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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희·조화태(1995). 『교육철학』. 서울: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pp. 7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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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교육의 개념
개 관
교육의 개념을 명확히 밝히는 일은 교육을 계획하거나 연구하고자 할 때 일차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문제이다. 교육철학자들은 교육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는 일을 핵심적인 과제의 하나로 삼아 왔다. 그러나 교육의 개념은 학자들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되어 왔으며, 교육의 개념을 둘러싼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이 장에서는 교육의 개념을 정의하는 일이 어떤 성격의 일인가를 알아보고, 교육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연구문제
1. 교육의 개념 정의가 왜 필요하며, 문제가 되는지를 이해한다.
2. 단어의 의미나 개념을 정의하는 일의 성격을 이해한다.
3. 개념 정의의 여러 가지 방식을 이해한다.
4. 교육에 관한 전통적 개념 정의의 유형을 이해한다.
5. 교육의 개념 정의와 가치관의 관련을 이해한다.
6. 교육의 개념적 요소를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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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교육의 개념 정의의 필요성과 중요성
교육을 계획하거나 연구해 나가는 데 있어서 “교육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첫 번째 질문이다. 교육을 하고자 하면서 또는 교육에 대한 연구를 하고자 하면서 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은 마치 아무런 설계도 없이 건물을 지으려 하는 것과 같거나, 또는 남산을 구경하고자 하면서 남산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비단 교육을 계획하거나 교육연구를 시작하는 마당에서만이 아니라, 교육을 하는 중간에도 그리고 교육을 마친 다음에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이다. 교육이 존재하는 한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계속해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며, 그것은 곧 그 질문이 교육을 어떻게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교육학 연구라는 것 자체가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교육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찾기에 앞서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몇 가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다른 답변이 제시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X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선 X라는 단어의 뜻이나 개념을 묻는 것일 수 있으며, X의 성격이나 특징, 또는 X의 가치나 목적, 그리고 X를 구성하는 요소나 조건을 묻는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이 질문은 인생이란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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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는 의미나 뜻을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삶의 가치나 목적을 묻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성이라든지 존재의 의미 등을 묻는 것이라 할 것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은 우선 교육이라는 말의 뜻을 묻는 것일 수 있으며, 그것의 목적이나 가치, 또는 성격이나 특성을 묻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교육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에 충분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교육이라는 말의 의미에서부터 교육의 성격, 목적, 요소, 작용 등이 종합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장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교육이라는 말의 개념이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교육의 개념은 글자 그대로 ‘교육’이라는 말의 뜻을 밝혀 줌으로써, ‘교육인 것’과 ‘교육 아닌 것’의 구분을 가능하게 해주고, 교육의 성격과 목적, 그리고 요소와 작용 등을 이해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우리는 교육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미 잘 알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교육’이라는 말을 의미의 혼선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교육이 무엇인지, 즉 교육의 개념이 무엇인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사람은 누구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해 나가기 위해 교육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사람은 좋은 교육을 받았다”,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등의 표현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으며 그 의미를 이해한다. 물론 이러한 예 이외에도 ‘교육’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며, ‘교육’이 포함된 용어들 역시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학교교육, 가정교육,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직업교육, 성교육, 여성교육, 인구교육, 환경교육, 종교교육, 정신교육, 사회교육, 국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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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교육, 원격교육, 입시교육, 인간교육, 도덕교육, 주지주의교육 등 수많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별다른 의미상의 혼란 없이 이들 단어들을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교육’이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교육’이라는 말의 뜻을 새삼 문제 삼을 필요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가 교육이라는 말을 일상생활 속에서 그 의미를 잘 알고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사용하고 있는 ‘교육’의 의미는 무엇인가? 막상 ‘교육’이라는 말의 의미를 명확히 나타내고자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우선 명확히 ‘교육’의 의미를 규정하기도 어렵거니와, 규정한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의 서로 다른 정의를 내리게 됨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성인이 미성숙자인 아동을 가르치는 것’으로, 혹자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혹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과정’으로, 혹자는 ‘사회 문화의 전달과 습득의 과정’으로, 혹자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교육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다양한 개념 정의에 부딪혔을 때 그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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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정의의 공통적인 특성을 가려내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서 예를 든 일상적 대화 속에서 사용되는 교육이라는 용어는 바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서의 의미 이상을 담지 않고 사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모두 ‘교육’일까?
‘교육’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전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사전을 통하여 확인해 볼 수 있는 ‘교육’의 일반적인 의미 규정을 사전적 정의 또는 일상적 의미에서의 정의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의 정의는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건 잘잘못을 평가하지 않고 폭넓게 교육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서술적 정의 또는 가치중립적 정의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을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닌다. 우선 교육의 개념을 너무 넓게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교육과 교육 아닌 것의 구분을 어렵게 만든다. 다시 말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의 범위가 극히 넓은 만큼, 교육 아닌 것이 거의 없게 된다. 그리하여 개나 고양이에게 오줌가리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교육’이 되며, 결국에는 ‘교육’이라는 말과 ‘훈련’이라는 말은 서로 구분될 필요가 없는 말이 되고 만다. 물론 교육의 의미를 이처럼 넓게 규정할 수도 있지만, 넓으면 넓을수록 그 말이 갖는 애매모호성은 커지게 마련이며, 언어생활에서 효용성 있는 의사전달의 매개체로서 사용되기가 어렵게 된다. 또한 이와 같은 정의는 평가적인 측면을 빠뜨리고 교육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무엇이든 가르치고 배우기만 하면, 또한 아무렇게나 가르쳐도 배우기만 하면 ‘교육’이 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다만 무엇인가를 배우고 가르쳤다고 해서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듯이, 배우고 가르치는 것만이 ‘교육의 필요충분조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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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하지는 않는다. 가령 나쁜 짓을 가르친다거나 환각제를 복용시켜 무엇인가를 배우게 한다면 그러한 것들을 ‘교육’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따라서 ‘교육’이라는 말을 보다 만족스럽게 정의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다른 요소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면 과연 어떤 요소가 포함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교육’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많은 경우에 사용한다. 그리고, 그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육은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여러 가지 뜻과 조건을 함축하면서 사용된다. 예컨대, “대학까지 다녔다고 해서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 “교육은 동물들을 훈련시키는 것과는 다르다”, “교육의 전형은 학교교육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다운 인간을 길러내야 교육이라 할 수 있다” 등의 예들에서 볼 수 있듯이, ‘교육’은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것’ 이상을 의미하고 있으며, 형식화되고 조직화된 활동, 인간을 대상으로 한 활동, 그리고 바람직한 무엇인가를 포함하는 활동 등을 그 개념 속에 함축하고 있다.
‘교육’이라는 말이 이와 같이 바람직한 무엇인가를 함축하는 용어로서 사용될 때,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바람직한 무엇’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서의 교육이 아니라,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무엇을 포함하는 것으로서의 교육은 그 의미가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정의된다. 그리고 그러한 까닭에 일상적인 대화의 수준을 벗어나 교육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되는 경우, 교육의 개념에 있어 서로간에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며, 그런 까닭에 대화에 혼선이 일어나는 경우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개념적 혼란은 교육을 계획하거나 탐구하고자 할 때, 극복해야 할 첫 번째 문제라고 할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을 추구할 때, 우리는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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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규정이나 합의가 없이 정의를 이루어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정의하거나 합의하지 못하면서 교육을 제대로 이루어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육을 하고 있는 많은 경우, 우리는 교육의 정의를 명확히 하지 못한 채로 교육을 하고 있으며, 결국 그만큼 교육을 맹목적으로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육의 개념이 명확히 규정된 다음에야 비로소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교육이란 우리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실제적 행위이며, 교육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 것은, 일단 하나의 개념적 문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삶의 의미를 명확히 알기 이전에도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교육의 개념적 문제가 명확히 해결되지 않더라도 교육은 우리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에 따라 보다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듯이, 교육이 추구하는 목표와 의미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고 그를 실현해 나가기 위해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게 되는 것이다.
