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릉(健元陵)의 크기 고찰
1.
건원릉(健元陵)은 조선 태조(太祖)의 능묘이다. 사적(史蹟)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건원릉은 태종(太宗) 8년인 1408년 9월 9일에 조성되었다.
1408년 5월 24일 태조(太祖) 이성계는 74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하였으며 한양(漢陽) 주변 100리 이내에 능묘를 만들게 되었고, 산릉(山陵)을 조성하는 데 대략 6,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하며. 서운관(書雲觀)에서 능실을 석실(石室)로 만들자는 상서(上書)를 올려 예종(睿宗)때까지는 왕릉의 능실은 석실(石室)로 만들게 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태조 이성계의 능묘(陵墓)인 건원릉에 대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사서(史書)속의 기록은 현 경기도 구리(九里)에 있는 동구릉(東九陵)에 위치한 능묘의 크기에 정확히 맞추어 기술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재고찰해 보면, 일제(日帝)는 대륙의 거대한 조선을 왜소한 반도로 옮기면서 유적지(遺蹟地)를 새로 만들고, 만들어진 유적(遺蹟)에 맞추어 사서(史書)속의 기록을 변조했음을 알수 있으며, 대륙에 남아있던 물질적 또는 문서적 기록은 문화혁명(文化革命)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두 사라져 버렸음을 또한 유추해 낼 수 있다.
2.
안드레 에카르트(Andre Eckardt, 1884∼1974, 한국명: 옥낙안-玉樂安)는 베네딕도회의 신부로 1909-1929년까지 20년간 조선에 체류하며, 한국어 연구와 한국문화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했으며, 그의 대표적 저작으로는 최초의 조선미술통사라 할 수 있는 <조선미술사>가 있으며, [<Wie ich Korea erlebte> 한국어 번역본: 조선, 지극히 아름다운 나라, 독일인 옥낙안이 본 근대 조선인의 삶, 이기숙 역, 살림출판사 2010]이 있다.
2010년에 번역출판된 <조선, 지극히 아름다운 나라>라는 책에는 서양인 기록중 유일하게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반도 구리(九里)에 있는 동구릉의 건원릉이 일제(日帝)에 의해 왜곡 축소되어 만들어진 가짜임을 단번에 파악해 낼 수 있다.
그의 건원릉(健元陵)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폭이 넓고 손질이 잘된 숲길이 2킬로미터 가량 丁字閣까지 곧게 뻗어 있었다. 길 좌우로는 수백년 묵은 침엽수들이 서 있었다.
丁字閣에 닿기 직전에 홍살문이 있었다, 붉은 화살 모양의 나무가 박힌 출입문이라는 뜻이다. 정자각이 몇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 일직선으로 끝나는 지점에 놓이지 않고 직각으로 굽은 곳에 있다는점, 또 15미터 높이에 위치한 거대한 봉분도 마치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악귀들을 속이려는 듯이 옆으로 비켜서 있다
여러 王들의 실록과 지금도 남아 있는 서울 근교의 거대한 봉분에서 드러나듯이 과거에는, 특히 高麗時代와 朝鮮時代초기에는 더 호화롭게 王을 장사지냈다.
혼유석(魂遊石)은 길이가 3미터, 너비가 1.5미터, 두께가 80센티미터인 네모돌이다.>
현재 건원릉의 혼유석 크기는 가로 3,296m, 세로 1,915m, 두께 0.53m로 되어 있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鼓石)은 높이가 50cm로 따라서 에카르트가 위에서 말한 혼유석 두께가 80cm였다는 기록은 고석(鼓石)을 제외한 두께였음을 알 수 있다.
에카르트는 그의 책에서 순종(純宗,1874-1926)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해 능묘(陵墓)의 조성과정을 직접보고 기록해 놓았는데 순종의 능묘에 대해 현실(玄室)위로 10미터의 봉분(封墳)을 쌓아올렸다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순종능 높이는 대략 11미터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높이는 경주 천마총(天馬塚)의 높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여지며, 천마총의 높이는 12.7m이다.
위의 글에서 건원릉(健元陵)에 대해 15미터 높이에 위치한 거대한 봉분이란 표현은 결국 순종능과 비교해서 고찰해 보면 건원릉 능묘 높이가 15미터였다는 사실로 분석되어야 하며, 이는 또한 서울 근교의 거대한 봉분(封墳)이란 표현을 통해 조선임금들의 능묘(陵墓)가 모두 10미터 이상으로 거대하게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다른 하나 중요한 분석요소는 바로 에카르트가 건원릉(健元陵)을 답사하면서 동구릉(東九陵)에 대한 기록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대륙조선 한양근교에 정말 동구릉이 있었다면 에카르트는 무리지어 늘어서 있는 역대 임금 능묘에 대해 정확히 기술했어야 마땅하지만, 반도 동구릉과 같은 역대 조선임금 능묘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첨언하지 않고 있다. 이를 통해 분석해 보면, 동구릉(東九陵)이란 일제가 대륙조선의 역대임금 능묘를 반도로 옮기면서 거대한 능묘(陵墓)조성의 어려움과 비용으로 인해, 한 장소에 모아 놓고 사서(史書)를 변조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데 서오릉(西五陵), 서삼릉(西三陵) 등도 모두 같은 맥락으로 보여진다.
건원릉(健元陵)의 능묘(陵墓)조성에는 하루 약6천명이 동원되어 3개월15일 총105일간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럼 총 투입인원이 무려 63만명에 육박하는 엄청난 대공사인데 반도에 만들어진 능묘를 보면 너무나 왜소하고 초라해 보일 뿐이다.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1858-1932)은 그의 기록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묘역 크기가 무려 120만평에 달했다고 기록하면서 또한 황후의 능묘높이가 11-15미터에 이르렀다고 부연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유추하면 건원릉의 능묘역 또한 어마어마한 크기였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현 반도의 건원릉(健元陵)은 일제에 의해 작고 왜소하게 만들어져 우리 곁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슬픈 역사의 비애(悲哀)일 뿐임을 가슴 저미게 바라본다.
3.
건원릉(健元陵)은 한양주변 100리(50km)이내에 조성되었다고 하고 현 반도의 서울 동쪽에 만들어져 있으니, 이를 참고해 대륙 구리(九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비정할 수 있다.
2025.02.12.松溪
첫댓글 궁금했던 사실들을 대륙조선사 관점에서 규명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매일. 새 글들을 기대하면서 사이트를 방문합니다.
감사합니다..항상 건강하세요.
송계님, "건원릉(健元陵)은 한양주변 100리(50km)이내에 조성되었다고 하고.." 이 글은 책에 기록으로 있는 건가요 아니면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가요? 전통적으로 왕릉은 100리 이내에 조성한 건가요?
경국대전의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네..감사합니다..정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