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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전부 '이단화' 되고 있다. 어느 교회를 가야할까?
신문사에 근무하다보니, 그것도 선교면이 있다 보니,
불신자 직원들 중 '이단'에 대해서 물어 보는 직원들이
있기에 그동안 성경공부를 하고 신문사 20년 경력과
기독교 신앙생활 40년 경력을 토대로 정의를 내려 봤다.
어느 교회를 가야할지 무섭다고 한다.
교회가 이단 정죄를 한답시고 다들 누워서 침 뱉고 있다.
그 침 자기 얼굴에 떨어지기밖에 더하겠냐.
어느 기독교 장로회 총회 교단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서로 이단 삼단 경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신문사기 때문에 보도자료를 받기 원한다고 전화하는
것이었고, 그 쪽은 그 신문사가 이단인지 삼단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전화를 했다고 서로 경계어린 투로 전화통화를 했다.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기독교단이 믿을 만 한 것인지,
주의 종들은 믿을 만 한 것인지,
교회는 정말 믿을 만 한 것인지 의문 투성이가 됐다.
이런 종류들은 이단이라고 정의를 내려봤다.
이단에서 주장하는 '구원' 이라는 것은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구원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말씀하시는 '구원'은 이 땅에서의 삶의 평안과
부유와 건강함과 수명 전에 죽지 않는 것에 대한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전도서 7: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아멘.
죽어서 가는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이시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것은 권리가 '제로'다.
아무도 자랑하지 말라.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 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아멘.
① 내가 하나님이다 예수님이다 하는 곳
② 여기에 와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곳
③ 내 설교를 들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곳
④ 쓸데없는 기사와 표적을 내세우는 곳
⑤ 기적이 일어났던 성경말씀을 아는 척 하면서 테스트 한다고 시험해 보는 곳
⑥ 목적과 이유가 없는 신비적인 현상과 행위를 강요하는 곳
⑦ 목사나 대장을 신격화 하는 곳
⑧ 신도들의 돈을 긁어모아 거부의 부를 누리는 곳
⑨ 대량으로 성 문란을 일으키는 곳
⑩ 144000을 들먹거리며 구원의 숫자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 곳
⑪ 이 땅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곳
⑫ 사회에 거대한 나쁜 물의를 일으키는 곳
⑬ 여기를 나가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협박하는 곳
⑭ 아무 교회든지 자기 맘에 안 들면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곳
⑮ 타인이든 다른 단체든 다른 종교에게 욕설을 퍼붓고 저주를 함부로 하는 곳
⑯ 가정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곳, 가정은 깨져도 자기 단체만
건재하면 된다고 하는 곳.
⑰자기는 설교와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고 식모의 일을 시키는 곳
이런 곳은 이단이든 삼단이든을 떠나 빨리 빠져 나오는 것이
자기가 살고 자기 가정이 사는 길임.
"개나 소나 다 이단이네"
우리나라만 그럴까? 왜들 그렇게 조금만 어쩌구 저쩌구 하면
이단이라고들 할까?
저 교회도 이단, 이 교회도 이단, 그 교회도 이단, 저 교회는 삼단.
어느 침례교회에서 큰집 조카 결혼식을 치루면서 고모 쪽
조카며느리가 말했다.
"이 교회가 왜 이단이래요?"
"글쎄, 내가 보기에는 정상적인데, 속을 모르니까 모르지"
"저희 교회도 이단이래요"
"그 교회도 이단이면 개나 소나 다 이단이네 머"
라는 대화가 오고 갔다.
이단의 정의를 세워놓고 그 교회에 가서 파헤쳐 본 다음에
이단이라고 하는 것인지, 그냥 누가 "그 교회는 이단이래"
라고 해서 이단이라고 하는 것인지,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곳이라서 이단이라고 하는 것인지
도대체가 모르겠다.
유독 기독교인들이 이단 규정을 제일 많이 하고 있고,
이단 정죄를 제일 많이 하고 있고, 욕을 제일 많이 하고 있다.
'이단'은 잘 되고 '정죄자'는 망하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신문사 경력 20년에, 기독교인 경력
40년에 느낀 것은 개인이든 신문사든 목사든 '이단 정죄'를
철저하게 한다고 하던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못 봤다.
오히려 '이단' 이라고 정죄 당하는 곳이 잘 되는 것을 본다.
내가 기독교 관련 주간지에서 일을 할 때도 발행인이 이단을
규정해 본다고 공청회를 열고, 취재기자들을 동원시키고
난리를 쳤는데 몇 년도 안 되서 결국에는 망했다.
어느 교회 목사는 그동안 얼마나 이단 정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교회는 내가 칭찬했던 신정동 소재 열방교회 같은
분위기인 것 같은데, 그 교회를 '이단' 이라고, 사탄이 씌운 곳이라고
목사나 교회를 싸잡어서 엄청 욕을 하고 정죄하는 것을 보았다.
이단이라고 정죄 받은 교회는 1천명 가까이 성도가 모이는 교회였고
건물도 크게 지은 곳이었고, 담임 목사님을 보니 참 정갈해 보였고,
교인들도 표정들이 밝았다. 내가 우리 교회도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모습이었다.
욕을 하면서 정죄하는 그 교회는 10년이 넘었는데도
자기 가족만 4명 안팎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곳이었다.
아! 이 교회는 사탄이 부흥이 안 되도록 막고 있었나,
하나님께서 부흥이 안 되도록 막고 있었나?
아님 내 맘대로 교회를 차려서
'의로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인가?
종교인의 함정 '이단' '삼단'
하나님께서는 '이단'이 세워지는 것을 왜 허락하셨을까?
(신명기 13:3)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아멘.
불신자나 신자나 '주의' 할 것이 있는데, 우리 사람들이 믿던지
말던지 이 땅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하나님께서
발전시키셨고, 개나 소나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만드셨고,
이단이든 삼단이든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고, 생사화복,
생로병사, 빈부귀천, 흥망성쇠 중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신 것이 절대로 없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한다.
그냥 당신이 믿던지 안 믿던지 할 뿐이지 뿌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성경에 말씀하시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 이방신을 따라가지 말라, 제사를 지내지 말라,
점쟁이에게 물어보지 말라, 다른 나라 풍습을 쫒지 말라,
이방인하고 결혼하지 말라, 이방인하고 섞이지 말라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선민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나라 법대로 사는 것이다.
다른 나라까지 이 법을 적용시켜서 다 죽여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기독교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방신을 따라가지 말라, 제사를 지내지 말라, 점쟁이에게
물어보지 말라, 세속적인 풍습을 쫒지 말라, 불신자하고
결혼하지 말라, 불신자의 세속적인 문화에 물들지 말라
하시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불신자들의 법대로 사는 것이다.
이들에게도 이런 법을 적용시키셔서 다 죽여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이다.
하나님이 불신자들을 답답해 하시고 한심해 하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답답해 하신다.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
(잠언 22:14)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아멘
음녀의 깊은 함정? 사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노를 당한 자가 빠지는 하나님의 함정이다.
사탄이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화를 주시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사탄이 화를 주시고가 절대적으로 아니다. 그 무엇도 오직 하나님께서
하셨다. 인생들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일지라도 전부 몽땅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다스리시고 관리하신다.
인생에는 무수한 '함정' 들이 있다.
그 함정 '루시퍼사탄' 이 팠다고 믿어서 큰일이다.
무엇이든 나쁜 것일지라도 '사탄'이 한다고 믿는 자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설교에서도 자기 교회가 안 되거나, 자기의 안 되는 일을
사탄의 역사라고, 사탄이 방해한다고, 사탄을 때려잡아야
한다고 설교할수록 교인들이 떠나고, 교인들 가정이 시끄럽고,
교인들이 말도 안 듣고 시끄럽고, 서로 한 마음이 되지를
못하고 생각들이 다 갈라져 있고, 한 쪽으로 전도해 와도
한쪽으로 새 나가고 하는 것을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그런 주의 종도 모르고 그러는 것이라 안타깝지만,
그 주의 종에게 배워서 성도들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가정이 더 안 되고 찌그러지고 자녀도 없고 시끄러운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나도 그렇게 살고 있었지만.
'자기가 파는 함정'에 자기가 빠진다
자기가 파는 함정 도 있는데 성경에 보면 사람이 자기가
함정을 파 놓고 다른 사람이 빠지길 기다리는 자는 자기가
그 함정에 빠진다고 말씀하셨다.
회사에서도 다른 사람 쫓아내려고 모략을 꾸미고 이간질을
시키면 자기가 쫓겨나가거나 회사까지 망해버려서 자기가
실업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전도서 10:8)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아멘.
자기가 ‘얼짱’이고 ‘몸짱’ 인데다 자꾸 살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심한 사람은 ‘이성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강간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죽음의 늪’에도 빠지고,
노는 것이 좋은 것이 심한 사람은 ‘도박의 함정’이나
‘게임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거대한 눈 먼 돈이 생긴
사람은 ‘뜯기는 함정’에 빠지게 되고,
공짜 돈을 너무 좋아 하는 사람은 ‘갈취의 함정’ 이나
‘살인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일하기는 싫고 돈은 필요하고 머리는 좋고 하면
‘사기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돈이 아무리 나의 목숨과 하나님 같을지라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바르고 착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와 상관없이,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돈만 쫓아가면 '사기꾼'과 '악인'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전도서 7:29)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아멘.
(고린도전서 3: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아멘.
하나님을 몰라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잘 살아가지만,
돈 없으면 그냥 죽는다. 굶어죽든 자살하든.
기독교인들 조차도 "돈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하나님 없으면
살 수가 없다"는 말은 다 허세다. 어짜피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떠들 뿐이다.
불신자나 신자나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돈'은 나의 목숨이고 나의 가족의 목숨이다.
'돈' 이라는 것이 그냥 동정 몇 개 화폐 몇 개가 아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존재고, 내가 입을 수 있는 존재고,
내가 거처할 수 있는 존재다. 내가 살 수 있는 존재다.
돈이 얼마나 중요하냐를 성경에 말씀하신다.
'돈'과 '하나님'과 비교를 했다. '두 주인' 이라고.
'신이 파신 함정'에 '종교'들이 빠진다
인생에는 무수한 함정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놓으신 함정 들도 있다.
이것은 무수히 많고 다양한데 무섭고 두렵다.
설상가상의 화도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 치는
기독교에 왜 이단이 있을까?
'기독교인의 함정 … 이단'
하나님께 받은 능력을 자기 것처럼 사용해도 이단에 빠지고,
자기가 하나님인척 대우를 받아도 이단에 빠지고, 기독교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뭔가 많이 아는 척을 하고 나대다가
이단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께서 파 놓으신 함정.
하나님의 노함을 입은 자가 그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무엇이 이단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신약에 들어서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칠 수 있는 권능을
주셨다.
이런 능력을 잘 못 사용할 때 '이단' 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을 본다.
사도 바울 선생도 이단 교주가 될 뻔 했다.
옷을 찢고 소리쳐 뜯어 말렸기에 망정이지.
"예수 이름"의 능력을 사용해야 이단이 안 된다.
그것도 상대를 아주 불쌍하게 여기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주 겸손하게 사용해야 한다.
처음에는 믿음이든 능력이든 예수님께 빌려 쓰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하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그 모든 것이
'내 것 같은 것'이 문제다.
(사도행전 14:9~14)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
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아멘.
신의 함정은 무수히 많다
기독교인의 함정이다.
하나님의 노함을 입은 자가 그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신비' 만을 쫓아가는 자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 '함정' 이라는 것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아무 곳이나
웅덩이 같은 구멍을 파놓고 지푸라기를 놓고 어느 놈이든
지나가다가 재수 없으면 빠지고 걸려라 하시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아무데고 걸려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죄 값에 대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자기 그릇대로 사는 것이다.
함지박, 밥그릇, 반찬그릇, 세수대야, 오강,
다라, 도자기, 항아리, 간장종지, 술병 등.
'이단'만 함정이 아니라 함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떠냐에 따라
생활 습관이 어떠냐에 따라, 성격이 어떠냐에 따라 함정도
여러 가지다. 아주 다양하다.
인생들을 보면 안다.
(이사야 24:18) "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아멘.
하나님의 함정은 이단으로만 보내는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지역으로 교회로 단체로 보내신다.
하나님께서 구역을 정해주시는데, 생활적인 삶에서도 너는
이 나라, 너는 저 나라, 너는 이 동네, 너는 저 동네 정해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을 받아 잘 되서 좋은 동네로 이사도 가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잘 못되어서 안 좋은 동네로 이사도
가고 하는 것이다.
너는 이 구역으로 가라
교회에도 구역을 정해주신다.
너는 이 교회로 가라, 너는 저 교회로 가라,
너는 그 교회로 가라 하신다.
그러면 어느 교회는 담임 목사가 좋아서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도 있고, 어느 교회는 괴팍한 담임 목사를 만나 시험 들어
가면서 고민하는 성도들도 있고,
어느 교회는 부자라서 부요함을 누리는 성도들도 있고,
어느 교회는 가난해서 일당백을 해야 하고 부요함을
누리기는커녕 매번 헌금도 모자라 찬조금을 내야 하는
교회도 있고,
어느 교회는 담임 목사가 웃는 얼굴로 지내서 성도들도
웃고 지내고, 어느 교회는 담임 목사가 웃지도 않고 인상을
쓰고 지내서 성도들도 같이 웃지도 않고 인상을 쓰고 지내고,
어느 교회는 담임 목사 앞에서 물러날 때는 뒷걸음질 쳐서
물러 나야 하는 교회도 있고, 어느 교회는 담임 목사가 성도들까지
계산해서 다른 목사에게 팔아넘겨서 교회와 같이 팔려가야 하는
성도도 있고,
어느 교회는 체계와 행정이 피라미드식으로 잘 잡혀 있어서
일사천리로 행사가 치러지는 교회가 있고, 어느 교회는 중구
남방으로 헤매는 교회도 있고,
어느 교회는 성도들을 교회에서 살게 하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오히려 떨어져 나가고 남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이사를 가서
다른 교회를 가면 그 교회를 안 나오던 남편이 열심히 나오다 못해
봉사까지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교회도 있고,
어느 교회는 여전도회원들이 교회에 쓸데없이 오지 못하게 막고
가정으로 돌려보내, 가정을 깨끗이 하고 남편과 자녀를 더 보살피라고
교육을 시켰더니 남편들이 교회를 나가겠다고 해서 갑자기 부흥되는
교회도 있다,
신의 '족쇄'에 매여 꼼짝못해
주의 종의 올바른 신앙생활 정치로 주의 종도 복을 받고 성도들도
복을 받는 교회가 있고, 주의 종의 올바르지 않는 신앙생활 정치로
성도들 가정도 복도 못 받고 주의 종 가정도 복을 못 받고 시끄럽고
자녀도 안 되고 일도 안 되고 하는 여러 가지 교회가 있는데
그 중에서 나에게 계산된 계산에 의해 이 교회 저 교회를
왔다 갔다 하게 된다.
