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장군은 1441년 세종 21년에 태어나서 1468년 예종 원년 27세 혈기왕성한 청년때 죽은 영웅호걸중의 한사람이였다. 의령 남씨로 태종의 외손이며 좌의정 권람(權擥)의 사위로 17세의 어린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세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1467년 함경도 길주 사람 이시애가 북쪽 사람들을 관직에서 배제하는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고, 여진족의 소굴인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하여 그공으로 적개공신이되고 병조판서까지 올라간 장래가 총망되는 명장이였다. 그런 남이장군이 왜 27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을까? 그건 바로 조선조 4대 간흉중의 하나인 류자광의 모함 때문이였다.
남이장군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회군할때 다음과 같이 지은 詩가 발단이 되었다.
백두산석 마도진 (白頭山石 摩刀盡) -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다하고,
두만강수 음마진 (頭滿江水 飮馬盡) - 두만강 물은 말 먹어 없애리.
남아이십 미평국 (男兒二十 未平國) - 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수칭 대장부 (後世誰稱 大丈夫) -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희대의 간신 류자광은 이때 남이가 지은 詩句중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이라는 "未平國" 대신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이라는 "未得國"이라는 글로 고쳐 고자질했다. 남이는 모반을 꾸민다는 모함을 받아 결국 康純과 함께 주살되고 말았다.
예종은 세조가 죽자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20세에 죽었는데 치세기간은 채 1년도 안되지만 왕이되어 제일 먼저 처리 한 일이 류자광의 계락에 빠져 남이장군을 역모로 다스린 일이였다.
예종은 세자 시절부터 아버지 세조의 총애를 받고있는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역모로 몰고 간 인물이 바로 류자광이였다.
류자광은 영암 류씨로 경주 부윤을 지낸 규(規)의 서자로 그가 태어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의 아버지 規가 어느 봄날 東軒의 관사에 한가히 있는데 메어 놓은 말(馬)이 신나게 교미를 하는 광경을 보고 있는데 하필 그때 여종이 물동이를 이고 앞을 지나가는기라 욕정을 참지 못하고 다짜고짜 여종의 손목을 잡고 방으로 끌고 들어와 일을 치르고 태어난 아이가 자라서 류자광이 되었다고 한다. 머리가 비상하게 똑똑하고 힘이 장사였으나 신분이 노비의 몸에서 태어나 높은 관직에는 오를수 없어 늘 불만을 품고 살았는데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을 모함하는일에 앞장섰다.
1498년 이극돈과 결탁하여 김종직의 문인 김일손의 史抄를 트집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고 또 1506년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임금으로 옹립하자 반정공신 성희안에게 빌붙어 또 공신이되어 부령부원군이라는 시호를 받기도 한 변신의 鬼才이기도 하였다.
말년에 대간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서 장님이 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첫댓글 좋은 사료를 재미있게 소개해주어 많은 역사 공부를 쉽게 할 수있는 기회를 주어 고맙소,참으로 많은 연구와 노력에 찬사를 보내오, 칠언절귀의 시구중 두만강수 음마진이 아니라,음마무 로 바로 잡습니다.( 盡---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