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제1년 4월 2일 레위기 5장 찬송가 193장(새찬송가 257장)
01.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02. 누구든지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들 무릇 부정한 것을 만졌으면 부지중에라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
03. 혹시 부지중에 사람의 부정에 다닥쳤는데 그 사람의 부정이 어떠한 부정이든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이요
04. 혹 누구든지 무심중에 입으로 맹세를 발하여 악을 하리라 하든지 선을 하리라 하면 그 사람의 무심중에 맹세를 발하여 말한 것이 어떠한 일이든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것이니
05.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고
06. 그 범과를 인하여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양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07. 만일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속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 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08.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 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09. 그 속죄 제물의 피를 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10. 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범과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11. 만일 힘이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에도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인하여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 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12. 그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기념물로 한 움큼을 취하여 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속죄제라
13. 제사장이 그가 이 중에 하나를 범하여 얻은 허물을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그 나머지는 소제물같이 제사장에게 돌릴지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5.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든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너의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수양을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16. 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되 그것에 오분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17.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18. 그는 너의 지정한 가치대로 떼 중 흠 없는 수양을 속건 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부지중에 그릇 범한 허물을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19. 이는 속건제니 그가 실로 여호와 앞에 범과함이니라
“속건제(贖愆祭) 규례”
5대 제사 중 다섯 번째 제사는 속건제(贖愆祭, Guilt Offering)입니다. 속건제는 속죄제의 한 형태로서 어떤 경우에는 속죄제를 드리고 어떤 경우에는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가는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속죄제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거나 하나님의 성물에 대하여 손실을 끼치지 않았으나 자신의 거룩함과 정결함에 문제가 생겼을 때 드리는 제사로 보이고, 속건제는 여호와의 성물이나(5:14-16) 금령을 범하거나(5;17-19) 이웃에게 재산상의 피해를 주었을 때(6:11-7) 드려지는 제사로서, 이때 속건 제물로는 숫양이 요구되었고, 가해자는 자기가 끼친 피해액에 5분의 1을 덧붙여서 배상하여야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그리스도가 당할 고난을 속건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사 53:10). 말하자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기 이전에 하나님께 손해를 끼친 모든 것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그 희생을 통하여 보상하셨음을 말해 줍니다.
이처럼 속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으로 성취가 됩니다만, 속건제의 배상 의무 규정은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 구체적인 회개의 열매가 따라야 함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마 3:8; 눅 19:8-9 참고).
속죄제를 드려야 할 경우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규례(1-13절)
【1-6절】여기서는 속죄제를 드려야 할 경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예가 제시되어 있는데, 모두 태만이나 부주의에 의해서 이루어진 죄과이며, 그 죄과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 경우의 죄에 대해서 속죄제가 드려졌습니다.
【7-10절】평민들의 속죄제는 암염소나 어린 양으로 드리게 되어 있었지만, 이를 바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로 속죄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범죄할 수 있고 태만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고, 가난한 자들도 그러한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이처럼 예외 규정을 두시고 계십니다.
【11-13절】비둘기 새끼들조차 바칠 수 없는 극빈자의 경우에는 기름이나 유향을 쓰지 않은 고운 가루로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기름이나 유향을 쓰지 않는 것은 거룩함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의 의미가 그 가운데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면서, 또 극빈자로서 기름이나 유향을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예배자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서 융통성 있는 법칙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이로써 가난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속건제의 규례(14-19절)
【14-16절】다섯 번째 종류의 제사는 속건제입니다. 속죄제의 경우는 하나님이나 다른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나 자신의 정결과 거룩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드리는 제사이지만, 속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범했거나 이웃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여기서 속건제를 드려야 할 범죄에 대해서 예를 들고 있는데, 여호와의 성물을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남용했다거나,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재산상의 손해, 미납 등이 관련되었을 경우에는 속죄제가 아닌 속건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속죄제는 범죄자 자신에게 국한된 문제이기에 제사를 드림으로써 문제 해결을 받을 수 있지만, 속건제에는 반드시 배상 책임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성물을 범한 것에 대해서는 오분의 일을 더하여 배상해야 했습니다.
【17-19절】성물과 관련된 범과가 부지중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그 성물에 대하여 범과한 것이라면 속죄제가 아닌 속건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해를 끼쳤기 때문입니다. 속건제의 경우에는 속죄제와 같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나 제사 방법의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속죄제의 경우에는 단순히 자신의 거룩함에 손상을 입었을 경우이지만, 속건제의 경우는 하나님이나 이웃에게 손상을 입힌 경우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야만 했습니다.
◈ 묵상을 돕기 위한 질문
1.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제사는 어떤 제사입니까?
2. 오늘날에 있어서는 속건제의 정신이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겠습니까?(눅 19:8-9 참고)
◈오늘의 기도
“나의 삶을 통해서 참된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믿음의 글◈ “사죄의 확신과 뻔뻔스러움”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니기 전에 이웃들에게 많은 금전상의 손해를 끼치고 다녔습니다. 이웃들 중에서는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가 받지를 못해서 극심한 가정 불화가 일어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쩌다 다른 사람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오고 나서는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이전에 자기가 금전적으로 손해를 끼친 이웃들이 지금이라도 갚아 줄 것을 요구하니까 “하나님도 나를 다 용서하셨는데, 나는 더 이상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이런 경우 그가 가진 사죄와 구원의 확신은 사실은 진정한 확신이 아니고, 양심이 마비되어 나타나는 뻔뻔스러움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성령님이 그의 속에서 감동하시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이전에 자기가 손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며 할 수 있는 한 자기가 끼친 손해를 갚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오시자 주님을 영접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기가 세리로서 살아가면서 이웃들에게 끼친 손해를 네 배나 갚을 뿐 아니라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런 삭개오의 결단과 회개의 열매를 보시고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이런 회개의 열매들이 너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값싸게 바겐세일된 복음 때문에 교회 안에는 점점 참된 회개의 열매가 없는 ‘뻔뻔이’들이 많아지고 그 때문에 교회가 자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