그래서 어는 성도는 즐겁고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어느 성도는 지지고 볶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잘한 대가로 하나님께서 먼저 지혜나
생각으로 '길'을 알려주시기도 하신다.
하지만 사람들이 내 상황 앞에, 내 현실 앞에, 지금 내 눈앞에
놓여 진 두 길 중에 한 길을 잘 선택 하냐 잘 못 선택 하냐,
두 가지 생각 중에 어느 것을 선택 하냐, 두 가지 마음 중에
어느 것을 선택 하냐, 두 가지 말 중에 어느 것을 선택 하냐에
따른 결과를 주관하신다. 복으로 화로.
내가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고 가는 것 같아도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안 이루시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추진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계산과 다른 내 생각과 내 계획이 꿈쩍도 할 수가 없다.
믿든지 말든지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족쇄에 차 있기 때문에
멀리 갈수가 없다. 죽는 길 밖에는. 그것도 소용없는 것은 육체는
썩어 없어져도 사람의 영들은 영의세계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다.
(욥기 36:8~12)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아멘.
'침례'가 이단이면 '약식세례'는 삼단?
그렇게 교회가 다양한데 어느 교회가 이단이고 어느 교회가
삼단인지 잘 모르겠다.
장로교 쪽에서 볼 때 순복음 쪽이 이단이라고 하는 것인지,
순복음 쪽에서 볼 때 장로교가 이단이라고 하는 것인지,
성결교 쪽에서 볼 때 침례교가 이단이라고 하는 것인지,
침례교 쪽에서 볼 때 감리교가 이단이라고 하는 것인지.
장로교에서도 ‘파’가 수백 개로 갈라져 있다는데 어느
교단이 이단이라고 하는 것인지.
그런데 가만히 들리는 소리를 통계적으로 보니 이단이라고
몰리는 교단이 침례교가 많다는 것을 본다.
'세례적'으로 따지자면 '침례'가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물에 풍덩 빠졌다가 나오는 것이 싫다.
몸도 젖고 머리도 젖고 말려야 하고, 옷도 갈아 입어야 하고.
하지만 세례요한 때에도 강물에 잠겼다가 나왔다.
예수님도 그렇게 세례를 받으셨다.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
심을 보시더니" 아멘.
세례 침례 적례 관수례
'세례' 라는 용어를 찾아보니 그리스도 교회에서 행하여지는
입문 의례로 영어로는 'baptism'. 강이나 교회당 내에 설치된
수조에 전신을 담구는 것을 '침례', 손으로 물방울을 묻히는
것을 '적례(滴禮)', 손 또는 용기를 이용해서 물을 붓는 것을
'관수례' 라고 한다.
.
'세례'는 보편적으로 전체적인 의미로 말을 하는 것이고,
'침례'는 물에 푹 담궜다는 것이고, 지금의 우리 세례는
손으로 물을 떠서 머리에 붓는 '관수례' 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요단강’에 들어갔다가
물에서 올라오셨다.
예수님 당시는 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고 세대가 많이 지나서 손으로 물을 떠서 ‘관수례’를
베푸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말자.
갓 쓰고 도포 입고 두루마리로 글을 읽던 옛 시대에서
양복 입고 책으로 만들어서 성경을 읽고 있는 것처럼
그런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말자. 그냥 귀찮다고 하자.
지금 우리는 강이 근처에 없어서 침례를 못하기 때문에 교회 내에
욕조 같이 만들어 놓고 침례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도 편리한
방법이라 잘못된 것이라면 손으로 퍼 붓는 것은 더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아예 그 욕조 조차 만들지 않고 물에 들어갔다 나오기 싫고
귀찮아서 안하고 있다. 전에는 손에 적당히 묻혀서 머리에 손을
얹더니 지금은 그래도 아주 듬뿍 담아서 퍼 붓다시피 해서 머리부터
흘러내려서 수건으로 닦아낼 정도로 하긴 한다.
전통을 지키느니 가난한 집에 파 한 뿌리나 줘라
그러면 성경대로 정상적으로 침례를 베풀었다고 이단이라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강에 가서 하지 않았다고 이단이라고
하는 것일까?
침례교는 정상적으로 물에 잠겼다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러면 지금 일반 교회가 침례를 베풀지 않고 약식세례를
주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강도 없고, 주변에 그렇게 큰 물이
있는 곳도 없고, 욕조 시설이 없을 뿐이고, 욕조를 안 만들었을
뿐이고, 귀찮을 뿐이다.
가운을 입고한다 해도 몸이 젖어야 하고 말려야 하고 많이
귀찮을 것 같긴 하다. 성경대로 약식세례가 아닌 침례를
준다고 하는 침례교가 이단으로 몰림이 많은 것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
(고린도전서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아멘.
그 유명하신 사도바울 선생도 스테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뿐 그 외에는 없다고 한다(고린도전서 1:16).
그런데 우리는 왜 사도바울보다 유명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고
복음도 전하지도 못하면서 쓸데없이 세례냐 침례냐 따져가면서
이단이냐 삼단이냐를 논하는지 모르겠다.
왜 사람이 전통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게 하는지
모르겠다. 떡 먹기 전에 손을 닦았냐 안 닦았냐 해가면서 말이다.
(마가복음 7: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아멘.
누구는 사탄의 별 모습은 5각별이고, 기독교적 별 모습은 8각이란다. 이 일로 서로 다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을 본다. 이 세상 것 중에 어느 것이 하나님 것이고 어느 것이 사탄의 것일까? 제대로나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아버지께서 말씀하신다. "얘야~ 별은 5각도 아니고 8각도 아니고 동그랗단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닐지라도 지금도 개나 소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성경대로 살고 있다. 유대인 같이 바리새인 같이 전통을 만들어 놓고 서로 정죄하고 있고, 회칠한 무덤의 죄를 지으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잘난 척을 하면서 떠들면서 살고들 있다. 제발 전통 챙기지 말고 가난한 이웃에게 파 한 뿌리나 줘라. 정죄하는 자가 왜 망할까? (고린도후서 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아멘. '정죄' 한다고 다 망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때에 따라 정죄도 하게 하신다. 그래서 그 정죄 당하는 사람의 죄 값으로 계산하시기도 하신다. 그래서 정죄의 직분도 있긴 하다. 그렇다고 항상 정죄만 하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동안 많이 참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네, 해도 해도 참 너무 하네" 하면서 정죄가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혼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정죄죄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계산에 의해 이렇게 저렇게 살고 있는데, 그 하나님의 계산대로 처지대로 살고 있는데 그것을 꼴 사납다고 한다든지, 보기 싫다고 한다든지, 바보 같다든지, 나 같으면 그렇게 안산다고 하면서 쓸데없이 욕을 하고 핀잔을 주고 정죄를 하는 경우가 있다. 사람들이 더럽다고 하면서 손가락질 하고 사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산된 함정에 빠져서 살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나와 상관없는 삶인데도 불구하고 욕을 하고 다니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소문내고 다니고, 정죄하면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이때는 '정죄자'가 혼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죄라고,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는다고, 너는 더러운 놈이라고, 지옥가도 마땅하다고 하면서 정죄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혼내신다. 너는 그 죄는 아니지만 다른 죄에 걸려있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다른 죄가 더덕 더덕 붙어있는 사람인 네가 누구를 정죄하느냐고 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아멘. '정죄권' 남용·오용 자는 '불법' 쟤는 큰 죄, 나는 쬐끄만한 죄? 그런 거 없다. 다 같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랬다고 다시는 죄를 안 짓나? 또 짓고 또 짓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사람이 정죄를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정죄자가 혼난다. 정죄자가 망한다. 정죄자가 죽는다. 사람이 사람을 정죄하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에서 정죄 빼면 무슨 재미로 살까 할 정도로 타인을 나의 입술의 도마위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하면서 회를 뜨면서 정죄하면서 산다 하루도 한시도 빠지지 않고. 아무리 허락된 정죄라 할지라도 계속되거나 즐기거나 하게 되면 정죄 자 당신이 혼나게 된다. 사람이 합당한 정죄를 하게 되면 정죄 당한 사람이 혼나게 되는 것이고 합당하지 않은 정죄를 하게 되면 정죄 자가 혼나는 것이다. '사람들의 죄' 라고 제일 크게 적용되는 것이 '정죄 죄'다. 그것은 '니가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네가 아무리 이단 교주가 아니더라도, 이단에 빠진 자가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 계산하실 때는, 사람들이 정해놓은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 곳은 이단이다 라고 하는 곳의 죄'나 '깨끗한 척하면서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 너의 죄'나 "다 같다" 라는 것이다. 다 똑 같다. 쓸데 없이 정죄하는 자 "불법" 이 정죄의 방법도 여러 가지다. 눈길로 정죄하고, 생각으로 정죄하고, 마음으로 정죄하고, 정죄가 아닌 척 하면서 정죄하고, 몸으로 정죄하고, 정죄하지 않았다 라고 착각하고, 정죄한 줄도 모르고 정죄하고, 말로 정죄하고. "말로 정죄하지 않고 눈길로 했으니 아무도 모를 것이다"는 거대한 착각이다. "말로 정죄하지 않고 생각으로 했으니 아무도 모를 것이다"는 거대한 착각이다. "나는 정죄한 것인 줄 모르고 했으니 괜찮겠지?"도 오산이다. 다 계산된다. 적던지 크던지로. 하나님께서 계산하시는 것이니 사람인 나는 모르겠다. 나나 내 가정이 시끄럽고, 인상 쓰고, 일도 안 되고, 손가락질 당하고, 수군수군함을 당하고, 속상하고, 가난하고, 사고 나고, 찌그러지게 사는 나의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살기를 바랄 뿐이다. 그냥 서로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넘어가 주는 것이 서로 사는 길일 수도 있다. (요한복음 8:15~16)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아멘. (야고보서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아멘. (요한복음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어느 교회를 가야할까요?
'정죄'는 오직 하나님의 권세이시다.
어떤 교단이 이단인지, 어느 교회가 이단인지, 그 교단과
교회가 주장하는 ‘교리’를 성경적으로 따져봐야 알겠다.
전에는 통일교가 이단이다, 전도관이 이단이다, 신천지가
이단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단이다, 여호와 증인이 이단이다,
몰몬교가 이단이다, 제칠일 안식교가 이단이다 하더니
이제는 이 교회가 이단이고 저 교회가 이단이고
저 교회는 삼단이고 한다.
아! 도대체 우리 성도들은 어느 교회로 가야하나?
누가 "어느 교회를 가야하나요?" 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다니는 교회로 오라고 하고 싶지 않다.
나도 들썩들썩 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내가 다니고 있지는 않지만
"신정동의 열방교회로 가세요"
"성남의 선한목자 교회로 가세요" 라는 말 밖에 못하고 있다.
누가 물어본다. "대형교회 기준은 모예요?" "모가 이단이예요?"
누가 그런다. "기독교방송에서 설교하는 목사님들의 교회가
대형교회라고 보면 되요".
하지만 요새는 인터넷을 통해서, 유튜브를 통해서
아무 목사님이나 설교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그것도 모르겠다.
자기가 하나님이고 예수면 이단이다
‘이단’ 이라고 규정을 지어야 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대략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하면 모든 교회를
싸잡아서 이단화 할 것 같고 그러면 도대체가 전도도 할 수도
없고 어느 교회로 가라고 할 수도 없다.
교회가 무섭다. 그렇다고 절에 갈 수도 없고. 정말 큰일이다.
이단은 먼저 그 교주인지 목사인지는 모르지만 그 대장이
자기가 ‘하나님’ 이라고 하고 자기가 ‘예수님’ 이라고 하면
그건 이단이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성도들이
신격화 하도록 유도하고 그것을 즐기고 있으면 이단이
될 확률이 높다.
(에스겔 28:9) "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 아멘.
그리고 무슨 기적인지 표적인지가 나타나는 것도 하나님이
그런 이단 대장에게도 주시는데 그것은 구제와 선행을 위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처럼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
행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신기 나불 나불로
사람들을 모으는 것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는 장면을
연출해서 사람들이 "오!~ 놀라운데"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교주가 소리 지르면 벽에 달라붙는다든지, 책상다리 하고
앉아서 손뼉을 치면서 공중으로 붕붕 뛰던지 하는 별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예수이름으로 고쳐주는 것이 아닌 그냥 마술 같은 행위를
하는 곳은 이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신은 "쓸데없는 기적 no"
성경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성경하고
똑 같이 역사하신다.
모세처럼 바다를 갈라보자,
기도하면 만나와 메추라기도 내려주신다.
'민수기'나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곳은
칼로 진멸해 버려야 한다고 자기 목숨을 담보로 테러를
일으켜 버리고.
바다 위를 베드로처럼 걸어보자,
불에 손을 올려 놓아도 데지 않는다.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
사도 바울 같이 뱀에 물려도 죽지 않는다.
하면서 성경을 '테스트' 하는 곳은 이단이다.
하나님께서는 쓸데없이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으신다.
(누가복음 11: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아멘.
하나님은 쓸데없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시는 것을 싫어하신다.
그런데 이단들은쓰잘데기 없는 행위들을 일삼는다.
그 시간에 가난한 사람에게 파 뿌리 하나 주는 것이 훨씬 낫다.
하나님께서는 개나 소나 전부 착하고 정직하고 바르고 성실하고
칭찬 받고 사랑스럽고 온유하고 긍휼함이 많고 올바른 재판을 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구제와 선행에 뛰어난 자를 칭찬하시고
점수를 후하게 주신다.
그런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이며 ‘예배’이다.
(야고보서 4:15~17)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아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아멘.
이단은 쓸데없는 기사와 표적을 즐긴다
(출애굽기 7:10~11)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매
그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 아멘.
우리는 착각하는 것이 모세가 지팡이로 뱀을 만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애굽 요술사들이 지팡이로 뱀을
만든 것은 루시퍼 사탄이 했다고 알면 큰 오산이다.
그 어떤 것도 전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것이고, 관리하시는 것이고, 대결도 벌이게
하시는 것인데, 단지 모세에게는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 뿐이고, 애굽 요술사들은 그냥 본인이
자기들의 어떤 신에게 능력을 받아 행하는 줄 알게 하신
것 뿐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능력을 받아 요술을 행하는 요술사들이
답답하신 것이 절대적으로 아니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알려주시지 않으셨던 것 뿐이다.
모세는 그저 하나님이 계시다 라는 것을 알게 하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한 길을 가시는 것 뿐이다. 저들은 다
죽어야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살아야 하고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들도 잘못하면 죽었다.
땅이 꺼저 죽었고, 서로 찔러 죽였다.
쓰러뜨리는 곳은 이단일까?
인터넷에서 ‘이단’ 이라고 규정한 곳을 찾아봤다.
‘빈야드’도 이단이라고 되어있다. 옛날에 한참 성도들을 쓰러뜨리는
집회가 유행인 적이 있었다. 우리 같은 성도는 주의 종이 쓰러지라고
하니까 쓰러진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그런 이성적이지 않은 집회에 참 멀뚱하다.
