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세기는 현대 과학기술 문명이 무르익고 인류가 그 혜택 속에 살아온 100년이었다.
그 후반기 50년대 초에 인류 역사의 흐름 하나를 크게 바꾸는 사건들이 벌어졌다.
1950년 안나푸르나(8091m)와 1953년 에베레스트(8850m) 등정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성취는 전자에서 인간이 8000미터 고소라는 벽을 처음으로 넘어섰고,
후자의 경우 세계 최고봉을 끝내 올라갔던 것이다.
지금부터 고작해야 반세기밖에 안 된 이야기인데, 그 무렵 히말라야는 지구상에 아직 공백지대로 남아 있었다.
당시 프랑스 안나푸르나 원정대가 불확실한 지도를 가지고 목표를 찾느라 고생했으며,
영국 원정대는 32년에 걸쳐 10번째 도전으로 성공한 에베레스트 등정이었다.
2003년 5월 29일은 이렇게 이루어진 에베레스트 초등 50주년을 맞은 날로
네팔 카트만두에서는 이 일로 갖가지 국제적 행사가 다채로웠다.
그런데 이전의 경이적이고 위대했던 성취는 과연 인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던가 생각해 볼 일이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에는 표고 8000미터가 넘는 고산이 14개 있지만,
그 엄청나게 높은 산들이 사람을 받아들인 것은 20세기 중엽인 1950년부터 14년 사이였다.
18세기 후반 유럽의 근대화와 때를 같이 해서 시작한 알피니즘이라는 등산이 시대를 따라 발전하다가
현대 문명이 무르익은 20세기 중반에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 데는 그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등산의 본질과 요체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며 그 과정에서 예상되는 어려움과 위험을 극복하는 데 있다.
등산이 18세기 말 알프스에서 시작하여 19세기 말 히말라야로 그 무대가 옮겨진 것은
등산의 근본 종신이나 활동 형식으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한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숙명적인 도전을 받은 것이 에베레스트와 낭가 파르바트(8125m)였다.
그리고 또 한 세월이 흘렀다.
이제 에베레스트는 만고의 비밀을 간직한 채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던 비경이 아니며,
지난날과 같은 원정의 대상에서 일종의 산악계 행사장으로 전락한 감이 짙다.
산악 단체들은 저마다 어떤 명목을 찾아 일을 꾸미고 힘들지 않게 다녀온다.
여기엔 공포와 염려와 불안이 없으며 물론 흥분과 감동도 없다.
오늘날 등산의 세계에는 '더 오를 데가 없다'는 말이 유행어가 됐지만,
그 속에 에베레스트가 들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최고봉이 변질되고 있는 가운데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1982년 크리스 보닝턴의 에베레스트 미답릉 도전인데, 그때 보닝턴은 유능한 동료 둘을 잃었다.
후일 당시의 기록이 <Unclimbed Ridge>라는 표제로 나왔지만,
이것이 에베레스트에 남았던 마지막 루트가 아닌가 싶다.
지난 2001년으로 에베레스트는 개산 80년을 맞는데,
그 사이 동, 서, 남, 북에서 정상을 향해 방사선으로 길이 14개나 뚫리고 등반 진기록도 속출했다.
스키 활강, 설동 전술, 무산소 등정, 횡단과 종단, 정상 장기 체류, 패러글라이더 하강, 무박 속공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한 사람 당 7000만 원을 받고 끌고 갔다가 대참사를 빚은 이른바 상업등반대가 등장했는가 하면,
8000미터 고소의 사우스 콜을 청소하는 등반대까지 출동했으니 에베레스트는 마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격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2000년 막이 내릴 무렵, 75년 동안 수수께끼였던 조지 말로리의 시신을 찾은 일이리라.
이리하여 19세기 중엽 인도 측량장관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땄던 '피크 ⅩⅤ'의 일대기는 종결된 셈이다.
에베레스트란 무엇일까?
이것은 전인미답인 에베레스트에 던지는 고전적 질문이 아니라 현대적 반어적인 물음이다.
에베레스트에 대한 고전적인 질문은 역사상 오직 한 번 있었는데,
1924년 영국의 제3차 원정 때 조지 말로리 대원에게 에베레스트에 가려는 이유를 물은 그것이었다.
