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행스님 (팔달선원 조실)
- “인욕과 보시의 삶은 좋은 인연 만드는 길” -
“대신심·대의심·대분심으로
‘도 깨닫고 말겠다’ 서원 지니고
수행할때 깨달음이 다가옵니다”
*약력
·1921. 2. 21(음) 경기 화성 生
·48년 금산 태고사에서 포산스님을 은사로 출가
·52년 선학원 팔달선원 원장
·64년 선학원 원장
·71~75년 대한불교신문 사장
·74~90년 선학원 이사장
·79~80년 부산 금정선원 원장
·조계사, 동화사, 불국사, 수덕사, 봉은사 주지 역임
·現 수원 팔달선원에 주석.
구름은 한가로이 하늘 가득 들고나니(出入雲閑滿太虛)
원래 참된 상은 한 티끌도 없구나(元來眞相一塵無)
거듭거듭 서쪽에서 오신 뜻 물으니(重重請問西來意)
오직 마당에 있는 잣나무만 가리킬 뿐(唯指庭前一栢樹).
달마대사가 전한 법은 말과 문자가 문득 끊긴 ‘불립문자 언어도단’(不立文字 言語道斷)의 진리입니다. 본래 법이라고 이름 붙여서 설한다는 그 자체가 잘못입니다. 입을 열면 이미 잘못 된 것(開口則錯)이지요. 명(名)과 상(相)에 사로잡힌 것이지요.
그래서 누가 내게 “불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언어도단에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법문을 잘 하지 않아요. 하더라도 미리 준비하지 않고 그때 그때 대중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근기에 맞는 떠오르는 말을 할 뿐이지요. 법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인데 새삼스레 말씀드릴 게 뭐가 있느냐 이 말이죠.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것이 법문 아닌 것이 없어요. 온 세상과 우주에 법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무슨 신통한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후 열반하시면서 “나는 아무것도 설한 것이 없다”고 하신 말씀의 뜻이 여기 있습니다. 성철스님 역시 열반송에서 “평생 많은 사람들을 속였다”고 한 것이 이 뜻입니다. “원래 얻을 것이 없으며, 줄 것도 알 것도 깨칠 것도 없는데 무엇을 설할까 보냐” 이런 의미지요. 법문이란 것도 그 사람의 근기에 맞아야 지혜의 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그릇에 ‘발 씻은 물’, 꿀, 밥, 오줌을 넣으면 오물통, 꿀단지, 밥통, 오줌통으로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사람에 맞는 방편을 설할 때 ‘참 법문’이 되는 겁니다.
한 생을 버려서라도 안되면 누생을 버려서라도 반드시 도를 깨닫고 말겠다는 굳은 서원을 지니고 수행할 때 비로소 깨달음이 다가옵니다. 그때는 조금만 일러 주어도 ‘법의 문(法門)‘이 열리고, 심지어는 돌부리에 채여도 깨닫는 것입니다. 결국 법이란 자기가 노력해서 스스로 얻는 것이지, 남이 떠다 먹이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수행 체험담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도 같습니다. 수행의 3요소는 잘 알다시피 대신심(大信心), 대의심(大疑心), 대분심(大忿心)입니다. 나의 경우는 신심으로부터 수행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생겼습니다.
나는 남들보다 늦게 출가를 했어요. 집안이 넉넉해서 화학공장을 경영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해 보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나이가 들어도 술·담배도 하지 않았고 세속적인 즐거움에는 초연한 편이었어요. 평소 몸이 약해 결혼도 하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공장에서 염소가 터지는 바람에 폐가 나빠졌어요. 당시 폐병에는 약이 없어서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었죠.
