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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역사를 바꾼 장비들.
알피니즘 230년의 역사에서 20세기 초반은 장비발명의 시대였다.
오스카 에켄슈타인의 아이젠. 오토 헤르조그의 카라비너. 한스 피히틀의 하켄. 프리츠 리겔레의 아이스하켄. 로랑 그리벨의 12발아이젠 등 이 분야는 야심찬 젊은 알피니스트들의 신천지나 다른 없었다. 이들은 장비분야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데 능했으며 이들이 만들어낸 장비들은 알피니즘의 역사를 바꾸는데 크게 공헌한다.
1910-1930년대는 알프스의 모든 미답 봉들이 정복되고 등산이 점차 어려운 벽을 향해 오르는 새로운 방법이 발아(發芽)하던 시기였다.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산악인들은 ‘현 상태 대로라면 등산이 한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라는 우려를 자아내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용구에 의존하지 않는 한 알피니즘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고 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 속에서 출현한 용구가 아이젠, 카라비너, 하켄이다.
이런 장비의 등장으로 동부 알프스의 돌로미테 산군에서는 출발점과 정상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디렛티시마(Direttissima Climbing)와 몇 미터 간격으로 하켄을 두들겨 박으며 오르는 인공등반이 성행했다. 또한 서부 알프스에서는 암. 빙. 설 혼합등반이 활발하게 이루진다. 당시 몇몇 알피니스트들은 이런 장비를 활용하여 미등의 북벽에 길을 열기 시작한다. 그중 아이젠, 카라비너, 하켄은 등반의 발전에 중심축을 이룬다.
도깨비 발명품으로 매도된 에켄슈타인 아이젠
1908년에는 현대적인 아이젠의 원형이 된 ‘10발 아이젠’이 오스카 에켄슈타인에 의해 개발된다. 물론 아이젠의 역사는 이보다 더 오래된 2000년 전부터 카프카츠 지방의 초기 원주민들이 눈과 얼음 위를 걸을 때 가죽 밑창에 쇠 징을 박은 신발을 신은 데서 유래했지만 아이젠의 기초를 다진 사람은 영국의 에켄 슈타인이다.
역사 속에서 에켄슈타인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일은 그가 아이젠(Eisen)을 고안하고 새로운 타입의 빙벽등반기술도 창안하여 보급했다는 점이다.
그가 창안한 빙벽등반기술은 프렌치 테크닉(French Technique)의 원조가 되었다. 그는 아이젠과 길이가 짧은 피켈사용 기술을 함께 조화시킨 ‘에켄슈타인 아이젠기술’도 창안하여 보급했다. 오늘날 프렌치 테크닉이라 부르는 플랫푸팅(Flat Footing)기술도 그가 개발한 것이다. 불어로 ‘삐에다 쁠라(Pieda Plat)’라고 하는 이 기술을 정통 프랑스식 기술로 오인하고 있으나 이 기술의 창안자는 영국의 에켄슈타인이며, 이후 프랑스 산악인들이 더욱 정교하고 우아한 형태로 완성시켰다.
에켄슈타인의 ‘10발 아이젠’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장비였다. 이 용구의 출현으로 등산은 한층 더 발전하였고, 눈과 얼음에 대한 등반개념을 완전히 바꾸었다. 아이젠의 출현은 얼음에 스텝(발판)을 일일이 깎아야하는 엄청난 중노동으로부터 등산가들을 구해냈고, 종래의 쇠 징 박힌 등산화를 퇴출시켰고, 비브람 고무창을 출현시키는 계기를 제공한다. 아이젠의 출현은 등반기술 발전에 혁명적인 공헌을 한다. 이용구의 발명은 눈·얼음이 덮인 미등의 북벽에 새로운 길을 차례로 여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신형 아이젠을 개발한 에켄슈타인 조차 처음에는 아이젠 사용을 경멸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1886년 호베르크 호른(Hohberg horn·4219m)의 빙벽등반을 하던 중 피켈로 발판 만들기를 하다가 지쳐 등반을 포기하게 되면서 비로소 아이젠의 효용가치를 깨닫게 된다. 이후 그는 아이젠 무용론이 그동안 자신의 무지와 편견이었음을 깨닫게 되어 서둘러 역사적인 물건이 된 ‘10발 짜리 에켄슈타인 아이젠’을 고안하게 된다.