입신이 유행일 때 나도 입신하고 싶었지만 물 건너 가고,
쓰러지고 싶어도 물 건너 가고, 그것이 이단이든 삼단이든 간에
뭔가 신비적인 현상에 나도 들어가고 싶은데 들어가 지지를 않는다.
무슨 체면에 걸어도 안들어 갈라나 원.
우리 교회 목사님도 한 때 쓰러뜨리신 적이 있었다.
빈야드를 갖다오셨는지, 거기서 배운 것을 갖고 들어온 어떤
주의 종에게 배운 것인지는 몰라도. 우리 목사님도 어지간히
이성적인 목사님이라 그런 것으로 쓰러질 것 같지는 않다.
쓰러뜨려도 목적과 이유 있게
그런데 나는 참 멀뚱하다. 몸에 힘이 빠지는 감각이 없다.
힘이 빠져야 드러눕지.
목사님도 성경에 천사를 보거나 하나님을 보는 자는 그렇게 힘이
빠져서 쓰러지는 것이라고 되어있다고 자신 있게 설명하셨다.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나는 점점 그런 것이 싫어지는데 목사님은 계속 했다.
내가 새벽예배에 빠진 어느 날 동생 집사가 아침부터 우리 집으로 왔다.
"언니, 목사님이 또 머리를 밀어서 쓰러뜨리실려고 하는데 싫어서
도망 왔어" 라고 했다. 잠깐 대화를 끝내고 나만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쓰러지는 것이 정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쓰러지고
싶지 않은데,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밀어서 쓰러뜨리는 것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런 것 때문에 새벽예배 더 못가겠어요"
"내가 손가락으로 밀었어요? "
"네!"
"목사님이 손 대지 않아도 자연현상으로 쓰러지는 것은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몸은 반항을 하는데 밀어서 쓰러지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아요" 라고 했다.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지도 않는 그냥 멀뚱한 정신으로 그 새벽에
목사님 앞에서 드러누우면 뭘 어쩌자는 것인지.
그 다음부터 그런 것을 하지 않았다.
쓰러질지라도 목적과 이유가 있어야 한다. 무조건 쓰러뜨리는 것 말고.
천사를 보았다든지 하나님을 보았다든지 예수님을 보았다든지.
병이 고쳐졌다든지 귀신이 나갔다든지 입신을 했다든지 영의세계로
들어갔다든지 등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런 것도 계속 그런다든지 그런 것을 추구한다든지 하면
신비의 세계로만 빠져버리게 된다.
베뢰아 성락교회도 귀신을 쫓는다고 이단이라고 규정되어 있지만
나는 나의 기가 다 빠져나가서 살 수가 없을 때 누군가에 의해 그
교회에 인도되어서 부목사님들인가에 의해 손을 대지 않는 방언의
한마디 외침으로 나의 몸에 힘이 빠져나가 뒤로 앉아버린 적은 있었다.
힘이 다시 생기기까지 몇 시간이 걸렸다.
그후로 점점 회복되는 시간이 필요했고 지금은 아주 건강하다.
쓰러지라니 쓰러질 수밖에
나의 딸과 아들이 대학교 고등학생 시절 우리 교회에서 학생 대상으로
부흥회가 열렸다. 강원도 횡성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강사였다.
우리는 직장도 다녀야 하고 학생 대상이라 참석하지 않고 잠을 잤다.
마지막 날, 밤 12시쯤 아이들에게 전화가 왔다. 부흥강사님이 엄마
아빠 깨워서 데리고 오라고 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잠을 자냐고
부흥회 참석을 해야지" 하셨다면서.
우리 같은 성도들은 주의 종이 오라고 하면
하나님이 부르시나 하고 달려간다.
다짜고짜 강단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막 쓰러뜨리 실려고 한다.
아! 다리에 힘이 빠지거나 몸에 힘이 빠지거나 해야 쓰러지지,
몸은 뻣뻣한데… 그래도 하도 방언으로 쓰러지라고 하니까
그냥 쓰러져버렸다.
남편도 어지간히 이성적인 사람인데 쓰러지더라.
그래서 의아했다. 힘이 빠졌나?
나중에 물어보니 그냥 쓰러졌다고 했다.
시간 끌어봤자 일 것 같아서 얼령 쓰러지고 집에 가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언제 일어나야 하나?" 고민했단다. 나도 그랬는데…
주의 종은 하나님 대리자이니까 하나님 본 것처럼 해서 쓰러져야 하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일어나도 될 때가 됐나 싶어서 주섬 주섬 챙기고
집에 와서 잤다. 그냥 지가 알아서 일어나면 되는 거였다.
그 시간에 전화까지 해서 불려 간 사람은 우리 부부 만이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셨나?
그 목사님은 몸에 금가루가 입혀지는 목사님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너도 나도 금가루가 몸 어딘가에 묻어져
있나 살피곤 했다.
금가루가 입혀진 그 목사님은 누가 그러는데 지금 천국에
있는 것을 봤다고 했다. 좋겠다.
우리는 금가루가 없어서 천국에 못 가는데.
신비적인 체험? 당신 것 일뿐
어떤 목사님은 입신을 했나보다. 그래서 입신 강사로 활동을 하셨는데,
우리 교회에서도 입신 부흥회를 했다. 그날 인격적으로 괜찮다고 소문난
여 집사님이 입신을 했는데, 어느 집사님의 남편인 안 믿는 사람에
가까운 아저씨를 만나고 왔다.
그 사람은 '거기'서 구역예배를 드리고 있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 입신한 집사님은 차분하고 인격적으로 신뢰가 가는 분이었다.
거짓말 할 사람이 아니다.
'거기' 라는 곳이 천국인지, 천국 변두리인지, 지옥 변두리인지,
지옥 중앙인지는 모르겠다. 그 중요한 것을 안 물어봤다.
죽으면 개는 지옥에 가고 소는 천국에 간다고
교육을 받았는데 구역예배라니.
죽음 직전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나?
사람은 누구든지 그러려나?
뭔가 신비스러움을 체험하면 남도 그래야 하는 줄 안다.
혹여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려고 벽에 달라붙었던지,
공중으로 날랐던지, 가래나 이물질을 뱉었던지, 흙탕물 소변을 보았다든지,
피를 쏟았다든지, 귀신을 보았다든지, 천국을 보고 지옥을 보았다든지,
영의세계를 들어갔다든지, 하나님을 보았다든지, 천사를 보았다든지,
마귀를 보았다든지, 입신을 했다든지, 쓰러졌다든지, 어떤 물을 먹고
병이 나았다든지, 귀신을 쫓으니까 나갔다든지, 금가루가 묻었다든지,
손에 보석이 쥐어졌다든지, 투시력이 생겼다든지, 사람의 마음을 읽게
됐다든지, 점쟁이 같이 예언의 은사가 임했다든지,
각종 신비적인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으시다.
그러면 그것은 그냥 당신 것일 뿐이다.
남도 그래야 한다고 쫓아다니면서 외치고 모이라고 해서 보여주고
학교를 차리고 "따라 하라"고 그러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알아서
은혜를 주신다. 크든 작든.
'지식'은 학교 '영성'은 신께서
성경 지식을 위한 공부나 어떤 학습이나 기술이나 도덕공부 등은
학교에서 선배 교수들의 수업이라는 것을 통해서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적인 영성'을 한 단계씩 올리는 것은 사람 중
그 어느 누구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머! 나의 영성이 한 단계 높아졌네! 아이 좋아라"
그렇게 내가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주의 종이나 어느 기관의 대장이 영성훈련을 시켜주면서
"당신의 영성이 한 단계 높아졌습니다"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영성을 높여주는 것은 영의세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다.
어떤 기관이나 학교에서 영성훈련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저
학습이고 공부일 뿐이다. 영성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다.
일반 학교로 치자면 MT나 오리엔테이션에 불과하다.
"내가 무슨 영성훈련을 받아봤더니 좋더라" 해서 내가 다시 그 종류의
학교를 차릴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훈련을 반복해서 한다고
하더라도 영성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기가 배운 것 다시
가르쳐 주는 것 밖에 안 된다. 더 나아가서는 성경 지식은 높여줄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영성훈련 창시자는 정말 하나님께 직접 며칠을 통해서든
몇 달을 통해서든 몇 년을 통해서 받은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심혈을
기울여서 연구한 것인지, 아니면 외국에 가서 배워가지고 온 것인지
분별을 잘 했으면 좋겠다. 영성훈련 창시자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말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훈련이라 해도 하나님은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따라하게 하시지 않으신다. 그것은 그 본인에게 해당되는
훈련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우리 부부는 양수리 수양관에 있는 '세계기독교 박람회장'에서
성경 속에 나오는 각종 물품들을 구경하고 어떻게 쓰였던 것인지,
그것은 무엇이었는지 3시간에 걸쳐 강의를 듣고 왔다.
우리가 다르게 알고 있었던 성경 부분을 공부하고 오니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영성이 한 단계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나니 성경지식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참 바람직한 성경공부라고 생각한다.
'졸업장'과 '영성 up'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니고,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영성이 훌륭한 것도 아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신앙이
좋은 것도 아니고, 성경을 통달했다고 영성이 훌륭한 것도 아니다.
'영성'은 무조건 하나님께서 한 단계씩 한 단계씩, 하나님께서
계산하신 고난이든 질병이든,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계획에 의해
그것을 통과한 자들이 영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영성이 높아지는 것은 눈치를 채지 못한다.
아주 진실로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영성의 점수’는 하나님께서 매기시는 것이다.
주의 종이든 성도든 하나님께서 계산하시고 통과시키신다.
주의 종이 성도의 영성을 훈련시키고 보태주고 더해주고
주입시켜주고 계산하고 점수를 매겨서 통과됐다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주의 종들이 자꾸 성도들의 영성의 점수를 높여주느라고
학교를 만들고 학생을 모집한다. 그냥 일반 성경공부를 위한
학교를 만드는 것이 낫다.
신학교를 아무리 4년제 6년제를 나와도 영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성경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고 선배 주의 종들의 학습을
물려 받는 것 뿐이다.
이 땅에서 학습을 통과하는 자들은 '졸업장'을 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훈련을 통과한 자들은 '영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영성' 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관리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관리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능력 행함 아닌 '올바른 사회성'
나 같은 경우는 2011년 8월29일 방언을 받자마자 '기드온 용사 훈련'
이라는 것에 돌입해 버렸다. 그냥 내 인생이 그러려니 하는 믿음까지
주어진 상태로. 가족은 온전히 나만 믿고 따라오는 믿음을 부여받고.
하나님의 직접 임재 가운데 가족하고 전과 다름없는 일상생활을
그대로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영의세계를 경험하면서 6개월에 걸쳐서 군대식 훈련을 받고,
그 훈련이 무엇이었는지 풀어주시는 데만 해도 2~3년이 걸렸다.
지금도 계속 성경을 풀어주시고 계신다.
그래서 내가 어떤 계기로 이 '기드온 용사 훈련' 이라는 것을
간증했다고 치자. 그것으로 끝이어야 한다.
계속 간증 요구가 들어와서 한다면야 누가 머라겠냐 만은,
이 훈련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게 하신 것이라고 당신들도 이런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내가 학교를 차리고 어떤 주의 종들을 섭외하고, 학생들을
모집해가지고 6개월 코스로 '기드온 용사 훈련'을 강행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하겠냐 말이다. 내가 하는 거지.
그런 신비적인 현상으로 신이 정말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이고, 더 나아가서
당신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으신 것은 맞지만 그 신비적인 현상을
따라하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너의 그런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알려주고
따라 하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 일로 "하나님은 정말 계시구나"를 알면 되는 것이다.
(역대하 18:21)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아멘.
그리고 그 신비적인 현상? 정말 하나님께서 '거짓의 영'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면 그 일로 성경을 풀어주신다.
그냥 능력만 행하고 다니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성경대로 사는 것인지 성경을 풀어주시고
올바른 사회성을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께서 "따라하게 하라" 하신 것은 따로 있으시다.
너의 구제와 선행, 착하고 도덕적이고 바르고 정직하고 의롭고,
속과 겉이 같고, 처음과 끝이 같고, 올바른 눈길을 보내고,
올바른 생각을 하고, 올바른 정신 상태와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고,
나의 것도 귀하게 여기고 남의 것도 귀하게 여겨주는 올바른 성품을
갖추고, 구제와 선행이 체질화가 되어 타인들이 그 것을 보고
따라하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은 어떤 능력만 행함이 아닌
'올바른 사회성'이 목적이시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아멘.
표적이나 신비의 현상 성경에 보면 신비현상이 많다. 그 현상 중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관리하시기 위해 급한 상황에서 신비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 있다. 모세를 통해 애굽 나라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은 그저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시기 위해서 하신 일이시다. 하나님은 영의세계에서 말씀하셨지만 모세는 육의세계에서 그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했다. 모세가 "나는 이런 능력이 있다. 보여줄까? 홍해야 갈라져라, 반석에서 물이 나와라, 쓴물이 단물이 되라, 땅이 꺼져서 고라 자손들과 한패거리들은 죽어라" 라고 자기 개인 능력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노예로 고생하는 자기 나라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하실 때 항상 하셨던 일이 귀신을 쫓는 것과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었다. 귀신도 쫓고 나면 질병이 고쳐졌다. 귀신만 쫓아대신 것이 아니라 질병이 고쳐진 것이다. 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그냥 말씀으로 명해서 고치신 적도 있고, 흙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기도 하셨고, 이렇게도 하시고 저렇게도 하셨다. 예수님은 '항상' 병에 고생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항상 그렇지 않으면 능력 발휘 자가 된다. 지금의 주의 종들이나 교주들이나가 ‘항상’ 성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귀신을 쫓거나 병을 고쳐주거나 하는 신비적인 능력을 행하지 않으면 자기 개인 능력 발휘 자가 될 뿐이다. 개인 장기자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누가 누가 센가 잴 수도 있다. 처음에는 불쌍한 마음으로 병 고치는 능력을 행하다가 어느 날 자기 능력을 행하는, 자기 자랑을 할 뿐인 때가 올수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심해야 한다. 어느 날 그 주의 종이나, 그 사람이나, 그 기관이나, 그 단체가 이단으로 갈지 모른다. '회개' 의 신비현상 어느 집회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계속 가래침을 뱉어내는 곳이 있다고 한다. 성경에 보면 간질병 환자의 귀신이 나갈 때 거품을 흘렸다고 해서 가래를 뱉어내면 귀신이 나간다고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귀신이 나갈 때 몸속에 있던 더러운 가래나 거품이나 이물질을 흘릴 수는 있다. 하나님께서 눈물 콧물 흘리는 통회자복을 시키실 때 자기의 죄를 처절하게 회개하는 시간에 더러운 이물질을 토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다시 정상화가 된다. 흙투성이 색깔의 소변을 볼 수도 있다. 그것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피를 쏟는 경우도 있다. 그것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르다. 계속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자연적인 현상이어야 한다. 계속 시키시면 계속, 잠깐 시키시면 잠깐. 그냥 그러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자연적인 현상의 것은 괜찮지만, 누군가의 교육에 의해 그렇게 해야되나보다 해서 인위적으로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단으로 가든 이단이 됐을 것이다. 어떤 현상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것은 나와 상관없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린다. 내가 어떤 목적과 이유도 없이, 누군가 병이 고쳐지거나, 정말 귀신들린 자가 불쌍해서 얼른 정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없고, 그저 신비스러움이 너무 신기하고 또 보고 싶고 또 겪고 싶고, 그 신비로운 느낌을 계속 느껴보고 싶어서 그 현상만을 추구하게 되면 이단으로 빠져버린다. 주의 종이나 성도나 할 것 없이. '목적'이 '상실’된 신비나 표적이나 기적이나 이적이나 기사를 원하는 자는 '이단’으로 빠져버린다.