요양이나 할 생각으로 금산 태고사를 찾았어요. 그때가 28세. 태고사에는 나의 첫번째 은사가 되신 포산(飽山)스님이 계셨어요. 포산스님을 뵙고 토론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10권을 숙독하는 등 철학과 문학에 나름의 소양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던 터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처음 불교를 접하다보니 호기심도 들고 지적인 욕구도 강하던 터라 토론은 2주일 정도 계속되었어요. 결과는 내가 읽고 들은 철학·문학이 불교에는 필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예요. 철학·문학 등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 위대하다는 서양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윤리도덕 정도의 가르침이었어요.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내 병이 업력으로 인해 생겼음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 역시 공업(共業)임을 알게 되었어요. 스님은 업장을 소멸하고 건강을 찾고 싶거든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를 열심히 외우라고 하시더군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성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잠도 안 자고 앉아서 부지런히 외웠어요. 아침·저녁엔 옆방 스님들과 참선도 같이하면서 약 5주 동안 일심으로 모다라니를 외웠습니다.
하루는 다라니를 외우고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유명한 일본인 내과과장인 나리 타가 나타났어요. 내몸 이곳 저곳을 검진하고나서 “다 나았다. 아주 기쁘다”고 말하더군요. 이 때 앉은 채로 꿈이 깨었는데, 날아갈 듯이 몸이 가뿐했어요. 문득 무언가 먹고 싶다는 생각에 40리나 떨어진 연산시장으로 뛰어내려갔어요. 그전에는 입맛이 없어서 공양도 겨우 했는데, 시장에서 국수 떡 등을 배불리 먹었어요. 그러고 나니 기운이 솟는게 몸이 나은 것을 느꼈지요. 불법의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한 순간이었어요.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한 후 포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습니다. 포산스님은 앉아서 10리 밖의 일을 보고 듣고 하실 정도록 도가 높았어요. 포산스님은 ‘옴마니반메훔’ 6자대명왕진언을 외우셨는데, 모다라니를 계속 외웠어요. 스님에게서 주력수행법과 함께 생식·벽곡 등을 하는 신선도를 배우기도 했어요.
당시 태고사에는 5명의 스님이 계셨는데 모두 개성이 강하고 수행에 열심이었어요. 숙명여대 교수를 지낸 정남조 스님과 땡초라고 자임하던 스님, 한학자 출신 스님등 모두 학식도 높고 배울 점이 많은 분들이었어요. 그중 땡초스님은 묵언정진으로 ‘벙어리 시늉’을 계속 했어요. 나는 그걸 따라 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어렵더군요. 얼굴도 안 변하고 벙어리 흉내를 내는 것이 묵언정진보다 수십배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 스님에게서 ‘탁발(托鉢)은 저렇게 하는구나’를 배웠지요.
6.25전쟁 때는 거지 생활을 곧잘 했습니다. 여름에는 남산에, 겨울에는 한강변에 움집을 지어놓고 거지 생활을 했어요. 솥단지를 걸어놓고 깡통에 담아온 음식을 모두 넣고 끓여요. 그러면 병도 안 생기고 참 맛있어요. 나는 부잣집에 태어나 잘 먹고 호강하며 지냈지만 깡통에 든 밥을 먹으면서도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어요. ‘일체유심조’라는 진리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가난한 사람일수록 없는 살림에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부자는 인색한 것으로 부자가 되는가 보다’했지요. 탁발은 수행을 방해하는 가장 큰 독소인 아만과 아집을 없애고,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주는 공덕이 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53년경에는 서울 선학원에서 당시 조실로 계시던 금오스님을 은사로 모시게 되었어요. 당시 만암스님이 종정으로 계시면서 수행승(비구)과 교화승(대처)의 거주 사찰 지정문제로 종단내의 의견 대립이 심각했습니다. 이해 8월 선학원에서 열린 제1차 수좌대회가 파한 뒤 효봉, 동산스님 등과 함께 정화의 실천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지요.
금오스님은 늘 나보고 참선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당시 주력수행에 몰두하던 터라 참선이 잘 되지 않았어요. 몇년 뒤에는 마곡사 토굴에서 정진했는데 주력을 통해 삼매나 정(定)에 드는 것이 익숙해졌습니다. 마치 참선을 할 때 화두를 참구하듯이 항상 외우면서 수행의 요체로 삼았지요. 마곡사 토굴에서 1년정도 지냈는데 느낌이 이상해 내려가 보니 정화운동이 시작되었어요. 봉은사 주지 등을 맡으며 정화운동에 참여했어요.
