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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완의 기찬여행-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서 |
입력시간 : 2014. 01.10. 00:00 |
남도 곳곳 따라 '수군재건길' 걸어보자
명량해전 '13 대 133' 대승 해상권 다시 장악
전적지 해남 이진·어란, 진도 벽파진 가볼만
완도 고금도, 목포 고하도 등도 밀접한 관계
마누라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서 교회를 다녀왔다, 집에서 원고 쓰는 날에는 삼식이가 되어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날이라도, 이끌려 교회에 다녀와야 홀가분하다, 왠! 생뚱맞은 이야기일까?
교회에서 헨델의 '메시아'를 들려준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가 도입부에서 사용됐다.
문득 교회에서 예배 중에 이순신은 수군재건의 길목에서 선조와 윤두수 일당과 명나라 장군들에 의한 지독한 견제를 받는다.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도 마치고 싶어서 마친 것이 아니다. 원균이 패전하면서 조선수군을 말아먹고 나니, 더 이상 별수 없어 이순신에게 설거지 하라는 의미 일지도 모른다.
그가 만일 헨델의 '메시아'를 알았다면 이렇게 항변했을지 모른다.
“메시아께서는 위로자로 오셔서, 우리의 상처와 절망을 치유하십니다. 소장은 절망과 시름에 빠져 고통 받는 종들인 조선백성의 안위와 조선수군을 재건하여 왜군을 물리치면서 그들의 편에 설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했을 것 같다.
그는 명량해전에서 엉망진창이 된 조선수군으로 13:133의 대승을 이룬다.
정유년(1597년 8월3일 통제사로 임명을 받아, 구례→곡성→순천→보성→장흥→해남(뱃길)→진도(뱃길)→해남(뱃길,명랑대첩)→무안(뱃길)→영광(뱃길)→고창(뱃길)→목포(뱃길)→완도(뱃길)→고흥(뱃길)→여수, 광양(뱃길)→남해 관음포(뱃길) 전사. 무술년(1598년 11월19일) 숱한 뱃길을 다니면서 남서해상제해권을 장악하면서, 왜군에게 타격을 준다.
정유년 8월 7일(양력 9월 17일)의 난중일기다.
“'을축' 맑다. 일찍 길을 떠나 곧장 순천으로 갔다. 고을에서 십리쯤 되는 길에서 선전관 원집(元潗)을 만나 임금의 분부를 받았다. 길옆에 앉아서 읽어보니 병마사가 거느렸던 군사들이 모두 패하여 돌아가는 길이 줄을 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 세필과 활과 살을 약간 빼앗아 왔다. 곡성현 석곡 강정 (석곡면 능파2구 능암리 3490번지 일대)에서 잤다.”고 쓰여 있다.
지금의 능파2구 둔치의 물레방아 근처다.
동네 뒤 달봉 기슭에 보성강이 굽이쳐 흐르는 바위위에, 평산 신씨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인 진사(進士) 대년(大年)과 아우 대수(大壽), 대춘(大春), 대충(大冲), 대림(大臨)이 진사(進士)에 동방급제(同榜及第)하고 여기에 작은 정자를 짓고, 이름을 ‘능파(凌波)’라 하고 또 ‘오로당(五老堂)’이라 하였다.
5형제의 우애를 돈독히 하자는 뜻에서 지었으며, 능파라는 이름을 짓게 된 연유는 속세의 번뇌를 다 잊고 선비의 도를 닦기 위해서다.
능파정을 떠받치고 있는 바위는 마름처럼 생겼다 하여 ‘능암’이라고 부르며, 신대년과 친분이 있는 충무공 이순신이 순천으로 가던 도중 능파정을 찾아와 신씨 5형제와 나라 걱정을 하며 밤을 새웠다고 일기에 전한다.
지금은 능파정 자리만 남아 있으며, 얼마 전 주변으로 농로를 개설 하면서 주변의 흔적들이 많이 파손 되어 버렸다.