교육적 의미체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활동으로서의 교육철학은 그 주요한 기능으로서 언어의 의미와 그 논리적 관계를 밝히는 분석적 기능을 갖는다. 따라서 ‘교육’의 개념을 명료하게 분석하고 밝히는 일은 교육철학자들의 핵심적 과제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교육의 개념을 명료하게 정의함으로써 교육에 대한 개념적 혼란을 해소하고, 교육과 교육 아닌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또한 교육활동을 평가하게 함으로써, 교육적 판단과 행위의 기본적 방향과 규칙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철학자들도 교육이 무엇인가에 대해 각기 다양한 설명과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설명과 정의는 오히려 ‘교육’의 개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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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개념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러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언어와 언어의 의미, 그리고 개념과 개념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3.2. 언어와 의미, 개념과 개념 정의
3.2.1. 언어와 의미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에 대한 서술을 하며, 서로 간의 의사소통을 한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단어와 단어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며, 단어는 곧 의미의 최소단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 단어란 의미를 지닌 소리 또는 글자의 덩어리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단어의 연결을 통해 문장을 만들고, 문장을 통해 서로 간의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언어의 기본 단위인 단어는 어떤 사물이나 대상 또는 의미를 지칭하기 위하여 부여되는 것으로서, 어떤 사물을 어떤 단어로 지칭할 것인가 하는 것은 순전히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임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꽃이라는 사물을 ‘꽃’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은 사물과 이름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것을 다른 것들과 구분하여 ‘꽃’이라고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꽃이라는 사물을 ‘꽃’으로 부르지만, 영미인들은 ‘flower’로, 독일인들은 ‘blume’로, 중국인들은 ‘花’로 부른다는 사실에서 단어는 임의적으로 어떤 대상을 지칭하여 부르는 상징적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리말로 꽃을 반드시 ‘꽃’으로 불러야만 했던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이런 까닭에 영미인들이 꽃을 ‘flower’로 부르는 것이 틀린 것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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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적으로 어떤 대상이나 특성을 지칭하여 부르는 상징적 기호로서의 단어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외연(denotation)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포(connotation)라는 것이다. 외연은 그 단어가 가리키는 구체적 적용 대상물들이고, 내포는 그러한 대상물이 갖는 공통적 특성을 말한다. 예컨대, ‘행성’이라는 단어가 있을 때, 그 단어가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대상물들, 즉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등은 외연을 구성하며, 이들 대상물들의 공통적 특성, 즉 태양의 주위를 타원의 궤도를 그리며 운행하는 비교적 큰 천체라는 특성이 곧 내포인 것이다.
어떤 단어의 의미 또는 개념이란 곧 그 단어의 내포를 가리키며, 따라서 개념을 정의하는 일은 결국 그 단어의 내포를 명확히 규정하는 일이다. 내포란 곧 한 단어가 적용되는 대상물들이 갖는 공통적 특성 또는 보편적 속성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어떤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물들이 지니는 보편적 속성은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어떤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물들이 갖는 보편적 속성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다른 설명이 있다. 하나는 실재설(實在說)이라는 것으로서, 그러한 보편적 속성이 어떤 형태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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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삼각형을 삼각형이게 하는 보편적 속성이 존재하며, 그런 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삼각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유명한 이데아론은 이와 같은 실재설의 대표적인 예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들의 원형, 즉 이데아는 이데아의 세계에 따로 존재하며, 우리가 보는 사물들은 단지 그러한 이데아의 반영일 따름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데아의 세계가 따로 있으며, 보편적 속성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실재성이 갖는 관념성 또는 허구성의 문제점은 ‘실체화(實體化)의 오류’로 일컬어진다.
실재설과는 다른 하나의 설명은 성향설(性向說)이라는 것으로서 이는 보다 현대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성향설에 의하면, 어떤 단어의 대상물이 갖는 보편적 속성이란 자연적으로 존재하거나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단어에 대해 갖는 인지 반응이나 습관화되어 형성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사람’이라는 단어의 경우, 사람을 사람으로서 성립시키는 보편적 속성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사람’으로 일컫는 습관과 경험을 통해 ‘사람’이라는 말에 대해 우리가 머리 속에 갖게 되는 이미지가 곧 그 단어의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향설이 제시하는 것은, 어떤 단어의 보편적 속성이나 그것을 파악하는 일은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보편적 속성을 사람들이 발견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단어를 어떤 경우에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발견해 나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어떤 단어의 개념 또는 의미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절대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져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에 따라 새로운 단어와 그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듯이 언어의 의미는 인간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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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새롭게 부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 언어의 의미가 이와 같이 인간들 간의 약속에 의해 만들어지며 필요에 따라 약속된 의미가 변화될 수 있다는 원리를 일컬어, 약정자유(約定自由)의 원리(the rule of freedom of stipulation)라 한다.
성향설에 의하면, 결국 어떤 사물에 대해 ‘의자’라거나 영어로 ‘chair’라는 이름을 붙이고, 또는 ‘의자’나 ‘chair’라는 말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정하는 것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서로 약속하기 나름의 일이다. 여기에서 단어의 의미가 순전히 개인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합의될 수 있도록 약속되어야 하는 까닭은, 단어를 구성하여 이루어지는 언어는 기본적으로 인간상호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에 반드시 붙여야만 하는 이름이나 그 의미가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단 어떤 사물에 이름이 주어지고 그 이름에 의미가 부여되면, 그 이름이나 의미는 사람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그리고 일관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사용되어져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원활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지고 만다. 만약 일관성과 관용성이 없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에의 유용성이 없는 단어로서 잊혀지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언어 사용에 있어서 의미부여의 일관성이 지켜져야 한다는 원리를 일컬어 관용(慣用)의 원리(the rule of common usage)라고 한다.
언어의 의미가 언어 그 자체에 붙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이 그 언어에 부여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할 때, 결국 어떤 단어의 개념 또는 내포란 어느 인간집단이나 개인이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그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겠다. 그리고 언어의 의미는 결국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집단이나 개인이 어떤 생각과 신념을 갖느냐에 따라 다르게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는 까닭은 곧, 그 단어가 의미상 가질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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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성이나 모호성을 제거하고 그것이 사용될 수 있는 조건을 명확히 제시함으로써, 언어사용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의사소통의 정확성과 효율성을 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의미가 언어 그 자체에 붙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과 신념에 따라 다르게 부여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언어의 의미는 결코 한 번의 정의에 의해 불변의 것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며, 역동적으로 변화해 나가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만큼 애매성과 모호성이 완전히 배제된, 완벽한 개념 정의는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을 기본적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3.2.2. 개념 정의의 방식
어떤 단어의 개념을 정의하는 일은 곧 그 단어의 의미상의 보편적 속성을 규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떤 단어의 의미상의 보편적 속성을 규정하는 일은 그 단어의 성격이나 그 단어에 대한 개념 정의가 요구되어지는 상황에 따라 그 방식이 달라지게 된다. 예컨대, 그 단어가 구체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구체적 개념인가 아니면 어떤 추상적인 특성을 가리키는 추상적인 개념인가에 따라서, 또는 ‘체중’이나 ‘키’와 같은 양적 개념인가 아니면 ‘행복’이나 ‘사랑’과 같은 질적 개념인가에 따라 그 개념 정의의 방법은 달라진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들의 의미를 어린 아동이 물었을 때, 대학생이 물었을 때, 그리고 전문가인 학자가 기존의 개념 정의에 만족하지 못하여 새로운 정의의 필요성을 의식하면서 물었을 때, 그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개념 정의의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단어의 개념을 정의하고자 할 때, 그 단어의 특성이나 상황을 고려하여 그에 적합한 개념 정의의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 여기에서 몇 가지 대표적인 개념 정의의 방식을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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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시적 정의(明示的 定義)
그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물을 직접 가리키거나 보여줌으로써 그 단어의 의미를 시사해 주는 정의 방식이다. 예컨대, 어린 아동이 ‘빨강’이란 말의 의미를 물었을 때, 빨강 색을 가리킴으로써 ‘빨강’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대상물 또는 그 말이 사용되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빨강’이라는 단어와 같이 언어적 설명보다는 구체적 대상물을 직접 가리킴으로써 그 의미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개념을 단순개념이라고 한다. ‘교육’의 개념을 명시적 정의를 통해 설명한다고 하면, 어떤 모범적이고 대표적인 교육상황을 가리킴으로써 명시적 정의를 시도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상황이란 결코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명시적 정의를 통해 전달되는 의미는 사람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2) 사전적 정의(辭典的 定義)
사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단어의 의미를 통해 어떤 단어의 개념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가장 일반적인 개념 정의의 방식이라 할 수 있으나, 흔히 개념 정의가 문제되는 상황은 이와 같은 사전적 정의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빚어진다. 예컨대, ‘교육’의 사전적 정의는 ‘가르치어 기름’ 또는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지만, 교육에 대한 보다 정련된 개념을 요구하는 상황에 있어서 이러한 정의는 극히 피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3) 어원적 정의(語源的 定義)
단어가 성립된 어원적 배경을 밝힘으로써 단어의 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민주주의(democoracy)’는 ‘인민(demon)’과 ‘힘(kratia)’의 합성어로서, ‘인민의 힘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는 식의 정의 방식이다. 어원적 정의는 어떤 단어의 어원적 배경을 통해 그 단어의 의미를 대략적으로 시사해 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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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한 어원적 배경이 그 단어의 의미를 반드시 정확하게 설명해 준다고 할 수는 없다. 설혹 어떤 단어를 어원적 관련을 고려하여 만들고 또한 그 의미를 규정하였다고 하더라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다른 의미가 붙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라는 말을 어원적으로 분석해 보면, 한자의 경우 ‘아랫사람을 때려서 사귀어 기른다’의 뜻이 깃들어 있으며, 우리말의 경우 ‘교육’에 해당하는 ‘가르치다’는 단어는 ‘갈다’와 ‘치다’의 합성어로서 연마하고 제거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4) 약정적 정의(約定的 定義)
약정적 정의라 함은 어떤 단어의 개념을 하나의 약속으로서 제안하는 식의 정의 방식이다. 물론 어떤 단어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단어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정하자는 하나의 제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약정적 정의는 기존의 일반적인 개념과 구별하여, 제한된 상황 속에서 특정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규정한다거나 또는 새로운 단어를 도입하고 그 의미를 처음으로 규정하는 경우에 있어서 ‘이 단어의 개념은 무엇 무엇이라 한다’는 식의 개념 정의를 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교육의 개념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교육을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이라 한다”라고 정의할 때 이것은 약정적 정의의 방식이다.