당시 선학원에는 경지가 높은 쟁쟁한 스님들이 많아서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동산스님은 복이 많은 분이었고, 효봉스님은 덕이 많은 분이었어요. 금오스님은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동진출가한 청정 비구이셨죠. 큰스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화두는 어떻게 드느냐 하면 일체 경전을 다 본 후에 의심을 내라’는 등의 결론을 내렸어요.
그러던 중 1968년 10월8일에 금오스님이 세수 73세로 입적하셨어요. 이후에는 선학원 이사장으로 계시던 혜암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했어요. 혜암스님은 어디서나 설법하여 사람들을 교화하셨어요. 70세가 넘도록 매일 새벽 108배의 참회예불을 중단하지 않으셨죠. 특히 신도나 청소년을 대할 때마다 신의와 효도를 강조하여 도의(道義)재건운동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혜암스님 역시 나를 참선으로 이끌기 위해 애를 쓰셨어요. 하루는 스님께서 <반야심경>에 대해 물으며 ‘부처 불(佛)자 보다 더한 곳이 있으니 일러라’ 하셨는데, 나는 답을 못했어요. 그로부터 ‘내가 안다는 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주력수행만 해서는 안되겠구나’ 느꼈지요.
그때부터 참선수행에 본격적으로 몰두했는데 <반야심경>의 이치를 깨칠 수 있었어요. ‘마음이 곧 부처(心則是佛)‘ 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예요. 혜암스님은 <반야심경>에 대한 나의 답변이 옳음을 인가하고 ‘효일(曉日)’이란 호와 전법게를 내리셨어요.
은산철벽이 터지면 화두가 술술 풀려요. 경전과 선어록을 봐도 모르던 부분이 저절로 환하게 됩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별 것 아닌 것이 수행자들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오도의 세계’ 첫 관문을 통과한 뒤에는 ‘놓고 쉬는’ 공부를 해야 해요. ‘내가 깨쳤네, 내가 큰 스님입네’하는 상을 일체 버려야 해요.
참선이란 것은 본디 내 마음자리를 바로 보는 거예요. 거울의 때를 벗기면 자기 얼굴이 환하게 보이듯이 본래 나만 남는 거예요. 그 경계에 들어서면 춤도 춘다고 하지만, 그때부터가 중요해요. ‘안다고 하는 그 생각’ 마저 버려야 해요. 백양사의 서옹스님처럼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어야 해요. 참도인은 어린애처럼 즐거울 뿐 아무런 상이 없는 거예요. 보림(保任·保護任持의 준말로 깨달은 이가 그 경지를 잘 보호해 지켜가지는 것)이란 게 딴 게 아니예요. 수억겁 동안 쌓인 습을 지워내는 작업이예요. 미세한 식·색·명·리(食色名利)·잠 등 오욕락을 제거하는 것이지요. 죽을 때까지 쉬지 않아야 해요.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배부르게 먹으면 성욕이 발동하고, 권력을 잡으면 재물을 모으려 해요. 그래서 밥을 적게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요.
