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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88년
낙양성에 춘삼월 따스한 봄이 온지 오래되었건만 황궁 어처 극시아의 가슴은 아직 얼음장이었다. 낙양궁성의 북궁도 여느 때처럼 활기차고 봄의 기운이 강렬했다. 평상시와 달라진 것은 아무 데도 없었다.
단지 몇몇 여인의 가슴이 허허롭게 구멍 뚫려 봄바람이 가슴 속에 머물며 가슴을 채우지 못하고 그냥 휑하니 지나가버린다는 게, 좀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일까?
그 중의 한 여인이 극시아다. 극시아는 남몰래 매일 밤마다 울고 있었다. 구중궁궐에서 그린 임을 머나먼 북으로 떠나보낸 후, 꿈에라도 사모하던 그 임이 목숨을 잃었다는 비보에 접하고서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나도 무슨 수를 써서든 태자전하를 따라가, 그분과 함께 죽었어야 하는데.’
그녀는 요새 부쩍 죽음을 머릿속에 맴돌리고 있었다.
그 무렵 다른 두 여인은 장생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고조영과 이해고, 사비우의 시신은 찾지 못했느냐?”
“그래요. 그 지역을 샅샅이 뒤지고 파헤쳐보았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답니다.”
“목격자도 발견하지 못하고?”
“산 아래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해보았지만, 하룻밤 그곳에서 머문 이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답니다.”
“네 추측에는 그들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 같으냐?”
“죽지 않았으면 살았겠죠.”
“그런 대답이 어디 있느냐?”
“그 돌궐 도적놈들이 죽여서 어디엔가 감쪽같이 파묻었을 거예요. 그놈들부터 붙잡는 게 순서예요.”
“네 말이 옳구나. 범인들을 반드시 붙잡아 능지처참해야 한다. 하지만 그네들은 돌궐로 들어갔을 터이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돌궐에 사자를 보내, 세 분을 죽인 범인들을 찾아내 넘겨달라고 요구해야죠.”
“그렇지 않아도 그들이 늘 우리 북변을 침공해 우릴 괴롭히는데, 그 요구가 불 난 데 기름 끼얹는 격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얼마 후부터, 신도 낙양성과 서경 장안성 일대에는 고조영과 신창 이해고, 사비우 등이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어디에서부터 그 풍문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는지 모르나, 사람들은 모두 중화인이 아닌 이족夷族 젊은이들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물론, 그 이족 젊은이들이 장차 반역을 저질러 무 태후를 죽일 것이라는 점쟁이들의 예언에 혹한 나머지, 무 태후가 자기 일신의 안위를 염려한 끝에 돌궐인들의 손을 빌려 결국 그 젊은이들을 죽였다는 풍설도 은밀하게 나돌았다.
“고조영은 얼굴도 잘생기고 무예도 따를 자가 없었다는데, 하늘이 그를 버리신 게지. 그가 후고구려의 태자라니, 이는 틀림없이 후고구려가 망할 징조네.”
“자네 말이 옳으이. 거란팔부를 평정하고 중원의 무사들을 웅시했던 신창 이해고도 비명횡사했으니, 이는 하늘이 거란을 돕지 않는다는 표식일세.”
“그 뿐인가? 사비우 역시 말갈의 천하장사라는 구만. 이래저래 하늘은 우리 중국을 도우신다는 증거일세.”
“하지만, 젊은 놈들이 무 태후 치마 폭 속에서 놀았다니, 뭐 그만하면 인생에서 좋은 것은 다 얻어 누린 셈 아닌가? 일찍 죽었다고 서러워할 필요가 없을 걸세.”
“태평공주가 안 됐어. 자나 깨나 고조영을 쫓아다녔다는데.”
“그 여자는 남편이 뻔히 있는데 뭐가 안 됐단 말인가? 실은 어처 극시아가 고조영의 정인情人이었다지 뭔가? 그래서 어처 극시아가 요즘 밤마다 베개로 눈물을 적신다네.”
“이 사람아, 자네가 보았는가? 심산유곡 은밀한 숲속보다 더 깜깜하고, 심해보다 더 깊은 구중궁궐의 일을 자네가 어찌 안단 말인가?”
“내 친척 가운데 궁인이 있네. 소문을 들었어.”
“하지만, 은밀한 풍설에 의하면 무태후가 돌궐의 자객들을 시켜 그들을 제거했다는데, 그들이 이족이라고 하지만 어찌 자기가 총애하는 놈들을 죽일 수 있을까?”
