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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계파정치의 기원과 발전
이상윤 목사
1. 감리회 제도상 특징은 감독정치, 감리사 제도, 속회 등을 꼽을 수 있고 교리상의 특징은 신앙체험과 선교정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신앙체험은 경건주의이고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성화의 교리를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1930년 조선감리회는 자치교회가 되었는데 여러 차례 분열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분열하지 않고 단일교회 체제를 유지하였다. 감리회는 본부가 중심이 되어 있는 교회다. 감독회장이 대표로 있고 감독회의가 있다. 감독회장은 본부의 인사 재정 행정을 관장한다. 본부는 감리회의 대표기관이고 정책을 개발하고 교회발전의 중심이다. 급변하는 세대를 대처하여 중앙집권적인 제도를 지양하고 행정단위는 연회장 중심으로 모든 정책은 선교중심으로 전환시켜서 감리회의 발전을 도모한다. 총리원 기구는 개편하여 간소화하고 감독직무에 행정은 분리시키고 그 기구의 일부를 연회로 이관 한다. 1966년 제 10차 총회 해결방향을 합의하다. 감리회 신앙과 신학의 핵심은 성서와 전통, 이성과 경험이라는 4가지를 가지고 신앙의 원천적인 근거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양성 속의 일치는 신학적 원리이며 회중정치는 감리회의 전통이다. 그러나 감리회는 계파정치로 갈등을 증폭시켰고 내부가 혼란해지면서 선교운동이 침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영국감리회는 38개의 지방회가 있고 지방마다 전임 감리사를 두었다. 총회는 1년 한번 씩 모이는데 임기 1년의 의장이 있다. 미연합감리회는 종신 감독제이며 전임 감리사 제도를 운영하며 개체교회 구역회를 관장한다. 감리사의 임기는 6년이다. 감독은 연회행정을 관장한다. 감독회의가 있고 의장 감독이 있다. 총회는 4년에 한번 씩 모이고 교회 정책의 지표를 밝히는 주제를정하여 총회로 모인다. 한국 감리회는 1978년 5월 총리원-갱신총회 측이 합동하면서 다원감독제를 실시하였다. 연회 감독에 감리회를 대표하는 감독회장이 있다. 1938년 10월 양주삼 총리사가 물러나면서 헌법을 개정하고 교회의 최고임원은 총리사나 감독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종우 목사는 최초로 감독이라고 불렸다. 미연합감리회는 1784년 프란시스 애즈베리를 총리사로 세웠으나 1787년 감독으로 개칭해서 불렀다. 일제하에서부터 연회는 연회장을 두었다. 1968년 연회장 제도가 다시 시행되었으나 감독제도로 되돌아갔다. 1980년부터는 감독회장 제도를 채택하여 본부를 관장하고 감리회를 대표한다고 하였다. 감독회의가 설치되고 협의하는 기능을 주었다. 일제는 교회 탄압을 조직적으로 시도하여 한국과 일본의 감리교회를 합동시켰고 이어서 관제교회를 동원하여 혁신교단을 만들었는데 마지막에는 신사참배로 기독교 신앙을 박멸하고 교회도 폐쇄하였다. 정춘수 감독은 친일 순응정책을 시행하였다. 상동교회를 황국문화관으로 바꾸고 갈홍기가 관장으로 있었다. 1943년에는 연회를 해산하고 감리회는 10개 교구로 변경되었다. 성경은 4개 복음서만 설교하도록 강요하였고 구약전서와 일부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찬송도 금지시켰다. 오경과 예언서도 금지되었다. 연회는 교구개편되고 목사는 교사로 불렀다. 본처 사역자는 장로로 불렀다. 일제는 전쟁 말기기독교조선교단을 조직하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을 한데 묶어 단일교단으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교회는 친일파-민족주의자로 양분되었다. 친일파는 일제 통치와 정책에 순응한 사람들이었으며 반대로 민족진영의 사람들은 일제에 저항하였다. 일제의 박해도 문제였지만 같은 동족끼리 박해를 당한 일도 큰 문제였다.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창씨개명을 하도록 하였으며 교회 대지를 팔아 국방헌금으로 드렸다. 심지어는 비행기 헌납행위도 강요하였다. 정춘수 감독은 반대파들을 교회에서 축출하여 제명하거나 파면시켰다.
