 중남미 좌익은 사실주의의 미덕이 결여되어 있읍니다. 피노체트는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변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는 아직 살아있는 존재이지만 그는 아닙니다"라고 지적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러한 결정은 번복될 수 있으며, 그런 결정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큰 활자로 200페이지가 채 넘지 않는 이 조그마한 책은 이와 같은 상황으로 인해 출판 당시부터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논란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소설은 산티아고 나사르라는 청년을 소재로 전개되는데, 그만을 제외한 모든 마을 사람들은 그가 살해당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죽음이 정말로 실현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을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략 1979년경이라 추정된다. 이 소설은 카리브해의 열대지방을 소재로 한 그리스 비극이며, 종래의 탐정 소설과는 정반대의 형식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은 "거짓된 르포이며 동시에 거짓으로 가득 찬 소설이다. 이는 정말로 일어난 범죄 사건을 다룬 거짓된 이야기이다"라고 이 작품을 평하고 있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는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초기에 구사한 깨끗하고 선명한 필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기의 단순한 구조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최고의 작품은 이 작품과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 두 작품은 사실상 그의 소설 세계 속에서 가장 강도 높은 극적 표현을 구사하고 있는 작품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두 소설은 대령의 좌절과 산티아고 나사르의 죽음을 통해 거짓된 '긴장 상태'를 나타내는데, 이들의 운명은 『숙명론자 자크』처럼 이미 쓰여져 있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 숙명론은 『백년 동안의 고독』과 『족장의 가을』등 대부분의 그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가 보고타에서 출판되기 전날에 보고타 주재 멕시코 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한다. 이것은 당시 콜롬비아의 투르바이 정권이 쿠바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면서, 사상적 이유로 그를 체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다시 멕시코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예를 한껏 빛낼 수 있는 새로운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제 중남미의 한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지식인으로서 선진국과 중남미 사이에 참여하는 것을 작가의 임무로 상정하면서, 이 둘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1981년에 멕시코의 칸쿤에서는 여러 국가의 수뇌들이 모인 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기자 자격으로 참석한다. 여기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친구인 미테랑 대통령은 그의 조언을 받아 선진국과 제 3세계 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새로운 뱡향으로 바꾸게 만드는 중요한 연설을 한다. 또한 1982년에는 칸느영화제 심사 위원으로 참석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영화에의 관심이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는 단적인 예이다. 그의 영화에의 애착은 1948년에 제작된 채플린의 『베르도씨』에 대한 찬사로부터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으며, 이후 그는 1955년에 로마의 영화 실험 기관에 등록을 하고 1963년에 멕시코에서 후안 룰포의 『금으로 만든 닭』의 시나리오를 쓰고, 1965년에는 아르투로 립스테인 감독이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죽음의 시간』이란 작품을 영화화한다. 또한 1979년에는 칠레의 미겔 리틴이 『몬티엘의 미망인』을 영화화하며, 1983년에는 브라질의 루이 게라 감독이 『순박한 에렌디라』를 제작하며, 1987년에는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로시가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영화로 만드는데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러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또한 1983년에 그는 니카라과의 카스티요 콴트라는 정치가의 집을 주제로 다루는 실제 이야기를 허구화시킨 시나리오 『유괴』를 출판하며, 이 작품의 인세를 산디니스타 정권에 기증한다.