당시 아이젠이 발명된 영국에서는 이 용구의 사용을 기피했다. 보수적인 영국 산악인들은 아이젠과 같은 인공적인 용구를 써서 정상에 오르는 일은 스포츠 정신에 위배되며, 이런 이기(利器)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등산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사용을 기피했다. 오늘날 보편화된 이 용구도 한때는 이단시되었으며 보수적인 산악인들은 아이젠을 기피대상 1호로 여겼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10발 아이젠’의 출현은 종래의 쇠 징 박힌 등산화를 퇴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비브람(Vibram) 고무창을 출현시키는 동기를 제공했다.
1932년에는 아이젠의 두 번째 혁명이라 할 수 있는 12발짜리 ‘그리빌 아이젠’이 로랑 그리벨에 의해 개발되어 오늘날 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아이젠은 기존의 10발 아이젠 앞쪽에 두 개의 발톱을 첨가한 것으로 현재 사용하고 있는 아이젠의 기본형이 되었다.
아이젠의 개발은 알프스 북벽시대의 주 무기가 되어 동계 암벽등반 및 빙벽등반 시대를 열어 주었으며, 이제까지의 등반형태에 일대 혁신을 가져다준다.
특히 1931년 마터호른 북벽 초등과 1938년 아이거 북벽 초등 당시 아이젠의 활용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발명품으로 대환영을 받는다.
그리벨은 빙설이 덮인 꿀루아르에서 12발 아이젠을 시험할 때 스텝커팅으로 앞서가던 다른 팀을 추월해 프런트 포인팅의 놀라운 효과를 실증했다. 이 결과에 주목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등반가들은 곧 이 용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벨 아이젠은 8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 등산가들에게 상식적인 표준용구로 널리 쓰이고 있다.
에켄슈타인은 1892년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이 이루어진 콘웨이(M.Conway)팀의 카라코룸 원정대 부대장으로 참가하였으나 대장과의 불화로 원정을 포기한다. 그는 등반이론에 정통한 산악인으로 암벽등반에 체계적인 이론을 도입하고, 아이젠뿐 아니라 여러 가지 등반장비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실용화하는데 전력했다. 그는 빙벽등반에 적합한 짧은 피켈도 고안했으며 안정성이 높은 여러 가지 매듭도 연구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전에 있었던 여러 등산가 중 가장 과학적인 등산가로 평가되고 있다. 영국 클라이머스클럽(Climbers Club)창설회원의 한 사람으로 보수성 짙은 알파인클럽에는 평생 동안 가입하지 않았다.
불구경중에 얻어진 아이디어 카라비너.
1910년엔 장비개발의 또 다른 전설 오토 헤르조그(Otto Herzog)가 등장한다.
그가 개발한 카라비너라는 이름의 ‘개폐식 쇠고리’는 암벽등반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이 쇠고리의 사용으로 암벽등반은 한층 빨라지고 안전성도 높아졌다. 카라비너가 개발된 배경은 화재현장에서 진화작업을 하는 소방관들이 소방호수를 고정하는 쇠고리에서 얻어진 아이디어가 동기가 된다.
어느 날 헤르조그는 뮌헨 소방관들의 화재진압 현장을 구경하던 중에 소방 수들이 수압호수고정용으로 사용 중인 배 모양의 클립(Pear Shaped)'을 보고 이것을 암벽등반에 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안한 후 연구를 거듭한 끝에 새로운 모양의 장비를 고안하여 실용화하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카라비너의 효시다. 이 쇠고리는 1853년부터 베를린 소방대에서 ‘베를린 벨트 후크’라는 이름으로 사용해왔던 소방 기구다. 당시 하켄의 고안자 피히틀과 헤르조그는 하켄과 카라비너는 실과 바늘과 같이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용구임을 절감하고 두 용구를 사용한 확보방법을 개발하여 암벽등반에 항시 휴대하고 다녔다. 그러나 당시의 산업기술로는 많은 량을 생산할 수 없어 단 2개의 카라비너만 지니고 다녔다한다.