종교자들 입장에서 서로 이단
"이런 곳이 있는데 이단인가요?" 라는 의문점을 갖는 성도들이 많다.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이단 적인 행위를 하는 곳을 가보지를 않아서
어떤 종류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것이 성경에 나와 있어요"
하면서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은 이단일 확률이 많다.
가래를 뱉어야 한다. 공중에 붕붕 떠야 한다. 벽에 달라 붙어야 한다.
눈을 감고 투시력을 배워야 한다. 드러누워야 한다. 뜨거운 가스렌지에
손을 얹어서 불에 데지 않아야 한다. 금가루를 입어야 한다.
하나님께 보석을 받아야 한다.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해야 한다. 등등.
일반적인 교회는 그저 예배를 드린다. 찬양을 드린다. 기도를 드린다.
봉사를 한다. 구제와 선행을 가르친다. 폐쇄적이 아닌 좋은 사회성을
가르친다. 착하고 바르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속과 겉이 같고 올바른
마음씨를 갖도록 가르친다.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고 성령님을 찾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올바른 예물과 교회 봉사가 아닌 어떤 '행위'와 '현상'을 하라고
주장하면 가차 없이 나와 버려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과의 좋은 관계이다.
부부의 좋은 관계, 가족의 좋은 관계, 친구와 좋은 관계,
친척과 좋은 관계, 교우와 좋은 관계, 타 종파든 불신자든
이웃과 좋은 관계, 나라와 좋은 관계를 원하신다.
목적도 없는 신비적인 현상을 발휘하는 것보다,
'불쌍한 마음'과 '긍휼의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구제'와 '선행'에 뛰어난 것을 좋아하신다.
나쁜 물의·떼돈 착복 '이단'
그리고 이단은 사회에 거대한 나쁜 물의를 일으킨다.
집을 팔고 땅을 팔아 큰돈을 갖다 바쳐라 그래야 구원이
임한다고 한다. 안 갖다 바치면 죽인다고 협박을 하나?
가정보다 교회가 우선이기 때문에 다 팔아서 교회에다
바치고 가정은 쑥대밭이 되어도 괜찮다고 하나?
그런 곳은 그냥 뛰쳐 나와야 하는데 어떻게 세뇌를 시켰는지
나오면 죽는 줄 안다. 두려워 한다. 함정에 빠진 것이다.
문제는 그 함정이나 이 함정이나 하나님께서 빠져나오게
하셔야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단 함정'이나
다른 '함정'들을 '사탄'이 파 놓았는데, 하나님께서 건져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함정' 하나님께서 파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계로 빠지게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용서로 인해 그 함정에서 건져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때도 땅을 팔고 집을 팔고 해서 베드로 앞에 갖다놓았다.
땅 판 값 얼마를 숨기고 거짓말 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 때는 그 모든 재산들을 다 고아와 과부를 돕고 가난한 자와
나눠먹자고 거둔 것이다. 지금의 두레마을이나 그런 것처럼.
안 바치면 이들처럼 죽는다고 협박해도 넘어가지 말라.
지금도 그 때처럼 부자가 큰 돈을 내놓아서 가난한 자가
도움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큰
돈들을 모아 모아 교주나 목사가 착복을 한다면 그것은
이단이라고 보아야 한다.
빨리 그 곳에서 나와야 한다.
이런 곳은 평범한 교회처럼 재정부가 없다.
있어도 친인척이 해먹을 것이다.
그런 곳은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
일반교회
일반 교회는 헌금을 걷기는 하지만 ‘재정부’가 따로 있다.
물론 건축을 하기 위해서 상당한 액수를 걷기는 한다.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면 집을 팔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는 하나님께서 남들이 보고 놀라도록 축복으로
갚아주신다는 간증을 많이 들을 수 있다. 집 팔고 땅 팔아서
교회에 갖다 바쳤는데 아무 축복으로 갚아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니 맘대로 했을 것이다.
이 재정에는 담임 목사도 관여를 많이 안한다.
그리고 목사도 월급을 받는다. 물론 부자는 잘 먹고 잘 살 듯이
부자 교회는 월급이 많을 수 있다. 좋은 집에 살 수도 있고,
좋은 차를 끌고 다닐 수도 있고, 좋은 옷을 입고 살 수도 있고,
좋은 것을 먹고 살 수도 있고, 좋은 곳에 놀러 갈 수도 있다.
가난한 목사는 월급이 적을 수도 있고, 모자랄 수도 있고,
그로 인해 가난할 수도 있다. 놀부와 흥부가 교회에도 있다.
이런 모습들을 보고 일반인들은 ‘사업’ 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쨌든 하나님의 일인지 모르는 불신자들이 ‘사업’ 이라고
했을 때, 그 사업 잘하면 된다.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선행을 베풀면서 잘 살면 된다.
그리고 일반 교회는 그렇게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
물론 주의 종들의 성문란 사건도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거야 일반인들도 아주 보편화된 이야기 이다.
"애인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 "애인 없으면 바보다"
라는 유행어가 돌 정도로 사회가 그렇다.
그렇다고 주의 종들이 그래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 교회는 아주 사회적으로 거대하게 사람들을 죽게 만들고,
가난하게 만들고, 가정이 풍비박산 되게 만드는 거대한 돈 줄기
조직단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 관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주의 종들도 사람이라서 각종 죄를 짓고 살지만
그런 죄는 보통 사람들이 짓고 사는 정도의 죄라는 것이다.
천국 구원 권한
우리 교회에 와야 구원을 받는다. 얼마를 바쳐야 구원을 받는다.
교주는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성 관계를 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 하면서 성 문란을 일으키면 이단이다.
하나님은 도덕적인 분이시고, 부부를 중요하게 여기시고,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부부 사이에 부모가 끼는 것도
자녀가 끼는 것도 불법으로 계산하신다.
그 어떤 대상이라 해도 부부를 갈라 놓는 성 행위를 요구하면 이단이다.
"내가 구원을 받게 해준다"고 하면 무조건 이단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전해주신 것이다.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한 번의 회개로
족하다고 다음부터는 회개를 안 해도 된다고 해서 이단으로 몰린
곳이 있다.
이런 곳이 잘 못 가르쳤다가는 사회의 거대한 물의를 일으킬 수도 있다.
한 번 회개와 한번 예수 영접으로 천국 구원은 따논 당상이라
이 땅에서는 함부로 살아도 되고, 죄를 지어도 되고, 남에게 피해를
끼쳐도 되고, 사람을 죽여도 된다고 가르치면 안 된다.
그렇게 가르치지 않더라도 개인적으로 반성하고 돌이키고 뉘우치고
회개하는 삶이 없어지면 죄를 지어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어지게 된다.
어차피 나는 천국 갈 것이니까. 성품이 그렇게 타락적으로 만들어져서
범죄자가 생길 우려가 심하다. 사회성이 망가지게 된다.
그 한 번 구원 누가 시켜줬는지 모르지만,
천국 가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시고,
육의세계에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매순간 회개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 회개도 우리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심으로 통회하는 자복의 회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통회 자복하는 그런 회개도 못했는데 천국에 간다고 껍적대지 말라.
그런 회개를 했어도 갈지 말지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
'욥'처럼 살면 안 된다
욥이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바르게 살았는지
본인도 본인을 '의인' 이라고 칭한다.
정말 죄가 하나도 없는 올바른 사람인줄 알았다.
하지만 이 때는 그를 죄인이라고 단정지을만한
율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대에 뛰어난
의인이라고 했던 것이다.
(욥기 29장 31장)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만일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문에서 숨어 기다렸다면/ 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엎는 것을 못 본 체 했다면/
만일 나의 양털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입혀서 그의 허리가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다면/ 만일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주먹을 들어 고아를 향해 휘둘렀다면/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 하였던가/ 실상은 그가
죽기를 구하는 말로 그의 생명을 저주하여 내 입이 범죄 하게 하지 아니
하였노라/ 내 장막 사람들은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는가/ 실상은 나그네가 거리에서 자지 아니하도록
나는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노라/ 내가 언제 다른 사람처럼 내 악행을
숨긴 일이 있거나 나의 죄악을 나의 품에 감추었으며/ 만일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출을 먹고 그 소유주가 생명을 잃게 하였다면")
(욥기 32:1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욥'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기계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욥기 1: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기 31:23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
'사랑과 긍휼과 인애'가 없었고
(욥기 2: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기 17:6 "하나님이 나를 백성의 속담
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자기 자랑'과 '자기 영광'으로 취해 있었다고
(욥기 29:20 "내 영광은 내게 새로워지고 내 손에서 내 화살이 끊이지 않았노라")
하나님께 그토록 매를 맞았다.
(욥기 2: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욥기 16:7~16/ 마태복음 24:51/ 에스겔 7:9).
예수를 창조주신으로 믿어야?
그러면 '회개' 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쓰는 말인데, 회개를 한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받고 회개 라는 단어를 모르는 일반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냐?
하나님께서는 일반인들은 뉘우치고 반성하고 돌이키는 것으로
계산하신다.
이 '회개' 라는 것, 뉘우치고 반성하고 돌이키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삶에서 잘 못한 것에 대한 것이다. 미워하고 험담하고 이간질 시키고,
정죄하고, 비판하고, 욕하고, 싸우고, 폭행하고, 죽이고, 하는 것에
대해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라" 하시는 것이다.
그런 회개를 잘했다고 세상 삶의 구원은 받을지라도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구원에 대해서는 무조건 절대적으로 니가 죽어봐야 안다.
이 땅에서는 세상의 삶의 구원을 논해야지 죽어서 천국에 가냐
못가냐를 논하면 안 된다. 그것은 니가 할 몫이 아니라
오직 절대적으로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권세이시다.
아무리 성경에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자들이 구원받는다고
하셨어도 그것은 니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니가 나서서 누군가에게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게 해주고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을 베푸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께 빌려 받은 믿음을 그 사람에게 알려주고 조금
빌려주는 척도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믿음'은 네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네가 했다고 하면 안 된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까지 통 털어도 사람 스스로 하나님을
먼저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 스스로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먼저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도 그랬지만 다들 착각 속에 살고 있다.
너는 그냥 씨를 뿌리고 물주기
아무리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받게 하신다고 하셨어도
그것은 그냥 영의세계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신 것 뿐이지,
사람인 네가 나서서 교회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네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게 해주고 주입시키고 재촉하고
귀에다 대고 속삭여서 천국에 보내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냥 너는 니 할 일만 하면 된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었으면 됐다.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거두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고린도전서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아멘.
니가 씨도 뿌리고 물도 주고 자라게 하고 열매도 거둬서
천국에 몇 명 보냈다고 숫자를 세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통해서 알려주셨고,
믿을 수 있도록 믿음을 주셨던 것 뿐이다.
누군가 왕이 되어야겠기에 누구를 왕으로 뽑으셨던 것과 같다. 너는 그냥 "성경에 그렇게 써있다" 라고 전하면 된다. 너는 그냥 "당신이 믿던지 안 믿던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 라고 전하기만 하면 된다. 전하기 이전에 너의 행실로 보여주면 된다. '사심' 있는 전도 전도한다고 사탕도 주고, 물티슈도 주고, 콩나물도 주고, 호떡도 구워주고, 커피도 주고, 계란과 야쿠르트도 주고, 전도지도 주고, 이것저것을 준다. 줄 때 이것을 받고 누가 올까? 하고 숫자를 세지 말라. 그 전도지 줬다고 다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마땅한 자에게 감동을 주셔서 보내시는 것인데 내가 전도지와 물품을 줬다고 감동을 받아 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너는 주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까지다. 오직 결산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아까워 하지도 말고, 아깝거들랑 아예 하지를 말라. 우리가 몇 개를 줬는데 몇 명이 왔는지 계산하려거든 주지를 말라. 돈만 아깝고 전철이나 땡볕에서 전도한답시고 욕 먹고 한 정성이 아까울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전하기 이전에 너의 행실로 가족에게 친척에게 친구에게 이웃에게 보여주면 된다. 참 착하다, 참 바르다, 참 정직하다, 참 성실하다, 참 책임감이 강하다, 참 도덕적이다, 참 선하다, 구제와 선행이 뛰어나다, 참 본 받을 만하다, 참 하나님을 보는 것 같다고 박수갈채를 받게.
죽어서 천국 가는 조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너의 믿음? 아무 것도 아니다.
누가 성경을 행했다고 자부하는 것인지?
내가 성경 어느 부분을 행했는지 세어보라.
다들 죽은 믿음을 갖고 껍적대고 있다.
하나님의 계산법은 하나를 못 지켰으면 다 못 지킨 것으로
계산되는 것이다. 하나 지켰다고 두 개 지켰다고 떠들지 말자.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아멘.
직접 눈으로 예수를 본 유대인들도 못 믿고 안 믿고 이단이라고
참람죄를 적용시켜서 죽여 버렸는데, 그 사실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현대인이, 이방인이 누가 감히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인지, 그것도 스스로.
유월절과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자와 시간:
AD 33년 4월 3일 오후 3시
(요한복음 19:13~14)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아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과 시간을 정확히 세기 위해
성서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4절에
기록된 유월절 준비기간은 히브리 음력달력의 니산(Nisan)
14일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율법에 의하면 유월절 어린양은 니산 14일에
3시에서 5시 사이에 잡아서, 그날 밤 12시 이전까지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약 율법의 유월절 어린 양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형식을 취하여서, 예루살렘에 니산 10일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니산 14일 십자가에 달리시고 마침내 오후 3시에 돌아가십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희생제사로 드린 최고 제사장은 니산 16일 새벽에
일어나 첫열매의 제사를 드리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니산 16일의
첫 열매를 의미하게 된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자를 처음 연구했던 과학자는
만유인력을 발견했던 영국의 아이작 뉴튼(Isaac Newton)이라고 합니다.
그는 유대 달력의 니산 14일을 근거로해서 히브리 음력과 율리어스
양력 달력을 가지고 계산을 하여, AD 34년 4월23일 금요일로 제시
했었는데, 1991년 영국 왕실 천문학회의 존 프랫(John Pratt)은
뉴튼이 계산상 약간의 실수를 했고, 이를 바로 잡으면 AD 33년이
4월 3일이 된다고 했습니다.
컴퓨터 계산을 통해 1990년 천문학자 브래들리 스케퍼
(Bradley Schaefer)도 동일한 날짜인 33년 4월 3일
금요일로 계산해 냈다고 합니다.
