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탄신100주년 산문기고
“어데로인지 가는 선(線)을 보았다”
장윤우(성신여대 명예교수,시인)
선(線)
서울고등학교 1년 장윤우
어데로인지 가는 선(線)을 보았다
길고 가느다란 기름끼 없는 푸른 선을.......
산은 높아
구름조차 쉬어넘고
샘물은 차고 맑으나
퍼 주는 사람없는
호젓한 골짜기
싸릿가지는 싸르륵 싸르륵 떨고
죄질 일없는 하늘아래
버드나무는 장대 모양 서 있다,
이윽고 푸른 선은
나즉히 부르는 소리 쫓아 달리고
새봄의 서곡---
부슬비는 나린다
봄의 계곡을 타고 넘으며. -전문-
단기4288년 7월호- 학원지 P245-. 입선작 / 선고(選考) 김용호
선정위원이신 김용호시인은 이렇게 표현하여 주셨읍니다.
-산골짜기를 끼고 어디론가 끝없이 달리는 선. 그러나 주제에의 응결이 약하여 따라서 이메이지가 약해지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게 이 시의 약점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하나의 선을 중심하여 산골짜기의 주변의 이모저모를 잘 묘사한 곳에 이 시의 특이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삽화는 서양화가 백영수 화백이 담당하셨으며 이외에 산문도 학원에 입선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학원(學園)잡지라하면 학생들은 물론 왠만한 문인들까지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의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유일한 월간행물로서 학원사김익달 사장의 선의로 발행되였습니다,
예컨대 제주도의 김광협 학생은(훗날 동아일보기자, 작고시인) 매월 이 잡지가 나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선창가로 나가 배가 들어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노라고 피력한 바도 있습니다 당대 동년배의 오현고교 김종원시인도 마산의 이제하, 서울 유경환 구석봉 고영(공석하), 목포의 정규남,.........함께 선의로 겨루어가며 여기에서 닦은 기량으로 문단에 진출하여 대단한 활동을 현재 기우리고 사는 터입니다. 같은 서울고 년배 학생으로서 황동규, 갈천문, 마종기씨도 전국의 학생들 사이에서 모르는 문학도가 없었습니다.
돌아가셨어도 이땅의 훌륭한 문단사의 김용호시인을 학생시절에 흠모하여 먼 발치에서 가끔 뵙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봉직하시던 단국대학교에는 훗날 제가 대학원 강의를 맡으면서 체취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학산(鶴山) 김용호선생은 1912년5월26일 경남 마산에서 태여나 1973년 5월 14일서울 용산에서 61세의 아까운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시집 ,향연>, <해마다 피는꽃>,<푸른별>, <날개>, 장편서사시집<남해찬가>,<의상세례>,유시집<혼선(混線)>을 남기셨습니다, 단국대학교 문리대 학장으로 봉직하시기도 하면서 이동희,김태룡,김연식,신현득,김지향,자가들을 키워냈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늦깎이로 1963년도 1월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겨울동양화>로 데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당시 심사위원은 현재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미당 서정주, 박남수 시인이셨죠,
고(故)김용호 시인의 발탁 등이 싻이 되어서인지 오늘, 칠순의 나이임에도 신인다운 설레임을 안고 문단 말석에서 열심히 글을 쓰며 젊은 문인, 문우들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당시 6.25 남침전쟁의 후유증으로 한국사회 문단 모두가 저조하고 좌절에 가까운 풍조가 미만(未滿)하였읍니다만 오로지 <시인>이라는 이름 하나로 호기(豪氣)를 부리며 무관(武官)의 제왕인양 명동일대 동방살롱과 돌체, 청자, 청동, 갈채, 지하층 무아다방이며 은성 선술집들을 누비고 다녔다, 전봉건, 이인석, 김규동, 이활,김종삼시인들을 뵙고 기쁨을 누릴 수 있던 광화문의 월계다방, 조선일보사옆 아리스, 음악감상실 세시봉-, 종로 복지다방 등지로 거들먹거리고 누가 알아주던 말던 헤집던 날들이 기억됩니다, 별다른 모임장소가 열악해서인지 다방문화가 횡행하였다고 여깁니다, 이런 저런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갑니다.
직접 수학한 제자문인, 지성인들이 마련한 조촐한 추모의 자리- <오월의 향수>를 아마 대견스레 내려다보시며 기뻐하실 줄 압니다, 먼 발치에서나마 저도 이분이 가는 선(길)을 지켜드리렵니다, 총총,
- 2012, 5,25. 태화빌딩 강당 5시.김용호(金容浩)선생 탄신 100주년문학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