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서울대 사범대에서 윤리학 교수를 지낸 김석목金錫穆(1909~1996)은 일제 말기 1944, 1945년경 극심한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애쓰다가 우연히 만난 지인을 통해 정릉에 가면 독농가篤農家 왕 모 씨가 있으니 찾아가 도움을 받으라는 말을 듣는다. 실제 왕 씨를 만나보니 농부지만 제법 소견도 있고 인생도 논할 줄 알았다. 김석목은 식량 구할 생각도 잊고 생면부지의 초면인 사람과 이야기하는 재미가 더 좋았다. 왕씨는 이야기하던 중 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숭배하는 선생이 한 분 계신다고 했다. 그가 곧 김교신 선생이라며,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계신다고 했다. 자기는 무식해서 학문도 모르고 신앙도 모르지만, 진정한 신앙을 살아가는 사람은 볼 줄 안다고 했다.
"사람이 거의 다 하루 같이 세력을 따라 바쁘고 남을 헐뜯고 속이기에 재빠르고 먹을 것을 찾아 분주하고, 영달을 노리어 혈안이 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학식과 명망이 높아지면 사람과 멀어지고, 부자가 되면 사람을 몰라보게 되는 게 일쑤가 아닙니까? 그러나 내가 아는 양반 가운데는 분명히 그렇지 않은 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이가 곧 김교신 선생이십니다. 그는 언제 보아도 한결같이 평범하십니다. 모든 사람과 느닷없이 가까우십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그렇게 하십니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이 없습니다, 그에게서는 설렘과 흥분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항상 조용하나 낙심하는 빛이 없고, 무엇에나 큰 소망을 걸고 대쪽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어디 다 그렇습디까? 종교인들이 어디 그렇습디까? 기독교인들이 어디 그렇습디까? 교회인들이 어디 그렇습디까? 그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어 보입디다. 그래서인지 김 선생은 교회에 나가지 않으시면서도 자택에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무엇에나 깨끗하게 하시고 집도 정결하게 거두시고 동네일도 다 잘 되게 하십니다. 그는 정말로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이시지요."
교회 다니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믿지 않는 사람보다 나을 게 없다고 탄식한 왕씨는 김교신을 극구 칭송하면서 “그런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나도 정말 신앙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김석목은 생면부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참다운 신앙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늘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들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은 다 신앙으로 철해있고 소망으로 가득 차 있고, 성실과 친절한 사랑으로 젖어있기 때문에 억지스러운 조작이나 꾸밈이 없다. 신앙이 철저해지면 인격이 환하게 열려 사랑으로 순화된다. 김석목은 왕씨의 말을 들으면서 진리의 열매가 무엇인지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