2003년에도 천문학자인 LIviu Mircea 와 Tiberiu Oproiu가
다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시간을 계산했는데, 또한 동일하게 AD 33년 4월 3일 3시로
일치하였습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날은 AD33년 4월 5일 아침이 됩니다.
누가 먼저 기독교를 믿었다는 것인지, 누가 먼저 교회를 갔다는
것인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불법' 으로 계산된다.
죽어서 천국 가는 조건에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고,
내가 얼마를 내야 하고는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얼마나 "내가 했다"는 것을 만들고,
"내가 해야 될 것"을 만들고, 사람의 ‘전통’ 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켜야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하니 ‘올무’만 잔뜩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자기 울타리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살고 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에는 '내가' 라는 것은 없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로 간다.
개가 가든 소가 가든, 개나 소나 다 가든, 개나 소나 다 못가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
혹시 모르겠다. 하나님이 주셔서 믿는 것 말고,
내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원래 스스로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진짜 믿음이겠다.
그 원래 스스로 믿음이 있는 자는
자기 믿음으로 천국 갈 수도 있겠다.
세상 삶에서 구원의 조건
이 땅의 삶에서는 '내가'가 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다" 라고 교육받는다.
(출애굽기 36:1)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그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아멘.
그러면서 뭘 내가 무엇을 했다고 겸손 같은 자랑을 하면서
천국에 가서 나만 큰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신자나 불신자나 평등하게 이 땅에서는 내가 무엇을 하고,
내가 무엇이 되고, 내가 어떻게 하고, 내가 얼마를 내고,
내가 누구를 돕고, 내가 착하게 살고, 내가 바르게 살고,
내가 정의롭고, 내가 정직하고, 내가 성실하고,
내가 속과 겉이 같고, 내가 쓸데없이 입을 떠들지 않고,
내가 긍휼함도 많고, 내가 사랑도 많고 하는 나에게 매겨지는
점수가 중요하다. 그것이 나나 내 가족이 천국 같은 삶을 사냐
지옥 같은 삶을 사냐 지표가 되는 조건들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교회에서 잘 감당해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그 시간만큼은 세상 것을 누리지 않기 때문에 복으로 갚아
주시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세상 것을 누리기도 하고 자기의 올바른 노력으로
복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 재능을 받은 자는 무엇을 받았든지 그것을
잘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닌 마음에 감동으로 온다.
그것이 하고 싶다고 몸이 움직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시키셔서 하는 것은 지겹지가 않다. 권태기도 없다.
이 땅에서 받는 복과 징계
요리를 잘 하는 자들은 식사로, 찬양을 좋아하는 자들은 성가대로,
운전을 잘 하는 자들은 운전으로, 피아노를 잘 치는 자들은 반주로,
손 기술이 좋은 자들은 무엇을 만드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을
잘하는 자들은 교사로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겸손하게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이 땅에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은 죽어서 천국이 아닌 이 땅에서의 삶에서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집만 천국 같은 삶을 살까?
불신자들은 다 지옥 같은 삶을 사나? 아니다.
예수를 믿는 집도 잘못하면 하나님께 매 맞고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잘 하면 복 받고 천국 같은
삶을 살고,
불신자들도 잘 못하면 하나님께 매 맞고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잘 하면 복 받고 천국 같은 삶을 살고
평등하다.
"내가 어떻게 하냐"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영의세계에서 "너는 예수를 믿어라" 라고
하셨다면 그 사람은 교회를 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드리는 생활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 일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는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시간만큼은 세상의 것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떼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편안한 삶을 살면서 가난해도 천국을 느끼면서 살게 될 것이다.
불신자나 신자 중 모든 형편이 비슷한 상황이라면 신자가 조금 더
안정적이고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귀신 쫓는 교회가 이단일까?
귀신을 쫓는다고 이단으로 몰린 교회가 있다.
침례교든 장로교든 이단으로 몰린 교회 교인에게
"그 교회가 왜 이단으로 몰린 것 같냐?" 고 물어보니
"귀신을 쫓는다고 이단이래요" 한다.
정말 귀신을 쫓으면 이단일까?
그러면 '예수도 이단' 이다.
인류 역사상 그렇게 많은 귀신을 쫓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예수라는 청년이 이 땅에서 공생애 동안 하신 일은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한 것 밖에 없다. 구약에는 귀신을
쫓지 않았지만 신약에 들어서서는 귀신을 쫓았다.
(마태복음 8: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아멘.
(마태복음 10: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아멘.
게다가 12제자를 불러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칠 수 있는
권능을 주셨다. 그러면 그 12제자를 지금의 누구랑 비유를
할 것인가가 문제다. "12제자는 '주의 종' 들이다" 이든지
"12제자는 '성도' 들이다" 이든지다.
예수는 하나님이라서 귀신을 쫓아도 되고 주의 종들이나
성도들은 하나님이 아니라서 귀신을 쫓으면 안 되나?
지금은 개나 소나 다 "예수가 하나님이다" 라고 성경에 써
있어서 믿는 것 뿐이지, 그때로 돌아가면 예수는 그냥 사람일
뿐이다. 선지자격.
그러면 그 선지자는 지금의 '주의 종'을 말하는 것일까?
'성도'를 말하는 것일까?
(누가복음 9:8)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아멘.
우리 교회도 귀신 쫓는데?
우리 교회는 성결교단인데 우리 목사님도 귀신을 쫓는다.
물론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쫓고
그러지 않아서 그렇지, 대표기도 시간에 특히 치유기도
시간에 큰 소리로 외치신다.
"질병 귀신들은 떠나갈 지어다" 라고.
그러면 우리는 귀신들이 나갔는지 안 나갔는지는 모르지만
그저 질병이 고침 받으려니 하는 믿음으로 아픈 곳에 손을
대고 "아멘" 하고 기도를 받는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고 나면 목사님 혼자 교회를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성도들이 떨어뜨리고 간 귀신을 쫓으신다고
하신다. 우리 교회는 이단이라는 소문은 없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 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며, 이웃과는 어떻게 살아라 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섬기라고 부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면 되는 것이고, 그나 저들이나 이웃과도 잘 살아야 한다.
하나님 섬김답시고 이웃과 불통하는 것은 불법으로 계산된다.
세포 '딱 이 땅에서의 삶' 사람아! 너는 이 땅에서 제대로 살아라. '사람' 으로서 살 수 있는 길은 딱 이 땅에서다. 죽으면 썩어서 없어져 버리고 더 이상 '사람' 답게 살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고, 계획을 세울 수도 없고, 무슨 일을 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고, 생리현상을 나타낼 수도 없고, 어디를 갈 수도 없고, 사람끼리 만져볼 수도 없다. 내가 내 몸을 만져볼 수도 없다. 이 세포로 형성된 육체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곳은 딱 이 땅에서다. 한 번 주어진 이 땅에서의 삶, 아무리 형벌일지라도 이 땅에서 대충 살고 저 세상에서 잘해보자 하지 말자. 나는 그동안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면서, 사탄에게 넘어간 이 세상의 삶을 계획 있게 짜임새 있게 알뜰 살뜰하게, 알콩 달콩 잘 살아야 하는 것인지, 어짜피 사탄이 쥐고 가는 것이라 아무리 제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해도 사탄과 귀신들의 무차별 공격과 훼방과 함정과 올무가 펼쳐져 있고 함부로 지옥에도 던져버리는 권세가 있다면 이 땅에서는 발버둥 쳐도 소용없으니, 세상의 삶은 대충 살고 '예수님이 하나님' 이라는 것만 잘 믿고 교회만 잘 다니다 천국 가서 잘 살아야 하는 것인지가 늘 궁금했다.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그런 것은 잘 모르겠더라. (전도서 9: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아멘. 사람은 이 땅에서 죽음이라는 형벌을 맞게 되어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창세기 때 아담과 하와의 육체에게 선포하신 형벌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 이라는 단어를 무서워한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스올' 이라는 단어는 '죽음' 이라는 단어이다. 그 죽음 자체가 지옥이든 아니든 그것은 각자 죽어보면 알 것이다. '스올(hell)'은 영의세계에서 말씀하시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고, '죽음(death)' 이라는 것은 육의세계에서의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영의세계와 육의세계를 동시에 말씀하시고 계시다. 영의세계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것이고 육의세계는 사람이 보는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무엘하 24:1 / 역대상 21:1) (민수기 16:30)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죽음)'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아멘. (사무엘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육의세계),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영의세계)" 아멘. (욥기 17:13~14) "내가 '스올(영의세계)'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 놓으매, '무덤(육의세계)'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아멘. 십자가? 십자가? 그건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주권이시다. 네가 십자가를 믿던 말던 그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고, 네가 십자가의 용서를 믿는다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니다. 네가 십자가를 믿던 말던, 네가 예수를 믿던 말던, 네가 하나님을 믿던 말던, 네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말던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대로 이시다. 사람들의 ‘믿음’과 ‘행위’로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한 푼어치도 없다. 오직 하나님아버지께서 뜻대로 하신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되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전통으로 섬겨야 된다고 떠들고 싸우지 말고, 성경대로 잘 섬기고, 사람을 내 몸과 같이 귀히 여기면서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잘난 척 하지 말고, 자랑하지도 말고 도와주면서 사랑하면서 협동하면서 잘 살아라. 이 땅에서도 이기적이고 파를 나누고 내편 쟤편 해가면서 흑백으로 나눠져서 나는 천국 가야 하고, 쟤는 지옥 가야 한다고 떠들고 있으면서 ‘사랑’ 이라는 것은 눈꼽 만큼도 보이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천국에 간다고 떠들지 말자. 사랑이라는 것이 광범위해서 그렇지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 같이 지내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아! 예수는 니가 알기도 전에, 믿기도 전에 2천년 전에 아예 전 인류의 죄 값을 하나님아버지께 지불하시고 대신 죽어주셔 버렸다. 그러니 그 십자가? 네 것이 아니다. 그 피? 네 것이 아니다. 그 죽음? 네 것이 아니다. 그 용서? 네 것이 아니다. 그냥 하나님아버지 것이다. 이 땅에서도 제대로 못 살면서 무조건 천국은 따논당상 이라고 떠들지 말자.
불법을 행한 자
(히브리서 10: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아멘.
불신자든 신자든 이 땅에서 살면서 스스로 짓는 죄들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살지 못하면 ‘불법’으로 계산되는
것이 있다.
불신자나 신자나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불법' 에 걸려있는데
유독 기독교인들만 자기네는 불법자가 아니라고 외친다.
그것도 '불법' 이다. 개나 소나 다 '불법자'인 것이다.
남편이 머리다 라는 것을 어기면 ‘불법’, 부부사랑 사이에
그 무엇이 틈타게 허락하면 ‘불법’,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 ‘불법’,
효도하지 않는 것 ‘불법’,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을 내 것처럼
사용해도 ‘불법’,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 ‘불법’,
하나님의 성경의 법에 어긋나면 ‘불법’ 이다.
성경은 이 땅에서의 법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죽어서 가는
영의세계까지 적용시키려고 하는 것도 ‘불법’,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시고 쫓으라고 하시는데도 불복종 하는 것도 ‘불법’,
그 권세가 자기 것인 줄 아는 것도 ‘불법’.
선한 싸움을 잘 싸우는 것
우리는 늘 듣는다. "성령 받아라" "능력 받아라"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라"
"예수님처럼 살아라" 라는 설교는 듣는데 성령을 받아서 무엇을 할 것인지,
능력을 받아서 무엇을 할 것인지,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서 어떻게 살 것인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무엇인지를 모른다.
무슨 물위를 걷고, 바다를 가르고, 불에 손을 넣어도 데지 않고,
공중으로 날라 다니고, 말빨 만 쎄지고, 금가루가 날라 와야 하고,
보석을 손에 쥐어야 하고, 쓰러져야 하고, 가래를 뱉어야 하고,
귀신을 쫓으면 막 쫓겨나가야 하나?
병자가 고쳐지는 것도 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서 불모지로 선교하러 가라고 하면 좋아 하려나?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서 순교하라고 하면 좋아하려나?
내가 성령 받고, 능력 받고,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 예수님처럼 산다고
하면서 착하고 바르고 도덕적이고 정직하고 성실하지 않으면, 속과 겉이
같지 않으면, 눈길과 느낌 조차 올바르지 않고, 말도 올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아멘.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어떻게 하는지를 모른다.
그냥 불신자들과 "너는 무조건 지옥 갈 것이고, 나는 무조건 천국 갈 것"
이라고 싸우라고 하는 것인지, 전도하다가 먹히지 않으면 울그락 불그락
싸우라고 하는 것인지 잘 모른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라는 것"은 이 땅에서 지켜야 할 법도를 지키면서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면서 제대로 살으라는 것이다. 부모에겐 어떻게 바르게
대하고, 친구에게 어떻게 바르게 대하고, 직장에선 어떻게 바르게 대하고,
학교에선 어떻게 바르게 대하고, 사회에선 어떻게 바르게 대하고, 나라에겐
어떻게 바르게 대하고를 배운 대로 깨달은 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착하고 바르고 도덕적이고 성실하고 구제와 선행을 베풀면서 사는 것이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귀찮고 싫은 생각이 들 때 이런 이기적인
나와 싸워서 나를 이기라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8:18~19)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아멘.
'교만' 이라는 옵션
내게 능력이 나타날 때 '교만' 이라는 것도 같이 온다.
성경말씀을 통달하게 될 때 교만도 같이 온다.
내가 잘났을 때 교만도 같이 온다.
내가 부자가 됐을 때 교만도 같이 온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오를 때 교만도 같이 온다.
내가 봉사 할 때 교만도 같이 온다.
'교만'은 옵션이다.
처음에는 겸손하게 하려고 하다가도 자꾸 '교만'을 생각하지 않고,
내게 있는 교만의 수치를 체크하고 지내지 않고 지나게 되면 어느 날
능력 보다 교만이 위에 있게 된다.
모든 것 위에 교만이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교만의 능력 휘두르다 ‘불법자야’ 라는 소리를 듣는다.
‘불법’의 종류는 무수히 많고 다양하다.
꼭 귀신을 쫓냐 안 쫓냐 만 불법이 아니다.
(마태복음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아멘.
(마태복음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아멘.
'귀신'이 무엇인지나 알자
문제는 능력의 남용과 오용이다.
주의 종들은 귀신들을 쫓아라. 하지만 귀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쫓아야 한다. ‘귀신’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무슨 죄든 ‘죄’가
있는데 그 ‘죄’의 종류가 무엇인지 서로 다를지라도 그 ‘죄’
자체인데, 사람의 눈으로 영의세계의 나의 죄를 볼 때 ‘귀신’
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무엇이든 살아 움직인다.
어느 교회는 귀신은 불신자가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이고,
신자는 죽어서 천국에 갔기 때문에 귀신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귀신’은 불신자 영도 아니고 성도 영도 아니고, 조상도 아니고,
그저 나의 ‘죄’ 자체일 뿐이다. 그것이 사람의 모습일 수도 있고
조상의 모습일 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죄’ 라는 ‘귀신’은 그 나라 사람들의 모습일 뿐이다.