독일어 'Karabiner'의 원래의미는 기총(騎銃)이다. 어원은 불어 Carabine(기총)에서 왔다. 등산용어로 쓰이는 카라비너는 Karabinerhaken(기총걸쇠)의 줄임말이다. 등산용 카라비너가 기총의 걸쇠모양과 비슷하여 이 같은 이름을 붙여 쓴 것이다. 영어로는 카라비너(carabiner) 또는 스냅링크(snaplink)라고 한다.
카라비너는 등반할 때 사용하는 다목적의 필수등반장비다. 가장 많이 쓰이고 가장 널리 알려진 장비 중의 하나다. 확보를 볼 때나 확보지점에 로프를 통과하고 오를 때 중개 물로 쓰이는 쇠고리다.
오늘날 카라비너는 등산뿐만 아니라 군사작전. 소방작업. 광산의 채광작업. 건축공사. 선박. 항공기 등 여러 분야에서 다각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열쇠고리나 각종 장신구 등에도 그 수요가 늘어 나고 있다. 카라비너는 알피니스트들에게 단순한 금속물체 이기 전에 산악인들의 혼(魂)이 담긴 결속의 고리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여러 산악회들은 회기나 빼지 등에 카라비너를 상징적 의미로 쓰고 있다.
카라비너가 개발되기 이전에는 하켄 구멍에 코드슬링으로 큰 고리를 만들어 카라비너를 대신했다. 사람의 몸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고리를 하켄에 묶어 이고리를 사람이 통과하는 불편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오토 헤르조그에 의해 발명된 카라비너는 암벽 등반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이 쇠고리 사용으로 암벽등반은 한층 더 스피드해지고 안전성도 높여주었으며 같은 시기 한스 피히틀이 고안한 마우어하켄과 함께 짝을 이루어 암벽등반은 급속히 발전한다.
1930년대 까지만 해도 카라비너는 연철로 만들어져 300-400킬로그램의 하중에도 곧잘 파괴되었다. 1935년에는 장금장치가 달린 록킹 카라비너(locking carabiner)가 출현했고, 1940년 이전 까지 강철소재의 카라비너가 사용되었으나 2차 대전 중에 알루미늄을 소재의 가벼운 제품이 개발된다. 알루미늄 카라비너는 미 육군 산악장비 개발위원인 윌리엄 피 하우스(william P. House)에 의해 1941년에 개발된다. 이것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알루미늄 카라비너의 시초다. 하우스는 미국 동부지역의 샤왕건크스에 수많은 초등 루트를 그려낸 클라이머다.
현재의 카라비너는 고강도 소재인 두랄루민을 써서 한층 더 경량화 했다. 금속의 강도와 구조도 과거의 강철제 보다 더 우수하다. 카라비너의 경량화는 거벽등반에서 많은 양을 휴대할 수 있다는 이점과 등반의 스피드와 안전성을 동시에 향상시켰다.
20세기 초 소방 수의 손에서 불길 진화작업용으로 쓰이던 이 용구가 알피니스트들의 손으로 옮겨간 후로는 산을 향한 불길을 오히려 높여주는 촉매역할을 하고 있다.
산악인들에게 카라비너는 단순한 금속 물체이기 이전에 산악인들의 혼(魂)이 담긴 ‘결속의 고리’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1937년 이 땅의 선구적인 산악인들이 모여 만든 산악단체 “백령 회”는 신참회원 입회 식에서 동지애의 결속을 다진다는 의미로 이 쇠고리를 고 참 회원들의 것과 연결하는 결속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카라비너를 개발한 헤르조그는 1923년에 350여 미터의 드라이진켄 슈비체(Dreizinken Spitze)를 3일 만에 초등한 사람으로 이 등반이 최초의 6급 등반으로 기록된다.
인공등반의 총아 마우어하켄
1910년엔 오늘날 볼트와 함께 암벽 훼손(毁損)의 주범으로 매도되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마우어하켄(Mauerhaken)이 오스트리아의
한스 피히틀(Hans Fiechtl)에 의해 개발된다. 이 장비는 반세기 이상 가장 널리 사용된 암벽등반의 기본용구로 자리 잡지만 하켄사용으로 암장 파괴가 가속화하자 1970년 등반윤리의 관점에서 제창된 클린클라이밍 운동의 확산으로 사용범위가 점차 감소한다. 그 후 하켄 대신 친환경적 장비인 너트와 캠이 하켄의 자리를 메우면서 점차 사용범위가 축소된다. 클린 클라이밍이란 암벽파괴를 최소화하면서 오르는 친환경적인 등반양식으로 자연파괴에 대항하는 도덕률이다.
