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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아사쿠사1 - 우에노공원에서 지하철로 아사쿠사역에 내려 센소지 절에 가다!
2019년 4월 12일 도쿄역 에서 야마노테선 山手線(산수선)으로 우에노역 에 내려 우에노공원
을 찾아 405년에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와 오진(応神)왕
태자의 스승을 맡아 일본에서 한문 을 가르친 왕인 박사의 비 (博士王仁碑) 에 참배 합니다.
그러고는 옆에 자리한 메이지유신 의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降盛像)의 동상을
거쳐 시노바즈노이케 不忍の池(불인노지) 연못을 지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를
모시는 도쇼구(東照宮 동조궁) 를 구경하고는 국립 미술관 마당에서 조각상 을 봅니다.
JR 야마노테 선을 타고 우에노역에 내려서 나오면....... 우에노 문화지역 으로 연결되는데
개찰구를 나서기 전 부터 우에노 지역에서 열리는 전람회 표를 파는 공동 매표소 를
볼수 있으니 줄 서는 시간을 줄이라는 배려로 운영되고 있을 뿐, 할인을 해 주지는 않습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음악관, 미술관, 박물관 등..... 교육 목적인 근대적 공간 부터 만나게
되지만, 시장을 끼고 있는 서쪽 출구 로 들어가면 근대 이전의 우에노 모습을 만날수
있는데 공동 매표소 는 문화 기관들에서 주관하는 전시 십여개를 동시에 알리고 있습니다.
신앙과 행락의 장소 로서 오랜 역사를 가졌던 우에노 에 근대적 개념의 문화시설이 들어선
것은 일본이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일 과 관련이 있으니 만국박람회의 참가는 칠기.
도자기, 우키요에 와 같이 일본 미술품들을 서양의 기준으로 평가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일본이 만국박람회에 공식적으로 참가한 첫 해는 1873년 인데 오스트리아 빈 만국 박람회
에 초청된 일본 정부는 첫 해외 박람회의 준비로 1872년 우에노에서 멀지 않은
유시마 에서 내국권업 박람회 (內国勧業 博覧会) 를 열고는..... 빈 만국박람회 에는
가마쿠라 대불 을 종이로 뜬 것과, 나고야성 물고기 기와장식 샤치호코(鯱) 실물을 보냅니다.
가마쿠라 대불과 사치호코 외에도 조경 기술자 를 파견하여 일본 정원을 만드는 열성
을 보였는데, 빈 만국박람회의 일본관 은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자포니즘
(Japonism) 을 한층 유행시키며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빈 만국박람회 에 참가한 뒤에는....... 미술을 근대화와 같은 감각으로 생각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본 정부는 선진국의 학문, 예술, 기술, 제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조지아 콘더 (Josiah Conder) 라는 영국 건축가 를 초청했습니다.
이 외국인은 1877년에 일본으로 와서는.... 도쿄 대학 건축과의 전신 고부대학
(工部大学) 의 교사가 되었으며, 1882년에는 일본 최초의 박물관 을 짓기도
했는데... 이 박물관은 간토 대지진 때 파괴되었지만 역사상 의미가 크다고 합니다.
도쿄는 이미 다섯차례나 본지라..... 이번 여행에서는 벚꽃을 컨셉 으로 정했으니
인터넷과 여행 가이드북을 뒤져서 다섯 곳 을 뽑았는데... 첫째 우에노 공원,
둘째 아사쿠사와 스미다가와 강변, 셋째 치도리가후치 (千鳥ヶ淵公園)
넷째 후락원(고라쿠엔), 다섯째 묘가다니역 茗荷谷駅 분쿄 文京(문경) 벚꽃 입니다.
지하철을 여러번 타야하는데 도쿄 시내는 도쿄메트로와 도에이 두 회사의 지하철이 운행중
이니 두곳 모두 통용되는 패스 로 도쿄 서브웨이 티켓 Toyko Subway Ticket 을 구입
해야하는데, 우에노역 上野駅 에서 두리번거리니 마침 구석에 간이 관광안내소 가 보입니다.