5) 조작적 정의(操作的 定義)
‘공격성’이나 ‘지능’, ‘모성애’와 같은 개념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성향성(性向性)을 나타내는 개념들이다. 조작적 정의는 이와 같은 성향적 개념들을 정의함에 있어서, 그 개념이 갖는 성향성이 나타나는 조건을 정의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정의방식이다. 조작적 정의가 대개 “만약 ~하면, ~한다”라는 문장형식을 취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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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절(만약 ~하면)은 성향성을 관찰하기 위해서 수행되어야 할 조건 또는 조작과정을 진술하고, 종속절(~한다)은 그 특정한 조작이 가해졌을 때 관찰될 수 있는 반응을 진술한다. 예컨대, “공격성이란 욕구좌절의 상황을 부여했을 때, 타인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를 하는 성향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조작적 정의이다. 교육의 개념을 성향적 개념이라 하기는 어려우며, 따라서 조작적 정의에 의해 교육의 개념을 규정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교육을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 과정’으로 정의했을 때, 인간행동이 계획적으로 변화되었는지 여부를 관찰함으로써 교육 여부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이는 조작적 정의라고도 할 수 있다.
단어의 의미가 정의되는 몇 가지 방식을 설명했지만, 이러한 분류 방식과는 달리,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가치에 대한 언급이 명시적으로 포함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규범적 정의와 서술적 정의 방식을 구분하기도 한다.
6) 규범적 정의(規範的 定義)
규범적 정의란 단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어떤 바람직한 상황이 제시되고, 그와 같이 바람직한 상황에 한해서 그 단어가 사용될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는 정의 방식이다. 예컨대, ‘교육’의 개념을 정의하여 ‘가르치고 기름’이라고 하였을 때,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면 무조건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평가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며, 이러한 평가기준이나 원칙까지를 포함하여, ‘교육이란 가치로운 것을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라 정의할 때 규범적 정의이다. 이와 같은 규범적 정의에 의하면, 예컨대, 도둑질을 가르치거나 세뇌의 방법을 통하여 가르치는 것은 교육이라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정의를 강령적 정의(綱領的 定義)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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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술적 정의(敍述的 定義)
개념을 정의함에 있어서 가치평가적인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 정의방식을 기술적 정의(記述的 定義) 또는 가치중립적 정의(價値中立的 定義)라 한다.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가리키는 사실적 개념들은 서술적 정의 방식에 의해 정의된다. 이 경우 가치평가적인 문제가 제기되기 어렵지만,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많은 단어들은 서술적 정의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으며, 가치평가적인 요소가 추가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예컨대 책상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데 받치고 쓰는 상’이라고 정의했을 때 이는 서술적 정의이며, 가치평가적인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육의 경우,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 과정’으로 정의했을 때, 이에는 가치평가적인 요소가 포함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인간행동을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바람직한가라는 가치평가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3.3. 가치관과 교육의 전통적 개념 정의
3.3.1. 가치관과 교육의 개념 정의
단어의 보편적 속성 또는 개념은 단어 그 자체에 붙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부여되며, 개념 정의의 방식에도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생각하고 있는 ‘교육’의 개념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육’이라는 말에 자연적으로 붙박혀 있는 어떤 의미란 없으며, 어떤 현상이나 행위를 지칭하여 ‘교육’이라 부르게 되었듯이 ‘교육’이란 말에 부여하는 의미 역시, 그 말을 사용하는 개인이나 인간집단에 의해 주어진다. 따라서 교육의 의미는 ‘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관과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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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관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이러한 점을 이해할 때, 교육의 개념이 사람에 따라, 사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의 개념을 규정하고 그 개념적 조건을 세우는 일은 결국 어떤 가치관이 어떻게 반영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 어떤 교육에 대한 정의가 있다면, 그것은 곧 어떤 가치관을 반영해 이루어진 것이며, 결코 아무런 전제 없이 이루어진 것일 수는 없다. 때문에 만약 우리가 교육의 개념을 정의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갖는 가치관과 신념에 입각해 교육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며, 그리고 역으로 설명할 때, 우리가 갖고 있는 교육의 개념은 바로 우리의 신념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육의 개념을 결정짓는 데 작용하는 가치관은, 크게는 인간관과 세계관, 사회관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교육의 대상인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보느냐에 따라, 또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 바탕이 되고 있는 사회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리고 인간과 사회를 포함한 세계와 우주의 의미와 그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교육을 어떻게 보느냐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1) 인간관과 교육관
먼저 인간관과 교육관의 관계를 보면, 인간의 기원이나 본성이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하는가에 대한 견해에 따라, 교육관이 달라지게 됨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보느냐 아니면 원숭이로부터 진화된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서 교육에 대한 견해는 달라질 수 있으며, 인간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로운 존재로 파악하는가 아니면 자연에 의해 주어진 인과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기계적인 존재로 보는가에 따라 교육에 대한 관점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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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인간을 성선설적 관점에서 이해하느냐 아니면 성악설적 관점에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또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보느냐 아니면 비이성적인 충동과 욕구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 교육에 대한 견해는 달라진다. 그리고 후천적인 경험에 의해 인간이 변화될 수 있는가, 만일 변화될 수 있다면 그 변화의 원인은 무엇이며 변화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견해에 따라 교육에 대한 관점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2) 사회관과 교육관
사회관과 교육관의 관계를 보면,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그리고 사회가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이며 어떤 원리에 의해 사회가 운영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견해에 따라 교육에 대한 견해가 달라진다. 다시 말해, 사회가 개인에 우선하느냐 아니면 개인이 사회에 우선하느냐에 따라 교육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또한 사회가 어떤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견해에 따라 교육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3) 세계관과 교육관
세계관과 교육관의 관계를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우주의 기원, 본질, 목적이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교육에 대한 견해가 달라질 수 있다. 세계와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 또는 목적을 설명하는 관점에는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적인 세계관도 있으며, 형이상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철학적 세계관도 있다. 그리고 과학적 세계관과 같이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배척하는 관점도 있다. 이들 각각의 관점은 세계와 우주의 기원이나 목적에 대해 각기 다른 견해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중 어느 것을 취하느냐에 따라 교육에 대한 관점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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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교육에 대한 전통적 개념 정의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리고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있어서, 교육이 갖는 중요한 역할을 인식했던 많은 사람들이 교육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양한 입장에서 제시하고 있다.
