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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밝히는 젊은 날의 축구인생”
한겨울 추위지만 약속장소(도문 기차역) 썩 앞에서 테니스채를 메고 씨엉씨엉 걸어오는분이 있다. 직감적으로 오늘의 주인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참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도문제재공장팀 축구선수시절부터 “펄펄” 날아
원로축구인 박광철은 1936년 11월 14일 도문시교 늪치라는 곳에서 2남1녀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집안은 째지게 가난한 빈농가정이였다. 광철이는 어린 시절부터 삼촌의 영향으로 조막만한 고무공을 차면서 축구기술을 익혔다. 축구에 미쳐있었지만 당시 상황으로 “논두렁축구”가 고작이였다. 소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학교의 골간선수로 활약했다. 초중졸업뒤 배치대로 연변한어사범학교에서 학습(1년)하는 기회를 가졌다. 1954년 도문제재공장축구팀에 들어갔다. 광철이는 축구팀에서 몇달간 뛰면서 공장 지도일군들의 눈을 확 뒤집어놓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논두렁 축구”로 펄펄 날았던것이다. 1955년 그는 도문제재공장선수로 동북제재공장계통 축구경기에 참가해 우승을 일궈냈다.
곧바로 연길현축구팀 마금춘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1956년 연길현축구팀의 일원으로 10월 27일부터 11월 7일까지 북경에서 펼쳐진 전국 8개 현 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연길현축구팀은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 하룡원수의 접견을 받고 기념사진을 남기는 영광을 지녔다.
1957년 박광철은 연변청년팀 일원으로 7월 28일부터 8월 15일까지 천진에서 펼쳐진 전국 12개 단위 청년축구경기에 참가, 팀은 2등의 성적을 거뒀다. 1958년 연변축구팀에 입선된 박광철은 전국을급련맹경기 연변경기구 분조경기에 참가했다. 분조경기에서 연변축구팀은 1등을 따냈다.
1958년 6월 1일, 축구선수의 전성기를 보내던 박광철은 중국인민해방군 동북군구축구팀(심양부대팀 전신) 선수로 선발되며 군인의 길을 걷게 되였다. 1959년 박광철은 동북군구축구팀(갑급팀)의 멤버로 중국인민해방군경기대회에 참가, 팀이 축구경기에서 1등을 따내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1960년 6월, 박광철은 당시 갑급팀 강팀이였던 해방군성년팀(8.1팀·북경)에 전근되여 주력선수로 활약하기 시작. 이때로부터 박광철은 8.1팀에서 절대 주력 윙포드(변선공격수)로 10년간 그라운드를 누비게 된다.
8.1팀에서 “황금기”… 축구운동건장 칭호도 수여받아
1960년 12월, 시골촌놈 박광철은 주은래총리의 친절한 접견을 받는 행운을 갖게 된다. 박광철옹은 이때를 자신의 체육사업중 가장 잊을수 없고 영광스러운 시기였다고 회고하고있다. 당시 박광철은 중국—버마 친선대표단(축구, 무술, 영화, 가무, 불교 등 분야의 400여명 성원으로 구성) 일원으로 뽑혀 버마를 출국방문했다. 버마와의 친선축구경기를 마치고 축구팀은 중국—버마 친선대표단 총단장이신 주은래총리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다.
1963년, 박광철은 8.1팀의 선수로 윁남에서 진행된 사회주의나라 군인축구경기에 참가했다. 축구선수로 근무하는 기간 박광철은 구쏘련, 윁남, 버마, 캄보쟈, 조선, 레바논, 인도네시아, 브라질, 알바니아 등 나라의 선수들과 친선경기를 펼쳤으며 8.1팀을 대표해 10여차의 출국방문경기에 참가했다.