해방 후 박해받은 이들이 나서서 감리회 재건운동을 폈다. 여기에 반하여 친일세력이 복흥파를 조직하였다. 해방정국에서 감리회는 두 개의 교회로 분열하였다. 복흥파는 일제의 통치와 정책에 순응하면서 목회 하던 세력이었고 해방후 복흥파로 등장하였다. 신사참배 창씨개명 징용 징병을 거부하고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출옥성도들은 교회내의 친일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차한 변명과 합리화로 대응하였다. 일제하에 친일지도자였던 정춘수 목사는 반민특위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고 구속되기도 하였는데 감옥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감리회를 버리고 개종하였다. 감리회는 선교 초기 멋진 서양식 교회 건물을 짓고 선교하였다. 한국 근대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고 한미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1930년대는 농촌운동도 열심히 하였고 1960년대 와서는 산업선교를 시작하여 노동자 선교에 앞장섰다. 또한 도시빈민과 농민선교에 참여하였다. 1924년에는 장감성이 참여하는 교회연합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민주화와 인권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에는 기독청년 학생운동에 동참하고 특히 도시산업 농촌선교에도 적극적이었다. 1990년대는 다문화 시대를 맞아 이주노동자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자연재해와 긴급 상황에 대처하는 봉사활동과 사회복지분야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감리회는 감독선출을 둘러싸고 분열사태를 맞으면서 목회와 선교활동에 많은 타격을 받았다. 자정능력이 없는 교회라는 의심도 받았다.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감리회는 재건파와 복흥파로 나뉘어 분열하였다. 일제 식민지 체제 청산에 실패한 끝에 분열한 것이다. 친일세력은 익숙하게 교회정치에 뿌리를 내렸고 민족주의 세력들은 교회 재건사업에 헌신하면서 분열한 것이었다. 분열의 배경은 신학적인 것보다는 친일 친미라는 현실주의적 이해관계에서 갈라져 나간 감정이 더 컸다. 이념적으로 보수일색이었고 정치적 성향은 친미-친일로 나뉘였다. 서울과 평양 이북과 이남 같은 지방색이 파벌을 만들고 계파로 모였다. 유교적 전통사회의 유산대로 지역출신 별 패거리들이 한데 어울려 권력화 되었다. 조선조에 있었던 사색당파 처럼 지방색에 따라 헤쳐모인 세력들이 계파정치의 모체가 되었다. 또한 파벌은 일제 식민지 통치시대의 유산이고 하였다. 식민지 통치의 방법으로 민족구성원 간에 이간질을 시키고 공작하여 분할하고 통치하는 수법이었다. 교회를 다스리는 방법의 하나였다. 관제조직을 동원하여 민족적인 양심을 가지고 저항하는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수법이었다. 공작정치는 해방정국에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고 모인세력들이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면서 분열해 나갔고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있었다. 분단된 것도 억울한데 망국적인 병인 지방색으로 갈라지고 분열하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었다. 지역감정이라는 망국병은 패거리 정치를 만들고 파벌은 이제 권력화 되었다. 감정에 호소하고 지연과 혈연 학연에 엮여 돌아가는 세력들이 조직화 된 것이다. 붕당정치의 한 형태인데 계파나 파벌 정치는 마피아 같은 것이다.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못할 노릇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남남갈등이나 동서대립도 모두 같은 산물이다. 종북몰이가 그렇고 보수우익이 그렇다. 한국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린 이와같은 행태는 정당과 사회단체 및 민간조직과 교회까지도 철저하게 좀 먹고 있다. 사회통합을 해치고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해방직후 일제의 간악한 통치에서 벗어난 한국은 남한 서울에는 미군이 군이 점령하였고 북한 평양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전승국 미국의 비호하여 소련과 붉은 중국의 남하를 막는 방파제가 되었다. 제국주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민족세력들은 미군정이 비호하는 친일파를 막지 못한 채 깊은 좌절에 빠졌다.
1945년 9월 8일 새문안 교회에서 모이기로 예정되었던 친일 잔당 세력인 기독교 남부대회가 무산되자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감리회 인사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이규갑 변홍규 전효배 권성집 구성서 김광우 목사를 위시하여 윤성범 이봉구 이찬용 장시화 라사행 등 소장목사들 까지 참가하여 감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재건운동을 시작하였다. 1945년 12월 17일에는 기독교 조선감리회 유지위원회 이름으로 모여서 위원장에 이규갑 목사를 세웠다. 이듬해 4월 5일에는 남한에서 3부 연회를 조직하였다. 중부연회장에 이규갑 목사 동부연회장에 변홍규 목사 서부연회장에 이윤영 목사를 선정하였다. 냉천동 신학교거 문을 열고 연회마다 선언문을 배포하였다. “1939년부터 외인의 강압적인 정책 하에 우리 교회가 내정 간섭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로 인하여 된 행정이나 규정 된 것은 일체 부인한다” 로 시작하는 문서였다. 그러나 재건파가 연회를 조직한 직후 4월 7일 일제강점기에 교회목회에만 전념해 왔던 일부인사들이 모였다. 강태희 방훈 박창현 김응태 박연서 박만춘 김희운 목사 등은 수표교 교회에서 모여 기독교 조선감리회 부흥전도 대회를 개최하였고 수습대책위원회 위원을 선정하여 발표하였다. 1946년 6월 11일 종로 중앙교회에서 복흥준비위원회를 만들고 강태희 목사가 중부연회 연회장이 되었다. 복흥측은 9월 6일 특별총회를 열어 “1941년 3월 10일 특별총회에서 헌장 변경 폐지를 의결한 결정을 무효로 선언하고 당해 헌장을 준수하여 기독교 조선 감리회가 복흥 됨을 선서한다” 고 하였다. 재건파는 동작빠르게 연회를 먼저 열기는 했는데 복흥파는 교회정치에 익숙한 관계로 개체교회의 구역회와 지방회 연회를 차례로 재건한 후에 총회를 열었다. 복흥파는 재건파에 비하여 교회 정치와 정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복흥파는 강태희 목사를 감독에 선출하였다. 재건측은 부랴부랴 서둘러 1948년 1월에 가서 동대문교회에서 총회로 모여 예산제일교회 장석영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해방정국의 혼란한 시기에 감리회는 분열되었다. 하나되어 선교해도 시원찮을 순간에 둘로 갈라져 황금시간을 놓친 것이다. 교회발전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감리회는 3년 후 통일전권위원회를 구성하여 다시 합치기로 한다. 전진규 목사가 위원장이 되고 서기에 박설봉 이병남 목사가 되었다. 1949년 4월 26-5월 2일까지 연합연회로 모이고 총회를 소집하였다. 감리회는 총회를 열고 중도적인 인물인 김유순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1년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김유순 감독은 납북되었고 총리원 박만춘 목사도 납북되었다. 초대 총리사 양주삼 목사도 납북되었다.
