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39편 1절 ~ 13절
[서론] 실존적 고뇌 앞에서 묻는 인생의 길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침묵과 고통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말하는 '실존적 허무'나 '불안'은 먼 학문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 역시 인생의 가혹한 시련과 자신의 한계 앞에서 깊은 침묵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다윗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정직하게 직면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은 19세기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의 삶과 깊이 닮아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세계적인 명성, 막대한 부, 완벽한 가정을 모두 이루었음에도 50세 무렵 심각한 영적 위기에 부딪혔습니다. "언젠가 죽어 흙으로 돌아갈 인생이라면, 내가 지금 이루고 있는 모든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절망적인 질문 앞에 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윗과 톨스토이가 거쳐 간 영적 여정을 신약적 조명과 철학적 사유로 탐구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가 붙들어야 할 참된 소망이 무엇인지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인생의 한계와 실존적 허무를 직시하십시오
본문 5절과 6절에서 다윗은 반복해서 인간의 상태를 노래합니다.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여기서 허사(헤벨, הֶבֶל)은 본래 '호흡', '한 자락의 숨', '연기'를 뜻합니다. 전도서 전체를 관통하는 "헛되고 헛되다"의 그 단어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견고하게 서 있는 순간(질병이나 고난이 없는 평안한 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순간 사라지는 숨결(헤벨)에 불과합니다.
이는 장폴 사르트르나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로서의 인간 실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쌓아 올린 자아와 유토피아는 죽음이라는 절대적 한계 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톨스토이 역시《참회록》에서 자신이 이 '헤벨'의 벽에 부딪혔을 때 삶의 모든 의미가 붕괴되는 유기적 절망을 겪었다고 고백합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은 이를 신약적으로 재해석합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신약은 인간의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과 세상적 성취가 유한성이라는 한계 속에 갇혀 있음을 명확히 지적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세상의 자원과 성공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는 '근대적 자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의 한계와 영적 파산을 정직하게 인정(헤벨)할 때 비로소 십자가의 은혜가 들어설 자리가 마련됩니다.
둘째, 세상의 헛된 우상을 내려놓고 오직 주께만 소망을 두십시오
다윗은 허무와 고통의 밑바닥에서 돌파구를 찾습니다. 본문 7절의 위대한 반전입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여기서 나의 소망(토헬레트, תּוֹחֶלֶת)는 '기다리다', '바라보다'라는 뜻의 동사 '야할(יָחַל)'에서 유래한 단어로, 단순히 유연한 기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함으로 견디어내는 집중된 기다림'을 의미합니다.
Soren Kierkegaard(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세상적 윤리나 지식을 넘어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신앙의 도약'이라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의 회심이 정확히 이 지점에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학문, 명예, 재산이라는 가짜 소망(우상)을 철저히 떨쳐 내고,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의 말씀 앞으로 도약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찾던 의미가 '내 안'이나 '세상'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 24-25절에서 이를 부활의 소망으로 승화시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신약의 토헬레트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된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성도는 세상이 제시하는 가짜 소망(소비주의, 스펙, 물질적 안락)에 영혼을 기탁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과 한계의 순간이야말로 타성적인 신앙을 버리고, 오직 주님께만 우리의 '토헬레트(소망)'를 앵커링(Anchoring)해야 할 때입니다.
셋째, 이 땅에서 나그네임을 자각하고 영원한 본향을 향해 살아가십시오
본문 1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의합니다.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여기서 히브리어 게르(גֵּר)는 자기 소유의 땅이 없이 타국에 거주하며 보호를 받아야 하는 '거류민' 또는 '나그네'를 뜻합니다. 다윗은 한 나라의 존엄한 왕이었으나, 영적으로는 이 땅에 영원히 정착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그네'임을 자각했습니다.
이는 '소외(Alienation)'와 '기류(Adjournment)'의 철학입니다. 이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거룩한 불편함입니다.
톨스토이 역시 회심 이후 귀족으로서의 특권을 내려놓고, 대지주라는 신분을 부끄러워하며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복음의 순수성을 실천하는 '땅 위의 나그네 삶'을 자처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은 신약의 교회를 향해 동일하게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16절은 이 나그네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곳이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임을 밝힙니다.
오늘날 교회가 지상주의(Terrestrialism)에 빠져 이 땅에 정착하고 기득권을 집착할 때 세속화됩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게르(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그네는 짐을 가볍게 쌉니다.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라는 본향을 향해 매일 삶을 정돈하는 거룩한 나그네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결론] 허무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톨스토이가 세상의 성공이라는 허무를 뚫고 나와 하나님을 만났듯이, 다윗이 인생의 한계 끝에서 주님을 바라보았듯이, 우리도 오늘 이 순간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ㆍ인생은 한 자락의 연기이자 숨결인 헤벨(הֶבֶל)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는 은혜의 시작입니다.
ㆍ우리의 소망(토헬레트, תּוֹחֶלֶת)은 이 땅의 썩어질 것에 있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 있습니다.
ㆍ이 땅에서 왕으로 살려 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하늘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거룩한 나그네(게르, גֵּר)로 살아가십시오.
세상의 소란함과 헛된 자랑을 내려놓고, 오직 영원하신 주님께만 소망을 두어 승리하시는 복된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