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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국악성가 원문보기 글쓴이: Monica
▶다시오(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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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순교록의 1월 27일자에는 두 그룹의 아프리카 순교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성 다티우스(또는 다시오), 성 레아트루스(Reatrus)와 동료 순교자들과 또 다른 그룹으로는 427년부터 531년 사이에 아리우스파 반달족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던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 다른 성 다티우스(Datius), 성 빈첸시오(Vincentius)와 27명의 동료들이 함께 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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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오(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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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순교록의 1월 27일자에는 두 그룹의 아프리카 순교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성 다티우스(Datius), 성 레아트루스(Reatrus)와 동료 순교자들과 또 다른 그룹으로는 427년부터 531년 사이에 아리우스파 반달족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던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 다른 성 다티우스(또는 다시오), 성 빈첸시오(Vincentius)와 27명의 동료들이 함께 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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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보타(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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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시카 처녀인 성녀 데보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신앙을 지키다가 찢겨 죽었다고 한다. 그녀는 지중해 코르시카 섬의 수호성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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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트로(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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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순교록의 1월 27일자에는 두 그룹의 아프리카 순교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성 다티우스(Datius), 성 레아트루스(또는 레아트로)와 동료 순교자들과 또 다른 그룹으로는 427년부터 531년 사이에 아리우스파 반달족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던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 다른 성 다티우스(Datius), 성 빈첸시오(Vincentius)와 27명의 동료들이 함께 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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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포(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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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푸스(또는 루포)는 프랑스 샬롱쉬르손의 주교로서 교구내의 병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자선으로 유명하였다.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601년 그의 친구인 성 루푸스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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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로(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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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프랑스의 시스테롱(Sisteron) 교구의 보돈 수도원의 원장이 바로 성 마우루스(또는 마우로)이다. 그는 이 수도원의 설립자이자 초대원장이었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가 언급한 그의 전기에 의하면, 성 마우루스는 오를레앙(Orleans) 출신으로 수도자가 된 후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와 파리(Paris) 교외에 있는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0월 9일)의 무덤을 순례하였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병을 치유하여 크게 유명해졌다고 한다. 또 그는 사순절 40일 동안 숲 속에서 은거하여 고행하면서 지낸 위대한 수도자였다. 그는 마리우스(Marius) 또는 마이(May)로도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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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피니(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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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피렌체(Firenze)에서 태어난 성 미카엘 피니는 1502년에 카말돌리회의 은수자가 되기 전에는 로렌조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궁의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은수자가 된 후 사제품을 받았고, 자신의 은둔처를 벽으로 막고 그 안에서 죽을 때까지 20년을 지냈다. 그는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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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리아노(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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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의 세니(Segni) 출신인 성 비탈리아누스(Vitalianus, 또는 비탈리아노)는 교황 성 에우게니우스 1세(Eugenius I, 6월 2일)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어 657년 7월 30일에 착좌하였다. 그의 재임기간 중 영국 주교와 아일랜드 주교들의 부활절 축일 논쟁을 종식시킨 것이 가장 돋보이고, 로마(Rome)와 영국 교회간의 유대 강화는 그의 탁월한 지도력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캔터베리(Canterbury)의 성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월 9일)와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9월 19일)를 영국으로 파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의 그리스도 단성론 이단은 그의 재임기간에도 버젓이 활동하고 다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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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시오(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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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순교록의 1월 27일자에는 두 그룹의 아프리카 순교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성 다티우스(Datius), 성 레아트루스(Reatrus)와 동료 순교자들과 또 다른 그룹으로는 427년부터 531년 사이에 아리우스파 반달족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던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 다른 성 다티우스(Datius), 성 빈첸시오(Vincentius)와 27명의 동료들이 함께 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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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토(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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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순교록은 아프리카 순교자로서 성 아비투스(또는 아비토)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에 있는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에의 사도이자 첫 번째 주교로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과 동일인으로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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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라 메리치(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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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이탈리아 북부의 가르다(Garda) 호수 남쪽 데센자노(Desenzano)에서 태어나 경건한 신앙인으로 교육받았다. 