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축성된 사목자를 포함해서 많은 사목 활동가한테서 자신의 개인적 자유와 안락함에 대한 무절제한 관심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의 신원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즉 자신의 생활에 덧붙여진 것쯤으로 보게 됩니다.
동시에 이들은 영성생활을 다른 사람과의 만남, 세상과 관계 맺기, 혹은 복음화를 위한 열정을 촉진하지 않는, 단지 특별한 위로를 주는 경건한 실천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 결과, 복음화를 위해 일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록 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일지라도, 극도의 개인주의, 정체성의 위기와 열정의 소멸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 제78항)
사제들은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같은 제목으로 번역된 책도 한 권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사제들은 “사제들의 적은 사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 교구 공동체의 사제들이 수 백 명씩 되면서 서품연차에 따른 차이로 신학교에서 함께 생활하지 못한 경우에는 여간 해서 사제들의 이름을 다 알고, 그들이 누구인지를 다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같은 지구에 편성되거나 교구의 여러 가지 위원회를 통해 함께 일하거나, 교구청이나 특수사목분야에서 함께 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관계를 형성하기가 쉽지 않다.
골프모임, 야구모임, 스킨스쿠버 등 특별한 운동을 취미로 하거나, 특정한 생각을 함께 공유하는 사제들의 모임, 특정 본당의 신학생들이 많아 동일한 추천신부(아버지 신부)아래의 모임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임들이 신앙을 촉진하고 심화하며, 공동체의 일치와 연대의 틀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사제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사제단과 연예인들이 함께 야구를 한 기사를 접하면서 참 씁쓸했다. 새누리당의 김무성이 좌장으로 앉아 있는 데서 새누리당 국회의원들 김장실, 이자스민, 이상일 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사제들의 야구경기를 바라보면서 생각 있는 신자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선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민망한 그런 무엇이었다. 사제들은 복음연구나 영성생활을 위해서 모이지는 않지만, 이렇게 친목이라는 명분으로 모여 세속인 만큼도 되지 못하는 교양으로 자신들의 레저를 즐기는 모습에서 우리는 사제의 본분이 무엇인가 의심을 하게 된다.
모임에 소속된 신부들은 어떠한 소속감과 일치감을 갖는 것 보다는 어디든지 한 군데는 속해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결국 이러한 흐름들이 내부에서 세력화되고 단순한 친목 모임으로 흐르면서 무거운 주제의 교회 쇄신이나 민주화, 사제 영성의 심화와 기도 생활의 어려움을 나누는 자리이기 보다는 다른 사제들의 문제를 곱씹거나 네 편 내편 나누기 식의 정보교환으로 사제들의 호불호가 분리되는 지점을 제공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교구에 두 명의 주교가 있는 경우나 영향력 있는 몬시뇰 혹은 사제들이 있는 경우 소위 ‘줄서기’ 하는 묘한 장면도 연출된다. 또 그러한 것들이 사제들의 인사발령에 반영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사제들의 어려움 가운데서 파생된 일련의 공동체 안의 현상이다.
본질은 무엇인가? 현대의 사제들이 사제적 실존을 살아가기에 여러 가지 많은 성무의 스트레스와 긴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나 연구가 상당히 많이 부족하다.
사제들은 병들어 가고 있는데 그들의 문제를 올바르게 식별하고 도와줄 수 있는 전문가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법을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했고, 신학교 양성시스템은 그러한 문제를 반영하기에는 너무나 지리멸렬하다. 그리고 그들은 쇄신의 대상으로 지목된다.
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의 경우에도 ‘나는 정의로운데 너는?’ 이라는 식의 도덕적, 지적 우월감으로 다른 사제들과 스스로 담을 쌓는 경우가 있다. 나뉨은 나눔을 가로 막는다.
가난한 이들의 천막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쌍용이나 콜트의 노동현장뿐만이 아니라, 전국 모든 교구 내의 노동현실이고, 교구청 직원들의 노동현실이며 교회 내에서 노동하는 모든 이들, 가까이 본당 사무장들의 노동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천교구 노동사목이 ‘전국 어느 교구에서도 하지 않는 노동자들을 위한 사목을 한다’라는 자부심을 갖는지 모르겠지만, 곱씹어 말해보면 전국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노동문제가 교구 내에서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내부 문제에는 침묵하는 인천교구 노동사목은 반성해야 한다.
누군가의 눈에 보이는 투쟁도 중요하지만 내 삶의 자리에서 나는 정의로운가를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은 사회 민주화와 노동문제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지만 정작 자신의 사목지, 본당이나 대학, 병원, 교구청에서는 정의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본당에서는 스스로 더 무서운 독재자나 위선자가 되어 있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제들의 연대는 특별하고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면 함께 하기 어려운 경계를 만드는 것이다.
