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의도
길 위에서 살고, 길 위에서 사유했던 독특한 철학자 에릭 호퍼
에릭 호퍼는 '독학한 부두노동자 - 철학자', '사회철학자', '프롤레타리아 철학자' 등으로 불리며 1960년대의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사상가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나는 삶을 관광객처럼 살아왔다"라는 자신의 말처럼 평생을 떠돌이 노동자 생활로 일관하며 정규 교육도 받지 않은 채, 항상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독서와 사색만으로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해 세계적인 사상가의 반열에 오른 이채로운 이력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들의 의도는 무엇이 옳은지를 사람들의 코 밑까지 가져다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던 호퍼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얻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이 책에서 남김없이 보여주려 한다.
또한 얼음처럼 찬 위트와 아포리즘으로 표현되는 그의 독자적인 사상이 모두 그 시기에 시작되었다는 고백을 볼 때,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미 2003년에『에릭 호퍼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 책은 이번에 새로운 사진 자료 및 내용을 보완한 개정판으로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제도권 안에서만 교육이 이루어지고 학력이라는 잣대만으로 한 개인의 지성이 인정되는 우리 사회에서, 에릭 호퍼의 길 위의 삶과 광적인 독서량 그리고 깊은 사색을 통해 얻어진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과 냉철한 현실 인식은 분명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줄 것이다.
▣ 책의 특징
에릭 호퍼의 자서전은 지금까지의 자서전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그가 남긴 유일한 자서전인 이 책은 그가 떠돌이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부두노동자로 정착한 40세까지의 인생을 만년에 기록한 것이다.
총 27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글 솜씨가 뛰어나 생전에 소설을 썼어도 좋았을 것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유년 혹은 청년 시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을 했다는 기존의 자서전을 기대한다면 이 책은 다소 실망감을 안겨줄 지도 모르겠다. 8년간의 실명 상태와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 방랑, 자살미수 등의 그의 생활. 그의 삶의 궤적은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보통이라면 그 뒤에는 '피나는 노력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성공했다'라든가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라는 스토리가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호퍼의 인생은 그런 형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65세까지 계속 떠돌이 노동자, 부두노동자로 있었던 것이다.
이 자서전에는 사회적인 잣대로 소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캘리포니아대학의 교수가 된 일, 미국의 사회철학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 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다만, 독서에의 몰두와 깊은 사색, 떠돌이 노동자 생활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며 느끼고 겪었던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에피소드는 그냥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같다.
그러나 그 재미있고 묘한 이야기를 따라 읽어가다 보면, 그 에피소드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그의 사상이나 삶의 자세, 그 만의 사색과 깊게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그는 진실로 사색하기를 즐긴 철학자였다. 애지중지하던 책을 화물 열차 밖으로 던져 버린 에피소드며, 사랑하던 헬렌을 떠난 에피소드는 사색하기를 무엇보다 우위에 둔 그의 생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이 책을 무엇보다 인상 깊게 하고 특별하게 하는 것은 호퍼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보다도 방랑과 노동의 일상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 그 묘사의 산뜻함이다.
호퍼는 떠돌이 노동자나 방랑자들에게 섬세한 시선을 보내고, 그들의 삶의 음영을 훌륭하게 드러내고 있다.
거리에서, 달리는 화물차 위에서 하루의 품삯을 쫓아다니는 군상들의 갖가지 사건들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그것이 인간과 세계를
비춰 주는 거울이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역자서문에서
호퍼는 엘센트로의 떠돌이 노동자 임시수용소 생활 중 떠돌이와 개척자 사이의 친족적 유사성과 약자의 특이한 역할에 대해 사색했고, 훗날 이런 아포리즘으로 결론지었다.
1951년 에릭 호퍼의 첫 저서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 : Thoughts on the Nature of Mass Movements)』이 나왔을 때 유럽의 인문학적 전통에서 보자면 프롤레타리아 철학자의 출현을 기대할 만했다. 그러나 세계를 거의 파괴할 뻔했던 광란의 숨은 원인들을 조명하는 호퍼의 통찰은 떠돌이 노동자다운 민간의 예지에서 시작된다.
대중운동의 맹신자는 죄의식, 실패,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좌절한 자로, 미래의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 동기에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묻어버리게 된다. 자신의 무의미한 생에 의미를 부여해 줄 것으로 여겨지는 운동에 열광적으로 투신하는 것이다. 호퍼의 저술들은 그런 좌절한 이들에 관한 심리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