교육에 대한 주관적인 관점 또는 체계적인 신념체계를 교육관이라 일컫는다고 했지만, 교육관이란 곧 교육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다.
따라서 자기 나름의 교육관을 피력했던 수많은 사상가들이나 교육자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교육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각각의 개념은 결국 교육에 대한 개개인의 신념과 가치관, 관심과 동기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데아의 세계라고 하는 영원불멸의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신념을 가졌던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교육을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로 무지한 인간을 안내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하였으며, 듀이와 같은 실용주의 철학자는 교육을 ‘끊임없는 경험의 개조 과정’으로 정의한다. 또한 피터즈(R. S. Peters)와 허스트(P. H. Hirst)같은 교육철학자는 ‘문명된 삶의 형식에로의 입문식’ 또는 ‘합리적 지식의 형식 안으로의 입문’으로, 그리고 파인버그(W. Feinberg)와 같은 교육철학자는 ‘사회적 기술과 지식의 재생산 과정’으로, 브라멜드(T. Brameld)와 같은 사회철학자는 교육을 ‘사회의 유지와 개조를 위한 문화전달의 과정’으로, 만하임(K. Mannheim)과 같은 사회학자는 ‘사회화의 과정’으로, 매슬로우(A. Maslow)와 같은 인본주의 심리학자는 ‘자아실현을 위한 인간형성의 과정’으로, 스키너(B. F. Skinner)와 같은 행동주의 심리학자는 ‘인간행동의 의도적인 변화 과정’으로 교육을 정의한다. 이와 같이 개개인의 관심과 관점, 가치관에 따라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는 교육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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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을 일일이 열거하기란 어려우며, 또한 그것들을 몇 가지 틀에 맞추어 분류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교육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을 크게 두 가지, 즉 ‘주입과 적응으로서의 교육관’과 ‘성장과 자기형성으로서의 교육관’으로 구분하고, 그 각각에 있어서의 교육의 개념과 그에 관련된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1) 주입과 적응으로서의 교육관
교육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개념은 교육이란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에게 어떤 지식이나 기술을 전달하고 습득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식과 기술의 습득과정으로서의 교육의 개념에 함축되는 것은 전달되는 지식이나 기술은 가치로운 것이며, 가르치는 사람은 그것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전수해 주어야 하며, 배우는 사람은 주어지는 모든 내용을 수용하여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교육을 마치 항아리에 물이나 곡식을 부어넣듯이, 사람의 머리나 마음속에 지식이나 신념을 부어넣어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주입으로서의 교육관’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교육을 주입의 과정으로 여기는 교육관은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지만, 사실상 가장 일반화되어 있으며 교육에 관한 전통적인 관점이 되어 왔다. 주입으로서의 교육관과 유사한 것으로는 ‘주형(鑄型)으로서의 교육관’, ‘행동변화로서의 교육관’, 그리고 ‘문화획득으로서의 교육관’ 등이 있다. 이들 교육관은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지식과 신념을 가르침으로써, 배우는 사람의 행동이나 사고를 일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교육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이들 교육관에 기초가 되고 있는 인간관과 사회관 등의 가치관 역시 공통점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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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들 교육관에 있어서 바탕이 되고 있는 인간관과 사회관을 보면,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가 구축해 놓은 지식과 신념, 문화를 습득함으로써 인간이 된다. 사회는 개인에 우선하며, 사회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 개인은 일정한 방향으로 길들여져야 한다. 개인의 흥미나 관심, 개성에 대한 고려는 이차적인 것이며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 문화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교육은 기존의 사회적 지식이나 가치관을 개인에게 습득시키기 위한 사회적 목적 하에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교육의 주된 관심과 동기는 개인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사회에 있으며, 사회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개인을 변화시켜 나감으로써 개인에 대한 사회적 통제력을 강화해 나가고 사회의 존속을 도모해 나가는 데 일차적인 관심이 놓여 있다. 그리고 개인은 사회가 제시하는 기존의 지식체계나 신념체계를 수동적으로 수용하고 그에 적응해 나가야 하는 존재이다.
주입으로서의 교육관에 있어서 교육을 통해 습득시키고자 하는 지식과 가치는 사회가 축적해 놓은 것으로서, 그것의 객관성과 타당성은 지적 권위를 갖는 성인들에 의해 확인된 것이므로, 어린 세대들은 그것을 가치롭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교육을 통해 전달하려는 사회적 지식체계나 신념체계는 당연히 올바른 것으로서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입되어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배우는 사람의 흥미나 자발성에 상관없이 배우는 사람의 머리 속에 주입시켜야 하는 책임이 있으며, 그에 따른 권한을 사회로부터 부여받게 된다. 그리하여 지식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가르치는 사람은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을 동원할 수 있으며, 그의 가르치는 방식과 권위에 순종하지 않을 때 처벌을 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교육관에 입각할 때, 교육을 잘 받은 인간이란 기존의 지식체계와 신념체계를 잘 수용하여 기존의 사회체제에 잘 적응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능력에 대한 평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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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회적 지식체계를 얼마나 잘 수용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달라지며, 학교는 개인 간의 능력 차이를 가려내고 소수의 우수한 개인들을 가려내는 선발적 기능을 갖는 것으로 인식된다.
2) 성장과 자기형성으로서의 교육관
성장과 자기형성으로서의 교육관은 주입으로서의 교육관과 모든 점에서 대비된다. 우선 성장으로서의 교육관은 외부적인 지식과 신념을 일방적으로 주입하여 배우는 사람을 일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배우는 사람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가능성들이 자연스럽고 올바른 방향으로 커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으로 교육을 설명한다. 이 점에서 아동은 자라나는 식물에 비유되고 가르치는 사람은 정원사에 비유된다. 다시 말해, 정원사가 좋은 토양과 수분, 광선을 적절히 제공하여 식물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돕듯이, 가르치는 사람은 아동들이 갖는 적성과 능력이 자신의 흥미와 관심에 따라 제대로 발휘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동이 자신의 흥미와 개성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실현시킬 때 자아의 실현이 이루어지며, 교육은 이와 같은 성장과 자아실현을 위한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성장으로서의 교육관을 ‘자아실현으로서의 교육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장으로서의 교육관은 주입과 적응으로서의 교육관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제기되어 왔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교육에 있어서 지배적인 교육관으로 정착되고 있다. 주입으로서의 교육관을 비판하고 성장으로서의 교육관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루소(J. J. Rousseau)를 들 수 있다. 루소는 주입위주의 강압적이고 교사중심적인 전통적 교육을 비판하고 아동의 흥미와 자유로운 활동을 강조하는 아동중심의 교육관을 제시했다. 루소의 교육관 또는 교육이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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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일컫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연주의적 교육이론이라고도 불리우는 루소의 교육관은 프뢰벨과 페스탈로치, 헤르바르트에 의해 전개된 19세기 유럽 신교육운동의 바탕이 되었으며, 20세기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이론의 기본원리가 되었다.