요즘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면 그것은 하루에도 수십 명이 정상을 밟는 그곳에 무엇 때문에 가려는가 반문하는 꼴이다.
에베레스트에 대한 질문이 이렇게 바뀐 것은 그 동안의 의의와 가치가 그만큼 달라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러한 산을 보는 시각의 변화는 무산소 등정이 이루어진 1978년 이후부터로 보아야 좋을 것이다.
이 무산소 등정은 사실 등산계의 사건이라기보다 세계가 놀란 사건이었다.
20세기 초 에베레스트 도전이 시작되면서 반세기 가까이 인류의 수수께끼로 남았던 문제가 비로소 풀렸던 것이다.
1978년은 히말라야 등반에 있어서 과거를 청산하는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즉 그 뒤 에베레스트 등반에 따르는 규제와 금기가 하나씩 풀리고 깨졌다.
그때까지 원정에 대한 국제적 정석으로 돼 있던 봄, 가을 두 계절에 한해서
등반대를 하나씩 입산시키던 것이 전천후 무제한으로 풀리면서 등반 루트도 거의 개방됐다.
원래 에베레스트 도전 상의 문제는 등반 기술보다 그 규모에 있었다.
지난날 유행했던 대원정이라는 개념과 형식이 그것을 그대로 말해준다.
그리고 그 핵심은 이른바 '로지스틱스(병참술)'의 문제였고,
여기에 아이스폴 루트 공작과 인공 산소의 사용 문제가 풀어나가야 하는 주요 과제였다.
50년 전 존 헌트는 '히말라야 고봉에 모험을 감행하는 사나이들이 직면하는 공포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고도의 문제와 기상 상태 그리고 등반 그 자체의 곤란이다' 라고 했다.
에베레스트의 최고봉다운 준엄성과 자연성을 전제로 한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에베레스트 도전자들은 그러한 대자연의 조건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
에베레스트가 평가절하된 것이다.
오늘날 에베레스트는 인간 공해로 신음하고 있다.
노멀 루트에 보통 10여 개 등반대가 운집하고,
베이스캠프 지대인 쿰부 빙하에 광대한 천막촌이 출현하면서 식수난과 오물 처리 문제가 심각하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가장 두려워했던 마의 길목 아이스 폴에는 루트 공작 대신 통행료를 지불하면 되는 '톨 로드'가 생겼다.
그리고 그리운 가족과의 유일한 통신 수단이었던 '메일런너'와 캠프 간의 연락에 쓰던 '워키토키'가 필요 없게 됐다.
이렇게 해서 오랜 세월 히말라야에서도 에베레스트 아니면 체험할 수 없었던 양상이 모두 사라지고
에베레스트는 하나의 고산 체험 정도의 대상이 됐다.
인간의 영원한 향수인 태고적 적막감과 준엄한 대자연에 대한 외경감도 동시에 잃었다.
에베레스트 등반의 의미는 50년 전 영국 원정대의 초등으로 충분하다.
그 뒤를 이은 활동들은 필경 모방에 지나지 않음 결코 새로운 것이 없다.
기도 레이(Guido Ray, 1861~1935)가 초등과 재등의 차이는 원화와 모사의 그것과 같다고 했다.
에베레스트에는 등반 방식에 따라 어려움이 있겠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것은 존 헌트의 1953년 초등 기록을 보면 자명하다.
그러나 에베레스트에 대한 정당한 인식은 고전적 관점과 현대적 관점을 모두 필요로 한다.
이것이 세계 최고봉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자세며 에베레스트와 우리와의 관계다.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등반에 참가했던 릭 리지웨이의 글에 이런 것이 있다.
에베레스트는 바위와 얼음과 눈의 덩어리 이상의 것이다.
그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것이 아니다.
에베레스트는 상징이요 비유며, 궁극의 목표, 지고의 위업이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에베레스트 초등 50주년을 맞아 영국은 옛날 모습으로 당시 등반 상황을 재현한다고 했다.
선구자의 후속다운 갸륵한 시도인데,
그들이 50년 전 선배를 흉내내기에는 너무 에베레스트와 인간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