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듯 실상사는 정적 속에 싸여 있었다.
서늘한 먹장구름 사이로 별빛 서너개가 외롭게 반짝이고 저 멀리 지리산 그림자 사이로 희미하게 여명이 열리고 있다.
지리산 7암자 순례 겸 산행 입재(入齋)를 실상사 새벽예불로 시작하는 운영자님들의 결정에 머리가 숙여진다.
공명님이 마련해 오신 김밥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마치고 장도에 오르는 긴장된 순간, 배낭과 등산화 끈을 팽팽하게 조였다.
초면인 공명님이 나무로 손수 깎은 지팡이를 주신다.
주장자로 쓸 것인가 청려장[신선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으로 쓸것인가.
명산님을 선두로 기러기 행렬을 이루며 약수암을 향해 출발하였다.
지리산 정기를 피부로 호흡해서 그런지 한 숨도 자지 않았는데 몸과 마음이 가뿐하다.
천천히 산길을 오르며 자연스럽게 능강님과 인사를 했다.
아뿔사! 누가 알았겠는가, 잠시후 능강님이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 신세가 될 줄을. 흑흑
초장부터 완전히 스타일 구기는데....ㅋㅋ
약수암 뜰 앞에 서니 대숲이 싱싱하고 저만치 지리산 능선이 미려하다.
약수암에 와서 약수를 못 마시면 천추의 한을 남기겠지.
목각탱화가 유명하다는데 보는 눈이 없으니 어이하랴.
삼불사로 가는 길은 고행난행의 길이었다.
그나마 계속 따라오는 계곡물 소리가 비오듯 흐르는 땀을 식혀준다.
산지기님의 배꼽잡는 만담과 무량향님의 흥얼거리는 산 노래에 젖 먹던 힘까지 내본다.
삼불사에서 바라보는 천왕봉은 운무에 가려 신비감을 더해 주었다.
나는 싸구려가 아니라고.
원추리 꽃 군락이 도량을 장엄하고 잣나무 숲이 맑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비는 오락가락하고......
어렸을 때는 비 맞기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제일 무서워하는 빛나리(?)의 마음을 빗님은 아시는가. ㅋㄷㅋㄷ
걸음걸음마다 산 안개는 무심히 피어오르고 풀 나무 꽃 향기 짙어가니 점입가경 말 그대로이다.
갑자기 옆구리가 근질거리는 것이 날개가 돋아날 것 같다.
벗이여, 대붕이 되어 삼천대천세계를 소요해 봄이 어떠한고!
문수암에 당도하여 사방으로 펼쳐진 시원한 조망에 쾌재를 부른다.
때마침 앞산에 물결치는 소낙비 줄기가 사정없이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이 영겁 속의 일 찰라 그 누구를 그리워해야 하는지...
지혜안님은 철없이(?) 쌀밥에 김치타령만 되풀이하고...
드디어 상무주암 옆 고개 마루에서 구름에 갇혀 마음에 점찍는다.
왁자지껄 법우님들의 웃음소리가 텅 빈 산에 메아리치고...
시간이여, 이대로 멈추어 다오!
오늘의 클라이맥스는 상무주암(上無住庵)이다.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여기서 대혜어록의 '선이란 조용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시끄러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일상생활 가운데나 사색하고 따지는 데에도 있지 않다. 그렇다고 조용한 곳과 시끄러운 곳, 일상생활 가운데나 사색하고 따지는 것을 떠나서 참선하려 해서는 더욱 안 된다.'는 대목에 이르러 활연대오하셨다고 한다.
저기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반야봉인가.
상무주암 뜨락에 서서 시야를 허공에 두니 청산과 백운이 숨바꼭질하며 장난치고 있는 듯하다.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다는 지리산 품에 온전히 안긴다.
하산하여 영원사에서 108배, 역시 불가사는 실망시키지 않는다.
당초 계획했던 도솔암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섭섭하다.
그래, 나그네 여정은 100% 다 채우지 않는데 묘미가 있는거야.
숙소인 용쏘가든에서 저녁을 먹고 조촐하게 곡차모임을 가졌다.
비주류를 선언했던 나도 뜨는 분위기에 휩쓸려 버렸다.
중간에 꽁무니를 뺀 산지기님은 총운영자 권한정지다. ㅋㅋ
무르익어가는 주연에 명산님의 지리산 예찬과 사랑 얘기는 그칠 줄 모르고...
오늘밤은 산 그림자를 베고 잘까 물소리를 베고 잘까.
다음날 아침을 챙겨먹고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칠선계곡으로 들어가 벽송사에 참배했다.
철 지난 자목련이 반겨주고 대나무도 푸르기만 하다.
원래 벽송사 터에 올라가보니 그림같은 노송이 비스듬히 누워있고 이끼 낀 삼층석탑 뒤로 소나무 병풍이 멋지다.
그래서 벽송사인가.
옛 사람들의 절터 잡는 혜안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벽송사 이름은 서산대사의 사조(師祖)이신 벽송 지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국 조사스님들은 잘 알면서도 우리나라 선종의 법맥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이어 서암정사를 둘러보았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정성들여 다듬고 가꾼 석굴사원이 탄성을 지르게 한다.
순례객인지 관광객인지 찾는 사람이 많다.