부스에 2명의 여직원이 앉아있기로 다가가서 공통 1일 승차권 원데이패스 를 800엔씩 에
구입하는데, 우리 여권 을 달래서는 페이지를 넘기더니 입국 스탬프 까지 확인한
다음에야 주는데..... 며칠 도쿄에 있을 것 같으면 충전 카드인 파스모 PASMO 나
스이카 SUICA (보증금 500엔 + 충전금액 : 도쿄에서만 잔액 환불)를 구입하는게 좋습니다.
도쿄 서브웨이 티켓 : Toyko Subway Ticket : 도쿄메트로 + 도에이 지하철
공통 1일 승차권 : 당일권 800엔 구입 : 혹은 충전카드 파스모
PASMO 나 스이카 SUICA(보증금 500엔 + 충전금액 : 도쿄에서만 잔액 환불)
우에노역에서 바깥으로 난 계단을 걸어서 지하로 내려가서는 지하철 도쿄 메트로 긴자센
을 타고는 3정거장을 가서 종점 인 아사쿠사 浅草(천초) 역에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니 여긴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선뜻 동서남북을 구분하기 어려워서 잠시
두리번 거렸더니...... 뜻밖에도 전단을 나누어 주던 젊은이가 한국말로 말을 걸어 옵니다?
아마도 여기 도쿄에 유학 온 한국 학생이 알바 를 하는 모양인데...... 센소지
(浅草寺, 천초사) 가는 방향을 묻고는 골목길로 들어가니....
가게 들도 많은데다가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 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사쿠사(浅草) 는 센소지( 浅草寺 ) 를 중심으로 하는 번화가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2차 대전 전에는 도쿄 유일의 번화가로서 번영 하였으며, 간토 대지진 및 2차
대전으로 인해 궤멸에 가까운 피해 를 입었으나 그때마다 복구 를 거쳐 왔다고 합니다.
현대화 되어버린 도쿄에서 일본의 전통을 느끼고 싶다면 아사쿠사를 방문하면 된다고들
하는데..... 아사쿠사는 도심에서도 일본의 전통을 유지 하고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특히 아사쿠사 에서는 관광객은 물론, 일본 현지인들도 일본의 전통 의상인 기모노
와 유카타 를 입고 구경하는 사람이 많아 일본의 전통 을 보다 잘 느낄수 있다고 합니다.
골목길을 한번 돌아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따라 걸으니 이윽고
저만치 센소지 절의 산문 에 해당하는 가미나리몬(雷門 뇌문) 이
보이는데, 예전에 한번 보았던 것 처럼 큰 등이 3개나 매달려 있는 것을 봅니다.
가미나리몬 은 센소지 浅草寺(천초사)의 문으로 오른쪽에는 바람의 신상 이, 왼쪽에는
천둥의 신상 이 자리잡고 있는데, 원래의 가미나리몬은 1865년 화재로 소실
되었고, 현재의 문은 1960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한 것 이며 현재의 제등은
2003년에 제작한 것이라는데..... 직경 3.3m, 높이 3.9m, 무게 700kg 이라고 합니다.
센소지 절의 입구에 있는 '가미나리몬' 이라고 쓰인 빨간 제등은 그야말로 아사쿠사의
랜드마크 이니 촬영 장소로도 인기가 있고 늘 일본 내외의 관광객들로 붐비는데
오른쪽에는 바람의 신, 왼쪽에는 천둥의 신 이 안치된 문의 정식 명칭은.....
'풍뇌신문'. 언제 부터인지 가미나리몬 이라고 불리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가미나리몬(雷門 뇌문) 은 몇번인가 소실된 적이 있으며 현재의 문은 1960년에 마쓰시타
전기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 松下幸之助 의 기부로 재건된 것이니......
높이 4m, 지름 3.3m, 무게 700kg의 박력 넘치는 제등은 2013년에 교체 되었다고
하는데 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상가가 밀집해 사람들로 붐비니 이른바 나카미세도리 입니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神)’ 으로 추앙받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는 경영을 단순한
‘돈 벌이’ 가 아니라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하는 가치 있는 종합예술
로 여겼다고 하는데...... 마쓰시타의 삶 은 패전국 일본이 세계 경제의
기관차 로 떠오르는 과정 그 자체였으니 그의 경영 철학은 오늘날에도 유용 합니다.
