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us, as Caesar, AR Denarius. Rome, AD 74
Titus, as Caesar, AR Denarius. Rome, AD 74
Obv: T CAESAR IMP VESP - laureate head right
Rev: PONTIF TR P COS III - Titus seated right on curule chair, holding sceptre with right hand and olive branch in left.
Diameter:18.1~18.9mm Weight: 3.51g RIC (Vespasian) 692; BMCRE (Vespasian) 150; RSC 161a.
2018.5.5 Roma Numismatics
티투스(재위: AD 79~81) -로마 제국의 10대 황제이자 두 번째 세습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 황제로서 풀네임은 티투
스 플라비우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Titus Flavius Caesar Vespasianus Augustus).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장
남이자 도미티아누스의 친형. 그의 재위기간 2년 동안에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콜로세움)이 완공되었고, 로마시대 대참사 중 하나인
베수비오 화산 폭발(폼페이 매몰) 이 있었다
39년에 로마에서 기사계급출신의 직업군인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와 페렌티움 출신의 기사의 딸이었던 도미틸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고난 이름(본명)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였으며, 형제로는 아우 도미티아누
스, 여자형제로는 도미틸라가 있다.
티투스는 팔라티누스 황궁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후계자들과 함께 학문을 배웠다. 특히 그는 동갑내기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친아
들 브리타니쿠스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였던 브리타니쿠스가 네로에 의해 독살되었을 때, 티투스는 바로 옆에서 그의
독을 시험하느라 오랫동안 마루에 엎드려 있었다. 이 일을 티투스의 인생에서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었고, 후에 그가 황제가 되자, 티
투스는 젊은 나이에 죽은 옛 친구 브리타니쿠스의 상을 건립해서 죽은 친구를 기렸다.
성년식 이후, 61년부터 63년에 걸쳐 병사장(트리브누스 미리튬)으로 취임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브리타니아,게르마니아에
서 군인장교로 복무했다. 64년에 로마로 돌아와 아레키나 테르트라와 결혼했으나 곧 사별하고 다시 65년에 마르키아 프루니라와 재혼
했다. 새 아내였던 마르키아 프루니라는 생가가 제위 후계자였던 네로의 반대 세력에 속했기에 그는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고 거기
다 그 해 원로원 의원 피소가 주도한 네로 암살 의혹 사건으로 반강제적으로 아내와 이혼해야 했다. 이들 사이에서는 딸 율리아가 있
었는데 티투스는 마르키아 프라니라와 강제적으로 이혼한 이후에는 평생토록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
티투스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 이스라엘 전쟁일 것이다. 네로 시대에 이스라엘의 민족주의 정당인 열심당(질
럿, 혁명당)에서 일으킨 이 전쟁은 가장 큰 반란 사건 중 하나였다. 이때 아버지였던 베스파시아누스가 67년 유대 전쟁을 진압하는 지
휘관으로 임명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될 당시 형제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티투스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티투스의 직책은 중무장
보병 지휘관이었으며, 재무관으로서도 병영에서 활동했다.
68년, 네로의 자살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끝나고 새로이 갈바가 황제에 오르자, 이스라엘인들과의 전쟁을 지휘 중인 아버
지의 대리인으로 갈바에 대한 충성서약을 위해 로마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오토가 황제가 되었고, 다시 비텔리우스가 오토
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오토가 자살하고 비텔리우스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티투스는 로마제국 서방지역이 혼란에 빠져 있
으므로 상황을 봐서 충성여부를 판단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귀환한다. 그리고 다시 군단장으로 복귀한다. 같은
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시리아 속주 총독 무키아누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자, 티투스 역시 아버지를 지지했고, 무키아누스가
비텔리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고 난뒤, 아버지마저 로마로 진군하자 유대 전쟁 총사령관으로 새로이 취임해서 유대 전쟁을
총지휘하게 된다.