성장으로서의 교육관은 교육을 단순히 이미 만들어진 지식의 수동적인 습득의 과정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문제들을 학생 스스로 풀어 나갈 수 있는 주체적 사고능력과 자율성을 키워주기 위한 과정으로 규정한다. 지식은 인간에게 주어진 불변의 이성능력이나 감각능력에 의해 절대확실하고 보편타당한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이나 욕구,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동기나 목적을 갖는 인간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식이란 인간의 주체적인 판단과 해석, 탐구와 실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인간의 역사적·사회적 산물인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인간이 처한 상황 속에서 형성된 가변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은 교육을 통해 전달되고 습득되어져야만 하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 또는 ‘당연히 올바른 것’이 아니라, 아동 자신의 흥미와 경험에 의해 스스로 탐구되고 획득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 기성세대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지식은 그 자체가 결코 절대적인 의미나 가치를 지닐 수 없으며, 새로운 실험과 경험에 의해서 기성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지식을 비판하고 주체적으로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 자체가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이와 같은 지식관과 세계관 그리고 인간관에 바탕을 둔 성장으로서의 교육관은 교사나 교과서의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권위에 의존하여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동 개개인의 흥미와 경험을 중시하고,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 지식을 습득해 나가는 과정을 중시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교육에 있어서는 기존의 사회체제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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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보다는 새로운 지식과 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사회적 과정에 창의적이고 주체적으로 참여해 나갈 수 있는 인간 형성이 추구된다. 그러므로 교육을 잘 받은 인간이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끊임없이 새롭게 형성시켜 나갈 수 있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힘을 지닌,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이다.
3.4. 교육의 개념적 요소
3.4.1.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적 요소
교육에 대한 관점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그에 따른 교육의 개념을 살펴보았지만, 교육을 정의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관 — 인간관, 세계관, 사회관 등을 망라한 — 에 따라 교육의 개념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사회에 있어서 교육의 개념은 우리 사회에 있어서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다. 북한에 있어서 교육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적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며, 그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 있어서 개인의 인간적 존엄성이나 권리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교조주의적 도그마를 세뇌나 강압적인 방식을 통하여 가르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적 태도와 사고를 기를 수 있는 것이면 교육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교육적 과정의 도덕적 정당성이나 합리성을 배제하고서는 교육의 개념이 만족스럽게 규정될 수 없다.
교육의 개념이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고 할 때, 교육의 보편적 개념 정의란 불가능한 것인가? 일단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다. 비록 보편적 개념임을 주장하는 어떠한 교육의 개념도 모종의 사회적·문화적·역사적 배경과 가치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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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교육의 개념이 보편적이라 주장함은 그러한 교육의 개념이 기초하고 있는 특정한 가치관이 곧 보편적인 가치관임을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어떤 교육의 개념이 과연 보편적인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이 기초하고 있는 가치관을 분석해 보고, 다음에 그러한 가치관이 과연 보편적인 것인가를 따져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가치가 보편적 가치인가를 판단하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교육의 보편적 개념을 정립함에 있어 분석적 교육철학자들은 교육에 대한 수많은 정의들과 교육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용례를 분석하면 ‘교육’이라는 말이 갖는 보편적 속성을 분석해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대표적인 분석적 교육철학자인 피터즈(R. S. Peters)는 교육의 보편적 속성으로 세 가지를 분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교육’이라는 말은 다음 세 가지를 그 개념적 요소로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주 1: R. S. Peters, Ethics and Education, (London: George Allen and Unwin, 1966), p.45.]
첫째, 규범적 요소(規範的 要素)로서 교육은 가치로운 것의 전달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며, 둘째, 인지적 요소(認知的 要素)로서 교육은 지식과 이해 그리고 지적 안목의 형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며, 셋째 과정적 요소(過程的 要素)로서 교육은 배우는 자의 의지와 자율성을 무시한 전달 방식을 배제하며, 학습자의 인간적 존엄성과 권리에 대한 존중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피터즈의 개념분석에 의하면, 어떤 행위가 비록 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진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가치롭지 못한 무엇을 가르치거나, 또한 가치로운 것을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적 이해나 안목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것일 때, 즉 맹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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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가르치거나 단순한 신체적 기능만을 가르친다면 ‘교육’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로운 것을 가르침으로써 지적 안목의 형성과 변화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가르치는 과정에서 학습자의 자유로운 의지나 권리, 존엄성이 침해된다면 그것은 ‘교육’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피터즈가 제시하고 있는 교육의 개념적 요소들은 과연 어느 사회, 어느 문화, 어느 집단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보편적 개념인가? 다시 말해, 피터즈가 제시하고 있는 세 가지의 요소들은 과연 ‘교육’의 보편적 속성인가?
언어의 의미나 논리의 규칙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임의 규칙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언어분석이나 논리분석을 통해서 보편적인 언어의 의미를 밝히거나 보편적 타당성을 분석해 낼 수는 없다. 언어의 의미나 논리의 규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피터즈가 제시하고 있는 교육의 개념적 요소들은 교육의 보편적 속성이라 할 수 없다.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은 결국 피터즈가 속한 영국 사회의 사람들이, 그것도 영국 사회의 지적 전통과 가치를 존중하는 중류 계층 이상의 사람들이 ‘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부여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피터즈의 개념분석은 특정한 문화적 배경과 가치관 하에 사용되는 언어의 의미를 분석한 결과이며, 그러한 개념분석은 특정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가치중립적이라거나 보편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피터즈에 의하면 지적 이해나 안목의 형성을 포함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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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교육이나 직업교육은 ‘훈련’이라고 할 수 있을망정 ‘교육’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영국 사회에 있어서도 하류계층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받고 있는 것은 직업을 위한 기술교육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들의 부모나 그들 자신이 피터즈의 개념정의에 따라 학교에서 받는 교육을 ‘교육’이라 부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한 피터즈가 제시하고 있는 과정적 요소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존중하는 서구적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과정적 요소가 충족되지 않는 경우에도 ‘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회나 집단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피터즈가 제시하고 있는 교육의 개념을 살펴보았지만, 교육의 개념에 대한 어느 누구의 정의라도 그것은 결국 그 개인 또는 그가 속한 사회집단의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러한 까닭에 가치관의 변화와 관점의 변화에 따라 교육의 개념은 다르게 정의될 수 있는 개방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연유로 어떤 교육이 개념이 우리 앞에 제시되면, 우리는 그 개념이 어떤 관점과 가치관 하에서 형성된 것인지를 분석하고 평가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분석과 평가를 통해 과연 그 개념이 기초하고 있는 가치관이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관과 일치하는가, 만약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이 우리에게 설득력을 갖는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 역시 피터즈의 개념이 바탕하고 있는 서구적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이나 가치를 이미 수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교육의 개념은 무엇이며, 어떤 가치관이 그것의 바탕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가치관은 과연 타당하고 보편적인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답변의 모색은 교육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의 계속적인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는 결코 어느 시점에서 중단되거나 종결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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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서는 오늘의 한국사회 속에서 사는 우리들이 ‘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적용하고 있는 개념적 요소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3.4.2. 교육의 개념 분석
교육의 개념을 분석하고 규정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될 수 있다. 쉽게는 사전을 찾아보는 일에서부터 교육학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정의를 검토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교육’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용례를 분석해 봄으로써 어떤 의미를 갖고서 그것이 사용되고 있는가를 분석해 볼 수도 있다. 단어의 용례를 분석하고 그 단어가 갖는 일반적인 의미를 분석하는 이러한 작업을 개념 분석의 작업이라 한다. 그러나 개념 분석의 방법을 통해 ‘교육’의 개념을 분석하고자 할 때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육’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용례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교육’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몇 가지 용례들을 생각해 보자.
1. 교육은 국가의 백년지대계이다.
2. 계획 없이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
3. 교육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학교교육이다.
4. 학교교육은 교육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5. 비의도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
6. TV와 같은 대중매체가 갖는 교육적 영향은 엄청나다.
7. 인간의 삶 자체가 교육의 과정이다.
8. 교육이라고 해서 모두 교육은 아니다.
9. 오늘날 교육다운 교육을 하고 있는 학교를 찾아보기 어렵다.
10. 대학까지 다녔다고 해서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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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모름지기 인간의 균형적인 발달을 꾀하는 것이 교육이다.
12. 교육의 방법이나 과정도 교육적이어야 한다.
13. 기술교육이나 직업교육은 교육이라기보다는 훈련이라 해야 한다.
14. 내가 받은 교육은 엉터리 교육이었다.
15. 오늘의 교육은 오히려 사람을 망친다.
16. 단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교육은 교육이다.
17.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도 교육은 교육이다.
18. 강압적인 방식을 써서라도 가르칠 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19. 인간을 대상으로 해서 인간다운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이다.