“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릴 때 부터 갖가지 힘든 일 을 하며
세상살이에 필요한 경험 을 쌓았습니다. 저는 허약한 아이였던 덕분에
운동을 시작해 건강을 유지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던 덕분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제 선생 이어서 모르면 묻고 배우며 익혔습니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다 선생 이니 모르면 묻고 배운다? 문득 역사학자인 임용한 씨
가 동아일보 ‘임용한의 전쟁史’ 칼럼에 올린 “처형된 포로”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知彼知己百戰百勝 이라는데, 손자병법 원전에 ‘知彼知己百戰不殆
(지피지기백전불태) 라 나오는 이 말은.... 예나 이제나 정보의 중요성 을 말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 조정은 왜군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어서 고민했다.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면서도 왜군의 대략적인 병력도 몰랐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려고 해도 왜군의 세력을 모르니 얼마나 파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왜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한 향리 가 중요한 정보를 안고 탈출해 왔다. 처세술의
달인이었던 그는 왜군에게 잡힌 뒤 열심히 일을 해 신임을 얻었다. 적군과도
잘 사귄 그는 군량을 담당하는 왜군과 얘기를 나누다가 하루에 소모되는 쌀 이
얼마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을 한 끼 식사분으로 나누면 왜군의 전체 병력 이 나왔다."
"왜군 장수는 조선 측 사절이 방문했을 때 그를 슬쩍 풀어줬다. 돌아온 그는 조선 정부에 정보
를 보고 했다. 선조는 그에게서 많은 정보를 얻어내려고 했지만 대신들은 거부 했다."
"조선의 군법에는 적에게 포로가 된다는 개념이 없었다. 죽지 않고 항복해서
포로가 되는 것은 사형 이었다. 대신들은 빨리 그를 죽이자고 난리를 쳤다. 선조가
정보라도 얻은 뒤 죽이자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향리는 신속하게 처형되고 말았다."
"왜 이렇게 처형을 서둘렀을까? 국가 존망의 위기 에 조정 대신들이 위기감이 부족
하거나 나라를 구할 의지가 없거나, 생각이 짧았을리도 없다." "남은 이유는
하나인데, 그 향리를 빨리 죽이는 것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최선의 수단
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군이 적에게 항복하지 못하도록 하고, 항복한자
에게는 용서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게 그까짓(?) 정보 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강력한 적군의 위협에 굴복해 투항하는 자가 속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이런 판단이 현실보다는 이념, 신조, 가치가 먼저 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 이었다고 생각하면 오싹하다. 개인의 삶에서야 구차한 현실의
이익 보다 가치 추구를 우선하는 것은 나무랄 수도 없고 존경스럽기도 한 부분
이다. 그러나 국가 경영은 현실 이다. 국제관계와 전쟁은 더더욱 치열한 현실 이다."
"가치와 정신만을 내세워서는 책임질 수 없는 고난으로 국가와 백성을 밀어 넣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일은 또 있었으니..... 임진왜란 전쟁 초기 순변사로 명을 받아 왜군을
격퇴할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일 은 제승방략 전략에 따라 대구에 집결하게 될 10만
에 가까운 조선군을 지휘하기 위해 서울을 출발 하는데, 먼저 장교와 하사관 으로
쓸 병사 300명 을 모집하고자 하나 병조에서 소집한 병사들은 병신 아니면 서생들 이라....
한시가 다급한 가운데 금쪽 같은 사흘을 허비 하고도 3백명 병사를 징발하는데 실패
하자..... 유성룡은 부관은 남아서 병사 300명을 모으게 하고 6~7명 군관만
데리고 먼저 떠나라고 닦달하니 상주에 도착했는데... 상주 사또를 비롯 모두가
도망친지라 아전을 닦달해 쌀 창고를 열어 백성 500여명을 모아 훈련에 돌입 합니다.