“그거야 그들이 역적모의를 해 무 태후 자기를 죽일 운명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잖은가? 그리고 음험하게도 당에 거주하는 돌궐인들을 돈으로 매수해 그들을 죽인 것은, 돌궐과 고려, 돌궐과 거란을 상호 철천지원수로 만들어 어부지리를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겠나?”
“사실이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어리석은 여인일세.”
“그러게 말이네. 진상을 알고 나면 돌궐과 고려말갈, 거란 등이 무 태후에게 이를 갈지 않겠나? 우리 대당의 백성들, 특히 돌궐에서 가까운 북방 사람들은 그렇잖아도 돌궐 때문에 높은 베개를 베고 편히 자지 못하는데, 무 태후를 얼마나 저주하겠나? 이씨 친왕들은 회심의 미소를 날리며 무 태후를 속히 제거하려 할 테고.”
“쉿! 이 사람아, 낮말은 쥐가 듣고 밤말은 새가 듣는다네.”
사람은 죽어도 세상은 태연하게 흘러가고 해는 여느 때처럼 무심하게 동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한 세대가 가되 해와 달은 변함없고, 아무도 모르게 한 사람, 또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 두 세대가 지나며, 또 다시 열 세대, 백 세대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언 수천 년이 수일처럼 지나가버리지만 하늘의 해는 항시 저리 무정하다.
수천 년 전의 사람들이 늘상 바라보던 저 태양을 오늘의 우리도 변함없이 쳐다보고 있다. 수천 년 후의 인간도 저 태양을 무심코 일별하리라. 산천은 옛날과 같되 인걸은 보이지 않으며, 오래 전의 집도 마을도 죄다 사라지고, 그 위에는 전혀 다른 집과 마을, 도로, 물건이 놓여, 전혀 딴 세상이 된다.
하지만 그건 딴 세상이 아니고 옛 세상 그대로다. 수천 년이 수일에 불과하니, 기천 년 전의 사람들과 그들의 일을 궁금해 해 할 필요가 없다.
그들도 역시 자신들의 세대 수천 년 전 사람들을 그렇게 궁금해 했다. 오늘의 우리가 그들을 의식할 줄 알았는가? 수천 년 후의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할 것이다. 고독과 슬픔과 눈물과 한숨과 비통과 웃음과 쾌락과 행복과 즐거움과 무료함과 흥미진진함에 가득 찬 서기 21세기 우리의 삶을.
하지만 신神의 눈에는 지나간 천 년이 어제와 같으며 하룻밤의 한 경점更點과 같다고 했지.
불과 몇 십리 떨어진 곳도 잘 보지 못하는 인간의 눈보다, 신의 눈이 더 정확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수천 년 전의 일을 신비롭게 간주하지 말고, 오늘의 우리처럼 여겨야 할 것 같다. 리하면 우리에게도 신과 같은 눈이 열릴지 어찌 알겠는가?
따분하고 재미난 삶, 하루하루가 그저 그렇게 흘러가고 의미심장하게 전진하는 삶. 수 천 년 전의 그들을 누가 회상할 것인가? 지금의 그대를 수 천 년 후에 누가 기억해줄 것인가?
당나라 동도 낙양성의 삶도 지금 우리의 삶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하고 잡담하고 웃고 울고, 퇴근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회의하고 여행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그렇게 살다가 모든 인생이 간다.
낭야왕 이충도, 월왕 이정도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한 줌 이슬로 사라진 것이 서기 688년 8월, 바로 어제다. 고조영 등이 이승과 저승의 휘장 속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그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자가 무려 오천 명이었다.
예주에서 일어난 그 반란을 토벌하는데 일등 공신이었던 자가 누구던가? 그는 바로 고구려인 연헌성이었다. 그에 대한 상으로 연헌성은 비단 일백 단과 황제가 타는 어마 한 필을 선사받았다.
이것도 그의 묘비명에서 밝혀진 바다. 그가 죽은 지 일천 수백 년이 지나, 묘비의 한 줄 글귀에서 이런 사실이 드러났다.
낭야왕 이충과 월왕 이정의 거사 실패로 도륙당한 오천 명 안에는 태평공주의 남편 설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부마도위였으므로 일백 대의 장형에 처해졌으나 옥중에서 이승을 하직했다.
이듬해에도 이씨 친왕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모조리 주살 당한다.
어디 그 뿐인가? 절세영웅 흑치상지가 옥중에서 목을 매어 죽은 것은 바로 그 해인 689년 10월이었다.
주흥 등이 그를 역모죄로 무고했다. 그는 철창 안에 갇혀 세상의 비정함을 한없이 한탄하며 울고 또 울었다.