50여년의 수행으로 얻은 결론은 ‘절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마거사의 불이법문(不二法門)과도 같은 것이죠. 선악과 생사 등 모든 가치는 둘이 아니요, 그 어떠한 것도 절대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의 상대성원리를 발표했지만 불법은 정신과 물질, 모든 것이 절대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이 보는 선악 등 온갖 분별이 절대성을 갖지 못해요. 정치인들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에 처했다고 탓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예요. 그렇게 될 만한 이유가 쌓여서 그렇게 된 것이란 말이지요. 누구의 잘 잘못을 따질 필요가 없어요. 오욕락이 쌓이고 탐진치가 모여 벌어진 일이니까요. 업력으로 주고 받는 것이기에 연기론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인연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착하게 인욕과 보시를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온갖 나쁜 일 저지르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두루 행하라.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는 일곱 부처님의 공통적인 계율, 즉 칠불통계(七佛通戒)가 불법 수행의 요체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정화 당시 효봉스님의 사제인 향봉스님이 조계사 법당 안에서 모 스님과 서로 주지를 안 맡겠다고 싸워 재판에 회부된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언론에서도 청정 비구의 무소유 정신의 상징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했어요. 이것이 발단이 되어 정부쪽에서도 비구측의 손을 들어주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정화가 끝나고 40년도 안 되었는데 당시의 청정비구의 서슬퍼런 지계의지가 많이 희석되지 않았습니까. 무소유 정신도 약해지고 호사스런 생활로 불자들의 비판을 받는 스님마저 생겨나고 있습니다. 선각들의 훌륭한 전통은 잊어버리고 불교가 형식화 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수행의 전통을 되살려야만 우리 사회를 이끄는 정신의 고향으로 불교가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점 명심하시고 불자들은 ‘참 자기’를 찾는 일대사에 진력하시기 바랍니다.
현대불교신문 김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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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버려라’했는데 왜 달라고만 합니까?
현대불교신문
지상백고좌: 범행(梵行) 스님(팔달사ㆍ법주사 조실)
최신 가요가 울려 퍼지고 올 겨울 유행을 예고하는 형형색색의 옷과 액세서리가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수원 팔달로 로데오거리. 젊은이들의 들뜬 열기로 가득한 로데오거리에서 한 발만 물러서면 도심수행도량 팔달사를 만날 수 있다.
길 하나 차이로 거리의 번잡스러움은 간데없고 산사의 고요만이 팔달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곳 팔달사를 40여 년간 지키고 있는 조실 범행 스님은 전날 법주사에서 결제법어를 내리고 온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법을 청하는 자리를 물리치지 않았다.
진성은 물들지 않아 본래 원만한 성품이고(眞性無染本自圓性)
다만 망령된 생각을 여읜 즉 부처와 같으니라(但離妄念則如如佛)
어제 법주사에서 결제에 드는 수행자 200여 명을 만나고 왔습니다.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마음이 든든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수행자들이 결제 기간 동안 ‘본래 자기’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게송을 들려줬습니다.
범행 스님은 욕심이 고통을 부르는 원인이며
결제에 들지 않는 재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본성(本性)은 본래 부처임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무명(無明)에 싸여 이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살기가 어려울까요?
처음 지구가 만들어졌을 때 이 지구는 너무나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땅에는 곤충과 동물들이 자유롭게 살고 초목 과수도 아름드리 우거져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과일, 좀 더 많은 곡식, 좀 더 많은 고기를 원하기 시작하면서 농약을 쓰고 비료를 주고 땅을 파헤치고 하면서 땅이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살아가는 기반인 땅이 죽는데 어떻게 사람이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고달픈 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애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망상(妄想) 공상(空想)에 사로잡혀 탐진치(貪瞋癡)와 오욕락(五欲樂)에 집착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욕심을 끊지 못하면 괴롭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 이뤄지지 않으니 성내는 마음, 즉 진심(瞋心)이 생기게 되고 이 진심을 참지 못하고 폭발해서 어리석은 마음 즉 치심(癡心)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이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제 스스로의 욕심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욕심대로 안 되면 부처님께 ‘무엇을 해주십시오’ ‘무엇을 이뤄주십시오’ 하고 자꾸 바랍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버리라’는 것인데, 왜 자꾸 부처님께 바라고 이루려 합니까?
하루 밥 세 그릇 이상 있으면 오히려 귀찮은 겁니다. 재산을 잔뜩 집에 쌓아놓으면 도둑맞을까 걱정만 되잖아요? 내가 노력해서 하루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고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은 속을 썩게 마련이고, 늘 ‘살기 힘들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행복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탐심(貪心)을 내지 말라’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을 쉬어야 합니다. 나보다 높은 곳만을 바라보며 조금 더 가지려 하지 말고, 우리가 사는 진정한 의미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불자들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아야 합니다.