전쟁은 극도의 혼란기를 가져다 주었다. 위기에 처한 감리회는 교리장정에도 없는 총리원장 직에 당시 교육국의 총무였던 유형기 목사를 세웠다. 전시하에 1951년 11월 임시 총회가 열려 유형기 목사가 감독이 되었다. 평북 영변 출신으로 정춘수 감독시절인 1941년 9월 혁신교단에서 목사직을 파면 당한 적이 있었다. 친일파의 소행이었다. 그래서 해방 후 1949년에 가서야 겨우 재허입이 허락된 그는 감독자격에 문제가 있었다. 6년 계속시무에 하자가 있는 것이다. 출옥성도에 문제가 있듯이 감독자격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당시 임시총회 사회를 보던 미국의 모어감독은 전시라는 특별상황에서 처하여 총회를 설득하여 임시조치법을 통과시키고 이미 사퇴의사까지 밝혔던 유형기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그때 성화파가 유형기 감독을 지지하였다. 여기에 반대하고 나온 세력이 호헌파였다. 총리원 측에서는 이들 호헌파가 복흥파의 후신으로 일제하에 혁신교단에도 적극 참여한 세력이라고 매도하였다. 실제로 복흥파의 지도자였던 강태희 목사가 호헌파에 와 있었다. 1954년 총회는 유형기 감독이 장기집권을 노리고 모인 총회였다. 감독이 감리사 임명권을 행사하고 4년제 감독제로 하자는 개헌을 준비하였다. 호헌파는 수적인 열세로 인하여 총회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방청석에서 반대하였다. 즉각 감리교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듬해 1955년 3월 천안에서 김응태 목사를 감독으로 세우고 분열하였다. 재건-복흥파 투쟁과 똑 같은 양상이 터진 것이다. 친미세력인 성화파-친일 세력인 호헌파의 맞대결이었다. 이념상으로는 보수일색이었고 외형적으로는 지방색의 대결이었다. 당시 상황을 경험한 박설봉 감독은 이때의 분열은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감정적인 이유로 헤어진 것이었다고 솔직하게 술회하였다. 감리교회 분열의 심층 속에는 지방색이 있었다. 남과 북의 건널 수 없는 강이 도사리고 있었다.
계파의식은 지역감정을 끼고 발달되었다. 평안도 영변출신인 유형기 감독은 이북 사람들을 중용하였고 미국 유학을 갔다 온 엘리트들을 선호하였다. 여기에 소외당한 호헌파는 깊이 실망하고 반발하였다. 총리원측이 독점하던 미국 원조금은 부정 지출을 하였고 회계부정도 저질렀다. 이른바 MCOR 종교불 사건이었다. 미국교회는 총리원측을 지지하였다. 1958년 총회는 32회에 걸친 투표를 하여 호헌파 김종필 감독이 당선되었다. 호헌파는 연합 연회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합동하였다. 4년 만에 다시 합친 것이다. 그러나 감리회 계파파벌 투쟁은 더 심화되고 있었다. 1962년 제 9차 총회는 41차 투표를 하여 성화파의 이환신 감독이 당선되었다. 1966년 제 10차 총회는 2년을 끌면서 110 차례나 투표하여 호헌의 변홍규 감독이 당선되었다. 그때 감리회에 새로운 계파가 탄생하였다. 성화-호헌의 틈바구니에서 제3세력을 자처하는 정동파였다.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 김광우 목사가 정동파를 지휘하였다. 비록 소수파기이는 하지만 민족적인 의분을 가지고 있고 지사적인 기개를 펼치던 비판세력이었다. 1968년 중부연회장이었던 김광우 목사가 돌연 은퇴하였다. 아현교회 김지길 목사는 복음동지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장기천 목사는 총무를 맡았다. 제 11차 총회가 열린 1970년 총회는 성화파의 마지막 주자 윤창덕 목사가 감독에 당선되었다. 호헌신파는 성화파를 지지하면서 등장하였다. 성화 출신으로는 마지막 감독후보였던 윤창덕 목사는 호헌신파의 도움으로 당선되었다. 호헌구파가 신파들에게 밀려났다. 감리회 계파정치의 한축이 달라졌다. 폐쇄적인 호헌 구파에 비하면 신파는 공격적이었다. 호헌신파는 윤창덕 감독을 도왔다. 김 라인의 지도자 김창희 목사는 호헌 신파를 이끌고 총리원의 총무국장에 취임하였다. 구파가 정통파라면 신파는 신흥세력이었다. 1974년 제 12차 총회는 25차례 투표를 거듭한 끝에 호헌신파 김창희 목사가 당선되었다. 복음동지회는 신파와 손잡고 총리원 선교국에 들어갔다. 이제부터 감리회 계파정치는 한층 복잡하게 꼬였다. 윤창덕 감독시절부터 시작된 분쟁이 격화되었다. 1970년 중부연회장 개표 부정사건에 이어 1971년에는 경기연회 분리파들이 총리원을 점거하였다. 이같은 진통은 1974년 세 번째 분열을 예고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리회에 희망 없다고 느끼고 총회장을 박차고 떠난 갱신파는 개혁파였다. 