“아, 이국 만리 이 땅에서 앞서 가신 선왕폐하(백제 의자왕)와 고국 백제의 원혼들을 무슨 낯으로 대한단 말인가?”
흑치상지가 더 이상 쓸모없는 연장처럼 망가져, 무 태후는 주흥 등으로 하여금 그를 무고하게 하고서 제거했던가? 아니면, 날로 신망이 높아가고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해 그가 혹시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를 사전에 없애버렸는가?
중화의 여인들은 그 옛날 딴 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혹시 “무 태후는 중화의 여걸이고 흑치상지는 동이의 영웅이로다 中華女傑神武帝 黑齒常之東夷雄”라고 노래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겁을 먹고 시기심과 위기를 느낀 무조가 그를 제거했을 거라고 추정해도 누가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 진실은 신만이 아시리라.
아무튼 흑치상지가 인생을 처절히 비관하며 영어囹圄에서 자진하니, 그의 나이 예순이었다.
사해의 영웅들을 한 칼로 제압하고 전장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으며, 외인으로서 중화인들의 상찬을 폭포수처럼 쏟아 받은 그를 기리고자, 사후에 더할 나위 없는 감탄과 찬사의 글자들을 모아 한조각 돌비석에 철필로 덧붙여 새긴 들, 물에 물 탄 거나 마찬가지지 그것이 어찌 그의 영예로운 인생 비단에 단 한 올의 고운 수라도 누벼줄 리 있을까? 그저 귓가로 흘러가는 한 줄기 바람에 불과할 것이다.
토사구팽이 어찌 어제 오늘의 일인가? 원래 동서고금의 인간사 파란만장은 저 뜨거운 태양처럼, 저 차가운 달처럼 변함없이 그게 그것이 아니던가?
흑치상지가 감옥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는 소문을 듣고 미시아는 하루 종일 흐느껴 울었다. 그의 생전에는 그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어떻게 하든지 그를 붙들거나 아니면 없애려 했으나 그가 막상 죽었다고 하니, 눈물도 샘이런가, 어찌하여 줄줄이 솟아 흐르는가?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고구려를 망하게 한 일등공신 연헌성도 흑치상지가 세상을 떠난 후 대략 이년 삼 개월 정도 지난, 692년 1월 9일, 저 세상 사람이 된다.
무 태후의 수족인 내준신이 연헌성에게 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뇌물을 원한 것이다. 그런 요구를 받을 일이 없도록 처절히 빈한하게 산 흑치상지가 그 면에서는 훨씬 지혜로웠다. 물론 그도 역시 유사한 수법으로 갔지만.
연헌성이 거절하자 내준신은 그를 역모죄로 무 태후에게 고발했다. 연헌성은 감옥에 갇힌다. 무 태후는 지난 번 흑치상지가 투옥당할 때처럼 모른 척한다.
내준신은 옥중의 연헌성에게 목을 매 자살하라며 끈을 넣어준다. 연헌성도 한 많은 마흔 두 살의 인생과 그의 모든 영화를 그렇게 마쳤다. 최소한 세 아들을 지상에 남기고서. 연현은. 연현일. 연현정.
모두 그의 묘비명에서 밝혀진 이름들이다.
후인이 그의 묘비에서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그를 상찬한들, 그에게 한 올의 유익이 무엇이던가? 그는 자신의 부친 연남생처럼 조부인 연개소문의 낯을 지하에서 어찌 볼 수 있었을 것인가?
이국에서 호사를 누리느니 차라리 고국에서 혈육의 상잔을 그치고 연남건에게 찾아가 그 앞에서 자결하는 게 더 낫지 않았겠는가? 그가 간지도 벌써 일천 수백 년이니, 세월의 무심함에 하늘의 구름만 한가롭다.
그의 찬란했던 영화도 오늘 우리의 한낱 이야기 거리에 불과한 것을. 후세의 담화거리라도 된 그가, 이름도 빛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간 대부분의 범인凡人들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누가 감히 주장한단 말인가!
비명에 죽어간 이들이 그들만은 아니다. 무 태후가 국호를 “주周”라고 고치고 자신에게 “성신황제聖神皇帝”라는 신적인 칭호를 올리며, 허수아비 황제 이단에게 자신과 같은 무씨 성을 내리고, 나라를 다시 연 690년 9월 9일 중양절重陽節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구구구九九九區區區한 사변들과 모진 사건들은 쉴 새 없이 그 땅에 피비린내를 몰고 왔으니, 일찍이 또 그 후로 보위에 올랐던 천하의 여걸들 가운데, 무조 같은 여인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으랴!
