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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
황석영/문학동네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냉전의 박물관과도 같은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작가로서 살아온 내가 갈망했던 자유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던가.
이 책의 제목이 ‘수인(囚人)’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
산다는 일이 자유를 갈망하는 일종의 감옥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이라는 감옥에서 만성이 된 죄를 지으며 반성없는 행복을 소망하는 삶.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사회적 약속이라는 형틀을 쓰고, 위선에 익숙한 가면으로 누추함을 가리는가 하면, 보여주기 위해 조작된 미소를 지으며 거대한 일생을 조종하고 관리한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은 자신을 지켜보는 줄 모른 채 일생을 살아가지만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관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적당한 가식과 일탈의 욕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시지포스를 연상시키는 수인의 몸이 사각의 틀에 갇힌 채 일생의 형벌인 돌을 나르고 있다. 그는 틀을 벗어나서도 그 끝없는 형벌을 감내하는 듯 스스로의 벽을 세우고 있다. 囚人이란 사람의 생을 놀라운 방식으로 압축한 상형문자가 아닌가.
묵직한 돌직구 삶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현대사 그 자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누구나 다 아는 황석영 아닌가. 그러나 그에 대한 나의 시선은 조금 애매한 데가 있었다. 가령, 누군가 나에게 "우리 시대 거장은 누구인가?" 라고 물어 온다면, 소설가로는 조정래나 박경리 선생이 먼저 오겠고, 통일운동가라면 문익환 목사나 백기완 선생이 먼저인 것 같은데, 작가 황석영은 그 어디에 놓아도 2등을 하면 억울해지는 이름인 것이다. 한 분야에서 1순위가 아닌데 그는 왜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최고의 거장일 것만 같은가? 그것은 1등이 아니라 존재감 때문일 것이다. 그의 존재는 이름만으로도 문학사가 되고, 통일운동으로 구속되었기에 국제사면위원회의 상징이기도 하며, 북행을 결행하였기에 남북 경계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나 또한 뜨거운 여름 창살을 경험하게 되었다. 돌아보니 뜨겁지 않은 해 없었으나, 민주주의 이름으로 가장 극적이었던 그해 6월항쟁으로부터 30년이 걸린 걸음이었다. 먼 과거로부터 걸어왔으나 어쩌면 더 먼 길을 골라 걸어온 그의 수고스런 발자취에 파란, 만장이 펄럭이는 것 같다. 젊은 날 가슴 뜨거운 혁명에 매료되었으되 내 것이 아닌 그분들의 것이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듯, 오늘도 여전히 책이라는 안전장치에서 혁명을 훔쳐본다. 1993년 4월 27일 귀국과 함께 펼쳐진 국가보안법의 체포 쇼를 그들의 머리위에서 바라다보는 수감자의 이기적 나레이션이 일당백의 효과라는 생각이다. 나름의 객관성을 지니되 철저히 나 중심의 자서전은 이럴 때 얼마나 당당한 권위인가.
내가 처음으로 황석영의 책을 읽은 건 겨우 스물한 살 때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무언가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단 생각이다. 그럼에도 그 시절엔 대하소설이 넘쳐났던 것 같다. 마치 최고 작가 타이틀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름 꽤나 있는 작가들은 10권 부량의 대하소설들을 서점가에 쏟아냈던 것이다. 그분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나라 소설계에서는 더 이상 대하소설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 독서력이 얕았던 나는 이름난 작가의 책들을 두서없이 섭렵하고 싶어 했고 <임꺽정>, <장길산>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대작들은 고지를 향한 목적지나 다름없었다. 당시 거의 모든 책들은 빌려 읽어 아쉬움이 많았는데 언제고 사서 읽어야지 생각했으나 여전히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하여간 두 책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읽은 덕분에 나는 아직도 황해도 구월산 패거리가 꺽정인지 길산인지를 쉽게 구분하지 못하고, 그의 도당들을 제대로 연결지을 수가 없다. <수인>속에서 그의 작가인생에 분수령을 이룬 <장길산>에 관한 에피소드를 엿볼 수 있었다. 역사학자 정석종의 자료 수집이나, 이어령 박사의 사람 보는 안목, 들쭉날쭉한 마감 사태에도 끝까지 믿고 지면을 허락해준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 등이 <장길산>을 탄생시킨 배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부적인 이야기꾼 황석영이야말로 그 모든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겠는가.