어려서부터 성인전을 즐겨 읽었고, 성인들의 금욕 생활에 감명을 받아 금욕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13세 때 첫영성체를 한 후 평생 동안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는데, 쌍둥이같이 자라던 15세의 언니와 브레시아 시민이라는 귀족 작위와 넓은 땅을 가진 영주였던 아버지 조반니(Giovanni Merici)와 어머니를 연달아 여의고 외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5년간 휴양지로 유명한 살로(Salo)에서 살게 되었다. 그 후 성녀 안젤라는 작은 형제회 재속회(3회)에 입회하여 기도와 가난, 극기의 생활을 철저히 실천하며 자신을 이웃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부모처럼 돌보아주던 외삼촌의 사망 후 고향 데센자노로 돌아온 성녀 안젤라는 이웃에게 봉사하며 살았는데, 특히 주위의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기도와 신앙생활을 지도하였다. 1516년 안젤라는 두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브레시아의 귀족 파텐골라(Patengola) 가족을 위로하러 브레시아에 갔다가 그들의 청으로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서 성녀 안젤라는 죄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속죄와 금욕생활을 하는 한편 고향에서와 같이 청소년들에게 종교 교육을 실시하였다. 1524년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다음 해 로마를 순례한 뒤 그녀는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에게 동정녀들의 모임을 시작하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밝히고 허가를 받아 브레시아로 돌아왔다. 카알 5세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1528년 브레시아가 점령당하자 크레모나(Cremona)로 피난을 간 그녀는 그곳에서 심한 병을 앓다가 다시 건강을 회복하였다. 1530년 전쟁이 끝나 브레시아로 돌아온 성녀 안젤라는 뜻을 같이 하는 12명의 동정녀들과 함께 이듬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리고 1535년 11월 25일 28명의 동정녀들은 브레시아의 성 아프라(Afra) 성당에서 영성체를 하고 성녀 안젤라가 만든 규칙에 따라 청빈, 정결, 순명을 지키는 회원이 될 것을 서명함으로써 '우르술라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1537년 성녀 안젤라가 초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들은 특히 소녀들의 교육에 투신하고자 하였다. 가톨릭 여성 교육을 표방한 수녀회는 우르술라회가 첫 번째이다. 초기에 그들은 가족을 떠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수도복이 아닌 단순한 복장으로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에게 봉사하였다. 성녀 안젤라는 1540년 1월 27일 사망하여 성 아프라 성당에 묻혔고, 1768년 교황 클레멘스 8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참고자료 |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녀 안젤라 메리치 동정',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08-110쪽. |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4권 - '메리치, 안젤라',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7년, 2598-2599쪽. |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녀 안젤라 메리치 동정', 서울(성바오로), 2002년, 42-43쪽. |
사진/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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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리오(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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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계인 성 에메리우스(또는 에메리오)는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Cataluna)에 베네딕토회 규칙을 따르는 바뇰레스의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수도원을 설립하고 초대원장으로서 수도자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어머니인 성녀 칸디다(Candida, 1월 27일)는 근처 수도원에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는 메메리우스(Memerius) 또는 에메루스(Emerus)로도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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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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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 깊고 현명하던 요한(Joannes)은 프랑스 북동부 플랑드르(Flandre)의 워너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에 운 좋게도 위트레흐트(Utrecht)의 람베르투스(Lambertus)와 샤르트르(Chartre)의 성 이보(Ivo, 5월 23일)의 제자로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학업을 마친 후에 그는 자기 관구로 돌아왔다가 잠시 후에 프랑스 아라스(Arras) 교외에 있는 몽-생-엘로이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때 아라스의 주교가 그를 총애하여 그 교구의 부제가 되라고 권하였는데, 이것은 테루안(Therouanne) 교구장이 되는 서막이었다. 그 후 그가 주교가 되었을 때 성좌에서 그에게 중요한 선교 사명들을 맡겼다. 그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여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교회가 엄격한 시대였지만 그 자신은 항상 온순하게 처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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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노(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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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는 율리아노)의 전기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는 프랑스 르망의 초대주교이며 르망 지방의 사도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음은 사실이다. 7세기경에 성 율리아누스 주교 대성당이 세워진 것으로 보아 그의 생존은 그보다 더 이를 것으로 본다. 어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의 72 제자 중의 한 명으로 나환자 시몬(Simon)과 동일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성 율리아누스의 공경이 영국까지 전해진 것은 르망 출신인 헨리 2세 국왕의 개인적인 신심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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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노(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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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티아(Dalmatia) 사람인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는 율리아노)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때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의 소라에서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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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노(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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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순교록의 1월 27일자에는 두 그룹의 아프리카 순교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성 다티우스(Datius), 성 레아트루스(Reatrus)와 동료 순교자들과 또 다른 그룹으로는 427년부터 531년 사이에 아리우스파 반달족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던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는 율리아노), 또 다른 성 다티우스(Datius), 성 빈첸시오(Vincentius)와 27명의 동료들이 함께 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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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디다(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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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메리우스(Emerius, 1월 27일)의 어머니인 성녀 칸디다는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Cataluna)의 헤로나(Gerona) 부근에 자신의 아들이 설립한 바뇰레스의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수도원 근방에서 은수자로서 살다가 선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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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리코(1.27)◀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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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 또는 테오도리코)는 원래 프랑스 상스(Sens)의 생피에르레비(Saint-Pierre-le-Vif) 수도원의 베네딕토회 수도승이었다. 그는 왕실 고문을 역임한 후 오를레앙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로마(Rome)를 방문하러 가는 도중 프랑스의 토네르(Tonnerre)에서 사망하였다. |
첫댓글 오늘도 율리아노가 세분이나됩니다. 축일자 여러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