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rait n Profile
임대동(林大仝, 1432~1503) 호: 회헌(晦軒). 경남 함양 출생(14세).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 용성 교수(敎授), 임실현감(任實縣監), 통훈대부(通訓大夫). 어려서 효성스러웠으며 학문에만 뜻을 두어 홀로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에 정진하여 42세에 사마시(司馬試) 합격. 임실현감을 지내며 선정을 베푸신 뒤에 번잡하고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조종에 나가기보다는 학문으로써 도를 알고 그것을 따르려는 철학가이셨다. 유림면 화촌리에 회곡정사(晦谷精舍)를 지어 후학들을 강학(講學)하고 동료들과 유회(儒會)하셨다. 『회헌실기(晦軒實記)』 1권 있으며 경남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화산서원(華山書院) 상현사(尙賢祀)에 배향되셨다.
임종인(林宗仁, 1468~1535) 호: 회암(會巖). 경남 산청 출생(15세). 성종 17년(1486)에 병오식년(丙午式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진사(進士)가 되셨다.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식년시(戊午式年試) 문과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성균관 학정(成均館學正)으로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심에 의표(儀表)가 밝고 논의(論意)가 높고 바름으로 어려서 사람이 경중(敬重)함을 받으셨다. 연산군 때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산청군 모고리로 낙향. ‘귀전원시’, ‘자경시’ 등이 있다. 후손들이 몽호정(夢湖亭)을 지어 숭배하였고 『회암실기(會巖實記)』 1권 등이 있다. 경남 함양 화산서원(華山書院) 상현사(尙賢祀)에 배향되셨다.
임 익(林益, 1508~1547) 호: 장수(長水). 전남 나주 출생(16세). 귀래정(歸來亭) 임붕(林鵬)의 장자이며, 음직으로 선공감 감역으로 보임되어 시서(寺署)에 봉직하셨으며, 장수현감(長水縣監)으로 나가서는 엄격하면서도 관대하셨다. 향년 40세에 병환으로 관사에서 서거하셨다.
임 복(林復, 1521~1576) 호: 풍암(楓巖). 전남 나주 출생(16세). 1540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46년 증광을과(增廣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임명되었을 때 사림의 화가 있었는데 공이 권귀(權貴)에 불굴하여 풍절(風節)을 지녔다는 윤결(尹潔)을 옥중에서 죽인 윤원형(尹元衡)의 앞잡이 간신 진복창(陳復昌)의 트집으로 1548년 봄 정자가 삭탈되고 삭주로 유배되어 3년을 지내셨다. 1551년 명종의 원자 순회(順懷) 세자 탄생으로 1545년 이후 선비들의 죄를 풀어 공도 회진 옛집으로 돌아오셨다. 선조 초에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무고를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거하셨으며, 특히 시문과 학행뿐만 아니라 무략에도 뛰어나셨다. 효성이 지극하여 3년 시묘를 마치고 선친의 거처인 귀래정(歸來亭) 자리에 새로 정자를 짓고, 영모정(永慕亭)이라 편액하고 선친을 사모하여 하루에도 여러 번 회정하며 효성이 절절한 시를 남겼다.
임희무(林希茂, 1527~1578) 호: 남계(灆溪). 경남 함양 출생(17세). 명종 13년(1558) 세자책봉 무오별시(戊午別試) 병과(丙科)에 제4위로 급제(及第). 내직(內職)으로 승정원(承政院), 성균관(成均館),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좌ㆍ우승지(左⸳右承旨) 외직(外職)으로 횡성현감(橫城縣監), 금산(錦山), 순창(淳昌), 울산(蔚山), 능주(綾州) 목사(牧使) 등 오읍(五邑) 수령(守令) 등을 역임하셨다. 그 후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인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서평마을로 이거하여 오두막집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들을 가르치셨다. 이곳에 후손들이 재건립하여 연산정사(蓮山精舍)라 하였고, 『남계집(灆溪集)』, 『하제귀시음(下第歸時吟)』, 『석문유회(石門有懷)』, 『화개도중(花開途中)』 등이 있다. 경남 함양 화산서원(華山書院) 상현사(尙賢祀)에 배향되셨다.