한국은 한국인으로서의 귀신 모습(달걀귀신, 처녀귀신, 몽달귀신,
도깨비), 중국은 중국인으로서의 귀신 모습(강시),
일본은 일본인으로서의 귀신 모습(갓파), 서양은 서양대로의
귀신 모습(드라큘라, 프랑캔슈타인) 일 뿐이다.
그리고 그 ‘죄’ 자체인 ‘귀신’이 나를 때리는 것이다.
내가 매를 주주 하는 것이고, 내가 매를 자초하는 것이고,
내가 매를 버는 것이다.
(사무엘하 16:8)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
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아멘.
(역대하 25:19) "어찌하여 화를 자초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아멘.
긍휼과 사랑의 마음
그러면 ‘주의 종’들은 왜 쫓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교회에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웠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9:35) "너는 내가 네게 한 모든 명령대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같이 하여 이레 동안 위임식을 행하되" 아멘.
예배의 집례자이면서, 설교자 이면서 교회 관리자이다.
예수님께서 12제자에게 권한을 주신 것처럼 주셨다.
주의 종일지라도 겁이 많거나 능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해서
쫓지 못하는 주의 종들도 있고, 성격이 박력 있고 패기가
넘치고 겁이 없고 한 카리스마 해서 귀신을 쫓는
주의 종들도 있다.
하지만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귀신을 쫓는 것은
‘불법’으로 계산된다. 정말 그 귀신들린 자는 ‘죄’ 라는 것이
차서 드러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다 똑 같이 꼭 그렇게만
나타내시는 것은 아니시다. 그 사람의 죄 값과 형편에 따라
다르시다.
어찌돼서 귀신이 드러났건 간에 그를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으면 정말 좋겠다는 긍휼의
마음과 사랑의 마음이 넘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 때려잡는다고 그 사람을 때려잡을 수도 있다.
'귀신'은 나의 '죄'의 형상
죄 값(귀신)이 가득차서 질병으로 올 수도 있고, 사고가 날 수도
있고, 일이 망해버릴 수도 있고 등 여러 가지인데, 정말 귀신으로
드러나는 것은 ‘회개’ 하라고 알려주시는 것이다.
물론 다 회개해야 하지만 귀신으로 드러나지 않고 질병으로 와버리고
사고로 와버리고 죽음으로 와버리고 하면 잘 모를 수도 있다.
성도라 할지라도 어려움이 왔을 때 회개하기 보다는
하나님 원망부터 하기도 한다.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내게 ‘귀신’의 존재가 남들이 알 수 있도록 드러나거들랑 빨리
‘회개’할 것을 찾아야 한다. 물론 잘 모르고 ‘주의 종’에게 기도를
받으러 가도 되지만 일순간 일수도 있다. 또 재발한다.
회개해야 한다. 그런데 이 회개라는 것은 교회 한번 빠졌네
두 번 빠졌네 라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냐”가 더 크다.
남편과 아내에게 어떻게 했냐?, 부모에게 어떻게 했냐?,
가족에게 어떻게 했냐?, 회사 상전들에게 어떻게 했냐?,
부하 직원들에게 어떻게 했냐?, 친구들에게 어떻게 했냐?,
이웃에게 어떻게 했냐?, 누구와 원수를 맺었냐?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가슴에 깊이 새겼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를 못 하겠다 정도이냐?
한이 너무 많고 상처가 너무 커서 평생 씻어지지를
않는다 정도이냐? 내 몸에게 어떻게 했냐?,
나라에 어떻게 했냐? 교회에 어떻게 했냐?
주의 종에게 어떻게 했냐?
주의 종은 성도에게 어떻게 했냐?
음식물을 함부로 버렸냐 낭비 했냐 등
잘못된 사회성의 죄가 크다.
'귀신' 함부로 쫓다가…
어떤 눈길을 보냈냐? 어떤 생각을 품었냐? 어떤 마음을 가졌냐?
어떤 말로 비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했냐? 속과 겉이 다른 ‘아닌 척’
‘잘난 척’ ‘그런 척’ ‘안 그런 척’ ‘착한 척’ ‘겸손한 척’ 했냐가 더 크다.
이런 것을 제대로 못한 것이 다 불법으로 걸린다.
교회에서 주의 종들이 귀신을 쫓아줘도 되지만 자꾸 그래버릇 하면
'회개'할 생각은 안하고 무조건 기도 받고 쫓기만 하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죄’ 라는 자체가 ‘귀신’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매’이다. 그 ‘매’를 하나님께서 쥐고 계시는데 아무리
위임장을 받은 주의 종들일지라도 자꾸 하나님의 매를 쫓기만
하는 것은 잘 못될 수도 있다.
아무리 위임장을 받았어도 귀신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이리 저리
말도 걸어보고 잘난 척하면서 깐죽거리는 것도 잘 못된 것이다.
그냥 예수이름으로 쫓던지 회개시키던지 해야 한다.
그 귀신? 하나님의 ‘매’이다.
그러니 ‘회개’를 잘 하도록, 반성하고 뉘우치고 돌이키고 다시는
그 죄를 반복적으로 짓지 않도록 잘 가르치는 것이 더 낫다.
잘 못하면 예수님께 “이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
라는 꾸중을 그 주의 종들이 들을 수도 있다.
귀신 갖고 놀지 말라
그러면 나중에 죽어서 영의세계에 가서 혼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 보다는 하나님께서 영의세계에서 "그것은 불법이다" 라고
계산하시면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시는 것이다.
그 주의 종의 주변들이 시끄러워진다.
주의 종들이나 성도들이나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성경의 법에 어긋나는
불법을 행하면 매를 맞는 경우도 있지만 불법으로 대응하시는 경우도
있으시다.
귀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귀신 쫓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깐죽거리고
말도 시키고 대들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 정말 그 사람을 무서워 하는
귀신처럼 대응하게도 하신다.
루시퍼 사탄이 있다고 알고 대항하면 루시퍼 사탄이 있는 것처럼,
악마가 함부로 공격하는 것처럼 알고 있으면 그대로,
사탄이나 마귀가 무조건 방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면
그대로 대응하시는 경우도 있으시다.
하나님은 돌에게 명하셔서 하나님을 찬양하게도 하시고,
돌들에게 명하셔서 소리 지르게도 하신다.
하물며 창조주이시면서 영의세계의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귀신을 사용 못하실까보냐.
(누가복음 19: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아멘.
반성하고 뉘우치고 돌이키라
게다가 ‘죄’ ‘귀신’ 이라는 것을 성도나 일반인들이 쫓으면 안 된다.
자기의 죄 값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매를 내가 감히 "귀신아 물러가라"
라고 하는 것은 "내 죄야 물러가라" 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매 막대기야 물러가라" 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본인이 더 혼난다.
자녀가 사고 나서 장애자가 되는 경우도 본다.
죽기도 한다. 좋은 주의 종에게 잘 배워야 한다.
'회개' 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사전에는 "신앙생활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요건의 하나.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하여 죄인임을
반성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뜻을 세워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는
일을 이른다" 라고 되어 있다.
'회개' 라는 말이 기독교적이고 단어가 어렵다고 생각해서 그렇지
사실은 반성하고 뉘우치고 돌이키고 다시는 그 죄를 반복적으로
짖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뜻이다.
반성한다는 것은 ‘생각’으로 한다는 것이고,
뉘우치는 것은 ‘마음’으로 한다는 것이고,
돌이킨다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 까지다.
(전도서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회개)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아멘. 신비적인 일만 쫓아도 형통한 날에는 그냥 기뻐하면 되는 것이지만, 고난이 왔을 때는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조금은 알 수가 있다. 과거에도 어느 때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는지, 어느 때에 고난이 있었는지, 그때 어떻게 했더니 고난에서 건져졌다든지 나의 인생을 돌아보라고 하신다. 그러면 고난 속에서도 소망이 생긴다. 지금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께서 설마 지금 죽이시겠냐 죽이시려면 그 때 그 시절 굶어야 할 만큼 가난할 때 죽이셨겠지. 지금은 그래도 살만한데 무언가 잘못해서 고난이 와서 그런 것이지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한다. 하나님은 인생의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는데, 내가 내 앞일이든 남의 앞일이든 많이 아는 척을 해도 이단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내가 나의 앞일을 많이 알고 싶어 해도 이단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저 하나님을 믿던 믿지 않던, 내가 태어난 곳에서, 내게 맡겨진 환경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면서,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나의 예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도와주면서, 정직하게 바르게 성실하게 살면 그 앞 길을 하나님께서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나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미리 알려고 해도 거짓을 알려주실 수도 있기 때문에 자꾸 능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그것도 불법이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청지기?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청지기’ 라고 한다 정말일까?.
'청지기' 라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라고 한다 정말일까?.
'청지기' 라는 것은 내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잘 관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말일까?.
(갈라디아서 4: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아멘.
자녀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아버지의 재산을 쓸 수가 있다.
청지기는 주인의 허락을 받고 관리를 할 수가 있다.
지금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인지,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하는 것인지 아님 둘 다 라는 것인지.
아님 둘 다 아니라는 것인지.
이 하나님의 자녀와 청지기라는 개념은 불신자나 신자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자꾸 기독교인들의 것이라고 해서 문제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내가 죽는 날)까지 이 세상의
삶(후견인)과 청지기(관리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무신론자는 그냥 세상의 삶을 사는 것이고, 기독교인은 교회의 삶이
옵션이고, 불교인은 절의 삶이 옵션이고, 천주교인은 성당의 삶이
옵션이고, 이단이든 삼단이든 자기가 하나님의 어떤 함정에 빠뜨림을
당한 채 사는 지 모르지만 그냥 사는 것이다.
물에 빠진 이 내가 건진다고 껍적댄다고 건져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굴 건졌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꺼내주시기 위해서
너를 쓰신 것 뿐이다.
롯을 재앙에서 꺼내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쓰신 것처럼. 니가 자랑할 일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니가 했다고 떠벌이고 다니면 '자랑 죄'로 계산된다.
신께 믿음을 빌려 받은 것
하나님께서 믿음도 선물로 주시고 구원도 선물로 주시고 물질도
선물로 주셨다. 이것이 육의세계에서 보자면 과거에는 유대인들에게,
지금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믿음을 빌려주신 것이고,
물질도 빌려주신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불신자든 신자든 누구든지에게 빌려주신 것 뿐이다.
이 땅에서 누가 지진 나게 못사는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돈
100억원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빌려줬다고 치자.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언젠가 청구할 때는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무지하게 그 분이 고마운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고마운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쓰면서 지내다가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니까 그 돈이 내 돈 같다.
원래 내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많이 떵떵거리고 누구를 빌려주거나 구제를 하거나 해도
내 것 가지고 의기양양 해가면서 자랑해 가면서 떠벌이고 원래
부자였던 것처럼 살게 된다.
그 꼴이 소문이 나서 원래 100억원 빌려줬던 분에게 들어가게 되어
그 분이 마음이 상했다면 그 돈을 다시 달라고 청구하게 된다.
그러면 그는 꼼짝없이 그 돈을 갚아야만 한다.
이 땅의 법이야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냥 가져가 버리신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누가복음 16:1~9) "어떤 부자(하나님)에게 청지기(사람)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 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아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인 줄도 모르는 채,
내 것인 양 '불법' 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인 것이다.
우리가 땅 따먹기 게임을 한다고 치자. 운동장에서 하든 동네 길에서
하든 어디서든 그 곳이 그 게임을 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다.
주인이 있다. 나라든 동네 사람이든.
(욥기 41: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아멘.
그런데 이 '불의한 청지기'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것을 다 자기 마음대로
사치하면서 낭비를 하고 있다. 비싼 보석을 달고 끼고, 명품을 사고, 비싼
것을 먹고 함부로 버리고, 술 담배로, 각종 외식으로, 각종 여행으로,
내가 무언가 남을 위해 써도 잘난 척 하면서 자랑하는 마음으로 함부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혼내주시려고 "청지기 직무를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죽는 것인지 아플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 그 불의한 청지기인
우리들이 "내가 할 일을 알았다" 하면서 영적으로 깨닫고. 죽을 때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나, 하늘에 상급을 쌓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믿는
자든 안 믿는 자에게 '구제'를 하면서 '선행'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져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구제와 선행'
조차도 우리가 '내 것' 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지혜롭다고 칭찬해 주시지만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쓰는
'불의한 청지기'인 것이다.
우리는 어짜피 '하나님의 것'을 공짜로 쓰기 때문에 '불의한 청지기'
들인데, 그 하나님의 것을 세상 적으로 낭비하고 사치하는데 쓰지 않고,
남을 돕고 남의 짐을 져주는데 쓰면 똑 같은 불의한 청지기 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처소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보면 내가 더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며
내가 더 잘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의세계에서 볼 때는 '선행'과 '구제' 자체가 그 불의한 청지기를
변론한다. "그 사람은 선한 일을 했습니다" 라고.
하나님아버지께서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인 양 살아가는 자들아!
그럴지라도 세상 적으로 살지 말고 교인들을 돌아보아 도울 것을 돕고 일으켜
세울 것을 세우고, 혹 안 믿는 사람들이라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가면서
살아라" 라고 하시는 말씀이시다.
네 것은 없다 '無'
딱 지금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세계가 그런 것이다.
이 불의한 청지기라는 것은 신자나 무신론자나 다 똑 같다.
하나님을 자꾸 기독교인만의 하나님 이라고 주장해서 그렇지
하나님은 전 인류적인 하나님 이시다. 무신론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빌려 주시지 않으신 것 뿐이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빌려주셨던 것이다.
그 이스라엘 민족 조차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께 빌려 받은 것이다.
어떻게 해서 생긴지도 모르는 아메바가 분열해서 고등동물로 진화해서
사람이 됐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원래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고 주장하면 안 된다
.
그 빌려 받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 제 것이라고 떵떵거리고 살다가 언젠가
"그 믿음은 네 것이 아니니 돌려 주거라" 하시면 그냥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가져가 버리시고 나는 믿음의
'無'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네 믿음의 행위로 천국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떵떵거렸던
것은 말짱 헛거인 것이다. 그 '믿음의 주인'은 따로 있는 것이다.
너는 그냥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신 것과, 행위로
나타낼 수 있도록 봉사의 직분을 주신 것을 잘 하면서 세상의
삶에서도 올바르게 살고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고 박수를 받을
만큼 살아서 네 삶의 진보로 천국 같은 삶을 누리라는 것이다.
그 삶의 결과는 너만 배부르게 살아라가 아니라
구제와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때가 차서 네가 죽는 날 이 땅에서의 후견인의 삶과
청지기의 삶은 끝나고 하나님께서 계시는 영의세계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 후로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 것이냐고 알게 해 달라"고 조르니까 이단 삼단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하나님의 주권일 뿐이다.