8.1팀 감독들의 사심없는 양성과 배려 밑에서 기본기술, 신체소질, 전술의식 등 면에서 빠른 제고와 발전을 가져온 박광철은 강행돌파가 특기였던 재주를 뽐내며 감독과 부대 지도자, 광범한 축구팬들의 호평을 받았다. 1963년 3월, 박광철은 영광스럽게도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발급한 축구운동건장칭호(당시 8.1팀에서 단 2명이 축구건장칭호를 수여받았음)를 수여받았다. 연변조선족축구운동사에 따르면 지난 세기 60년대 배출된 전국조선족축구건장들로는 정지승, 동경춘, 허경수, 박장수, 박광철, 전룡호 등 6명이였다. 1964년 6월 20일, 박광철은 드높은 사업열정과 거둔 성과를 인정받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박광철은 8.1팀의 맹장으로 활약하며 300차의 국내경기와 50여차의 국제경기에 참가했다. 8.1팀시절, 길림성팀의 요청도 수차 있었지만 부대 지도자들의 기대를 저버릴수는 없었다.
국가청년팀 감독 제의 뿌리치고 고향으로 “전업”
1969년말, 림표 부주석의 요구에 의해 8.1팀은 해산을 하게 된다. 조직에서는 8.1팀에서의 10년 공로와 그의 재능을 여겨보고 국가청년팀 감독으로 배치했다. 몇달간의 심리갈등을 겪지만 그는 결국 전업을 해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고향에 계시는 홀어머니를 모셔야만 했다. 박광철은 3살에 아버지를 여의였고 형님은 1951년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했다가 희생되였다. 박광철은 1962년 8.1팀 선수시절 결혼했다. 그가 선수생활을 오래 할수 있었던것은 안해 한신옥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전업해오기전까지 고부간이 서로 의지가 돼 8년간 그를 기다렸다.
전업해 도문철도분국 체육판공실 주임으로 배치받은 박광철은 군인의 단호함과 근성으로 사업을 깐지게 밀고나갔다. 수년간 군중성체육사업을 착실히 틀어쥔 결과 도문철도차량단과 도문철도공무단은 전국철도계통 체육선진단위로 평의되였다. 년초에 계획이 있고 년말에는 총화가, 또한 달마다 축구, 롱구, 배구, 륙상, 탁구, 바드민톤, 바둑, 장기, 라지오체조 등 운동경기를 계획적으로 조직했기에 많은 아마추어선수들이 참여할수 있어서 직공들의 대환영을 받았다.
박광철주임은 이러한 일련의 사업들을 추진하는 한편 도문철도분국의 강세종목인 축구를 크게 틀어쥐였다. 1974년에는 길림성 제7회 체육운동회 축구경기에서 감독 겸 선수로 뛰면서 사회조 1등을 이끌어냈다. 1981년 7월, 전국철도계통 축구경기에서도 박광철주임이 감독 겸 선수로 뛴 도문철도분국팀이 우승을 일궈냈다.
1986년과 1992년 박광철주임은 중국철도부체육대표단 일원으로 조선 평양을 두번 방문, 번역임무를 원만히 수행해냈다. 1996년에는 중국철도부체육협회의 초빙을 받고 철도부축구팀 감독으로 팀을 이끌고 전국 제3회 로동자운동회 축구경기에 참가했다.
박광철주임은 도문철도분국이 1981년 전국철도계통축구경기와 1994년 전국철도계통 제14회 테니스경기를 개최하는데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했다. 1992년에는 다년간 로고와 그 성과를 인정받아 영광스럽게 전국철도계통 체육사업선진개인으로 선정되는 큰 영예를 받아안았다.
정년퇴직후에도 도문 생활체육활성화에 크게 기여
축구원로 박광철은 1996년 12월에 사랑하는 일터를 떠나 정년퇴직했다. 퇴직후에도 그는 도문 생활체육활성화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나날을 보냈다. 도문시테니스협회 회장사업을 10년간 해오면서 테니스운동 보급에 앞장섰고 73살까지 도문시원로축구팀 감독사업을 맡아하면서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에서 조직한 수차의 전국조선족축구경기에 참가(선수로도 활약)했다.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 리사, 고문 사업을 하는 기간 도문철로2중 등 학교의 축구선수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수명의 선수를 상급부문에 수송하기도 했다.
현재 테니스운동으로 만년의 건강을 챙기고있는 박광철옹은 도문시테니스운동사를 집필중이다. 스포츠인으로서의 그의 인생은 아직도 계속되고있었다…
연변일보 리영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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