계를 지키고 모자란 사람에게 늘 보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바로 들여다보고 인욕하며, 수행에 힘써 마음을 고요하게 함으로써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무조건 부처님께 복을 구할 것이 아니라 없는 사람에게는 보시하고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나눠주려고 해야 합니다. 또한 늘 수행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최근 수행이라고 하면 참선이나 간화선만이 답이라고 생각하고 그 외에는 다 외도로 취급하는 참선지상주의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佛家)에는 참선 외에도 많은 수행법이 있지요. 저는 그동안 수차례 법문을 통해 제가 불문(佛門)에 들어와 수행했던 경험을 얘기했습니다.
저는 부잣집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그런데 몸이 너무 약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술 담배도 멀리한 채 화학공장을 경영했습니다. 비누를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하루는 실험을 하다 공장에서 염소가 터지는 바람에 폐가 나빠졌어요. 우리 집안은 아버님과 두 형님, 작은어머니까지 모두 폐병으로 돌아가셨기에 폐병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컸습니다. 이렇게 살다 젊은 나이에 각혈하며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닐까 너무나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에 뛰어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구사일생 살아난 거예요. 그때 내 나이가 28살이었어요.
그 후 요양이라도 할 생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10권을 싸들고 금산 태고사를 찾았어요. 당시 태고사에는 포산 스님이 주석하고 계셨는데, 스님과 3주 동안 문학과 철학에 대해 토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부처님법 앞에서는 그동안 내가 배운 문학이나 철학이 가진 한계를 뚜렷이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출가를 결심했지요.
출가 후 포산 스님은 저에게 업장을 소멸하기 위해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佛頂心觀世音菩薩母陀羅尼)’를 외우라고 하셨습니다. 생사의 위대한 법을 일러주신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이 가고자 잠도 자지 않고 다라니를 외웠습니다. 그렇게 5주 정도 지났을까, 하루는 비몽사몽간에 다라니를 외우고 있는데 주치의였던 일본인 의사가 나타나 ‘이제 다 나았구나. 아주 잘 됐다’고 말하더군요. 깜짝 놀라 깼는데, 정말 거짓말 같이 기운이 나고 아픈 것도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가피력으로 지금껏 건강하게 살고 있는 거예요.
그 후 서울 선학원에서 조실로 계시던 금오 스님을 은사로 모시게 됐는데, 스님은 늘 ‘참선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주력 수행에만 매진했던 터라 처음엔 참선이 잘 되질 않았어요. 그래도 스승의 말씀을 따르고자 틈틈이 참선을 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공주 마곡사의 토굴에서 정진하게 됐는데, 그때 참선이나 주력수행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저는 이러한 제 경험을 바탕으로 늘 불자들에게 자신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찾아 매진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통한다고 말합니다. 염불이든 주력이든 참선이든 자기에 맞는 수행법을 찾아 지극한 마음으로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맞는 수행법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실 겁니다.
우선, 공부를 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도(道)에 이르는 길입니다. 불자라고 하면서 부처님 생애도 제대로 모르거나 경전 한 줄 읽지 않는다면 어찌 큰 가르침을 얻겠습니까? 부처님 말씀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참선한다고 벽만 보고 있으면 깨달음이 얻어집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을 열심히 읽다보면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基心)’이라는 한 구절을 보고도 자신의 마음자리를 바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스님들이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경전이나 선어록을 봐도 모르던 부분이 저절로 환하게 밝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깨쳐야 합니다. 다른 종교에는 ‘깨친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깨친다’는 것은 인연법을 제대로 안다는 것과도 같은 말입니다. 흔히 불자들은 ‘인연이 없다’ ‘인연에 따라 이뤄진다’고 말을 하며 인과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인연법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인연, 즉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緣)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因果)라고 하지요. 인과란 철저한 것입니다. 미래가 궁금하면,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과거가 궁금하면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똑바로 보면 됩니다. 불교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신통력 있는 종교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알고 보면 이렇게 간단한 이치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인과의 원리를 잘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짓는 모든 것이 인연이 되고 업이 되기 때문이지요.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저 사람이 없어져야 내가 행복할텐데”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오늘날 수천수만 가지의 직업이 있는데, 그 직업들 중 홀로 존재하는 직업이 있을까요?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내가 자동차를 타고, 그걸 또 고쳐주는 사람도 필요하지요. 여기에 자동차가 달릴 수 있기 위해서는 석유를 캐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그런 겁니다. 모든 직업이 존재해야 하고 원만히 굴러갈 때 우리네 삶이 올바르게 영위됩니다. 우리가 화합해서 더불어 잘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인과의 법칙을 깨닫기 위해서는 한 생을 버려서라도, 한 생에 이룰 수 없다면 누생(累生)에 걸쳐서라도 반드시 도를 깨치고 말겠다는 굳은 서원을 가져야 합니다. 그저 부처님께 복 빌고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참불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수행하십시오. 그것만이 크나큰 부처님의 자비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하루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범행 스님은?
