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능력자’는 초능력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자들이 뻑 갈만큼 잘생겼다는 주연남자배우들이 주인공인 영화도 아니었다. 그 영화의 주인공들은 무기력하고 존재감이라고는 죽을 때까지 먹고사는 게 살아있는 이유인 그런 사람들이다. 고수가 맡은 임규남 대리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전당포사장이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무거운 질문에, 그냥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일이라고 가볍게 말한다. 그런데 그는 영화 내내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고 온 몸으로 말하는 역할을 한다. 정말 너무 가엾은 인생의 초능력자와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는 그러나 따뜻한 담요로 온몸을 휘감고 있는 듯 사회라는 차가운 공간 속에서 서로의 인간애를 나눌 줄 아는 능력을 가진 규남과의 대결은 초능력자(사회적 관계에서의 무능력자)와 초인(사회적 관계에서의 초능력자)이라는 관계의 대결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을 이루는 사회의 각개들이 모두 이 두 부류로 나눠지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아마도 이 두 부류의 인간보다는 이도저도 아니면서 상황에 따라 이리로도 저리로도 무감각적으로 옮겨 다니는 무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들은 세상의 거의 반 이상을 이루면서 모든 것을 흡수해버린다. 그것이 악이든 선이든 그들에게는 하등 관심거리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이끌려 다닌다. 영화에서 그들은 무섭도록 소모품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감독은 그러한 모습을 일변하기 위해 그들의 행동에 있어 일말의 주저함도 주지 않았다. 정말 끔찍하게 몸서리쳐지는 것은 바로 그런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해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어떤 영화에서보다도 무섭게 그리고 간결하게 감독은 틈 하나 주지 않고 다그친다. 영화의 결말은 그래도 따뜻하고 게다가 가벼워진다. 우리는 초인(사회적 관계에서의 초능력자)이 될 수 있을까? 점점 통합되는 세계는 확장된 공간으로 상대적으로 더 작아지는 존재감을 가지게 되는 개인들을 뿔뿔이 흩어놓는다. 나는 어떻게 따뜻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 수많은 나와 교류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