궁금해도 할 수 없는 것은 니가 죽는 길 밖에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너는 그냥 이 땅에서 ‘불법’ 이라고 걸려서 감옥에 가지 말고,
누구랑 원수 맺지 말고, 싸우지 말고, 남의 것 뺒지 말고, 욕먹지 말고,
손가락질 당하지 말고, 수치를 당하지 말고 잘 살아라.
아! 믿음이 내 것이 아니구나
기독교인들아! 너희들은 "하나님은 내 것이다. 예수님도 내 것이다.
교회도 내 것이다. 성경도 내 것이다. 주의 종 자리도 내 것이다.
믿음도 내 것이다. 천국도 내 것이다. 회개도 내 것이다.
율법도 내 것이다. 봉사도 내 것이다. 행위도 내 것이다.
달란트도 내 것이다. 돈 도 내 것이다. 사업도 내 것이다.
직장도 내 것이다. 학벌도 내 것이다. 능력과 실력도 내 것이다.
미모도 내 것이다" 자랑하지 말라.
(욥기 41: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아멘.
'청지기' 라는 것은 무늬만이 아니다.
실전이다. 네 것은 한 개도 없다. '無'
아! 나도 지금까지 기독교적인 믿음이 내 것인 줄 알았다.
아무리 우리는 청지기라고, 청지기는 자기 것이 없고 주인의
것이라고 그토록 설교를 들었건만, 이제야 그 뜻을 알겠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니구나.
내가 기독교적인 은혜가 있었던 것이 아니구나.
나의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구나.
그냥 내 것은 없구나.
교회를 오래 다녀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갔었다.
저들은 왜 믿음이 없을까? 그렇게 교회를 몇 십년 다녔는데.
나는 그래도 믿음이 좋아서 지금까지 몇 십년 동안 예배도
열심히 드렸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데. 이상하다 그랬다.
아!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을 만나라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나에게 필요해서 잠깐 빌려주신 것이구나.
그러니까 그렇게 어느 때는 은혜가 충만했다가 어느 때는
은혜가 식었다가. 어느 때는 믿음이 충만했다가, 어느 때는
시험 들었다가 그랬구나.
그것이 내가 내 기분에 따라 그러는 것인 줄 알았다니
이제 보니 하나님께서 주셨다가 거두셨다가 주셨다가
거두셨다가 하셨구나.
하나님 앞에 내 것은 아무 것도 없구나.
정말 아무 것도 없구나.
비밀 숫자 타령 하는 곳
구원의 숫자는 사람은 모른다. 다 구원 받는지 다 구원 못 받는지,
누구만 구원 받는지 아무도 모른다.
예수님이 강림하시고 재림하신다고 하시는 인류가 속량이 되는
그 때의 날짜 숫자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휴거 날짜 숫자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7년 환란 날짜 숫자 그것도 모른다.
14만4천명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그것도 모른다. 12지파 24장로
그런 것도 우리는 모른다. 천성이 몇 평인지 그것도 모른다.
성경에 써 있어도 목숨이 살아 있는 우리 사람들은 모른다.
(욥기 24:1)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아멘.
(마가복음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아멘.
죽어서 영의세계로 들어가야 알 수 있는 그런 종류들은
개나 소나 다 모른다. 하나님께서 비밀에 부치신 그런 것을
알려고 파헤치다 이단으로 빠진다.
그것도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시다.
그런 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그 시간에 가난한 이웃에게 파 한 뿌
리나 주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처럼 그 파 뿌리 붙들고 천국
갈 수 있다. 발로 털어버리지나 말아라.
구원의 숫자가 있는데 선착순이기 때문에 빨리 빨리 티켓을 사야
한다고 외치는 자도 이단이다. 우리 재단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기관에서 티켓 판매하고 있다고 외치는 곳도 이단이다.
그 티켓 하나님께 전권으로 부여 받은 것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 인류적이다.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뜻일 뿐이다.
몇 명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티켓을 사는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돈 많은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한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교주하고 성관계를
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천주교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기독교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전 인류적인 것이다.
"어떻게 기독교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
"그러면 개나 소나 다 천국 간다는 거야 머야?" 라고
따질지 모르겠지만 그 따지는 너를 하나님께서
참 기독교인으로 계산하시지 않으시면 말짱 헛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먼저 선택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먼저 선택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만 천국 구원시키시려고 그랬는데 하나님의 생각이
바뀌셔서 이제는 기독교인들만 천국 구원시키시려고 그러신다고
억지부리지 말자. 이스라엘이 아니면 기독교인도 아니다.
영적 선민 영적 선민 하지 말고 그냥 '선민'과
'이방인' 과의 관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인의 뜻대로 행하라
그리고 누가 참된 기독교인인지 전혀 모르겠다.
기독교 40년 경력 있는 내 눈에는 아무도 없다.
그저 "하나님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할 뿐이다.
하나님을 먼저 믿을 수 있는 자격을 주신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자랑도 말고 자부하지도 말고
교만하지도 말라.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알려주신 자들이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셨다.
오히려 알지 못하는 종들은 적게 맞을 것이라고 하셨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먼저 많이 받았다.
하나님께서 많이 요구하실 것이다.
(누가복음 12:47~48)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할 것이니라"
아멘.
그 요구는 저 세상에서가 아닌 이 땅에서의 현실에서다.
내가 죽고 나면 성경의 법은 해당되지 않는다.
'성경의 법'에서 어긋나는 것은 '이 땅'에서 다 계산된다.
'성경의 법'은 '이 땅의 법'이다. 영의세계의 법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이나 지옥까지 성경의 법을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법은 한국에서만 적용된다.
미국의 법은 미국에서만 적용된다.
북한의 법은 북한에서만 적용된다.
더 '모범적' 이어야
내가 기독교 경력 40년에 이제 와서 깨달은 것은
우리만 하나님 앞에 최고구, 우리만 하나님께 칭찬 받을 것이고,
우리만 천국에 갈 것이고, 우리만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고,
우리만 예쁨을 받아야 하고, 우리만 이 땅에서도 잘 되어야 하고,
기독교 사장은 흥하고 무신론 사장은 망하고, 무신론자들보다
우리가 더 잘나게 해주시고, 더 높게 해주시고, 더 대우받도록
해주시고, 더 흥하도록 해주시고,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썩어도
준치여야 하는 줄 알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대우하시는 것인 줄 알았다.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기독교인)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더 잘 되는
것인 줄 알았다.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신자나
불신자나 똑 같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나를 더 정확하게 계산하시고,
성경대로 더 정산하신다. 성도나 불신자나 똑 같은 죄를 저질렀을
때 성도가 더 맞는다는 것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무신론자보다 높아지지는 않는다. 아무 이유도 없이
무신론자보다 대우를 받지는 않는다. 먼저 무신론자들보다 하나님을
알게 하셨고, 성경대로 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인지 교회를 통해 교육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무신론자들보다 더 성경적이어야 하고, 더 하나님
같아야 하고, 더 착해야 하고, 더 성실해야 하고, 더 정직해야 하고,
더 정의로워야 하고, 더 도덕적이어야 하고, 더 속과 겉이 같아야
하고, 더 실력이 있어야 하고, 더 모범적이어야 한다.
더 많이 찾으시고 더 많이 요구
그렇지 않고 기독교인이나 무신론인이나 모든 것이 거의 똑 같거나
비슷할 경우 두 명 중에 한 명이 정리해고가 되어야 한다면 기독교인이
해고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모든 면에 불신자 보다 더 월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하나님께서 많이 찾으신다.
많이 요구하신다는 말씀의 계산법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않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께 더 많이 맞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맞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남보다 일이 더 안 된다는 것이다. 일이 엉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직도에서, 도덕면에서, 성실면에서, 착함에서, 실력에서,
최선면에서, 그 기관을 사랑하고 애착을 갖고 있는 마음에서 기독교인에게
더 많이 요구하시고 찾으시기 때문에 만약 같은 실력에서 누구를 잘라야
할 경우 기독교인이 더 떨어지게 되어 있다.
조그만한 같은 실수에서 더 욕을 먹게 되어 있다.
기독교인이 사장으로 있는 사람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속이 좁다.
겉으로는 많이 넓은 것 같고 자기는 참 관대하다고 속이 넓다고 하나님을
믿어서 그렇다고 떠벌여서 그런 줄 알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은 참 뭔지
모르게 속이 좁다는 평을 듣는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무신론자들이
나은 것 같다. 술로 털어버려서 그런가?
기독교인 사장이 직원들이 딱히 주일날 일을 해야 되는 상황이
아닌데도 구태여 주일날 일을 시키려는 심보는 무엇일까?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를 말든지.
불신자라도 주일날에는 교회를 가라고 할 판국인데.
병아리→장닭
새 신자가 전도되어서 교회를 오면 병아리 같고, 얌전하고, 순수하다.
그런데 조금씩 세월이 지나면 어린아이가 커서 말도 많아지고 자기 주장도
생기는 것처럼, 그 성도도 그 수준쯤 된다. 그러다 집사도 받고 권사도
받고 장로도 받고 뭔가 머리가 더 커지면 ‘장닭’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 그 ‘장닭’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 들어오는 병아리들을
쫀다고 한다. 자기가 시키는 것을 안 해도 건방지다고 쪼고, 자기가 시
키지 않는 것을 솔선수범해서 해도 건방지다고 쪼고, 병아리 주재에 뭔가
나대는 것 같으면 건방지다고 얌전히 있으라고 쪼고,
그래서 ‘장닭’ 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지키려고 한다고 한다.
나는 이제까지 성도들만 '병아리'에서 '장닭'이 되는 것인 줄 알았다.
주의 종들은 어떨까?
주의 종들도 처음에는 병아리부터 시작을 한다.
뭔가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이것 저것을 하면서 애를 쓴다.
성도를 사랑도 하려고 하고, 교회를 부흥시켜 보려고 기도를
드리면서 열정을 가지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 점점 성도가 늘고 교회도 어느 정도 부흥되고
하면 병아리 주의 종도 중닭 정도 되고 장닭도 된다. 주의 종들도
'장닭'이 된다는 것을 생각 못했다.
주의 종은 '병아리 대장' 이었던 것이고,
'중닭의 대장' 이었던 것이고,
'장닭의 대장' 이었던 것이다.
성도나 주의 종이나 서로 병아리일 때는 성도 병아리가
주의 종 병아리를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순종하고 따른다.
그러다 성도가 장닭이 되고 주의 종도 장닭이 되면 이제는
서로 쪼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몰라지나보다.
누가 잘못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누가 죽느냐를 보면 알 수가 있다.
'거대한 장닭'이
성도만 질이 변하고 주의 종은 계속 순수한 줄 알았다.
계속 병아리 같은 줄 알았다.
성도들의 그 어떤 종류의 '대장' 이라는 것을 생각 못했다.
주의 종들도 질이 변한다는 것을 생각 못했다.
너무 '거대한 장닭'이 되다보니 이단 삼단도 나오게 된다.
성경에는 악인은 수명이 짧아지고, 악인이 잘 되는 것은
죄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단
삼단이 잘 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죄인이
잘 되는 것은 또 무엇일까?
하나님의 계산과 사람의 계산은 다른가?
(전도서 8:14)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아멘.
주의 종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보다 더 찾으신다.
먼저 더 많이 알려주셨기 때문에. 주의 종들도 많이 맞고 살고
있는 것을 보지만(가정도 시끄럽고, 자녀도 안 되고),
그것은 그냥 사탄의 함부로 무차별 공격인줄 알았고,
의로운 고난인줄 알았지 하나님께서 때리시는 것이라고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주인(하나님)의 뜻은 ‘참 주의 종’이 되어야 하고,
‘참 성도’가 되어야 하고, ‘참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불신자보다 생각에서 마음에서 씀씀이에서 말에서
인격에서 성품에서 실력에서 더 나아야 하고, 입술의 열매로가
아닌 실질적으로 생활에서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
겉치레가 아닌 진심에서.
겉치레는 느끼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계산으로.
참 기독교인만 '엘리시움'에 가라
영화 '엘리시움'을 보면서 기독교인들만 천국에 가야한다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돈이 아주 많은 자들만이 '엘리시움' 이라는 천국 같은 행성에
갈 수 있는 티켓을 살 수가 있고, 그 곳에서 살 수가 있다.
그 천국 시민권을 얻는 것이다.
지구에 남아있는 가난한 자들은 그들 인생의 꿈이 '엘리시움'에
갈 수 있는 티켓을 구하는 것이다. 그 '엘리시움'은 무슨 질병이든
고칠 수가 있고 성형도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자동으로 고칠 수
있는 지상낙원이다.
그 곳은 떼부자 엘리트만 갈 수 있다.
그 곳에 죽음을 앞둔 자녀의 희귀질병을 고치기 위해
불법으로 입국을 해도 무차별하게 죽여버리던지,
강제적으로 지구에 보내버린다.
지구에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만이 있다.
그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의술과 기계가 지구에는 없다.
그런데 한 남자의 희생을 통해 '엘리시움' 세계가
'재부팅' 되는 난리가 벌어진다.
'엘리시움'이 재부팅 되는 순간 지구의 모든 가난한 자나
병든 자나 어느 나라 사람이든 다 '엘리시움 시민'이 된다.
그리고 각종 신 의료기계들이 지구에 속속 도착을 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삶을 살게 된다.
아! 기독교인들만이 그 '엘리시움' 이라는 천국에
가야 한다고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주장하고 있었구나.
그 어느 누구도 못 간다고 주장하고 있었구나.
나머지는 지옥에 가던지 말던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있었구나.
자기가 참 기독교인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나보다.
자기는 죄가 하나도 없는 기독교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나보다.
(전도서 7:16; 20)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아멘.
(요한복음 8:7 하반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아멘.
교회에 다니면 꼭 천국에 갈까?
교회를 오는 것은 누가 전도한다고, 누구의 글을 읽고, 전도지를 읽고,
전도물품을 받았다고 오는 것은 아니다. 인사치례로 올수도 있지만,
정식으로 교회를 오게 되고 정착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영의세계에서 하나님께서 "너는 교회에 가거라"
"가서 하나님을 섬기거라" 명령을 받는 자들이 다니는 것이다.
내가 하는 줄 알면 오산이다.
교회에 오면 병이 고쳐진다고, 교회에 오면 복을 받는다고,
교회에 오면 하던 일도 잘되고, 사업도 잘되고, 교회에 오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난리다. 물론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해라, 그러면 이렇게 해 주시겠다”
“저렇게 해라 그러면 저렇게 해 주시겠다” “이렇게 하지 마라
그러면 혼난다” 이시다.
아무리 복 받는다에 밑줄을 긋고 달달달 외워도 소용이 없다.
행하라는 말씀이시다.
그런데 정작 교회로 와보니 나의 어떤 죄의법 계산으로 인지
하나님의 고난 속에 들어가 버렸다. 그것이 나의 인생이려니
하고 침묵 속에 버텨오도록 하셔서 지금까지 오게 됐다.
교회에 들어와 보니 사모님에게 시험 들고 목사님에게 시험 들고
성도들끼리 시험 들고, 누구에게 시험 들고 맨 시험덩어리였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믿음이 없어서 시험 든다”고 교육 받는다.