<무기의 그늘>은 그가 해병대로 종군하여 참전한 베트남전쟁의 실상을 고발한 문제작이다. 자유의 십자군으로 출전했으나 강대국의 대리인으로 전락한 전쟁에서 지극히 아시아인의 시각으로 전쟁을 봐줄 것을 희망했다. 전쟁에서의 휴머니즘이란 민간인들의 사치스런 관념이라 했던가. 당시의 풍조를 반영하듯 헐리우드의 상업영화가 그려내는 휴머니즘 가득한 전쟁영화에서는 야만과 폭력은 아시아인(베트콩)의 것이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지닌 인간미는 백인전용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받은 영혼의 상처에만 괴로워하는 심각한 자기부정 행위로, 명백한 가짜 휴머니즘이다. 그들이 한 달 넘도록 베트남 전역에 뿌린 네이팜탄 (저 유명한 소녀의 보도사진)은 치명적 대량살상무기였다. 훗날에야 국제적 공분을 샀지만, 베트남전쟁이야말로 인류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중요한 계기를 이루었다 하겠다. 결국 베트남전쟁이 낳은 광기와 폭력의 일상성은 백주대낮 광주의 활극으로 구체화되었다. 황석영이 그 관념적 휴머니즘을 배제하고 쓴 <무기의 그늘>은 당시 가짜 휴머니즘에 사로잡혔던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성급히 마무리한 책이었다. 덕분에 활자 곳곳에서 1989년의 곰팡내가 풍겨 나오는 책을 다시 뒤적여 보아야겠다.
☞ 밀라이 학살 사건도 베트남 전장에서의 일상적인 여러 가혹행위 중의 일부에 불과했다.... 한국전쟁 이래로 이러한 폭력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었고 베트남전쟁으로 심화되면서 몇 년 뒤에 광주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백주의 살육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 베트남전쟁은 우리가 아시아에서 타자에게 폭력을 가한 첫 케이스로 툭하면 일본의 과거사를 들추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돌아보지 않고 있는 부끄러운 사례다. -216p
☞ 루이제 린저는 망명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국어가 있는 곳에 돌아가야 합니다." -46p
☞ 바깥 세상에서 나 자신과 코리아의 부재는 속수무책이었지만 그저 징징대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이제 막 벽에 조그만 균열을 내고 너른 세계로 첫 걸음을 내딛는 참이었다. 그러나 벽 틈을 빠져나오자마자 이 세계는 북한이라는 장애물을 넘어야만 도달하게 되어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바깥세상이 접하고 알고 있는 북한을 나도 알아야만 했던 것이다. -47p
그가 북녘을 밟고 와서 쓴 <사람이 살고 있었네>는 온통 붉은 책이었다. 책꽂이에 불온한 책 몇 권 쯤은 지니고 싶었던 93년에 구입했던 책이다. 최초의 방북작가 기행문답게 감격스런 밑줄을 그으며 읽었지만, 끝까지 읽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의 생애 중요한 획을 그은 책들에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다.
인간 황석영이 쓴 몇 편의 소설들을 읽었지만, 그가 이야기꾼으로서의 소설가를 내려놓고 쓴 그의 자전 앞에서 마침내 황석영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만난 것 같다. 이것은 한 개인의 자전이 아니라 현대사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닌다 하겠다. 경계를 넘는 것으로 수인생활을 자초했던 그의 거대한 스케일에 지금까지의 소설 그 이상을 읽은 느낌이다.