20. 개를 잘 교육시켰다.
21. 원숭이들도 새끼들을 교육시킨다.
22. 교육의 종류에는 학교교육, 가정교육, 사회교육, 군대교육, 평생교육 등이 있다.
23. 교육의 종류에는 취학전교육, 유치원교육,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등이 있다.
24. 교육의 종류에는 국어교육, 과학교육, 수학교육, 도덕교육, 성교육, 인구교육, 종교교육, 정신교육, 경제교육 등이 있다.
25. 교육의 종류에는 주입식 교육, 경험중심 교육, 탐구중심 교육, 아동중심 교육, 교사중심 교육, 원격교육, 방송교육, 현장교육 등이 있다.
26. 교육의 종류에는 현직교육, 보수교육, 교양교육, 직업교육, 기술교육, 시민교육 등이 있다.
이 많은 용례에서 보듯이 ‘교육’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면서 사용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함축하면서 사용되기도 한다. 용례 1~7에서 보듯이, 어떤 경우에 ‘교육’은 의도적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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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적인 활동을 함축하는가 하면 비의도적이며 비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까지를 함축하기도 한다. 또한 용례 8~18에서 보듯이, 어떤 경우에 ‘교육’은 바람직하고 가치로운 것을 함축하는가 하면 그러한 것과 관계없이 가치중립적인 용어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용례 19~21에서 보듯이, 어떤 경우에 ‘교육’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활동만을 가리키는가 하면 인간 외의 대상에게도 적용되는 활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용례 22~26에서 보듯이 ‘교육’의 종류는 다양하며, 교육이 이루어지는 상황과 장소, 교육의 대상이나 시기, 교육의 내용이나 강조점, 교육의 방법이나 매체, 그리고 교육의 목적이나 기능 등에 따라서 그 종류가 구분되기도 한다.
‘교육’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다양한 용례들을 볼 때, ‘교육’의 개념은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의미를 함축하면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육’의 개념은 애매모호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만큼 ‘열려 있는’ 개념(open concept)이라고 할 수 있다. 개념 분석을 통해 ‘교육’의 개념을 분석하는 일은 결국 그렇듯 다양하게 사용되는 ‘교육’이라는 말의 용례 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경우의 것을 선택하여 그 의미를 분석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하면 가장 전형적인 ‘교육’의 용례는 어떤 것이라고 할 것인가?
그것은 앞의 용례 8~9에서 보듯이 “교육이라고 해서 모두 교육은 아니다”, “오늘날 교육다운 교육은 찾아보기 어렵다”와 같은 경우에 사용된 ‘교육’의 의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의 ‘교육’의 용례가 ‘교육’의 개념을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는 까닭은, ‘교육다운 교육’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이 경우 ‘교육’이라는 말은 무엇이 ‘교육적’인가 아닌가를 보다 엄격하게 판단해 줄 수 있는 개념적 요소를 함축하면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다운 교육’이라 할 때 ‘교육’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개념적 요소들이 함축되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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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도성
교육은 인간의 활동 또는 행위이다. 따라서 교육이라는 활동은 ‘활동’ 또는 ‘행위’의 개념상 의도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이다. 어떤 행동을 의도적으로 한다는 것은 몇 가지 개념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즉, 우선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동기를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 이루려는 동기나 목표를 행위 주체자가 의식하고 있음을 내포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그러한 동기나 목표를 실현해 나가기 위한 효율적 수단임을 믿으며, 또한 그 수단적 행동의 선택과 수행을 타인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선택하고 실행하고 있음을 개념적으로 내포한다. ‘의도성’이라는 말이 갖는 이러한 개념적 조건들을 고려할 때, 의도적 행동으로서의 ‘교육’이라는 말에는 교육을 하는 동기와 목적이 있으며, 그러한 동기나 목적을 실현시켜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적합성과 효율성에 대한 인식이 개념적으로 전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행위 주체자의 자율적인 판단과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행동인 만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행위 주체자에게 부여될 수 있음이 함축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의도적인 행동 과정으로서 ‘교육’을 규정할 때, 자연발생적이거나 우연적인 것들은 일단 교육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어떤 동기나 목적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지 않으며, 또한 행동의 효율성이나 타당성이 검토될 수도 없으며, 그리고 의지적이거나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닌 만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목적도 없이 맹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부여할 수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교육이라 할 수 없다.
의도성을 교육의 개념적 조건으로 제시하였지만, 비의도적으로도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견해를 제시할 수도 있다. 예컨대, “삶의 모든 경험을 통해서 교육이 이루어진다”라고 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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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의도성 여부에 관계없이 인간의 변화와 성장을 이루는 일정한 경험 그 자체가 교육의 성립 요건이 된다. 이와 같이 의도성을 포함시키지 않는 교육의 개념을 광의적(廣義的) 개념이라 부를 수 있다. 물론 의도성을 포함시키지 않는 광의적인 교육의 개념을 일상생활의 제한된 맥락 속에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광의적 개념은 일반적인 용례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이 광의적으로 교육의 개념을 규정할 때 교육인 것과 아닌 것의 구분은 사실상 할 수 없게 되며, 글자 그대로 삶의 모든 과정이 교육이 되는 것이다. 교육이라는 말을 분명한 의미를 갖는 용어로서 사용하고 그 대상을 명확히 한정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의도성의 개념을 교육의 개념적 조건으로서 포함시켜야 한다. 의도성을 포함시키지 않는 광의적 개념과 달리 이를 포함시키는 교육의 개념은 협의적(狹義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2) 전인적 인간변화에 대한 관심
일정한 동기와 목적 하에 이루어지는 의도적 행위가 교육의 개념적 조건이라 할 때, 그러면 어떠한 동기와 목적 하에서 교육은 이루어지는 것일까? 교육의 개념 그 자체 속에는 그러한 동기나 목적이 내포되어 있는가? 교육의 개념적 조건을 단지 의도성이라는 조건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교육의 개념은 인간의 다른 모든 의도적인 행위와 달리 구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육과 교육 아닌 의도적 행위를 어떤 개념적 기준에 의해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교육을 교육으로서 성립시키는 두 번째 개념적 요소로서 인간변화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교육의 동기나 목적은 다양하게 있을 수 있다. 개인적인 동기나 목적에서 교육이 이루어질 수도 있으며, 지적 성장과 자아실현과 같은 정신적인 동기 그리고 사회적 지위나 명예를 획득하고자 하는 동기 또는 물질적 동기에서도 교육은 추구될 수 있다. 때문에 교육의 동기나 목적을 어느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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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획일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육의 동기나 목적을 어떻게 규정하고 설명하건 간에 교육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또한 인간변화에 일차적인 관심을 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변화 외의 어떠한 동기나 목적도 결국은 인간의 신념과 지식, 행동과 태도, 기술과 기능의 변화를 일차적으로 이룸으로써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교육을 통해 인간의 제반 특성을 육성하고 계발하고 때로는 억제하고 순화하려는 인간변화에의 동기와 관심은 교육의 개념적 요소로서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교육이 인간변화를 도모한다고 할 때, 보다 구체적인 변화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신념이나 가치관, 지식, 경험, 행동, 성격 등 인간의 제반 특성들이다. 이러한 특성들을 가장 포괄적으로 일컬어서 성향이라고 한다. 성향이란 인간의 행동을 가능케 하는 내적 조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교육은 인간 성향의 변화를 추구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신념이나 지식, 지능, 합리성, 사고력, 도덕성, 사회성, 의지력 등 인간은 수많은 성향을 갖는다. 교육은 이러한 성향의 변화를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추구하기보다는 전체적이며 포괄적인 성향의 변화를 추구한다.