대구에 모인 10만명의 조선군 은 서울에서 사령관은 소식이 없고 천막이나 식사도 해결
되지 못하는 가운데 비까지 내리니 노숙도 어려운데.... 왜군이 북상한다는 소식 에
모두 흩어져 도망쳐 버렸으니...... 저 농민 5백이라도 훈련 시키려 상주에 머무는
중에 한 농민이 왜군 척후병이 나타났다고 보고하자... 군심을 어집힌다고 처형해 버립니다.
두세시간후 나타난 왜군 본대에 의해 농민병 5백은 학살 되었는데, 이후 삼도도순변사
에 임명된 신립 역시 병사 3백을 징집하지 못해 서울을 출발하지 못하자
전쟁터에 가기 싫어 후방의 도체찰사 유성룡 휘하로 모여든 3백명 명부 를
인계해 주니.... 볼이 부어 입이 어디 까지 튀어나온 병사 3백을 데리고 출발 을 합니다.
도중에 충청도 병사들을 소집 하고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내려온 기마병 까지 합쳐 충주에
이르렀는데, 문경 새재에 진을 치자는 막료와 이일의 건의를 묵살 하고 남한강을
등에 진 탄금대에 진 을 치는데.... 이는 산속에 진을 치면 병사들이 도망칠까 염려한
것으로, 병사가 왜군 척후병이 나타났다고 보고하자 신립은 혼이 빠져 야밤에 도주 합니다.
왜군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나타나자 너무 놀래서 무의식적으로 도주하긴 했지만
사령관인 신립 그가 도망쳐 봐야..... 이 좁은 땅 조선에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다음날 새벽에 부대로 돌아온 신립 은 장교와 병사들 보기에 민망 하니...
간밤에 적정을 살피러 갔지만 왜군은 보이지 않았다며 군심을 혼란시킨 병사를 끌어내
처형 하는데...... 두어시간 지나 왜군이 나타나자 무작정 기마대를 돌격 시켰다가
조총 3단 사격술에 전멸 하자 조선군은 겁에질려 뒤돌아서 도주해 한강에 빠져 죽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카이의 한약상인 고니시 유키나가 는 상인 집안의 자손 이라...
사위 대마도주 종씨 를 통해 조선에서 무역으로 큰 이득 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을 막기위해 국서 위조 까지 하면서 반대했으나 실패 합니다!
고니시 는 제 1선봉 을 맡아 동래성을 함락하면서 포로로 잡은 울산 군수를 풀어주며 조선
조정에 알려 평화교섭을 하자고 부탁 했으나 군수는 포로된게 두려워 도주해 버립니다.
조정에 왜군의 서신을 전해봤자 그 역시 처형당할 것이 두려웠던 것이지요? 이후 고니시
는 선비들을 붙잡아 보내니 조선 조정 에서는 예조참판 이덕형을 보냈으나 만나지는 못합니다.
조선군이 싸우지 않고 도주 하는 바람에 서울에 이어 평양도 무혈 점령 했으니, 북상했으면
선조는 만주로 달아났을 것인데.... 그 때문에 더 진군하지 않고 명나라 심유경 이 오자
화친에 매달리며 6개월을 허비한 때문에 북서쪽 영하에서 몽골족의 반란 보바이난 을
진압중이던 이여송군이 난을 수습하고 3천리를 달려와 파병할 시간만 벌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런저런 옛날일을 회상하며 호조몬 이라 불리는 문 을 지나 센소지(浅草寺, 천초사)
절로 들어가는데 오래된 절 안에는 일본인 말고도 외국인도 엄청 많이 보입니다.
특히나 여기 센소지 절 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일본의 여러 지방에서 도쿄로
수학여행을 온 중고등 학생 들이 참으로 많이 보이는데.... 아사쿠사 는
센소지시타마치 지역의 민간 신앙의 중심지 이니 628년에 절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첫댓글 거리에 아가씨들은 기모노를 입고 총각들은 일본남자한복을 입은 젊은사람들이 많군요.
일보 여자들은 자기네 전통 의상인
기모노나 유카타를 자주 입는걸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복을 입는 여자분들이 없어졌지요?
네 그렇군요
한복입은 사람들은 서울고궁에나 가야지 한번씩 볼 정도입니다
그러니..... 한복이 우리나라 옷이라고
주장하는게 민망할 정도입니다.
아무도 입지 않는 옷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