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부곡동네 모습 (5)
1956년도에 박사학위를 받으셨으니, 내가 10살이 되던 해에 있었던 일이 되었네요. 부곡국민학교 2학년 2학기에 대구로 전학을 갔으니, 고향엔 9살까지도 지내고 있었으니 기억에도 나련만 이 집 마당만 밟았던 기억은 납니다. 나보다 2살이 더 많으니 형이라 해야겠지만 그 집 형이 시우(時雨)라는 사람과 우연히 여러번 만나고 보면 인사하고 지내는 처지입니다. 그 형수도 아는 사람이지요.
왼쪽에 비닐을 2골 씌어놓은 터가 그 집 마당이 되겠네요.
2011년만 하더라도 이렇게 마당과 은행나무, 뒤에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지요. 그게 마당을 휘젓고 있습니다. 담장도 흙과 돌을 쌓아서 예쁘게 만들었고, 위에는 기왓장을 얹어서 꽤 기품있게 정자를 지어서 어릴 적에 마루에 올라가 문짝도 천정에 올려 걸어두던 방안을 뛰고 놀았던 생각이 스물스물 기어나옵니다.
마루 밑에 있는 물동이가 아직도 있으려나? 시간이 나면 뒤로 올라가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네요. 마루 밑에 돌 기둥이 제법 크게 보입니다. 아깝다.
이젠 아지매가 1년 앞서 가시고, 그렇게 내외 정이 많았던 탓인지 그 뒤를 이어 다음 해에 아제가 돌아가셨지요. 윗대는 독립운동을 하셨던 류낭개 할배가 계셨지요.
왼쪽에 보이는 향나무는 지금은 팔려가서 없는 나무이지요. 이 나무를 뿌리를 감싸고 전기줄 위로 옮겨갈 때에는 보기 드문 광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향나무 앞 양철기와집은 이낭개댁이 살았던 집인데, 요즈음은 어찌 되셨는지 소식도 알아볼 생각도 안하고 있어 참 나도 무심한 사람이지요. 그 어머니가 내 친구이고 같은 나이이니 어릴 때는 왕래가 참 많았던 사람들인데, 그 친구가 고향에 와도 나몰래 왔다 가버리는 이유도 모르고 지냅니다.
내가 참 인덕이 없는 사람인가 봅니다.
제가 꽃을 키우는 것을 좋아해서 꽃키우는 취미가 같은 외지 사람은 잘도 우리집에 놀러도 오지만, 또 그 사람은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는 사람인가 봅니다. 아마도 있을 때에는 이웃을 좀 얕잡아 보았는지 평이 순탄치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과 어울리는 나도 그 축에 들어가는 것이 되어지나요?
이씨(李氏)집이 지금은 류씨(柳氏)가 사는 집이 되어 버렸네요.
이 날은 5월달에 해당하니 아마도 경로회에서 무슨 행사를 하였던 모양입니다. 이 집 저 집 어른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행사 후의 뒷풀이 모습 같아 보입니다.
여기에 있는 담들이 바로 새마을운동으로 마을길도 넓히고에 이 시멘트 담장이 생기게 되었지요. 그게 1970년대가 되네요.
새마을노래를 들으실려면 위의 음악을 정지시키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버지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니, 불효막심한 놈입니다. 살아계실 때에는 아버지께 온갖 투정을 부리며, 못난 짓거리를 했더랬는데, 요즈음은 투정을 부릴 상대가 없으니 영 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계실 때에는 그렇게 아버지를 무서워 하면서도 머리가 굵어지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 다정하게 부자가 오손도손 야그하는 재미도 보덜 못하고, 손도 쓸 사이도 없이 작별하게 되었답니다.
언제 철이 들레? 공무원 하셨던 아버지에 공무원 했던 아들이 다정하게 함께 앉아본 적이 없다는 게 얼마나 불쌍한 일인지 모를 겁니다. 여러분은 그리 안 겪어보셨으니까?
동네 어른들도 "저늠아가 우리를 뭐한데 찍노?"라고 하시는 듯한데, 동네 어른들이야 뭐 공무원질 하는 아이니, 나무랄 일은 아니고 좀 좋게 보는 아이니 이상하단 생각만 하겠지요.
한 때는 그래도 진보면의 진성중학교 교편을 잡았던 사람인데다 또 덕망있는 부포어른 맏손자이니 좀 모자라도 좋게 봐 주시는 거지요.
참 세상에 그 떵떵거리든 집안이 이리도 손 쓸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