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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조 安逸戶長公 정회문
완담지
2006/07/24 20:00 |
始祖 安逸戶長公 鄭繪文
儒理王朝(西紀三十二 壬辰)에 賜姓된 신라 육부의 姓貫이 모두 경주로 비롯하여 영남에 가장 많지만 정씨가 동래로 처음 著籍한(저적) 때는 언제인지 알 수 없으며 공의 선계사적과 생졸년대와 배위와 묘소가 모두 미상이다.
우리 족보가 1585년(선조18년 乙酉)에 비롯되지만 8년 지난 1592년 임진란후로 전함이 없으며 을유로부터 71년지난 1655(고종6년 乙未)년에 이루어진 乙未譜에서는 공을 시조로 하고 一世라 했었는데 을미보가 간행된지 얼마 안되어 (1656-1659사이) 文安公 沆(항)의 誌石이 나타났고 거기에 甫尹公(보윤공)之遠까지만 系代가 밝혀졌으므로 이것을 微信하여 丙申譜부터는 공을 시조로 하고 보윤공을 일세로 해서 이제 까지 한결같이 병신보를 따르며 1928년 발견된 僕射公(복사공) 목(穆)의 墓誌에도 또한 보윤공까지만 系代되었다.
호장은 鄕職의 가장 윗자리이고 麗史選擧志(려사선거지) 鄕職考(향직고)에는 여러대에 걸쳐 優美(우미)한 가풍을 지닌 자손에게는 처음에 兵史나 倉史부터 임명하여 호장에 이르게 하고 가풍이 不及한 집안은
公須 나 藥店 등 까지만을 시켰으니 이로써 미루어 系代 이전에 착적이 오래되고 또한 가풍이 뿌리 깊었음 을 알게 한다.
金石集에서는 923(新羅 景哀王 4년)11월에 있은 甄萱(견훤)의 난에 아버님이 殉節하고 가족이 害를입어 孑孑(혈혈)한 어린이가 거리를 방황하다가 이듬해 928(경순왕 일년 戊子)년에 당으로 가던 신라 使臣의 도움으로 동래에서 자라나고 만년에 안일호장이 되었으니 안일호장의 제도가 마련된 998(고려 목종 1년 戊戌)년 3월 까지를 헤아린다면 공은 신라 경명왕 무렵에 탄생하시어 팔십여세의 수를 누렸을 것이라 고하고 이어 古史撮要(고사촬요)와 姓譜들을 인용하여 “어린공의 형제가 당으로 가던 신라 시신에게 구제되어 동래에서 자라나 형은 동래의 호장이 되고 아우는 延日로 옮겨가 그곳 호장이 되었다” 고 했으며 동래촌지에서는 공이 서울(경주)태생인데 어려서 난리를 만나 이곳 동래로 와서 호장으로 팔십여세를 누리고 안일호장에 이르렀으며 동래정씨 시조가 되었고 그후손이 번창하여 온 나라 안에 퍼졌다고 했다.
출처:완담지 1992년 완담종중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