신학적인 비전을 가지고 나타난 개혁세력은 성화파 일부가 참여하면서 세를 불렸고 마경일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이들은 감독제보다는 총회제도를 택한 것이었다. 총회신학교도 세웠다. 복음주의적 진보세력이었고 에큐메니칼 신학을 표방하기도 하였다. 감리회 교권투쟁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권력화에 매몰되었다. 4년을 넘게 끌었던 이 분열사태는 갱신총회특이 중앙연회를 만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진보에서 보수로 방향이 달라진 갱신총회 측은 다원감독제도가 채택되면서 타협점을 찾고 합동에 응한다. 한편 1974년 감리회가 분열하자 주한 미선교부는 총리원 후원금을 끊어버린다. 선교부는 중립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온양협의회에서 합의한 재산이양을 거부하고 말았다. 당시 유신독재 하에서 미연합감리회 극동태평양 총무였던 피셔 총무가 총리원 측이 정권에 협력한다고 비밀스런 보고를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총리원측에서 강력하게 항의하고 미국 선교부에 불신임을 낸 것이문제였다. 결과적으로 주한 미선교부는 한국감리회에 대한 재정지원을 거두었다. 이미 1968년 온양선교협의회에서 미선교부는 감리회에게 미선교부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이양해주기로 합의하여 장단기 발전계획안을 세웠는데 분열되어 버린 감리회에 실망하여 모든 약속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훗날 미국 땅에 기독교 대한감리회가 교회를 개척하고 지원하면서 미연합감리회로부터 불신을 받은 것하고 똑같은 취급을 받은 것이다. 1976년 호헌신파는 3개 연회에 감독을 세웠다. 이른바 교권을 분산하는 다원감독 제도를 채택한 것이다. 행정력이 집중되어 있는 감독의 막강한 권한을 분산시키자는 취지는 제 10차 총회때 부터 나왔다. 1978년 5월에는 감리회가 다시 합동하였다. 동부 중부 남부연회를 포함하는 3명의 감독에 더하여 총회 측에서느 감독을 세웠다. 6개월씩 돌아가면서 대표권을 행사하는 구조였다. 1980년 총회에서는 감독 중 한명을 감독회장으로 선출하여 감독회장에 오경린 감독이 취임하였다. 연회에 감독이 5명이 되었다. 1988년에는 서울 남, 경기를 더하여 7명이 되었다.
감리회는 교회성장의 새로운 동력을 찾기 위하여 5천 교회 100만 신도운동을 시작하였다. 분열로 흩어졌던 전도의 열기를 되살리고 총리원 이라는 옛 이름을 버리고 본부로 바꾸었다.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 것이다. 교세가 커야 힘도 쓰고 사회정의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꿩 잡는게 매라는 식으로 교세를 키우고 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당시 감리회 교세는 1200개 교회가 전부였다. 그러나 합동하고 8년이 경과한 후 1985년에 나온 공식집계는 교회수가 2839개 교회가 되었고 교인수도 급증하여 90만이 넘어섰다. 연회별 신학교도 있었고 감리회 출신 청년들이 갈 곳 없어 장로교로 가던 것을 대신하여 감리회가 키우는 획기적인 길을 텄다. 감신 목원에 이어 제 3의 감리회 신학교가 탄생한 것이다.
1. 성화는 친미 이북세였다. 지식층. 미국 유학파 보수우익. 1954년 4년제 개헌을 시도할 때 탄생한 계파다. 평양의 감리회 신학교와 같은 성화학교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74년 호헌신파 김창희 감독이 선출되자 성화파 세력은 대거 이탈 갱신총회로 나간다. 동시에 감리회 지식인들과 이화여대 등은 감리회의 변모에 회의를 느끼고 떠났다. 변선환 학장까지 감신대를 지켜왔다. 고질적인 지역감정이 배경을 이루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북에서 피란 온 이들의 설움을 대변하는 세력이기도하다.
2. 호헌은 1955년 3월 천안에서 호헌총회로 모여서 김응태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대부분이 충청남도 출신들이었다. 미국 유학파 총리원으로 부터 배척된 세력. 친일세력이었던 복흥파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호헌파는 촌놈 기질도 강하였다. 신파에 비하면 감리회 정통 보수 세력이었다. 목회에 충실한 편이었다. 겉과 속이 달라 시달림을 많이 받았다. 박설봉 나원용 김봉록 정영관 구본흥 도건일 등이 여기에 속하였다.