노벨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5.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 가르시아 마르케스 후기 작품
1982년 10월 21일에 스웨덴 아카데미는 그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선정되었다고 발표한다. 이는 그의 기대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는 "지금 스웨덴 한림원은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에게 그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상을 줍니다. 따라서 내 경우는 아닙니다"라고 평하면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내게는 불행입니다. 나는 내 사생활이 침해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해 12월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스톡홀름에서 수많은 논쟁의 대상이 된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란 연설문을 읽게 된다. 그리고 157,000 달러의 상금으로 기자 생활을 하면서 꿈꾸어 왔던 《타인 El otro》이란 신문을 창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공포하며, 중남미와 유럽의 잡지와 신문에 계속하여 글을 발표한다. 1986년에 『칠레에 잠입한 미겔 리틴의 모험』이란 현장 취재를 책으로 출판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의하면 이 작품은 "군사 권력의 위험을 비웃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잘 쓰여졌으며, 원래의 목적보다 더 가슴을 메이게 하고, 감동적인 모험을 자신의 감정에 격받쳐 재구성한" 르포이다. 이 당시 미겔 리틴은 체포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피노체트 군사 정권의 혹독한 현실에 관한 영화를 비밀리에 촬영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칠레 일반 보고서』란 이름으로 공개되며, 그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이러한 정치 참여는 핵 위험에 관한 『다모클레스의 대이변』이란 강연회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1982년에 콜롬비아는 투르바이 정권에서 시인 출신인 베탕쿠르 정권으로 바뀌면서 그가 멕시코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의 조국으로 귀국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하지만 1984년 초부터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치적 참여를 잠시 중단하고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는데 전념한다. 그해 8월에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은 자신의 소설을 "아주 열렬히 사랑에 빠진 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인데 그들은 20세 때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결혼을 할 수 없었고, 인생을 마감한 80세 때에는 생의 모든 것을 경험한 후라 너무 늙어 결혼을 하지 못한다"고 요약한다. 이러한 소재를 다른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1985년 12월에 출판된다. 이 연애소설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이미 다루어진 자신의 친척들의 일화를 문학 소재로 잡아 재구성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라카타카에서 전보사로 있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버지와 자신의 자전적 요소를 매우 많이 갖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작품에서 『백년 동안의 고독』의 분위기를 다시 맛볼수 있다. 가령 "그의 어머니는 송아지 털을 깎는 것처럼 그를 면도해야 했는데 이는 아주까리 기름을 달인 약을 다먹게 하기 위해서 였는데......"와 "장남은 자기 아버지처럼 대령이었지만 시에나가에서 일어난 바나나 농장의 대학살에 참여한 것을 수치스럽게 느껴 스스로 그만 두었는데......"와 같은 장면은 대표적이다.
늙음, 쇠퇴, 멸망과 죽음 등과 같이 가르시아 마르케스 소설 속에 내재하고 있던 개념은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다시 핵심적인 요소로 부각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이 작가의 소설세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고 볼 수는 없다는 평을 받았지만, 최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애 소설'이 각광을 받으면서 재조명을 받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이 작품은 노벨상이 악운을 가져온다는 소문을 재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기점으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일반 독자와의 교감을 책이 아닌 텔레비전과 연극을 통해 새로운 의사 소통의 수단을 실험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는 1988년에 『힘든 사랑』이라는 미니 시리즈를 스페인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과 국제 방송망 그룹과의 공동 제작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 해 8월 20일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가 최초로 쓴 극본인 『앉아 있는 사람에 대항한 사랑의 논박』이 상연된다.
1989년 3월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미로 속의 장군』을 출판하면서 다시 소설 세계로 돌아온다. 이 작품은 중남미의 해방자인 시몬 볼리바르가 죽기 직전에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보고타에서 산타 마르타까지 행한 마지막 여행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처음으로 고전적 의미의 역사 소설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작품을 출판하기 전부터 수차에 걸쳐 19세기에 쓰는 것처럼 19세기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의도를 표명한바 있다. 이 소설은 출판 당시부터 많은 논란을 야기했는데, 많은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역사가들은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역사적 소재의 사실성에 대해 찬양했으며, 또 어떤 이는 그가 시몬 볼리바르를 피델 카스트로와 흡사하게 다룸으로써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비방하기도 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92년에 『이방의 순례자들』을 출간한다. 이 단편집은 『백년 동안의 고독』을 출판한 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5년간 살면서 구상하기 시작했으며 유럽에 있는 중남미 인들에게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에 관해 쓴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기억에 의존해 이 단편들을 멕시코에서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단편집에 대한 영감을 받은지 20여년이 지난 1991년 3월에 이 작품에 수록된 이야기들을 다 쓴 단계였지만, 이 기억이 확실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유럽을 여행한다. 그리고 나서 이 기억이 모두 틀린 것임을 알게 되는데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진정한 기억은 기억의 환영 같았다. 반면에 거짓스런 기억은 너무도 그럴듯해서 현실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8개월에 걸쳐 이 단편들을 다시 쓰는 작업을 벌여 1992년에 이 작품을 독자들에게 선 보이게 된다.