포교방편으로는 모르겠으나 눈 밝은 사람의 수행공간으로는 산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비분별에 대한 과보는 신속하여 님들이 다담을 즐기는 사이 나 혼자 주차장에서 기다려야 했다오.
마지막으로 간 곳이 백장암(百丈庵).
호젓한 오솔길을 걷고 싶다는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오뉴월 땡볕에 팍팍한 시멘트 길을 오르자니 몸은 천근만근이다.
백장암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백장청규의 주인공인 백장선사에서 따온 이름으로 선방수좌들에게 이름난 수행처다.
준비해온 공양미를 부처님 전에 올리며 뭇 생명들이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잠깐 기도했다.
옆에서 해연심님의 절하는 모습이 소녀처럼 예쁘다.
시원한 대숲을 지나 출입금지의 팻말을 무시하고 백장선원의 마당에 서니 하안거 정진 중인 스님들의 성성함이 느껴진다.
작두날처럼 시퍼렇게 날이 서있을 때이리라.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대륜님과 운치있는 흙담장 너머로 흰구름 정처없이 흘러가는 유장한 지리산 자락을 바라본다.
가까운 산, 먼 산이 포개져 끝없이 이어지고...
어느새 말 길도 마음 길도 끊어진다.
용쏘가든으로 돌아와서 산채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사홍서원으로 지리산 7암자 산행을 회향(廻向)했다.
막상 정든 님들과 헤어지려고 하니 머뭇거려진다.
능강님과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나누고...(정원님 이 장면 포착했나요? ㅎㅎ)
더 이상 그리움을 키우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쌓은 정 모두 내려놓고 떠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큰 산, 청정한 암자, 아름다운 님들과 1박3일 동안 어우러진 지리산 7암자 번개!
먼 훗날 빛 바랜 기억의 곳간을 뒤지며 흐뭇해하리라.
ㅎㅎㅎ 원래 술에 약한지라 중간에 튀지않으면 내일이 걱정되고,또한 지금까지 한 번도 밤샘을 해본적이 없어 잠이 저를 청하길래 할 수 없이 살며시 사라졌습니다. 이일을 어찌할꼬 권한정지를 시키면 불명예 퇴진이 되는데... 무득 법우님 한 번만 봐주시면 안될까요.ㅎㅎㅎㅎㅎㅎㅎ
첫댓글 함께한 여정 내내 즐거웠읍니다. 권한정지... 란 말이 여기서 나오다니...ㅎㅎㅎ 글고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 신세를 그 누가 알아주리요......ㅎㅎㅎ
보헤미안 법우님을 서울지역 후기담당으로 임명 해야 할것 같습니다...다들 국문학과 출신들인가....비주류(?)에서 이제부터 주류(?)가 된겁니다^^
ㅎㅎㅎ 원래 술에 약한지라 중간에 튀지않으면 내일이 걱정되고,또한 지금까지 한 번도 밤샘을 해본적이 없어 잠이 저를 청하길래 할 수 없이 살며시 사라졌습니다. 이일을 어찌할꼬 권한정지를 시키면 불명예 퇴진이 되는데... 무득 법우님 한 번만 봐주시면 안될까요.ㅎㅎㅎㅎㅎㅎㅎ
무득법우님.....정확(?)한 용어로...[[활동중지 회원]]입니다......ㅎㅎㅎ.....아마 총운영자 기간의 대부분을 활동중지로 보내실겁니다.....우리 존경하는 산지기님......ㅋㅋ......한 폭의 수채화같은 후기 잘 보았습니다.....^^
이제나 저네나 올라오려나 하고 기다렸더니만 이제 올라왔군요. 후기... 이제 제가 한번 올려볼까요.사람들마다 느끼는 감정도 어찌들 그렇게 다른건지..
...운무 더리고 청산에 살어리랏다...늘 푸른이와 동행함은 파격도 신선하여 걸림이 없는 자유!
두목..님 만큼이나 후기도 잔잔한 구름 같습니다. 아~ 우주는 보셨군요..철없는 소녀 그눔의 쌀밥에 김치타령..지금도 끝이 없습니다. ^^ 노래는 항상 2절까지 하옵소서.. ^^
내려가고 올라가는 동안 ....법우님이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참 부럽더군요... 저도 그런 친구가 있긴 합니다....그 친구는 카페는 않만들고 왜 밖으로만 나다니는지 원 ~~~~ ㅋㅋㅋ
지리산이 선명하게 다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네요~~ 덕분에 저도 즐거웠습니다~~ 애정거미줄이란것 기억하시길~~하하핫 하산 절대 몬하징~~~~
근데요~~질문입니다. 애써 쌓은정을 왜 내려놓으려 하남요?
영산에서의 잊지못할 산행이신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꼭 함께하는 기회를 마련하겠습니다.
지리산 함께한 산행 즐거웠구요 후기 올라오는 글을 보면 지리산이 눈 앞에 왔다갔다 하네요.
법우님의 해박한 지식과 마음의 가감없는 후기 감사합니다.
산에오르는 자에게 지팡이가 필요하고 아주 단단한 나무로 깎았거든요. 백운산에 다녀오면서... 함께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좋은 날있겠지요.
만나뵈서 반갑습니다. 분위기와 곡차의 핑계로 결례는 많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아주 즐거운 추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