3. 1974년 총회에서 신파 김창희 목사가 박설봉 목사를 건너 뛰어 감독이 되었다. 1976년 다원감독제가 시작되자 신파는 박설봉 목사를 중부연회 감독으로 세운다. 1970년대 감리회 계파정치의 중심세력은 역시 신파였다. 표용은 감독은 1992년에 감독회장에 취임한다. 교회시력과 연합기관을 함께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계파정치의 요체는 거중 조정과 폭넓은 인맥이었다. 조직은 언제나 의리를 신봉하였고 상호신뢰를 생명으로 삼았다. 이것이 계파정치를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감리회 계파정치는 신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해서 지방색에 기조를 맞추어서 감정측면이 강했다. 신파는 김창희 감독과 이종수 김광원 표용은 박춘화 서형선 성기백 등이 속해 있었다.
4. 복음동지회 1960년대 성화 호헌 정치에 동조하지 않고 중간 조정자 역할을 하였던 김광우 목사는 1968년 정동제일교회를 은퇴한다. 아현교회의 김지길 목사는 목원대학교 졸업생들을 조직하여 복음동지회를 구축하였다. 초기 조직과정에 참여하였던 장기천 목사는 복음동지회를 하지 않았다. 이들은 계파정치의 폐해를 비판하면서 조정자의 역할을 하면서 제3의 길을 걸었다. 복음동지회는 비교적 호헌 신파나 구파에 비하면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1974년 복음동지회는 호헌신파와 손잡고 총리원 선교국을 장악한다. 김지길 김준영 안의걸 김경성 조명호 최기순 백문현 이성순 엄문용 이춘직 등이 여기에 속했다.
5. 갱신은 1971년 성화 호헌의 싸움이 치열한 가운데 교단 갱신을 하자는 취지로 태동한 계파다. 1974년 총회에서 호헌신파가 감독을 내면서 성화 일부와 함께 갱신총회를 결성하였다. 마경일 체제를 바탕 삼아 장기천 이계준 등이 참여하였다. 후에 대형교회 김선도 곽전태 등도 가세하였다. 합동직전 중앙연회로 바꾸고 총무에는 김수현 목사가 맡았다. 호헌과 양강 구도를 만들었는데 대형교회가 참여하면서 보수화되었다. 장기천 곽전태 김선도 등이 감독회장이 되었다.
6. 계파 파벌정치의 발단은 붕당의식에서 출발한다. 감리회의 경우는 지방색이 작용하였다. 권력자의 사랑방에 들락거리면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하나 둘 성장하면서 형성하였다. 의리를 생명으로 삼고 조직명령에 충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정치적으로 가부장적인 의식을 가지고 은인자중하여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60년대 교계에서는 통하는 말이 있었다. 투쟁을 배우려면 기장에 싸움을 배우려면 합동에 조직을 배우려면 예장통합에 가라고 하면서 정치를 배우려면 감리회에 가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개신교회 정치행태를 빗댄 것인데 근거가 있는 말이었다. 장로교는 총회와 신학교가 갈등의 원인이었고 선교사들의 개입 또한 분열의 핵이었다. 개신교 130년 역사에 100여개의 교파가 생긴 것은 그러한 배경이 직접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신학적 차이가 이단을 정죄하였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분열을 촉진하였다. 전쟁 직후 불어 닥친 광풍은 WCC를 용공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기화가 되어 장로교회들이 갈라졌다. 기장이 생기고 예장이 둘로 나뉘어져서 합동측과 통합측이 된 것도 이념 바람이었다. 기성도 예성으로 갈라졌는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이념문제가 깔려 있었다. 분단은 이처럼 처절하게 교회를 분열시킨 동기가 되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교회를 분열시켰고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감리회는 달랐다. 신학적 갈등보다는 최고 지도자 선출이 항상 문제였다. 지난 2008년 내홍사태에서도 교회가 극심한 대립 상태를 겪었는데 불구하고 갈라지지 않았다. 감독회장 선출은 난항을 겪었지만 연회나 지방회는 무난히 돌아가고 있었다. 압축성장의 결과 교회는 이단 사이비 판별 문제 만큼 세속화가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정통신앙의 문제보다는 세습 문제가 더 급하다. 그런데도 교회내부에서는 사유화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6.25전쟁 직후 사회불안이 이단 사이비 신흥종교운동을 일으켰는데 모드가 교회사유화를 저질렀었다. 통일교도 천부교도 다 같았다. 교주가 군림하고 사유화가 극심하여도 교인들은 반발하지 않는다. 권신찬 계열의 유병언 문제나 박옥수파 신천지 이만희 파도 세력을 모으면 돈을 모으고 세력화하고 나면 사유화한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가 물량적으로 커지면서 신앙을 보수적으로 강제하고 감리회 공동체성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교회성장운동이 자극한 측면도 있다. 현재 일선 교회의 목회행태가 급속히 세속화되면서 오순절은사주의 성령운동이 들어오고 번영의 복음의 메시지가 판을 치는 것은 매우 혼란스러운 일이다. 여기에 더욱 우려할만한 사실은 교회정치의 정서를 잘 알지도 못하는 급진적인 개혁세력들이 등장하여 보수일색인 교회세계에서 좌파적 개혁사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심각한 상황이다. 교회의 바닥정서는 보수일색이다. 특히 계파정치가 권력화 되면서 대화나 타협정신이 사라졌다. 독선과 아집에 빠진 패거리들이 이기적인 정치행동을 자행하고 있다. 패거리들은 진영논리에 빠져있고 승자독식이라는 독점적 구조가 개혁되지 않는 한 희망은 없다. 정치의 기득권자들이 정치재판을 하고 한정적인 인사기용을 하는 행위는 마피아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몰지각한 세력들이 부쩍 늘어났다. 