사제들이 갈 곳이 없는 것이다. 머물 곳이 없는 것이다. 쉴 곳이 없는 것이다. 사제들은 현장에서 상처받고 피곤하고 많이 아픈데, 사제들의 마음을 다독거려줄 병원이 없는 것이다. 그들을 독려하고 ‘사목에 열심하라!’, ‘사제들이여 일어나라!’ 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치유해 줄 방편을 찾아야 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들은 많이 병들어 있고, 많이 상처 받아 주님 안의 평화, 자신을 이해해주고 보살펴 줄 공동체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섬’아닌 ‘섬’이 되어 버리고 고립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사목 활동가들이 도움과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공간은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향한 개인적 사회적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하는 곳, 가장 심오한 물음과 일상의 관심을 공유하는 곳, 우리의 생활 자체와 경험을 복음의 빛으로 깊이 있게 식별하는 곳”을 말한다고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에서 말씀하신다. (복음의 기쁨, 제 77항)
김수환 추기경 생존 시 사제들에게 미사 중에 이런 강론을 하셨다.
“세계적으로 한국만큼 사제생활하기 좋은 나라가 없습니다. ‘한국은 성직자 생활의 천국이다!’ 라고 합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 주기에 우리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요. 원하는 것 다하면 천국에 가기 힘들어요. 아는 만큼 책임지고 살아야겠지요. 공부한 만큼 나누어 주고 살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국에서 신앙적으로, 영성적으로 갈망하고 있는지 알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에 대한 인식은 유교문화와 결합하며 성직중심주의로 토착화 한다. 사제를 신격화 하거나 교회에 대한 열심을 사제에 대한 열심으로 혼동하는 신자들도 많다. 최근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한국사회 지성의 호불호가 여실히 드러난다.
신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성직자, 수도자의 생활과 의식에 대한 질책으로 상처받고 권위가 망가지는 것은 물론 성소에 대한 두려움과 위협이 되기도 한다. 신자들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오로지 영성의 삶에 전력할 것을 요구하며 대신 수행과 증거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부담하겠다는 의무감으로 예물을 봉헌한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메커니즘에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대를 읽어야 할 종교인들의 자기역할과 기능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제들이 지나치게 개인적인 영성의 심화, 수행에만 전념하거나 아니면 세상의 쾌락에 정신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직자에 대한 지탄을 넘어 종교 자체에 대한 무관심이 교회의 냉담으로 이어진다.
2014년 한국갤럽 통계에 따르면 ‘종교를 가지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라고 응답한 사람이 전체인구의 49%에 이른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의존하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정치권력과 가진 자의 편에서 억압과 불평등을 동조, 방관하며, 사랑과 정의를 그 본질로 해야 할 교회가 일반 사회만큼도 이르지 못하는 윤리의식이나 도덕적 일탈을 일삼고 있으니 많은 이들이 외면한 결과이기도 하다. 많은 수의 한국의 종교인들 사제 수도자, 목사 등은 스스로를 종교 지도자라고 말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반면 평신도들이나 성직자들이 민중의 희망과 신뢰의 역사적 역할을 한 바도 없지 않다. 최근 살레시오 수도회의 이태석 신부나 쪽방촌의 슈바이처라 불린 선우경식 원장, 노숙인들에게 밥을 주었던 민들레 국수집의 서영남 대표, 배문한 신부 등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과 눈물을 내려놓게 하기도 했다.
시대의 종교 지도자, 영적 지도자라면 시대 현상에 나타난 영성적, 정신적, 문화적, 심리적 징표를 읽는 영성의 눈을 가져야 하며 사회과학적 지식과 통찰로 시대를 꿰뚫어 보는 대안의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한 영성을 얻으려는 것이 성직과 수행자들의 목적이다.
우리 사회는 정신세계의 붕괴로 인한 중증 질환으로 신음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의 착취와 억압이 만연하다. 성과주의 사회의 피로 누적과 좌절감으로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닌 집단 우울증과 자살충동이 집단 증후군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자신의 자유로운 시간을 지키는 데에만 사로잡힌 사제들도 여럿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주로 자기의 개인적 자유만을 지키려 하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복음화 과업이 사제들을 불러 사명을 부여하고, 그것으로 사제들의 영혼을 채우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쁘게 응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위험한 독물인 것처럼 치부된다. 어떤 이들은 이 사명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것을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결국 무기력하고 나태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돈이 우상이 되고 향락과 절제 없는 소비문화로 현대인들의 영혼과 정신을 혼란하게 하고 혼동시키는 악령의 손길이 바이러스처럼 창궐하고 있다. 대가족과 노동의 삶은 해체되어 집은 있어도 삶이 없고 가족은 있어도 가정이 없다고 말한다.
또, 시민의 권리와 자유는 있으나 책임은 없다. 공동체적 가치들이 무력하게 해체되고 있다. 남북분단 이후 경상도와 전라도로 갈라지고, 상처 난 진보와 소위 보수, 부자와 가난한 자, 명문 학벌주의와 지역우월주의로 갈라져 싸움을 벌이는 시대, 이념도 사상도 아닌 논리 없는 편견과 영혼 없는 감성적‧선정적 아집으로 전 방위적인 관계의 파국을 맞고 있다.
종교가 종교다움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종교의 존재 이유가 없음을 말한다. 사형선고다. 사제들이 종교를 파라다이스로 여기는 순간 타락이란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실천적 상대주의는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는 듯이 행동하고,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결정하고, 다른 이들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목표를 세우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교리와 영성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분명하게 갖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사명을 수행할 때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기보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정적 안전, 권력에의 욕망, 현세의 영광을 찾는 생활태도에 빠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는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우리 스스로 선교의 열정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복음의 기쁨, 제80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