나에게 시시때때로 이만큼 그만큼 저만큼 고만큼 믿음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내가 어떤 믿음이 없어서 시험 드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주의 종들은 자기들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했는데 갸가 시험에
들었는지 전혀 모른다. 교인 숫자에 배부른 주의 종일수록 더
전혀 모르고 해결해 줄 생각도 없다.
무조건 네가 믿음이 없어서란다.
이제 와서 깨닫고 보니 전부 ‘사랑’이 없어서 시험 드는 것이었다.
사랑이 없이 대하고, 사랑이 없이 말하고, 사랑이 없는 눈길을 보내고,
사랑이 없이 칭찬하고, 사랑이 없이 접대용 멘트를 사용하고,
사랑이 없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척하니 시험에 빠진다.
사랑이 있는 척은 한다. 웃으면서 말로만 사랑한다고는 한다.
예배 끝에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사랑합니다” 라고는 한다.
“당신이 내 옆에 있어서 행복합니다” 라는 인사는 한다.
얼마나 가식적인지 느끼해서 따라 하지를 못하겠다.
진실로 사랑은 없다. 그래서 다들 시험에 빠지곤 한다.
성경에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던 마리아는 시험에 들지 않고,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분주했던 마르다는 시험에 빠지는 것을 본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하는 예배의식 보다, 월례회의니 기관보고서니 연중행사니
총회니 사무총회니 기관 봉사에 치우치는지 그 봉사하다가 다들 시험에
빠지고 만다.
교회는 봉사하러 가는 것이지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 같지가 않다.
그것도 봉사를 열심히 하다가 시험 들어서든 바빠서든 안하면 삐지기도
하고 천대를 받는다.
아예 처음부터 봉사를 하지 않고 교만한 자세로 대예배만 드리는 자들은
그래도 대우를 받는다. 그들은 교회에 나와 주는 것만도 감사하다.
그런데 봉사를 안 하는 성도들이 더 잘사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돼지를 잘 먹여서 키웠다가 잡아먹으려고 한다나 어짼다나 그런다.
이 땅에서 잘 살면 뭐하냐 천국에 가서 잘 살아야지 한다.
착각도 참 잘하고 살고들 있었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삶은 이 땅에서다. 이 땅에서 제대로 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도 주시기 때문에
잘 살게 되어 있다. 가난한 것이 의인의 고난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주의 종이나 성도들이나 그나마 병아리 때는 그래도 사랑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장닭들이 되고 나면 서로 쪼기 바쁘고, 서로 경계하기 바쁘고,
서로 시샘하기 바쁘고, 서로 누가 누가 더 잘돼있나 재기 바쁘고,
누가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나 재기 바쁘고, 누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았는지 재기 바쁘다.
사랑? 가슴에 손들을 얹고 생각을 해보자.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은
고사하고 인간적인 사랑이라도 있는지 좀 계산 좀 해보고 살자.
나는 철저한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인들의 잘못을 숨기고 싶지 않다.
나의 잘못을 다 고백하지는 못하지만 죄가 없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글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잘못을 드러내게 하신다.
교회 다니다 천국 가기는커녕 저절로 나오는 불평불만과 비판과
판단과 정죄 때문에 더 일이 엉키고, 건강이나 일들이 안돼 시끄럽고,
가난의 연속이고, 일찍 죽을 것 같고, 죽으면 지옥에 갈 것 같다.
시험 들어서 죽을 것 같아도 중직이라고 교회를 옮기지도 못하고,
옮기거나 떠나면 하나님께 혼나고 지옥에 갈 것 같아서 어쩌지도
못하는 모습을 본다.
그렇게 속 끓이고 끙끙 앓다가 결국에는 육체가 죽임을 당하기도 하더라.
주의 종은 그런다. “그 사람이 죽은 것이 내 책임이 아니죠?” 라고
어느 성도에게 물어본다.
나도 똑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왜 천국에 지들만
가야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된다. 정말 대책이 안 선다.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는 영의세계에서 "너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거라, 그리고 너에게는 이런 지혜와 명철과 능력을 주었으니
그것을 실행하면서 살아라" 라고 명령하셔놓고 그 일을 이 땅에서
한 그 사람만 천국에 보내시는 것인지 모르겠다.
(출애굽기 36:1)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그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아멘.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가 전 인류적인지 의문스럽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일한지도 의문스럽다.
햇빛이나 비나 공기나 창조물들은 불신자나 신자나 동일하게
쓰도록 공평하게 허락하셔놓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왜 불공평하게
하셨는지 모르겠다.
누구에게는 믿음을 빌려주시고, 누구에게는 빌려주시지 않으셔놓고
빌려주신 자들만 천국에 들어가라신다.
하나님은 정말 불공평하시고 편벽이 심하시고,
주최 측 농간이 심하시고, 공의로우시지 않으시다.
하나님께서 '전도서 9장 1절~12절' 말씀은
잘못 써 놓으셨나보다.
죽은 영들 검열 중이신 예수!
예수께서 천국 문 앞에서 죽어서 하나님 앞에 온
사람들의 영들을 검열 하신다.
"너희들은 타종파들과 무신론자들이구나.
너희들은 거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이 선민이라고 하는 아이들부터 좀 보자꾸나"
"내가 너의 죄를 위해 네가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할 때에
그 모진 매를 맞고 온 물과 피를 다 흘리고 십자가에 매달려서
그 뜨거운 태양 아래서 말려죽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너희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히브리서 7: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아멘.
"이 아이들은 나의 십자가 보혈도 필요 없다고 하는구나"
"나의 피로 모든 인간들의 죄 값을 하나님아버지께 단 번에 지불을
다했다고 하는데도, 지들이 무슨 믿음과 회개와 목회와 봉사와 무슨
행위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저리 난리들을 치는구나"
"나의 십자가 보혈은 일단 창고에 넣어 두거라"
(욥기 41: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아멘.
"너희들이 세상에서 살면서, 목회를 잘했으면 잘 한대로,
못했으면 못 한대로, 예배를 잘 드렸으면 잘 드린 대로,
못 드렸으면 못 드린 대로, 봉사를 잘했으면 잘 한대로,
못했으면 못 한 대로, 하나님을 안 믿었어도 착하고 정직하고
바르게 살았으면 산대로, 나쁘게 살았으면 산대로, 하나님께
좋게 쓰임 받았으면 받은 대로, 나쁘게 쓰임 받았으면 받은 대로,
잘한 것에 대해 성경의 법대로 내가 축복을 주었으며,
그 축복은 자녀에게까지 흘러갔으며,
잘 못한 것에 대해서도 성경의 법대로 내가 징계를 다 했단다.
그 징계도 자녀에게까지 흘러간 것도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더 계산하자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죽음 이후에 들어오게 되는 영의세계에서는 ‘성경의 법’이 해당이
되지를 않는데 무슨 법으로 계산을 하자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도 계산해 보자고 하니 해보자꾸나"
예를 들어 내가 노래를 아주 전능하게 잘한다고 치자,
그리고 남에게도 실력을 빌려줄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있다.
누군가 노래는 지진 나게 못하는데 노래를 너무 너무 잘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를 대신해서 노래를 할 수 있도록 내가 그 사람에게 노래를
잘 할 수 있는 목소리와 실력을 빌려줬다.
그래서 그 사람은 평생을 노래하면서 칭찬도 들으면서 노래를 잘하는
것을 누리면서 즐기면서 그 일로 먹고 사는 것도 해결하고 살았다.
물론 나를 고마워하고 칭찬도 하고 나를 위한 노래도 불러줬다.
그런데 나중에 늙어서 노래를 못할 즈음에 나한테 와서는 그렇게 평생
노래를 해줬으니까 ‘대가’를 달란다. 큰 집도 사주고, 돈도 더 달랜다.
그동안 먹고 산건 어쩌고 수고의 대가를 또 달란다.
어이없다.
신께서 주신 능력으로 노래도 하고 스포츠도 하고 미술도 하고
종교지도자들도 하고, 종교생활도 하고, 작곡도 하고, 지휘도 하고,
대통령도 하고, 의사도 하고, 교사도 하고, 발명도 하고, 뛰어나든
뛰어나지 않든, 넉넉하게 먹고 살았든 겨우 먹고 살았든,
주의 뜻대로 살고 먹고 했다.
그런데 죽어서 주 앞에 가서 또 달라는 것과 같다.
"그래 너는 나를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이냐?
어디 검사 좀 해보자꾸나 이 아이들의 행위들을 좀 살펴보자꾸나"
"너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것인데 무슨 사탄이 함부로 공격한다고
그리 쫓고 난리를 쳤느냐? 그 덕분에 내가 너희들이 말하는 사탄이
되었구나"
"너는 니가 죄를 지어놓고 그 대가로 귀신이 형성이 됐는데
그것을 쫓는다고 난리를 치다가 오히려 더 많이 맞고 살았구나"
"음! 너희들은 무슨 교단을 그렇게 많이 만들었느냐?
게다가 한 교단마다 파도 많구나. 내가 총회장이라고 세워놓으면
하나님께서 실수하셨다고 하고 네가 나가서 총회장이 되었구나"
"장로교나 침례교나 성결교나 순복음교나 감리교나 그리스도교나
누가 진짜 믿음의 소유자들이냐? 나도 모르겠구나"
이 아이의 목회 장부 좀 갖고 와봐라, 음! 너는 진실 된 사랑으로
하지를 않았구나. 너는 처음에는 사랑을 가지고 하더니 교인 수에
배부르니까 왕권을 누렸구나. 설교 자리다툼도 일삼았구나"
"너는 목회를 사업처럼 제법 했구나"
"너는 목회를 사업처럼이라도 제대로 못 했구나"
"너는 성도들에게 많은 시험거리를 안겨주었구나.
'성도' 들을 하나의 '사랑스런 영' 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교인' 숫자에 불과했구나.
너의 목회 복은 한쪽으로 채워지면 한 쪽으로 새는 복이었구나.
그 덕분에 너는 재정으로 쩔쩔매는 고난을 받았을 것이다"
"너는 교회가 크게 부흥되는 것은 사탄이 맹목적으로 주는
것이라고 여기고 가난한 목회가 진정한 목회라고 그 자리에
안주를 하고 네가 무엇이 잘 못되어 그렇게 가난한 목회를
했는지 분별할 생각을 못 했구나"
"너는 행정과 체계를 잘 갖추고, 열정을 가지고, 웃는 얼굴로
목회 한 만큼 교인 수를 누렸고 그 덕으로 재정의 풍부함도
누렸단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서 너에게 주는 너의 '분깃' 이었다"
"너희들이 한 영혼이라도 구원시켜야 한다고 들레고 다니면서
구원시킨 것이 아니다. 내가 너는 하나님을 섬기라고, 너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도 된다고 다 명령하신 것이다"
"너희들이 구제를 했으면 구제에 의한 복을 받았고, 선행을 했으면
선행에 의한 복을 다 받았단다. 너희들은 각각 너희들에게 맡겨진
너희들의 일을 하면서 너희들의 복을 누리고 세상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너희들이 잘 깨닫지 못하고 살았을 뿐이다"
너희들을 어디로 보내야 하나? 어느 녀석부터 잘라서
천국으로 보내고 어느 녀석부터 지옥으로 보내야 하나?
"이 아이의 교적부를 좀 갖고 와봐라. 음! 너는 무슨 교적부가
그렇게 많으냐?” “어디 너는, 음! 교적부가 한 개구나"
"너는 내가 세운 주의 종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주의 종으로 세우신 것은 실수하신 것이라고 많이
나를 정죄했구나"
"너는 주의 종과 많이 싸우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주의 종을
쫓아내고 교회 우두머리 격 노릇을 많이 했구나"
"그래 너는 성가대를 했느냐? 어디 한번 찬송가를 몇 곡이나
외우는지 해 보거라. 한곡도 못 외우냐? 그래놓고 무슨 성가대를
했다고 하는 것이냐?" "
그래 너는 한 곡 이상 외우느냐? 그래도 못 미치는데
한 곡이라도 외웠으니 다행이구나"
"너는 무슨 봉사를 그렇게 많이 했느냐? 아하! 내가 빌려준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했구나. 그런데 무슨 니가 했다고 그렇게 자랑을
일삼느냐? 이 녀석은 어디로 보내야 하나?"
"그래 너는 별로 봉사도 한 것도 없고,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이나
십계명을 외워 보거라, 몇 십년 동안 다녔다는데 그래 그것도 못
외웠느냐?" "너는 세 개 중에 한 개는 외웠는냐?"
"어느 녀석은 머리가 좋고 어느 녀석은 머리가 나쁘구나"
"너는 무슨 예배를 대예배만 드렸느냐 그것도 드문드문"
"너는 그래도 오후예배까지 드렸느냐? 어디로 보내야 하나?"
"아! 쟤는 수요예배도 드리고 철야도 드리고 구역예배도
드렸다는구나. 중간에 보내야 하나?"
"쟤는 그래도 새벽예배까지 드렸다는구나. 천국으로 보낼까?"
"가만있어보자, 어느 녀석부터 잘라서 천국에 들여보내고
어느 녀석부터 지옥으로 들여보내야 하나? '사람' 으로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데,
일일이 다 체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다들 '저울'에 달아보자. 음! 다들 똑 같구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포 한 개의 무게 밖에 안 되는구나"
(시편 62: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 보다 가벼우리로다" 아멘.
(다니엘 5:27)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아멘.
"그러면… 다 천국에 들어가야 하나?
다 지옥에 쳐 넣어야 하나?
고민 되는구나" 하신다.
그렇게 종교적인 율법의 행위나 삶의 선한행위를
죽어서 가는 천국구원의 티켓으로 따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허상일 뿐이다.
아니면 하늘 창고에 쳐 박혀서 명함도 못 내밀고 있던지.
(갈라디아서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아멘.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사람들의 뜻이 아니다.
특히 특정 종교의 뜻도 아니다.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창조주 뜻대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주께서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두 길을 놓으셨고,
주의 명령으로 사람들은 지구에 갇혀 살게 됐고,
주의 명령으로 지구에서 살다가 죽어야 본체의
삶을 알게 하셨다.
예수로 오셔서 그토록 두들겨 맞고 십자가에
죽으심도 오직 창조주의 뜻일 뿐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든, 구원이든, 천지창조든
신적인 부분에서는 사람들의 믿음과 칭찬과
율법적인 종교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창조주의 마음이실 뿐이다.
'선한 행위' '악한 행위'를 따지는 것은
내가 이 땅에서 욥처럼 심한 매를 맞고 뉘우치고
다시 복을 받을 것이냐의 문제지 천국 구원과의
문제가 아니다.
이 땅에서 고통스럽게 살 것이냐
주께서 주시는 복으로 행복하게 살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
종교의 행위는 신의 존재가 실재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일 뿐 복과 징계의 대상은 아니다.
천국구원의 대상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속과 겉이 다른 회칠한 무덤의 죄는
혼날 수 있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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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읽고갑니다.
감사 감사 마음에 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