지금 오히려 연회에 계파정치가 보편화되었고 지방회 감리사 선출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비전교회가 너무 많고 도농복합지역의 교회들은 재정격차가 너무 크게 벌어져 있다. 감리사의 역할이 줄어들고 2년 임기의 감리사를 1년씩 나누어서 하자는 여론도 많다. 그러나 문제는 감리회의 개혁 과제에는 감독권한의 축소이다. 감리사의 권한도 문제지만 우선적으로 감독선거를 둘러싼 경재은 권한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신분상승 요인도 크다. 한번 감독은 영원한 감독이라는 인식이 퍼져있다. 감리사의 권한이 작은 교회의 인사구역회만 국한하지 않고 지방내의 큰 교회도 넘보고 있기 때문에 큰 교회들은 감리사의 영향력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문제의 핵심은 감독회장이다. 4년 전임제 감독회장제가 있다 보니까 2년 임기의 연회감독은 감독회장 아래에 있고 감독회장은 감리회 전체를 대표하니까 감독회장이 감리회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짐이 곧 국가이듯이 내가 곧 감리회다 하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다. 연간 예산이 366억이나 되고 130여명의 직원을 지휘한다. 본부 각국의 총무를 임면하고 직원을 기용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 대표이며 감리회 최고지도자이다. 두 번째 문제는 평신도 권력이다. 교역자 동수로 총회로 진출하고 각국의 위원이 되며 한번 진출하면 은퇴할 때까지 대표로서 활동할 수 있는 장로들은 세력화되어 있다. 수구적인 성향의 평신도들은 금권정치에 약하다. 성공한 목회자만 찾고 있다. 감리회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었다. 황금 만능시대에 감리회 상층부는 세속화되어 있다. 하루 아침에 바꾸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신학적 예언자적 입장은 없고 감독후보 찾기에 여념이 없다. 교회의 장래보다는 현실적 이득이 되는 다음 감독후보를 찾는 것이 더 절실하다. 선거운동이 중요해졌다. 임기는 2년이니 순식간에 다 간다. 역사의식도 필요없고 사회의식도 없어도 된다.
7. 감리회 정치지형의 변전과 헤게모니 쟁탈전 글로벌 경제체제 아래 고통당하는 신빈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격차 경제를 해소하는 안전장치가 없다. 재벌경제를 극복하고 경제민주화라는 견제장치가 없다면 공정분배는 실종되고 복지정책은 양극화의 격차를 좁히지 못한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큰 교회와 작은 교회의 격차는 심하게 벌어져 있다. 교회세습이 일상화되고 변칙세습도 일어난다. 작고 가난한 교회를 세습하는 일은 없지만 부유한 교회가 세습에 집착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세습자본주의와 닮은꼴이다. 교회의 공신력을 다시 회복하고 신앙의 소중한 가치를 되살려야한다. 기독교 사회윤리를 실천하여 부자들을 각성시키고 가난한 이웃들의 돌보아야 한다. 이것이 복음의 정신이고 부유한 교회가 가난해 지는 첩경이다. 그러나 시장 자유주의적 경제체제는 황금만능주의로 지배하고 있고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속된 사고방식이 만연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모두 개인주의화되었고 특권층의 반사회적 행동은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있다. 오로지 동물적인 본능에 의지하여 생존에만 급급한 세상은 기상변화만큼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정의를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의 패자부활전을 독려하고 책임 있는 자성이 뒤따라야 하겠다. 계파정치의 생명은 조직력에 있었다. 그러나 금권정치의 내용물은 이해관계였다. 상비 조직이 없는 상황에서 급조된 선거조직은 조직이 아니다. 돈으로는 만들 수 있으나 소중한 인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목원대학교 출신 감독회장이 일하던 시기에는 목원 40년 프로젝트에 의하여 목원 에큐메니칼 운동권이 교회정치에 발을 디밀었다. 교회행정에 오랫 동안몸담았던 행정출신이 운동권 세력과 결합하여 새로운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교회정치의 속성을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약간은 숙이고 들어가고 먼저 강도 높은 주장을 피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급진적인 개혁주의자가 되거나 과격한 개혁세력이 되기 쉽다. 자기를 숨기고 인내하고 견뎌내는 내공이 필요한대목이다. 자기도취로 정치를 할 수는 없다. 상대방을 견인하고 대화를 요청해야 한다. 정치적 위기는 자기 자신에게서 온다. 조직은 그 다음이다. 지금 감리회에는 조직 상비군이 필요하다. 급조된 조직을 가지고는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다. 파벌아 없고 계파정치가 사라진 상황이다. 소수정예를 가지고 다수를 밀어붙이는 식으로는 곤란하다. 팀웍을 맞추고 대화하고 토론하고 준비하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조직은 상비되어있고 정책개발을 위한 전문가 그룹이 투입되어야 한다. 실력이 있는 법무 팀도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금권과 타락 선거의 범죄인이 된다. 조직도 없고 단기필마로 승부를 보던 시절은 지나갔다. 돈으로 사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꾸준히 실력을 연마하고 인맥을 쌓은 사람은 필승한다.