“난 풀들을 만나는 게 참 좋아요. 풀들이 날 보고 ‘스님,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것 같잖아요. 그래서 난 이 풀 한 포기를 뽑거나 가지를 칠 때도 ‘얘들아, 미안하다. 이걸 잘라야겠구나’하고 얘기해줘요.”
전날 법주사까지의 장거리 이동과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범행 스님은 기자를 데리고 직접 사찰 곳곳을 안내해주셨다. ‘
호랑이 담배 피는 모습’이 담긴 사찰 벽화와 씨앗으로 심어 지금은 아름드리로 자란 은행나무, 전국 곳곳에서 모종을 얻어와 심고 가꾼 백목단ㆍ작약 등을 일일이 일러주던 스님은 “거짓 없는 자연처럼 사람들도 자신의 본성을 바로 보고 바르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여든 다섯이라는 세수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처럼 맑고 깨끗한 얼굴빛을 간직한 스님에게 건강 비결을 여쭙자 “특별히 건강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오후불식하는 것이 건강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답하셨다.
1921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스님은 48년 금산 태고사에서 포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55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55년 봉은사 주지, 56년 선학원 중앙선원 원장, 57년 서울 조계사 주지, 68년 불국사 주지, 71년 대한불교신문사 사장, 75~91 재단법인 선학원 13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현재 수원 팔달사와 속리산 법주사 조실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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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한담) 법주사 조실 범행스님
"나는 간화선(看話禪.화두를 방편으로 하는 참선)을 좋아하지 않아.간화선을 해서 깨쳤다고 해봐야 불법의 전통을 전해주고 받을 뿐 일반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모르는 사람에겐 선문답이 동문서답(東問西答)일뿐 아무 소용 없어"
첫마디부터 심상치 않다.
선불교를 표방해온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간화선을 일언지하에 부정하다니..중국의 육조 혜능에서 비롯돼 경허,만공,성철 등 한국의 대선사들이 한 점 의심없이 취했던 수행의 방편이 아니었던가.
지난 4일 오후 수원 화성(華城)의 남쪽문인 팔달문 인근 팔달사(八達寺) 경내에서 만난 범행 스님(梵行.80.법주사 조실)은 이렇게 간화선에 대한 비판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48년 금산 태고사에서 포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금오 스님(1896~1968)과 혜암 스님(1879~1944)의 지도를 받았던 노장(老長)이라 더욱 뜻밖이다.
"불교는 선(禪)으로 가면 아무 말도 필요 없고 임제종의 할(喝)과 같은 소리를 꽥꽥 지를 필요도 없어.문수보살과 대화하던 유마거사가 대답 대신 "양구"(良久)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게 참 기막힌 법문이었지"
"양구"란 "양구부대(良久不對)"의 줄임말로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뜻.말없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범행 스님은 "선문답이 원래는 기막히게 좋은 얘기지만 보통 사람은 몇십년을 노력해도 그걸 모른다"며 "일반 대중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노장은 그래서 석가모니부처가 수행했던 여래선,묵조선을 방편으로 삼아 존재의 실상을 찾는다고 했다.