임 제(林悌, 1549~1587) 호: 백호(白湖). 전남 나주 출생(17세). 1576년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 1577년에 알성을과(謁聖乙科)에 급제하여 예조정랑(禮曹正郎) 겸 지제교(知製敎)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역임하다가 동서 양당의 싸움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여생을 마치셨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고 호방쾌활(豪放快活)한 시풍으로 작품이 널리 애송되었다. 문정랑(文正郞) 대곡(大谷) 성운(成運) 선생의 문하로 천재절인(天才絶人)하야 문장이 호탕하고 저서로는 『화사(花史)』, 『수성지(愁城志)』, 『백호집(白湖集)』,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남명소승(南溟小乘)』,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 등이 있으며 일본 동경대학의 전신인 창평판학문소(昌平阪學問所)에서 1823년 『임백호집』을 발간하여 교재로 사용하였다. 전남 나주시에 「백호문학관」(2013)이 있다.
임 선(林愃, 1552~1610) 호: 백화(百花). 전남 나주 출생(17세). 절도공의 둘째 아들로 벼슬에는 뜻이 없고 지기(志氣)를 세우며 시를 전공하셨다. 선조(1590) 때 39세에 습정(習靜)공과 같이 과장에 나가 진사를 하시고도 은거하시다가 경술(1610)년 계제(季弟) 창랑정(滄浪亭)이 졸하니 슬퍼하시다가 두 달 후인 향년 58세에 서거하셨다. 특히 젊어서 시를 즐기며 동산에 여러 가지 화초를 심고 정자를 지어 백화정(百花亭)이라 명하고 거문고를 타면 학이 내려와 춤을 추고 늘 은사(隱士) 차림으로 려장(藜杖)을 집고 산책하며 시우들과 시주를 즐기셨다. 정유년 9월 17일에 습정공과 석촌공을 대동하고 어외도에 주돈하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위문하러 가서 해군이 대첩한 것을 치하하고, 회진으로 돌아와서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여 10월 4일 일가거종을 인솔하고 배로 피난하는데 주도하셨다. 선조들이 탄 피난선이 영산포를 출발하여 몽탄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왜구가 나타나 포로가 되었는데, 양씨 할머니의 재치와 희생으로 모두 풀려 나와 지금의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에서 왜구에 당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이순신 장군에게 보내어 왜전에 참고하도록 정보를 석천공과 연명하여 전달한 사실이 난중일기에 기록되었다.
임 환(林懽, 1561~1608) 호: 습정(習靜). 전남 나주 출생(17세). 절도공의 넷째 아들인 습정공은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義兵將) 종사관(從事官)을 하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의병장으로 나라에서 내린 호칭은 소의장군(昭儀將軍)으로 순천 예고(曳橋)에서 의병 활동을 하셨으며, 그 공로로 국가로부터 2등공신의 녹권(錄卷)을 받으셨다. 문집으로는 『오잠서(五箴書)』, 『악기탁약(握機槖籥)』이 있으며 관직으로는 무주현감(茂朱縣監), 직산현감(稷山縣監), 황해도 문화현령(文化縣令)의 3개 읍 영수(領袖)를 역임하셨고 퇴직한 후에는 영암군 삼호읍 용담리 덕호에 습정제(習靜齊)란 곳에서 복거(卜居)하시다가 향년 48세에 돌아가셨고 그 후에는 좌승지(左承旨) 정3품으로 특증(特贈)되셨다.
임 탁(林㤞, 1566~1609) 호: 창랑정(滄浪亭). 전남 나주 출생(17세). 진취(進取)에는 별로 관심이 없이 오직 도서와 매죽(梅竹)만 즐기고 사셨다. 금성(錦城) 가야산 아래 앙암바위 동으로 강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정사(精舍)를 세우고 수죽(水竹)에 물안개의 자욱함이 승경(勝景)이라 하고 창랑정 주인으로 백화정과 더불어 형제 두 분이 편주(扁舟)로 오르내리며 소영(嘯詠)하심이 풍치가 소쇄(蕭灑)하여 호해(湖海)의 참 선비셨다. 드러난 성패(成敗)로 고인을 거론하면서 격앙 강개함은 마치 세상을 잊고 사는 은자(隱者)가 아니며 석주(石洲) 권여장(權汝章)의 심우(心友)이셨다.
임 서(林㥠, 1570~1624) 호: 석촌(石村). 전남 나주 출생(17세). 1590년에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에 기증효(奇曾孝)와 같이 의곡(義穀) 수백 석을 수집하고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군산포에서 의주에 피난한 왕에게 보내면서 서해신(西海神)에 제사를 지내셨다. 1599년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급제, 주서(注書)가 된 뒤 봉상사직장(奉常寺直長), 공조좌랑(工曹佐郎), 전라도안핵어사(全羅道按覈御史), 공조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 그 후 봉산군수(鳳山郡守), 함양군수(咸陽郡守) 등을 역임하셨으나 대북의 전횡을 피하여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1623년 정유년 병화로 소실된 영모정(永慕亭)을 중건하고 인조반정(仁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