8. 다원적 정치상황과 헤게모니 쟁탈전 감리회 계파정치가 몰락하고 있을 때 부흥사들은 기존의 정치세력과 대립하지 않았다. 오래고 노회한 실력으로 집회를 초청해 주는 상대를 무시하지 않는 부흥사들의 실력이 주효했던 것이다. 동거 동락하는 정치를 했다. 모르면 상담도 하고 협력을 이끌어 내면서 갈등없이 지냈다. 그런데 문제는 대형교회가 등장하고 부터였다. 이들의 리더쉽은 교주 스타일이었다. 일인 천하인 것이다. 주군-가신 관계로 오랫동안 굳어져 온 관행으로 신 권위주의에 길들여져 있었다. 내 돈 내가 내고 왔는데 누가 잔말이 많냐 는 식으로 대했다. 정치력은 실제로 금력이다. 그러나 인맥도 중요하다. 법률자문도 중요하다. 권력화는 종합적인 구조물이다. 어디 하나 삐끗해도 사단이 난다. 권력화에매몰된 세력은 측근들과 실세를 데리고 놀았지만 실제상황은 반대였다. 임기가 끝나면서 해체된 듯이 사라졌다. 그것이 지금문제다. 물론 측근 실세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최종 결정자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모든 합의는 제로섬이 된다.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맹점이다. 그래서 측근은 측근일 뿐이다. 계파정치가 주름잡던 감리회 정치지형에 변화가 왔다. 금권의 위력으로 뚫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공고한 인맥을 뚫기에는 역부족이다. 인의 장벽에 막히면 정치력은 한계에 부딪친다. 정치소통은 인간 능력이다. 설교나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은인자중하는 인내심으로 승부하고 깊은 자비심으로 위기를 이긴다. 이것이 정치능력의 차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5년전 세계감리교협의회 의장 진출 문제였다. 계파정치에 숙달된 인사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세계협의회의 이니시어티브를 제 3세계 감리회 지도자들이 쥐고 있는 형편에서 미국교회에 매달려서 진출하는 방식을 택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독 한국 사람들은 미국이 최고인줄 알고 있다. 그것이 문제였다. 제 3세계 출신인 아시아 아프리카 감독들은 약하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 가난해 보이지만 오히려 당당하다. 제 3세계의 힘을 안고다니는 사람들이다. 그런 가운데 한국의 대형교회 출신 지도자가 미국 중심에서 진출 전략을 짜고 나타났다. 현장을 잘 아는 측근도 없었다. 자연히 제3 세계 출신인사들을 대접하는 것이 소홀하였다. 특히 국제기구의 선출직은 제 3세계 출신들이 여론과 주도권을 쥐고 있을 때가 많다. 영어만 못하지 실제로는 모르는 것 빼놓고는 다 안다. 제2 외국어인 영어도 실력이 있다. 회의 결과가 나왔다. 실패였다. 그런데 그 결과를 확인해 주는 측근들이 문제였다. 의장에 당선되었다고 알려준 것이다. 본인은 분명히 의장이 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크게 망신을 당했다. WMC 의장은 딴 사람이었다. 그 다음 번에 취임한 대형교회 목사도 비슷하였다. 조직적 기반이 취약한 선거조직을 운영했을 뿐인데도 선거에서 이겼으니 반대세력이 없는 줄로 착각하였는데 문제아들이 많았다. 레임덕 현상이 온 것처럼 악착같이 도전하고 괴롭혔다. 역부족이었다. 유능한 참모들도 곁에 없었다. 강경일변도로 업무를 보았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적들은 유유자적하면서 괴롭혔다. 상대방에게 물려서 낭떠러지 전략에 말려들었다. 고소를 하고 고소를 당하면서 유능한 변호사를 썼지만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 받았다. 임기 후에는 교도소까지 갔다. 그렇지만 감리회의 정치지형도 변한 것은 사실이다. 감독후보를 내지 못한 계파조직은 무너졌고 대형교회의 위력은 감리회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힘을 소진 당했다. 세습의 멍에로 인하여 당분간은 최고 지도력에 도전하기 어렵다. 이제부터는 중형교회 지도자 차례다. 문제는 지도자를 사람 됨의 실력과 영성의 깊은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교세로 본다. 교세가 크면 무조건 된다는식으로 세상을 본다. 실정법을 위반하고 범법행위까지 저지른 인가 범죄인 경력서를 제출해야 하는 선거법에 걸려서 무너졌다. 목사의 신원조회가 필요로하는 선거는 한심한 것이다. 그런데도 변호사 자문을 구하고 심지어는 현장에 대동하고 나서고 있다. 법원에 함께 가기도 한다. 실정법을 위반한 감독들이 투옥당하는 사례도 발생하였다. 법적 자격을 강화하고 제한하는 상황은 법적 제소거리를 찾고 쟁송을 하자는 것으로 봐야한다. 교회의 세속화는 법정에서부터 왔다. 로우스쿨을 나오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사람이 교회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교회 일은 교회를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한다. 중재하고 화해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처럼 교회가 세속화 되면서 돈 버는 이들은 변호사들이다. 물질이 풍요로우니까 법으로 다하려든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이다. 하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다. 법무법인에 랭킹이 있고 전관예우로 재판에 간여한다. 