하켄을 최초로 개발한 독일어권에서는 ‘벽 Mauer에 박는 갈고리 Haken'라는 의미에서 마우어하켄 또는 발명자의 이름을 따서 피히틀 하켄이라 부른다.
등산사상 최초로 하켄의 기본형이 등장한 것은 1910년이지만, 그 이전에도 원시적인 형태의 L자형 철제 로프걸이가 사용되고 있었다. 이 L자형 고리가 하켄의 조상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카라비너를 끼울 수 있는 구멍도 없었다. 이때는 카라비너가 개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구멍의 필요성도 없었고 당시 암벽등반의 선 등자는 액자걸이 모양의 L자로 휘어진 부분에 로프를 걸쳐두는 식으로 확보를 했다.
그 후 머리에 구멍을 뚫고 코드슬링으로 고리 매듭을 만들어 로프를 통과시키면서 등반했다. 등반 자는 고리를 묶고 푸는 불편하고 성가신 과정을 없애기 위해 열고 닫기 편한 ‘철제 고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으며 이런 필요에 의해 탄생한 것이 카라비너다. 카라비너가 개발된 후에는 하켄의 머리 부분에 구멍을 뚫어 고리를 묶고 푸는 불편함에서 해방된다.
하켄과 카라비너의 보급으로 1900년대 초에서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암벽등반은 하켄과 카라비너를 사용하는 새로운 기술체계로 발전, 암벽등반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인공등반(人工登攀)으로 발전한다.
하켄의 출현은 등반사상 용구 발전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혁명적인 용구라 할 수 있다. 이 용구의 탄생은 인공등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낳게 하여 암벽등반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러한 인공등반 방식에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며 인공적인 용구의 사용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심지어 “하켄을 사용하기 보다는 죽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자유등반 신봉자들도 많았다. 알파인 클럽 회장을 지낸 윌슨(wilson)은 “하켄은 명예스럽지 못한 용구”라고 매도했으며, 이런 의견은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편견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켄은 실용화의 길을 걷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한다.
하켄과 카라비너가 개발된 이후 암벽등반 수준은 급진전하여 돌로미테와 같은 수직의 거벽에서 난이도 높은 새로운 길을 열수 있게 되었다.
이 시대를 대표했던 인물 중에서 에밀리오 코미치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돌로미테의 수직세계에서 활동하며 39년이란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600여개의 암벽을 등반했으며, 200여개의 초등루트를 개척해 6급등반시대의 막을 여는데 공헌했다. 특히 그가 1933년에 이룩한 치마그란데(Cima Grande)북벽 초 등반은 유명한 성과다. 550미터 높이 중 180미터가 오버행을 이룬 이 거벽을 80개의 하켄을 사용하여 오른 성과는 알프스 북벽등반의 전환점이 된다. 코미치는 어려움을 추구하기 위해 직등을 주장했고, 1937년에는 자신이 초등한 치마 그란데 북벽을 3시간 30분 만에 단독등반으로 재 등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다. 그는 1940년 로프 절단사고로 추락사하기 까지 수많은 초등과 난이도 높은 6급의 세계를 열면서 한 시대를 리드하였고 현재의 인공등반 표준 스타일을 창출한다. 그는 인공등반 기술을 창안했으나 기존의 루트에서 하켄의 사용을 최소화하는데 노력했으며, 그의 초등 루트에서도 이런 흔적이 엿보였다. 그가 발전시킨 인공등반기술은 알프스 전역의 수직 벽과 오버행에서 위력을 발휘했으며, 돌로미테와 같은 수직의 세계에서는 그의 등반 기술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기도 했다. 줄사다리 3개를 사용하여 암벽의 천정(roof)을 넘는 기술은 그가 개발한 것이다.
첫댓글 밑에서 세번째 그림- 카라비너 세개가 있는 거-에 설명이 없네요...~~~
1920년대 일본의 R.C.C에서 만든 일본식 카라비너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