이 단편집을 출간하면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의 '돌과 하늘파'를 대표하는 시인인 에두아르도 카란사를 기리기 위해 콜롬비아 정부가 제정한 카란사 문학상을 수여하기 위해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로 돌아온다. 그후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보고타로 돌아오지만, 여기에서 자신이 폐암을 앓고 있다는 것이 판명되어 보고타의 산타 페 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된다. 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는 그 동안의 멕시코에서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의 문학적 토양을 제공해 준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로 돌아온다. 1994년에 그는 5년간의 침묵을 깨고 자신의 거처를 정한 카르타헤나를 다시 소재로 잡아 『사랑과 다른 악마들』을 출판한다. 이 작품은 신부와 광견에 물렸다는 이유로 수녀원 감옥에 갇힌 어린 소녀의 사랑을 그리면서, 어린 소녀 시에르바 마리아가 가톨릭의 엑소시즘의 희생물이 되는 과정을 통해 광견에 물린 소녀와 기존 사회였던 가톨릭 중에서 누가 정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1996년에는 메데인 카르텔의 우두머리인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꾸민 납치 사건을 소재로 『어느 납치 사건』을 발표한다. 르포이자 동시에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여러 개의 납치 사건이 하나의 목적에 의해 구성된 것임을 간파한다. 즉, 콜롬비아와 미국간의 '마약범 인도 협정'을 저지하기 위해 마피아들이 획책한 것임을 파헤치는 것이다.
7.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소설의 소생
이와 같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의 복잡하고 한편의 소설로조차 보이는 삶에서 소설을 형상화함으로써 지식인의 테두리에 스스로 갇혀 버렸던 현대문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다. 즉, 소설의 미래에 관한 참담한 예언이 나돌고 있을 때 그의 민중과의 유대를 꾀할 수 있는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과 비범한 문체를 통해 넓은 대중성을 확보함으로써 아직도 소설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 준다. 바로 이 점이 체코의 소설가인 쿤데라가 "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 인들의 지엽적인 걱정일 뿐이다. 동구나 중남미 작가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서재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 놓은 채 소설의 죽음에 대해 중얼거릴 수 있다는 말인가?"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중성과 소설 미학의 획득은 아마도 세르반테스와 그 중요성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처럼 그의 소설은 "아이들도 만지고 젊은이들도 읽으며 어른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노인은 극구 칭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소설 세계의 환상적 총체성은 중남미 인과 세계인의 정수를 동시에 획득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과 시적 환상의 병치로 구성되어 있다. 즉, 그의 소설은 20세기를 위협한 사악한 요소들을 극적으로 다루면서 강한 도덕적 분노를 표출하면서도 아이러니와 인간의 가치는 영원하다는 신념을 그 기조로 삼고 있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라 일컬어지는 현대 사회의 문학에 분명히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좌표를 형성해 주고 있음이 자명하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연보
1928년: 3월 6일 콜롬비아의 아라카타카에서 출생
1936년: 장학생으로 보고타 근교 도시인 시파키라의 국립중등학교에서 공부를 함.
1946년: 보고타에 있는 콜롬비아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함. 「세 번째 체념」이란 단편이 《엘 에스펙타도로 El Espectador》란 신문에 게재되는데 이후 1952년까지 이 신문에 10편의 단편을 발표함.
1948년: '보고타소 Bogotazo'라 불리는 정치 폭력이 일어나 법학 공부를 그만두고 카르타헤나 대학으로 옮김. 카르타헤나의 《세계 El Universal》란 신문에 셉티무스Septimus란 가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함.
1950년: 대학 공부를 그만두고 바랑키야로 이사함. 여기서 출판되는 《선구 El Heraldo》란 신문에 「기린 La Jirafa」이란 칼럼에 글을 씀. 『낙엽』의 초고인 『집』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함. 이 당시에 현재 부인인 메르세데스 바르차를 알게 됨.
1954년: 보고타의 《엘 에스펙타도르》신문 기자로 일을 함.
