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18,9-18, 요한 16,20-23ㄱ): 삶이라는 고통을 빚어 ‘예술’이라는 기쁨으로
“예술이나 예술가가 태양의 이글거림이나 폭풍의 격동성을 지니지 못한 채 일시의 안락이나 하찮은 행복을 주는 데에 불과하다면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소설 <지(知)와 사랑>의 한 대목에 남긴 말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지탱해 가도록 사람들이 갈고닦는 기술(技術)도 훌륭한 것이지요. 그러나 기술이 어느 정점에 이르러 더 나아감을 멈추고 그저 반복된 학습의 결과 이상을 보여주지 못할 때는, 모두 똑같은 모습을 띠는 제품(製品)을 만드는 재주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기술의 단계를 뛰어넘어 자신의 혼을 담고 창조적인 자신만의 영혼이 결합된 새로운 감동을 자아낼 때, 비로소 그가 예술(藝術)을 빚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때 그 한끝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소위 뼈를 깎는 땀과 희생 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안락이나 하찮은 행복에 머물러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참 기쁨이 그곳에 서려 있으니까요.
우리 삶의 과정은 늘 그런 응답을 원하는 도전의 연속입니다. 무엇보다 고통이나 번민이 다가올 때, 회피할 수도 있고, 두려움 앞에 움츠려져 포기하려는 유혹이 가슴 깊은 곳을 흔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눈앞의 깊은 골짜기와 높은 언덕 앞에 오르기를 주저하거나 포기하면서, 저 너머에 펼쳐진 아름다운 평원의 안온함을 바라보지 못하는 나약함의 유혹이 될 것입니다.
No pain, No gain! 이 말과 같이 눈물의 힘겨움을 지나지 않고 얻어지는 혜안은 없는 법이고, 어떤 과정에도 손쉽게 오르는 왕도(王道)는 헛된 망상 속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기 삶에 드리운 온갖 고통을 묵묵히 짊어지고 견뎌낸 이가 마침내 지니게 될 성숙함은, 나이나 경험을 떠나 누군가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고, 깊은 지혜로부터 흘러나오는 권위가 있게 마련입니다.
골방의 어둠을 견뎌낸 이에게는 햇살의 소중함을 설득력 있게 전할 뜨거운 열정이 살아있고, 바닥까지 내려가 본 이의 상처에는 누군가의 시린 눈물을 헤아릴 수 있는 연민의 축복이 빛으로 흘러나와 아픈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사랑이 녹아있습니다. 온몸을 가눌 수 없는 십자가 위에서 영원하고 참된 용서가 완성되고, 죽음마저 상쇄되는 생명의 초대가 활짝 열리듯이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20절, 22절에서,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기쁨은 모든 조건과 환경의 만족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울며 애통해했던 고뇌와 근심 속에서도, 믿음으로 의지하고 목적을 상실하지 않은 이가 다다른 극복과 승리의 찬가입니다. 그것도 자기만족이 아니라, 삶을 동반하는 모든 이가 함께 서로를 보듬으며 나아가도록 기대고 이끌어 줄 사랑이 자아내는 환희입니다.
주님께서 작품으로 빚어주신 우리 삶을, 그야말로 예술이 되도록 끌어올리는 일, 그것이 우리가 돌려드려야 할 응답이며 의무입니다. 사도행전 18장 9절, 10절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믿고 발걸음을 내디딥시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을 믿고서 말입니다.
저 역시 결코 좌절할 수 없었던 길을 돌아보며, 저의 영혼을 지탱하여 주신 주님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영(靈)의 숨결로 느낍니다. 심장의 박동이 이어질 때마다, 날숨과 들숨으로 매 순간 살아있음을 느낄 때마다 그분의 현존과 위로를 체험합니다. 그분의 손길에 우리 손을 얹어 함께 삶이라는 축복을 기쁨으로 채워갈 부활의 때입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