화두로써 의심을 풀어가는 간화선과 달리 묵조선은 화두를 갖지 않고 묵묵히 앉아서 모든 생각을 끊고 좌선하는 것. 여래선은 부처의 수행법으로 달마대사가 전한 최상의 선을 이른다.
그러나 간화선이나 조사선을 옹호하는 측에선 여래선은 여래의 교설(敎說)에 의거해 깨닫는 선이며 문자의 알음알이에 떨어져 달마가 전한 진짜 선미(禪味)에이르지 못한다고 비판해왔다.
"나는 법문할 때 (참선에 들기 전에) 화엄경까지는 보라고 해.사교입선(捨敎入禪.교를 버리고 선에 듦)이라지만 버릴 교(敎)가 있어야 버릴 것 아니야.교,즉 부처님의 말씀은 도에 이르는 길이야.길을 모르고서 어떻게 목적지에 도달하겠어" 그렇다면 조사선으로는 안된다는 것일까.
범행 스님은 "자성(自性)은 번뇌가 끊어지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라며 "참으로 깨친 분이라면 누구를 만나도 이야기가 통한다"고 강조했다.
부처와 보살이 갖는 여섯가지 신통력인 육신통(六神通)의 마지막 단계인 누진통(漏塵通.번뇌를 끊는 지혜를 체특한 신통력)까지 갖춰야 성불했다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육신통 중에 타심통(他心通)이라는 게 있어.남의 마음상태를 아는 능력이지.아주 깨친 분이라면 누가 뭐하러 자기를 찾아왔는지 이 타심통으로 안단 말이야.부처님은 물어보지않고도 누가 왜 찾아왔는지 다 고 처방했거든.그런데 낮은단계인 타심통도 못하면서 깨쳤다고 할 수 있겠어" 참 신랄한 비판이다.
일제때 경기도 화성의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난 노장은 젊은 시절을 화려하게 보냈다.
양조장,정미소,양복점,화학공장 등 여러가지 사업도 해봤고 인물도 훤해서 한국여자는 물론 일본 여자들까지 시집오려고 줄을 섰다는 것.그러나 노장은 여색이나 술,담배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보통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어도 문학이든 철학이든 책은 부지런히 읽었다고 했다.
"28세때 화학공장 폭발사고로 폐를 상해서 요양차 태고사에 갔다가 포산 스님이 가르쳐준 "관세음보살모다라니주(呪)"를 열심히 외워서 병이 씻은 듯이 나았어.그 길로 출가를 했고 나중에 금오.혜암 스님한테 갔지.두 분이 조사선을 하라고 그렇게 권하셨지만 난 안했어" 그래도 혜암 스님은 당시 범행 수좌한테 "효일(曉日)"이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를 내렸다.
옛날 조사의 게송을 놓고 문답을 주고받으며 법거량을 한 뒤의 일이다.
조사선과 여래선도 결국은 이렇게 만나는 것 아닐까.
"이 세상에 부처가 아닌 것은 없어.조그만 모기나 파리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어.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 조그만 곤충들이 알낳고 새끼낳고 후손을 퍼뜨리는 걸 보면 알 수 있어.식물도 낫이나 도끼를 들고 가면 벌벌 떨어. 눈에는안 보이지만 전파현미경 같은 것으로 보면 보일 게야"
노장은 "몸 안의 벌레가 사자를 죽이듯 이 세상에 절대 강자란 없다"면서 "미국이 자기 입장만 내세우며 전쟁하는 건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팔십 노구에도 믿음을 굽히지 않고 진지하게 설명하는 노장의 의지가 참 꼿꼿하다.
마땅치 않은 일은 법상(法床)에서조차 용납하지 않는 그다.
"가진 것이 없어도 잘 살려면 자족(自足)이 최고야.다툼을 해서라도 많이 가지려면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하잖아.그러니 적은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 중요하지" 목욕탕에 가야겠다고 일어서던 노장이 툭 한마디를 더 보탰다.
"신여취말(身如聚末) 심여풍(心如風)".몸은 먼지를 뭉쳐놓은 것과 같고 마음은바람과 같으니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일주문 바깥으로 나서는 노장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수원=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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