능파정 이라는 암각된 글씨가 파손 되었나 필자가 갔을 때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 무척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정유년 8월 9일 (양력 9월 19일)의 난중일기 이다.
'정묘' 맑다. 일찍 떠나 낙안군에 이르니, 오리까지나 사람들이 많이 나와 환영하였다. 백성들이 달아나고 흩어진 까닭을 물으니, 모두 하는 말이, "병마사가 적이 쳐들어온다고 퍼뜨리며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그 때문에 이와 같이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관청에 들어가니 적막하여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 김제군수 고봉상(高鳳翔) 등이 산골에서 내려와서, 병마사의 처사가 뒤죽박죽 이었다고 말하면서 하는 짓을 짐작했다고 하니, 패망한 것을 알만하다.
관청과 창고가 모두 다 타버리고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서 말하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십리쯤 오니, 길가에 동네 어른들이 늘어서서 술병을 다투어 바치는 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저녁에 보성군 조양창(조성면 조성리)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창고에는 곡식이 묶여진 채 그대로였다. 그래서 군관 네 명을 시켜 지키게 하고, 나는 김안도(金安道)의 집에서 잤다. 그 집 주인은 벌써 피난 나가 버렸다.
일기에는 낙안읍성을 거론한다,
이렇듯 남도의 곳곳이 수군재건로의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조양창은 전라좌수영의 군량미 창고를 그대로 방치한 채로 도주 한 것이다.
옛 고도(古都) 보성군 조성(鳥城)은 선사시대부터 흔적이 있는 곳이다.
조양현성(兆陽縣城) 이곳은 백제시대에 쌓아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성이 있는 조양현은 백제시대 분차군의 동로현(冬老縣)에서 통일신라 후 개명되었으며, 전라도 4진(鎭)(목포·조양·옥구·흥양)으로 지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지금은 조성이 육지의 자락에 있지만 예당 간척지가 조성되기 이전에는 모두가 득량만의 드넓은 갯벌이였다.
그러다보니 왜구들의 침탈이 심하여 조양에 성곽을 쌓고 진을 설치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나당에 백제가 무너질 때 이곳을 통하여 일본으로 망명길에 오르니 역사는 너무 아이러니 하다. 아마도 백제의 유민이 왜군이 되어, 그 후손이 다시 조일전쟁을 참전하지 않았을까 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해본다. 장군은 이곳에서 군량미를 확보하면서 수군재건에 박차를 가한다.
보성 박실 양산원집. 득량면 송곡리 박실마을에 양산원의 집터와 오매정이 있으며, 보성군 회천면에 자리하고 있는 회령포영(會寧浦營)지터와 봉수대로 추측되는 흔적들이 남아 있으며, 보성관아는 현 보성군청 자리이며, 보성초교는 보성군수 관사와 객관이며, 선조에게 장계를 썼던 곳이 열선루(列仙樓)이다.
“今臣戰船尙有十二。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戰船雖寡。微臣不死。則賊不敢侮我矣。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戰船)이 있사오니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전선이 비록 적지만 미천한 신하가 죽지 아니했으니 왜적이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열선루는 보성초교 뒤편의 보성중앙교회 자리이며, 원래 열선루의 이름은 취음정(翠陰亭)이었는데 1486년(성종 17년)에 군수 신경이 중건을 하면서 열선루로 이름을 고쳤다.
그리고 보성 회천면 전일리 백사정(白沙亭)과 장흥의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회녕진성(會寧鎭城) 전시에는 수군의 집결장소로, 평상시에는 군량과 군기를 쌓아두는 보급기지로 활용 했던 곳이다.
해남의 이진, 어란 진도의 벽파진은 해남의 우수영과 명량해전으로 유명한 곳이며, 완도의 고금도, 목포의 고하도 등이 이순신의 수군재건로와 아주 밀접한 관계이다. 이번 방학 때 함께 하는 여행지로 추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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