이 피비린내가 너무나 강렬해 그녀의 측근들은 코를 막고 살아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자신들도 언젠가는 피의 못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니. 주흥과 내준신이라고 어찌 용가리통뼈더냐?
무죄한 고려 고씨를 죽인 당나라 이씨들을 심판하고, 죄 없는 이씨를 죽인 무씨를 심판하라 했던가. 무씨와 그 수족들은 누가 심판하는가?
사람의 피를 먹고 마시며 살던 자 주흥이 피살된 것은 그 후 얼마 있지 않아서다.
내준신은? 거의 정신병에 걸린 나머지, 무 태후 즉 측천무후 성신황제의 최측근인 무씨 친왕들과 그녀의 딸 태평공주까지 역모죄로 모함하다가, 태평공주의 반격에 그도 역시 이 세상 삶에 급작스레 종언을 고한다.
그의 시체가 시장터에 내걸리니, 원한이 하늘 끝까지 맺힌 인민들이, 말하기가 참으로 역겹고 조심스럽지만(임산부들이나 마음 약한 분들은 아래 여덟 줄을 건너뛰고 읽으십시오), 심지어 그의 살을 씹어 먹으니 살점은 금새 없어지고 한 맺힌 대중은 그의 시신에서 두 눈을 후벼내고 얼굴 가죽을 벗기는가 하면, 배를 찢고 심장을 꺼냈다니<자치통감>.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올라타고 밟아서 곤죽으로 만들었다.” 어느 누가 감히 이승을 죄 없는 낙원이라 고 넋두리질한단 말인가?
이런 충격적인 일들을 과연 그대로 옮겨도 좋을지 모르겠다. 지옥에서도 그는 살점이 떨어지고 내장이 쏟아지는 그런 고문을 받고 있지 않은지 의문이다. 아, 가련한 인생이여! 비열했던 한 평생이여!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사람이 아닐까?
인간이 제정신이라면 어찌 그렇게 살다가 저렇게 죽는단 말인가? 기왕에 미칠 바에야 진짜 미쳐야 할 것에 미치면 얼마나 좋겠는가!
무태후의 남총 회의는 명당明堂과 천당天堂, 이 거대한 두 대전의 건립을 총지휘하고, 돌궐 토벌군의 대총관(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출전하는 등, 혁혁한 공功을 이루며 공公의 작위를 얻고 무 태후에게 더욱 큰 총애를 받는다. 우위대장군에 악국공鄂國公이다.
그가 건축에 일가견이 있었는지, 무 태후는 회의에게 명해 정사를 의논하는 중앙대전인 명당明堂을 세우게 하며 명당 뒤쪽에는 회의대사를 위한 불교 사찰 천당天堂을 그보다 더욱 높이 세운다.
측천무후가 수만의 인부와 천문학적 거액을 쏟아 그 거대 토목사업을 벌인 해가, 우리 소설에서 고조영 등이 안개 속에 그림자처럼 파묻히던, 수공 4년, 688년이다. 명당과 천당을 건축할 때 하루 동원 인부가 일만 명을 헤아렸고 몇 년 동안에 수 만억의 돈을 허비해야 했다.
명당의 높이는 3층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지상으로부터 무려 294척이다. 이는 대략 87미터다. 지금의 20층-30층 건물 높이다.
명당 뒤쪽에 세운 천당은 그보다 더욱 높은 5층이었는데, 얼마나 높은지 천당의 3층에 올라가면, 80미터가 넘는 명당이 머리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중국당국은 수당隋唐 낙양성 유적공원 안에 천당天堂과 명당明堂을 복원해 서기 2015년 4월 11일, 관광객들에게 개방했다고 한다. (<인민망> 한국어판 2015년 4월 14일, “뤄양[낙양] 유적공원 ‘천당 명당 관광지’ 전면 개방”).
그런데 석교釋敎 사원 이름이 천당이라니. 오늘날의 용어 의미로 이해하면 안 될 것이다. 어쩌면 무 태후의 종교혼합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명칭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해 후 돌궐이 침입하자 회의는 무 태후에 의해 최소한 두 번 이상 토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을 받아 전장에 나간다. 이름도 쟁쟁한 장수들을 한줌 휘하에 거느리고 간 회의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의 수하 장수들과 회의會議를 하다가 의견이 충돌하자 회의대사는 채찍으로 이견의 당사자를 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수하 장수 이소덕은 벌벌 떨면서 벌을 내려달라고 청했으니, 회의의 위풍과 세력이 얼마나 당당했던가?