법조인은 의뢰인의 승소에 목숨을 건다. 승소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은 법정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인맥을 치고 들어가고 비밀협상을 하는데는 당할 재간이 없다. 화해하고 용서하는 걸 생명처럼 여기면서 살았던 교회 사람이 법으로 상대방의 약점을 찾고 재판을 이기 위하여 개인정보를 추적하고 능욕을 한다. 감리회는 지금 주군이 있고 가신이 설치고 있다. 상하관계가 분명한 두 세력들이 교회를 지배하고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리고 있다. 정치를게임으로 알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나 헌신을 무시하는 무소불위의 존재들이 설쳐대는 한 망하게 되어있다. 믿을 수 없는 상대를 믿는 척하고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곳으로 선이 옮겨져 있다. 논공행상이 엉뚱한 인사에게 돌아가려고 한다. 이것이 문제다. 감리회는 지금 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합의를 지키는 신의가 없는데 의리는 어디에서 찾는가. 상대를 속이고 내가 살겠다는 처절한 속임수의 정치를 하고 있는 중이다. 생명은 모름지기 경외심과 연민으로 가득차야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신뢰와 헌신이 가족을 살리듯이 인간관계가 만사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대드는 정치적 복병 위기상황을 돌파하는 힘은 전적으로 믿음밖에는 없다. 상대하기에는 버겁고 힘들다면 차라리 법률자문을 받아라. 변호사를 끼고 살든지. 최종적으로 법원의 판결문을 가지고 종결짓는 세상만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 내홍사태에서 드러난 가장 큰 취약점은 정치력의 부족이었다. 사전협상도 가능하고 중재도 필요하다. 변호사나 데리고 상담해가지고는 현장 소리를 듣지 못한다. 정치욕망은 크고 리더로서는 미숙하다. 필패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대응하는 기동력은 평소에 기도도 많이 하고 자비심을 배풀면서 살아야지 헤어난다. 지인도 없고 돕는 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이들은 어렵게 되어있다. 돈 많은 후계자가 지략이 없다. 우왕좌왕하면 권력이 누수 되고 욕심은 노출된다. 치명적이다. 그래서 내홍사태에 끼어든 언론기관이 피를 본 것은 이변처중에 능한 것 같아도 대도를 놓치면서 무너졌다. 욕망의 끝이 나온 것이다. 운신의 폭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자비심과 진실이 어우러져야 생명이 산다. 사람이 사는 세상을 그렇게 외쳤던 사람도 무너질 때는 너무 허무하였다. 영성의 깊이를 더하고 진실되고 정직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기본이 되어 있어야 한다. 자기를 찾아온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서는 지도자는 필패하게 되어있다. 무슨 일이든지 정확한 판단과 적절한 인맥을 투입하는 실력이 필수다. 소견은 좁고 머리는 비어있다. 욕심은 많고 결단은 늦다. 생각은 많고 행동은 누리다. 그러면 적들이 좋아 한다. 공격하기가 쉬워지니까. 변호사가 평소에 열심히 다니지 않았는데 교회사건을 의뢰받았다. 신앙의 바닥에 관심이 없고 공부만 하던 변호사는 교회사정에 밝아질 때까지는 나서지 말아야 한다. 어릴 때 신앙생활이라도 잘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성경에 능통하든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변호하려고 덤비지 말아야 한다. 재판은 진다. 실체적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법리로 이기지는 불가능하다. 상대는 오랜 세월 교회에 익숙하다. 그런 사람을 상대하여 법리로 이긴다고 어렵다. 형사재판이라면 모를가. 민사면 진다. 끈질기게 기도하고 억울하다고 울부짖으면서 달려드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교회를 사랑하고 믿음의 커다란 바탕위에 믿음을 앞세우며 내 친화력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너그럽고 인내심 있게 나간다.
9. 깊이를 모를 영성의 소유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감리회 감독회장은 천하를 제패한 군왕의 도리를 익혀서 교회의 거룩함을 수호하고 강력한 영감에 사로잡혀야 감리회도 살고 본인도 산다. 그렇지 못하면 필패다. 교회법이 문제가 아니다. 법보다 주먹이라고 법에 앞서는 것이 인간성이다. 인화하고 단결하는 능력이 있고 평소에 익숙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정의는 필승이지만 시간이 걸린다. 법적 조치는 잔인하다. 징벌이 따른다. 마지막에는 심판이 있다. 법적대응은 뒤끝이 있다. 법적 해결은 죽고 나서야 해결되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법치가 나쁜 것이다. 살아야 좋은 것이지 긍휼과 자비심이 없는 법치는 악마적이다. 지금 교회는 사회법이지배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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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