1955년: 단편 「토요일 다음날」이란 단편으로 상을 수상함. 「마콘도에 내리는 비를 보고 있는 이사벨」을 출판. 그의 첫 번째 소설인 『낙엽 La hojarasca』를 출판. 생애 처음으로 외국으로 나가게 되며 이후 파리에서 살게 됨.
1956년: 중편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El coronel no tiene quien le escriba』를 탈고.
1957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출판되는 《엘리트 Elite》와 보고타의 《다색화(多色畵)Cromos》란 잡지에 사회주의 국가에 관한 10편의 글을 발표함.
1958년: 카라카스에서 독재자 페레스 히메네스의 몰락을 지켜봄. 메르세데스 바르차와 결혼함. 이해에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이란 단편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을 씀. 보고타의 《신화 Mito》란 잡지에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가 게재됨.
1959년: '중남미 통신 Prensa Latina'에서 일을 하기 위해 보고타로 감. 첫째 아들인 로드리고가 태어남. 단편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을 씀.
1960년: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에서 중남미 통신기자로 일을 함.
1961년: 뉴욕 주재 중남미 통신 부지국장직을 맡음. 하지만 곧 사표를 내고 멕시코로 건너감.
1962년: 둘째아들인 곤살로가 태어남.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함. 광고 회사에서 일을 함. 두 번째 소설인 『불행한 시간 La mala hora』을 출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 Los funerales de la Mam Grande』이 출판.
1965년: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쓰기 시작함.
1967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이 출판됨. 이 해는 중남미 낭만주의 소설의 백미인 콜롬비아가 자랑하는 호르헤 이삭스 Jorge Issacs의 『마리아 María』가 출판된 지 백년이 되는 해이기도 함.
1970년: 벨라스코 Luis Alejandro Velasco의 표류기인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뗏목에서 열흘간 표류하고, 조국의 영웅으로 추앙 받으며 미의 여왕들에게 키스를 받고 널리 알려져 갑부가 되었으나 그 후 정부의 미움을 받아 영원히 잊혀진 표류자의 이야기』를 출판.
1971년: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음.
1972년: 『순박한 에렌디라와 포악한 할머니의 믿을 수 없이 슬픈 이야기 La increíble y triste historia de la cándida Eréndira y de su abuela desalmada』를 출판. 베네수엘라의 로물로 가예고스상을 수상함. 1947년과 1955년 사이에 쓴 11개의 단편을 모아 『푸른 개의 눈 Ojos de perro azul』이란 단편집을 출판.
1973년: 열두 편의 기사가 실린『행복한 무명 시절 Cuando era feliz e indocumentado』을 출판.
1974년:『칠레, 쿠데타와 미국 놈들 Chile, el golpe y los gringos』 출판.
1975년: 8년간의 침묵을 깨고 『족장의 가을 El otoño del patriarca』 출판.
1976년: 『연대기와 취재 Crónicas y reportajes』를 출판.
1977년: 세 편의 신문 기사 성격의 글이 실린 『카를로타 작전 Operación Carlota』 출판
1978년: 『사회주의 국가 기행문 De viaje por los países socialistas』 출판
1981년: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Crónica de una muerte anunciada』 출판
1981년-1984년: 자크 질라르Jacques Gilard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신문기자로 활동할 당시의 글을 수록한 『기사 모음집 Obra periodística』을 스페인의 브루게라 출판사에서 4권으로 출판함.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 「라틴 아메리카의 고독」이란 제목으로 수상연설을 함.
1983년: 시나리오『유괴 El secuestro』를 출판.
1985년: 『콜레라 시대의 사랑 El amor en los tiempos de cólera』 출판.
1986년: 르포 『칠레에 숨어사는 미겔 리틴의 모험 La aventura de Miguel Littín, clandestino en Chile』 출판
1989년: 『미로 속의 장군 El general en su laberinto』 출판.
1992년: 『열두 편의 방황의 이야기들 Doce cuentos peregrinos』 출판.
1994년: 『사랑과 다른 악마들 Del amor y otros demonios』 출판. 희곡 『앉아 있는 사람에 대항한 사랑의 논박 Diatriba de amor contra un hombre sentado』 출판.
1996년: 르포 소설 『어느 납치 소식 Noticia de un secuestro』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