교육이 인간의 전체적 성향의 변화에 관심을 둔다고 했지만, 인간은 다양한 특성과 측면을 지니는 존재이다. 그러한 다양한 측면들을 흔히 지(知), 정(情), 의(意), 체(體) 등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특성들이 종합적으로 발전될 때 전인적(全人的) 발달을 이룬 것으로 생각해 왔다. 인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인간 특성의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특성이 조화롭게 발달된 인간을 전인적 인간으로서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전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인류의 보편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통은 교육에 있어서 전인교육의 전통, 즉 지(智), 덕(德), 체(體)의 균형적인 발달을 이룬 인간 형성의 전통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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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육의 기본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목표는 인간을 전인적으로 성장, 변화시키는 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인간 특성 중 일부분적인 것을 강조하여 교육시킬 수도 있지만, 전인적 형성에 대한 교육의 관심이 강조됨에 따라 지엽적인 지식이나 신체적 기능 또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훈련’이라는 개념으로 개념화되어 왔다. 이러한 개념 하에서는 단순한 지식의 주입이나 특정한 능력이나 기술을 훈련시키는 것과 같이 인간의 부분적인 성향의 변화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교육’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물론 교육의 전반적인 과정 속에서 인간의 부분적인 성향의 변화가 강하게 강조되거나 추구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전인적 인간형성과 변화에 대한 관심과 전혀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강조되고 추구된다면, 그것은 개념상 교육과는 거리가 있다고 하겠다.
3) 가치지향성: 바람직한 변화의 추구
지금까지의 분석에 의하면 교육이란 ‘전인적 인간 변화를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활동’이라고 일단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서술적 정의로서의 특성을 갖는다. 이와 같은 서술적 정의는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에 가치평가적인 문제가 추가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즉, 전인적 인간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면 모두가 교육이라 할 수 있는가? 전인적 인간 변화를 이룬다고 해도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일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국 바람직한 교육과 바람직하지 못한 교육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어떤 방향의 인간변화를 이루어야 바람직한 교육인가?
교육의 개념은 가치중립적인 방식으로, 즉 서술적으로 정의될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서술적 정의는 기본적으로 교육이라는 활동이 가치의 선택과 판단 하에 특정한 가치의 실현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활동, 즉 하나의 가치기업(價値企業)임을 망각한 정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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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적 인간변화가 추구된다고 했지만, 그러한 변화는 그 자체로서 가치롭기 때문이 아니라 어떠한 이유와 동기에서 가치롭고 바람직한 변화로 선택, 판단되었기 때문에 추구되는 것이다. 때문에 의도적인 인간변화의 목표나 결과가 바람직한 것이 되지 못할 때 그것은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어떤 방향과 내용의 인간변화가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교육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집단과 개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상대적일 수 있는 가치문제라 해서 교육의 개념에서 가치평가적인 요소를 배제하게 될 때, 교육의 개념은 왜곡되게 된다. 교육은 바람직한 변화를 추구하며, 그리고 변화의 바람직성이 끊임없이 새롭게 검토되고 논의되어야 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의 개념에서 가치요소를 배제하게 될 때, 교육의 이와 같은 특성, 즉 바람직한 행동변화를 추구하며 그에 대한 계속적인 논의와 검토가 요구되는 활동이라는 특성은 잊혀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가치논의가 배제된 상황에서 목표로 추구되는 행동변화의 규범성은 논의되지 않은 채, 그것의 의도적 조작가능성과 효율성에 주된 관심이 주어지게 된다.
교육이 그 개념에 있어서 바람직한 변화를 추구하는 활동이라 할 때, 교육은 규범성을 충족시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교육은 그 자체로서 바람직한 것이며, ‘바람직하지 못한 교육’이라는 말은 ‘틀린 진리’라는 말과 같이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일상적인 표현으로서 ‘바람직한 교육’ 또는 ‘바람직하지 못한 교육’이라는 말을 논리적 모순을 느끼지 않으면서 쓸 수 있다. 이 경우 ‘교육’은 규범적 요소가 배제된 서술적인 용어로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서술적 정의의 경우 우리는 가치평가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으며, 또한 교육 그 자체는 결코 가치중립적인 활동일 수가 없다. 가치기업으로서의 교육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가치 측면 또는 규범성은 개념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교육은 개념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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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성을 추구하며, 교육의 과정은 이와 같은 규범성을 확보하기 위한 가치판단과 선택의 과정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가치판단과 선택의 결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수반된다는 사실, 또한 이러한 까닭에 교육에 대한 규범적인 논의가 요구된다는 점이 교육의 개념을 통해 함축될 수 있어야 한다.
4) 피교육자의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
지금까지의 조건을 충족시킨다고 할 때, 교육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인적 인간변화를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는 규범적인 정의로서 가치평가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람직한 방향’이 제시하고 있는 가치평가적 측면은 교육의 목표에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면 그 과정이나 수단에 관계없이 모두 교육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추가적으로 다시 제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교육의 방법이나 과정 그 자체의 도덕적 정당성과 타당성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목적이 바람직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어나가는 과정 또는 수단이 정당하지 못할 때 목적의 가치성이 결코 수단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이렇게 볼 때, 비록 교육이 바람직한 인간행동의 변화를 추구한다고 해도 그 과정이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할 경우, 그것을 바람직한 교육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교육의 개념적 조건으로서 규범성을 넓게 적용시키면 교육의 목적뿐만 아니라, 교육의 과정도 도덕적으로 바람직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교육의 과정의 규범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일차적으로 피교육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권리,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존중에서 그 기준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교육의 과정 속에서 피교육자의 권리가 존중되고 개인의 선택과 판단, 자율성이 존중되어야 하며 만약 그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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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들이 부당하게 억압되고 훼손될 경우 그것은 교육일 수 없다. 강압적인 방식이나 세뇌와 약물투입과 같은 방식으로 어떤 바람직한 행동변화를 추구할 경우, 이러한 까닭에 그것들은 교육적 방법이라 할 수 없다.
5)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인격적 상호작용
교육은 피교육자와 그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교육자의 존재를 상정한다. 교육의 개념적 조건으로서 의도성을 들었지만, 이러한 의도성의 주체가 곧 교육자인 것이다. 물론 교육을 성립시키는 의도는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의 전유물은 아니다. 피교육자 자신도 교육을 받는 의도를 가질 수 있으며, 교육의 장(場)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학부모나 사회적 집단도 교육을 위한 의도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피교육자와 교육자와의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파악할 때, 교육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것을 추구해 나가는 의도성의 가장 중요한 주체는 교육자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교육의 개념적 조건을 적용할 때, 의도성의 주체로서의 교육자는 피학습자의 인간적 존엄성을 존중하면서 그의 바람직한 행동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피학습자의 자율성과 권리를 존중하면서 그의 바람직한 방향의 행동변화에 관심을 두는 교육자의 존재와, 그리고 그와 같은 교육자와 피교육자간의 인격적인 상호작용은 교육의 개념적 조건으로서 성립한다. 비록 피교육자의 권리가 존중되고 그의 바람직한 행동변화가 추구된다고 하더라도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인격적 상호작용이 배제된 채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교육다운 교육’이기 어렵다. 여기에서 인격적 상호작용 또는 만남이란 면대면의 물리적 접촉을 통해서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면대면의 접촉을 통해서도 인격적 만남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멀리한 접촉을 통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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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적 만남은 가능한 것이다.
교육자와 피교육자 사이에 있어서의 인격적 만남의 요체는 물리적 접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교감과 연대의식, 관심과 배려, 가치의 공유, 존경과 사랑의 느낌 등과 같은 심리적 교류에 있기 때문이다.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얼굴을 맞대며 교육을 한다고 해도 이와 같은 심리적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기계적인 만남일 뿐이며 교육적인 만남일 수 없다. 때문에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기계적인 학습일 수는 있어도 교육일 수는 없는 것이다.