☞ 윤한봉은 항쟁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수배중이었고 당시 상황으로 보아 체포되면 아마도 고문 중에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1981년 4월 29일 밤, 윤한봉은 마산에서 파나마 선적의 레오파드호에 올랐다....한 평 반의 화장실 안에서 그는 삼십오 일 동안 긴장과 굶주림에 떨며 숨어 있었다.... 호주를 거쳐서 미국 서부 해안으로 가는 항로여서 적도를 두 번이나 지나는 동안 그는 거의 해골만 남은 쇠약한 몰골이 되었다....한인 목사가 간신히 배에 올라 환자 같은 몰골의 윤한봉에게 암호를 물었으나 그는 어리둥절한 채 약속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목사는 집으로 돌아와 한국 쪽으로부터 '틀림없는 물건'이라는 확답을 받고서야 다시 먼길을 되돌아가서 윤한봉을 끌고 내려왔다. 배가 다시 출항하기 한 시간 전이었다. -59p
☞ 우리는 서양인들처럼 끌어안지는 않았으나 두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물기가 가득 고였다. 나도 돌아서서 눈시울을 닦았다 윤은 나보다 다섯 살 아래였지만 웅숭깊은 심성이며 현실에 대한 통찰력과 성실성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어서 내가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려워하던 친구였다. -58p
☞ 전라도 방언으로 합수는 똥과 오줌을 합친 거름을 말하는데, 이를 알게 된 그는 화를 내지도 않고 농부에게 가장 소중한 거름이 자기 별명이라니... 자기 책에다 한자로 '合水'라고 크게 써놓았다. 61p
그가 광주민주화의 전설적 이름 윤한봉과 재회하는 장면은 이렇듯 시큰한 울림을 주었다. 그들의 재회는 생사의 고비를 넘은 극적인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그의 도미장면과 전부인 홍희담과 연결되는 인물관계도는 흥미로웠다. 첫 부인이었던 작가 홍희담(희윤)과의 결혼생활 회고는 오히려 담담해서 친구처럼 유지되는 관계임을 짐작할 수 있었으나, 재혼부인 김명수와의 관계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앙금이 남은 것으로 안타깝게 읽혔다. 그의 여성편력적(?) 사생활이 이 책에서는 객관적으로 그려질 수 없었던 것 같고, 그의 방북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을 재혼부인의 입장이 읽혔던 때문 같다. 그에겐 결혼생활이 또 하나의 수인생활이었을까. 매 순간 경계에 섰던 사람의 일상적인 겉돌기였을까. 너그러울 때의 이해는 따뜻하지만 칼날보다 매섭게 편을 가르는 것 또한 이해의 작용 같다. 일상은 감옥이고 우리는 모두 경계에서 방황하는 수인의 몸. 누가 누구의 결혼에 대해 함부로 재단할 수 있겠는가. 결혼이 두 번이든 세 번이든, 익명의 호사가들처럼 왈가왈부 하고 싶지는 않다. 모두 칼날처럼 겨눈다면 결국 입을 다물고 말 것이다.
나는 그의 수인생활에 적잖이 감동하였고 반갑고 그리운 이름들이 나올 때면 마치 잘 아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듯 깊이 경청하였다. 내 젊은 날의 첫사랑 시인은 김남주였다. 그의 투박하고 지고지순한 저항성을 담은 눈빛이 좋았고, 그가 쓴 뜨거운 혁명연애시는 내 불온한 '사상의 거처'를 제공했던 것 같다.