70년에는 유대 전쟁의 최고 지휘자로서 끝끝내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결사항쟁하던 열심당의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예루살렘 성전까
지 통곡의 벽 부분만 남기고 부숴버렸다
73년, 여전히 항복하지 않는 열심당 최후의 보루, 마사다 요새를 제외한 팔레스타인의 유대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티투스는 항복한
이스라엘인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지만, 항복하지 않다가 잡힌 포로들에 대해서는 하루에 약 500명씩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공격을 몹시 주저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다. 이 한 가지 사건으로 유대교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고,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교 사이에
는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인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다 같이
이 곳에서 예배를 보았지만, 성전이 파괴된 뒤에는 둘 사이를 묶어 줄 가시적 공통 제도가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71년 개선하여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성대한 유대 전쟁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의 개선식 모습은 로마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티투
스 개선문에 남아 있다. 이후, 그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개인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후, 아버지와 공동 통치를 하
며 호민관 권한을 부여받았고, 2년 뒤인 73년에는 감찰관을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몇 차례에 걸쳐서 집정관을 지냈다. 이처럼 티투
스는 제위 계승자이자 아버지의 러닝 메이트로 정치가 겸 행정가로의 역량을 키워 나갔다
이때 일화도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양모 가공업자들에게 매긴 오줌세에 관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양모는 특유의 냄새를 제거하
기 위해 암모니아로 세척하는데, 지금이야 정제 암모니아를 쓰지만 당시에는 암모니아가 포함된 오줌을 사용했다. 로마의 양모 가공
업자들은 공공화장실의 오줌을 공짜로 이용했고, 이런 양모업자들의 무임승차에 대해 베스파시아누스는 과감하게 오줌세를 거뒀다.
이에 양모업자들은 크게 반발했고, 티투스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아버지에게 이를 따졌는데 이때 베스파시아누스가 은화 한 줌을
아들 코앞에 쥐어 주며 "자 맡아봐라. 오줌 냄새가 나느냐?" 라고 촌철살인급의 대답을 하며 해프닝으로 반발을 수습했다고 한다
79년 6월 24일에 황제로 취임했다. 이때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인들이 티투스가 "제2의 네로가 될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이유는 그가
유대전쟁을 치르던 과정에서 만난 이스라엘 공주 베레니케에게 홀딱 빠져 그녀와 정식 결혼하려고 한 일화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로마의 속주였던 이스라엘의 공주가 누구였는가 애매모호하지만 헤롯 왕가 계열의 여인으로 추측된다. 시민들의 반발을 우려했다고
하지만 티투스의 즉위는 아무 소란도, 걱정도 없었다.
티투스가 베레니케와의 사랑을 포기했다는 소식은 로마 시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로마인들은 티투스가 성격이 소탈한데다가 국가
를 위해 사랑까지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를 열렬히 사랑해줬다. 하지만 티투스는 죽기 전까지 오래 살지도 못했지만 끝내 결혼
하지 않았다.
더해서 검투사 시합을 빈번히 개최하거나 선제 베스파시아누스를 야유하는 희극이 상연되어도 어떤 심한 책망을 하지 않았기에, 인기
는 높아졌다. 이는 시민과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았다. 티투스는 원로원과의 관계도 양호했다. 실제로 티투스는 짦은 제위기간이긴 했
지만 어떤 죄를 묻더라도 '반역죄'로서는 처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이를 죽기 전까지 지켰다. 더해서 티투스는 자신이 아무 것도
좋은 것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주변인들에게 '하루를 잃어버렸다'고 한탄까지 했다.
이처럼 티투스는 선정으로 국민, 원로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지만, 온갖 대사건들이 일어나는 바람에 재해대책을 세우고 사태를 수습
하느라 쉴 수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폼페이의 참사가 그의 재위 2달만에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하나만 터진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연
달아 줄줄이 대 사건들이었다.
그의 치세 중 가장 큰 대사건으로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인한 폼페이시(市)의 매몰 등이 있었다. 이때 나폴리 근교의 폼
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 등의 도시들도 멸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산에 초토화되었다. 따라서 그는 베수비오 화산에 피해
를 입은 캄파니아 지방에 지원을 보냈으며 신속한 대처로 위기를 수습했다.
80년에는 로마에서 대화재, 페스트의 만연이라는 불행한 사건 등이 잇달았다. 4일 간 벌어진 대화재는 티투스에게 로마 재건 및 리모
델링을 하도록 했다. 더군다나 페스트까지 돌아서 질병퇴치 및 구제사업에 진력해야만 했다. 따라서 티투스는 황제로서 여가를 즐길
시간도 없이 재해대책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직접 재해현장에 나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진두지휘했
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로마 시민들은 그를 '인류의 총아'로 경모했다.
같은 해, 오늘날 우리에게 콜로세움으로 더 잘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건설 사업을 마무리되었다. 따라서 티투스는 준공 기념
으로 100일이 넘도록 축하행사를 벌였다.
하지만 열성적으로 재해지 구호에 힘쓰던 티투스는 축하행사 와중에도 재해대책에 몰두해야만 했고, 치세 2년 만에 열병으로 쓰려져
죽고 말았다(81년 9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