6) 의미충족과 자아형성감의 함양
피교육자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인격적인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의 바람직한 인간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을 교육이라 할 때, 만약 그러한 결과 실제적으로 행동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교육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가? 일단 교육을 바람직한 인간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으로서 파악했을 때, 그 과정적 활동의 결과에 관계없이 교육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을 단순히 하나의 과정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변화를 결과적으로 이루어내는 활동으로 파악할 때, 이 경우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의도된 행동변화를 이루어내야만 ‘교육’이라 할 경우, “교육을 했으나 (또는 받았으나)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 그러나, 교육의 개념적 조건으로 성공적인 결과까지를 포함시키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우선 어떤 교육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어서는 그것이 ‘교육’인지 아닌지를 말할 수 없으며, 그 결과를 보고나서야만 판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또한 그 결과도 교육적 활동이 끝난 즉시 관찰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만 비로소 관찰될 수 있거나 혹은 전혀 관찰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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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우리는 그러한 교육적 활동이 ‘교육’인지 아닌지를 영영 판단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이러한 까닭에 교육은 어떤 변화를 결과적으로 이루어 낸 활동으로 파악되기 보다는 어떤 변화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이 과정적 활동으로서 파악된다고 해서 교육의 결과에 대한 고려가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러한 과정 속에서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피학습자가 자신이 받고 있는 교육적 활동의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고, 그러한 활동의 결과로서 자신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받고 있는 교육에 만족하고 그러한 교육을 받고 있는 자신에 행복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이 비록 과정적 활동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과정 속에서 피교육자가 자신이 받고 있는 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알지도 못하거나 또는 부인할 때, 그러한 교육은 ‘교육다운 교육’이기 어렵다. 그리고 교육의 과정 속에서 피교육자가 발전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자신을 느낄 수 없을 때, 즉 자기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교육이 제공해 주지 못할 때, 그러한 교육은 ‘교육다운 교육’이기 어렵다. 그것은 다만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피교육자에게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억압의 한 형태이기가 쉽다.
7) 교육자의 도덕적 책임
교육의 결과로 어떤 특정한 변화가 피교육자에게 이루어지느냐 않느냐는 근본적으로 피교육자 자신의 판단과 선택 그리고 의지에 달려 있다. 교육의 과정 속에서 제공되는 교육적 경험의 의미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결국 피교육자 자신이며, 교육에서 의도된 행동변화를 스스로 수용할 것이냐의 여부는 궁극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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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의 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피교육자의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육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피교육자 개인에게 있다는 설명이 성립된다.
그러나 교육의 결과에 대한 책임이 피교육자 개인에게 귀결된다고 해서 교육자에게 그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가치판단과 선택을 통해 피학습자를 일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교육자에게는 바로 그러한 자신의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교육이 가치중립적인 행위가 아니라 교육자의 가치선택과 판단에 입각한 의도적 행위라고 할 때, 교육자에게 이에 따른 도덕적 책임이 수반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교육자에게 교육행위에 대한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방식의 교육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이미 교육으로서 성립하기 어렵다. 교육자의 자율성, 즉 교육자의 자유로운 판단과 선택은 의도적 활동으로서의 교육을 성립시키는 기본적인 조건이며,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과 판단에 따른 행위에 대해서는 항상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교육자가 교육의 과정 속에서 자율성을 발휘할 수 없었거나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반하는 강압에 의해 교육을 했다면, 교육에 대한 교육자의 책임은 묻기 어려우며 그것은 그만큼 ‘교육다운 교육’이기 어렵다. ‘교육다운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육자가 그 자신의 교육적 선택과 판단의 도덕적 의미와 그에 따른 교육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뚜렷이 인식하면서 교육을 할 수 있어야 한다.
3.5. 학교교육과 광의의 교육
지금까지 교육의 개념적 요소를 몇 가지로 분석하였지만,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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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된 개념적 요소들은 ‘교육다운 교육’이라 말할 때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함축적으로 포함시키는 개념적 조건이나 가치관을 제시한 것이다. 교육이라 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학교교육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을 하며, 따라서 ‘교육다운 교육’을 논할 때 우리의 주된 관심의 대상은 학교교육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시된 개념적 요소들은 교사와 학생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학교교육을 일차적으로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교육의 범위를 넘어서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될 때, 이와 같은 개념적 요소들이 반드시 모두 충족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삶의 과정 그 자체가 교육이다”라고 말하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 비의도적으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경험들을 통해 갖게 되는 교육적 경험을 강조하고자 하는 경우, 우리는 교육의 개념적 요소들을 다르게 규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나한테 교육을 좀 받아야겠다”든지 “개를 교육시킨다”라는 경우에서와 같이, 위에서 제시된 개념적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고서도 ‘교육’이라는 말이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 ‘교육’의 개념은 일반적인 의미를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위에서 제시된 요소들을 극히 제한적으로만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제시된 교육의 개념적 요소들을 부분적으로 또는 피상적인 수준에서 적용하여 ‘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 위에서 제시한 개념적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교육’의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 파악하고 사용함으로써 개념적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제시된 교육의 개념적 요소들을 부분적으로 충족시키거나 또는 다른 요소들을 포함하면서 ‘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 그것들을 틀린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의해 부여되는 것으로서 변화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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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앞에서 제시된 개념적 요소들은 ‘교육다운 교육’이라는 이상적 형태의 교육에 함축된 요소라고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고, 받고 있는 교육은 이러한 이상적 교육을 지향하는 문제투성이의 ‘불완전한’ 교육인 것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인식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앞에서 제시된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교육’의 개념에 포함시키면서 교육을 규정하고 계획하느냐에 따라서 ‘교육’은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단지 ‘의도성’과 ‘인간변화에 대한 관심’만을 교육의 개념적 요소로 규정할 때, 교육은 수단과 방법 그리고 그 방향을 가리지 않고 인간변화만을 추구해 나가는 활동으로 비춰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여 강조해 두어야 할 점은, 비록 학교교육을 교육의 전형적인 형태로 이해하고 그리고 앞에서 제시한 개념적 요소들이 학교교육에 전형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을 인식한다고 해도, 교육은 비단 학교교육에 국한되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학교교육은 바람직한 인간변화를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활동의 모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표적인 활동 유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의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를 발전적으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모든 경험의 교육적 의미를 보다 중요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따라서 바람직한 인간형성을 위한 과정으로서의 교육의 영역은 보다 넓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교육의 의미를 이와 같이 넓게 생각할 때, 학교교육 위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학교교육 외의 교육적 경험이 인간형성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학교교육 외의 가정교육,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확고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정교육, 사회교육에 있어서도 그것이 ‘교육다운 교육’이기 위해서는 앞에서 제시된 교육의 개념적 요소들이 고려되고 충족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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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가정교육이라고 한다면, 부모의 의도적인 노력, 자녀의 전인적 성장에 대한 관심, 가치지향성, 자녀에 대한 존중, 부모와 자녀간의 인격적 상호작용,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녀가 경험하게 되는 의미충족과 자아형성감, 부모의 도덕적 책임 등의 요소가 충족될 수 있을 때 비로소 교육다운 올바른 가정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요 약
1. 교육의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만큼 단순하거나 명료하지 않다. 따라서 교육의 개념을 명료하게 밝히려는 일은 교육철학의 핵심적인 과제 중의 하나이다.
2. 교육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고 그 개념적 조건을 어떻게 세우느냐는 결국 어떤 가치관이 어떻게 반영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 어떤 교육에 대한 정의가 있다면 그것은 곧 어떤 가치관을 반영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육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것은 곧 교육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신념과 가치관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교육의 개념은 교육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관점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교육이 교육으로서 성립하기 위해서 충족시켜야 하는 기본적인 원칙을 제시하며, 교육을 통해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과 선택의 기본적 방향과 규칙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교육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계획하고 실천하게 될 교육의 방향과 내용, 성격이 달라지게된다.
4. 교육의 개념은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규정될 수 있다.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는 교육의 개념들 중에서 무엇이 보다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평가적 논의는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적 논의 역시 특정한 가치관에 입각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어느 개념이 올바른 것인가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교육의 개념은 어느 것이 보편타당한 것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이나 맥락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수 있는 개방성을 지닌다.
5. 교육의 개념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그를 크게 두 가지의 교육관으로 묶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주입과 적응으로서의 교육관이라면, 다른 하나는 성장과 자기형성으로서의 교육관이다.
6. ‘교육’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용례를 분석함으로써 교육의 개념적 요소를 분석하려 할 때, ‘교육’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용례는 매우 다양하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교육다운 교육’이라고 할 때 함축되는 의미들을 분석해 보면, 의도성, 전인적 인간변화에 대한 관심, 가치지향성, 피교육자의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인격적 상호작용, 의미충족과 자아형성감의 함양, 교육자의 도덕적 책임 등의 요소가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