☞ 그는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 영문과에 진학한다. 혼자 공부하는 버릇이 붙은 그는 강의실에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한번은 어느 교수가 셰익스피어를 강의하고 있을 때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껄껄 웃고는 나가버리더라고.... 김남주는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쓰고 싶은 시도 쓰고 후배들도 길러낸다고 광주에서 '카프카'라는 서점을 운영했는데 박석무의 소개로 창작과비평사를 비롯한 몇몇 출판사가 보증금도 받지 않고 책을 보내주었지만 얼마 못 가서 망해먹고 만다.... 물봉이란 해남 사람이 촌사람들 중에서도 유독 물정에 어두워 그 고장의 특산품인 '해남 물감자'라고 불리던 것에 착안하여 물처럼 부드럽고 남에게 봉 잡히는 야물지 못한 인정주의자라는 뜻으로 붙인 별명이다. 그러나 그가 불의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유신독재에 맞섰던 것에서 대중은 그에게 '전사 시인'이라는 별호를 붙이게 된다. -326p
이문구의 행위에 대한 언급은 이문구스러워서 흐뭇했다. 문인도 독자도 이문구의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그리워할 것이다.
☞ 이문구는 당시에 나와 다를 바 없는 청년이었지만 한참 손위 형처럼 의젓했다. 고색창연한 옛날식 사투리에 속담과 고사성어를 적절히 섞어서 쓰는 그의 화법은 우선 점잖고 엇구수했으며, 후배들은 물론 선배들과 동석해서도 타이르는 것처럼 들렸다. 그것은 도회지에서 자기 힘으로 '살아남은 자'의 당당한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산해, 토정 이지함 등으로 유명한 한산 이씨의 후손으로서 그의 은근한 양반자랑은 애초부터 나 같은 '천출'로서는 감당할 길이 없었다. -284p
☞ 김동리가 교수로 있던 서라벌예대에 입학해서 소설을 썼는데 다른 이는 모두 고사성어나 충청도 사투리가 난삽하다고 평했지만, 김동리만은 그의 글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알아보았다..... 1980년대에 김동리가 김남주를 적색분자로 몰면서 작가회의의 석방운동을 공격했을 때 회원들이 성명서도 내고 반론도 쓰면서 항의를 했는데, 이문구는 김동리와의 의리를 지키며 그들과 반목했다..... 당시 이문구의 김동리에 대한 두둔과 분노를 이해는 하면서도 그를 대장부로 아는 오랜 동료로서 어쩐지 좀 씁쓸하고 섭섭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아랫것'이라 여전히 이문구를 좋아했고 스스로의 편향에 대해서 조용히 반성했다. -287p
그 누가 이문구를 싫어하겠는가 했던가. 그의 구수한 충청도 문학이 그리워질 정도다. <수인>은 그의 생애를 그려낸 높다란 산맥 같은 책이지만, 당대의 지사적 삶을 살다간 이들에 대한 그리움의 책이라 부를 만하다. 그것은 고은 시인의 문학 초창기를 그려낸 대목에서도 만날 수 있는데 고은을 우리시대 새로운 문학운동의 중심에 세웠다는 내용이다.
황석영 또한 일정한 거처 없이 세상을 수도의 터로 삼았던 독신의 고은 시인을 그립다고 했다. 서로에겐 평범한 생을 거부하는 기질적 동류의식이 상충할 것 같았다. 고은 시인 또한 자신이 속한 시대를 민중의 무게로 짊어진 시인으로서, '그의 비약이 그의 재간이자 덫'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동시대에 저만한 예술가가 몇이나 되겠냐고.
소설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쥐락펴락 제 머릿속에서 무수한 플롯을 구성하고 일체의 작전을 지휘하는 통수권자일 것이다. 그의 소설적 재미는 입심인 것도 같고 인내 같기도 하다. <수인>을 그의 자서전이면서도 소설적 긴장감으로 읽게 만든 것이 그의 탄탄한 삶 만큼이나 무수한 인간 군상의 에피소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석영이란 이름은 비단 문학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에서 '석영'이란 보석을 떠올린 적 없었는데 처음으로 그 가치를 본 느낌이다. 무릇 작가는 시대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준엄한 작가의식을 대장정으로 이룩해낸 사람이 황석영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의 수인생활에 도움(?)을 준 현대사의 페이지마다 그는 이미 한국현대사의 지형도가 되었다. 아울러 그와 함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한 시대를 호흡했던 수많은 지사들, 그들 모두를 의적 장길산이라 이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