그 무렵 회의가 돈을 흙 쓰듯[우리식 표현으로는, “물 쓰듯”] 사용했으며 무차회를 열 때마다 돈을 일만 꾸러미나 썼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다. 그가 제도濟度해 부처님께로 인도한 흑백양도黑白兩道의 무림인들(범죄조직과 건전한 무인들), 즉 그렇게 해서 그가 휘하에 거느린 승려가 일천 명에 달했다는 사실도 <자치통감>이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무 태후에게는 새로운 남총이 생긴다. 무 태후의 어의 심남구沈南璆라는 인물이 그다. 그는 젊고 아름다웠다.
심남구의 등장에 심기가 몹시 불편했던 회의는 황궁에도 나가지 않고 백마사에서 두문불출하기 일쑤였다.
그 무렵 회의가 제도해서 승려로 거느린 무림인들이 일천 명에 달했다는 사실은 위에서 명시했다. 시어사侍御史 주구라는 사람이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무슨 의혹의 구름이 홀연히 그의 머릿속에 일었는지, 아니면 무슨 일점의 속삭임이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는지 모르나, 어느 날 측천여황 무조에게 아뢰었다.
“무술을 하는 강호의 무뢰배들이 회의대사 휘하에 일천 명이나 모여들다니, 아무래도 그들이 수상합니다. 소신이 그들을 조사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게 바로 내 뜻이오. 그들을 모조리 데려와 조사하시오.”
무 태후의 밀명에 그는 회의대사와 그의 휘하 승려들 일천 명을 죄다 어사대로 소환했다.
부름을 사양치 않고, 그리고 그 소환이 좋고 나쁨에 개의치 않고, 회의는 말을 타고 백마사에서 달려온다. 그의 기세가 당당하고 오기가 충천하다.
그가 탄 말이 황궁 문 앞에 이르러 그대로 문을 통과한다. 무시무시한 어사대. 날아가는 새도 그 앞에서 놀라 추락하며, 지나가는 개조차 그 앞에서 벌벌 떠는, 그 어사대에 당도할 때까지도, 회의는 의젓하게 말 등에 앉아있었다.
‘여황제의 남자를 누가 감히?’
그런 심사였던가?
어사대의 계단 앞에 이르자 그가 비로소 말에서 내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 탁자 곁으로 다가간다. 그가 거만한 눈빛으로 시어사 주구와 심문관들을 한 차례 휙 휘둘러보다 갑자기 탁자 위에 배를 깔고 엎드린다.
“어서 곤장으로 나를 때려 주슈!”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시어사 주구는 기가 막혔다.
“여봐라! 이 사람을 조사하고 문초하라!”
그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곁에 선 하급 관리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한다.
그 때, 배를 깔고 엎드려 있던 회의가 탁자에서 벌떡 일어난다.
“곤장도 준비하지 않고 나를 부르다니, 어허! 이런 어이가 없구먼.”
회의가 시어사 주구를 향해 한 차례 히죽 웃는다. 그리고 점잖은 걸음으로 어사대 계단을 내려간다. 말 위에 올라탄다.
“가자!”
말에 채찍을 가하자 말은 그의 말에 순하게 복종한다. 그가 나가는 길을 감히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시어사 주구는 멍하니 그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무 태후 아니 측천여황에게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측천여황이 말한다.
“이 대사大師는 지나치게 도통道通해 병이 생겼네. 나무라지 말고 그냥 놓아두게. 단지 그가 제도한 승려들만 알아서 처리하게나.”
시어사 주구는 마침내 회의가 거느린 일천 명의 승려들을 붙잡고, 역모 죄를 적당히 걸어, 죄다 멀리 떨어진 지역들로 유배시키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부하들을 모조리 잃어버린 회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건 틀림없이, 무조 그 늙은 요녀가 고의적으로 저지른 짓이렷다!’
머리 좋은 회의가 어찌 그 사실을 알지 못했겠는가? 회의는 측천여황의 총애를 가로챈 어의 심남구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데다, 이런 수모까지 겪게 되자, 속으로 이를 갈았다.
‘흥! 심남구를 선택하고 나를 버리면, 내가 반역이라도 일으킬 줄 알았겠지? 그래서 내 수족을 잘라버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 천하에 꼬리 아홉 달린 백여시 늙은 할망구 요녀야!’
그는 속으로 마음껏 측천여황을 욕했다.
(다음 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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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5. 5. 23.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