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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교회사-죠지 밀러와 영국의 형제회
19세기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냉담하고 침체되고 형식화된 종교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유럽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각국의 영토가 재편성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언, 특히 주님의 재림에 관한 진리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영국 내에서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성공회의 죽어 있는 상태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잇달아 자유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성경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해외 선교에 열심을 냈으며 각지에 성서공회를 설립했다.
1827년 에드워드 크로닌(Edward Cronin)과 한 무리의 형제들이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떡을 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영국 형제회의 시작이다. 점차적으로 이 모임은 더 많은 사람들을 더블린에 오도록 매혹했다. 그 가운데에는 앤서니 노리스 그로브스(Anthony Norris Groves)와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가 포함된다.
치과의사인 그로브스는 주님에 대한 갈망을 가졌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금액을 모두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헌신(Christian Devotedness)>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글을 썼다. 그 글은 조지 뮐러의 봉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 조지 뮐러(George Mueller, 1805-1898)
조지 뮐러는 프로이센의 한 농촌에서 태어나 후에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젊었을 때 뮐러는 불신과 죄악 속에서 살았다. 회심한 후 그는 고아원에 헌신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일은 브리스틀에서 시작되었다. 브리스틀은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선박 수송의 항구 도시이다. 뮐러는 1836년, 여기에 집을 세 내어 첫 번째 고아원을 세웠다.
1849년 그는 다시 브리스틀 교외의 산에 여러 층으로 된 집을 직접 지어 새로운 고아원을 세웠다. 처음에는 스물여섯 명의 고아들이 있었는데, 2년 뒤 그의 돌봄 아래 있는 고아들은 삼백 명에 달했고 그의 일은 크게 확장되었다.
지금 영국의 브리스틀 시의 가장 큰 고아원은 그가 실제로 기도하여 얻은 기념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아원을 건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일생 동안 뮐러가 받은 헌금은 125만 파운드가 넘는다.
이 헌금의 전액은 뮐러가 사람들에게서 모금한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모두 자원하여 보내어 온 것이다. 이러한 기적에 대해 뮐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은 …모두 때에 맞추어 공급되었습니다.
아무도 제가 누구에게 한 푼이라도 요구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어떤 위원회나 모금을 권면하는 사람이 없고 어떤 결의안이나 이자를 불려서 생긴 자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이 모든 헌금을 믿음의 기도로 말미암아 얻은 것입니다."
뮐러의 믿음은 그의 꾸준한 기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항상 기도 안에 살았다. 그는 길을 걸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무엇을 하든지 항상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천번, 만 번 뿐이겠습니까? 저는 어떤 일이 옳다고 확신하면 결코 그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으며 기도가 응답받는 것을 하나의 영적인 율로 여겼다. 뮐러는 기도로 고아원을 돌본 것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건한 성경학자이자 전도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다른 어떤 책보다 성경을 더 중요시 했다. 그는 매일 새벽에 들판을 한두 시간 거닐면서 성경을 읽고 각 구절을 묵상하였는데, 그것은 그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이끌었다. 이로 인해 그는 새 힘을 얻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이제까지 그의 고아원에 수용된 고아들은 만 명이 넘는다. 그들은 교육받고 훈련받은 후에 세계 각지로 보내어져 유용한 일을 하였다. 이것 외에 그는 남은 힘을 기타 자선 사업에 썼다.
2). 형제회가 일어남
1827년 에드워드 크로닌과 한 무리의 형제들이 더블린에서 집회를 시작한 것이 형제회의 시작이다. 본래 천주교 신자였던 크로닌은 건강 문제 때문에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이주하였다. 혼란한 종교의 상태에 대해 곤혹스러웠던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함으로 그 원인을 알고자 했다.
그는 성경에서 교회가 오직 하나라는 것을 보았고 모든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며 주님께서 주신 은사 있는 사람들이 그분의 사역을 수행한다는 것을 보았다.
비록 그들의 모임이 당시 기독교계의 비평과 공격을 받았지만 그들의 인수는 날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시작 단계에 대해 크로닌은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자기 마음을 비운 형제들을 우리에게 더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피츠윌리엄(Fitzwilliam)의 집이 더 이상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주일날에 안기어(Aungier) 가의 회의실로 장소를 옮겨 모여야 했습니다.
존 파넬(John Parnell), 윌리엄 스톡스(William Stocks) 등, 여러 형제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 저녁 집회 장소를 정리하고 떡과 잔을 소박한 테이블 위에 둘때에 제 마음이 매우 기뻤습니다. 이러한 기쁨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모임의 시작에는 주님의 임재뿐 아니라 주님이 얼굴빛도 있었습니다."
후에 다비가 이러한 모임에 매료되었다. 다비는 1800년에 태어나 15세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한 수재였다. 당시에는 법학을 전공한 학생들은 졸업 후 바로 아일랜드의 법원에서 일할 수 있었으나 다비는 성공회의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였다. 다비 자신은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 저는 온전히 사도직분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는 유일한 통로가 되기 원했습니다.
당시 다비는 오직 천주교만이 사도 직분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마르틴 루터와 칼뱅과 그의 추종자들을 '교회에서 제명했다.
1827년 겨울, 다비는 형제회의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국교회의 직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두 척의 배에 발을 각각 두고 있었으나 점차적으로 교회에 관한 진리를 보게 되었다.
1828년 다비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과 합일에 대한 탐구>라는 한 편의 글을 썼는데, 그것은 형제회에서 출판된 첫 번째 문서가 되었다. 2년 후에 그는 정식으로 성공회를 떠났다.
다비의 인도로 형제회 모임은 잉글랜드 등지로 확장되어 '형제회운동'이 되었다. 이것은 유럽과 미주 각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브리스틀에서의 '형제회운동' 으로 조지 뮐러와 헨리 크레이크(Henry Craik)를 얻었다. 잉글랜드의 플리머스에서 다비는 벤자민 뉴턴(Benjamin Wills Newton)을 얻었다.
벤자민 뉴톤의 부모는 퀘이커교 신자였고 뉴턴은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는 기간에 다비를 만났다. 그가 다비의 '형제회 운동'에 참여한 후에 플리머스에 있는 그의 집은 잉글랜드에 있는 형제회의 첫 번째 거점이 되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플리머스 형제회(Plymouth Brethren)" 라고 불렀다.
플리머스에 있는 형제회 모임은 얼마 되지 않아 인수가 천 명이 넘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이 기간의 형제회 생활에 대해 뉴턴은 "땅 위에 있는 것이 하늘에 있는 것 같습니다." 라고 묘사했다. 그들 가운데 한 믿는 이는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말했다. "그곳은 집에 있는 것처럼 평안했고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저를 깨우쳤고 그들의 기쁨은 저를 격려했습니다. 그들의 교통은 저를 위로했고 그들의 보살핌은 저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들의 단일하고 순수함은 저로하여금 달콤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곳은 성령의 열매가 흘러 넘쳤습니다."(갈 5:22) 비록 프리머스 모임을 다비와 뉴턴이 함께 주관했지만, 다비가 런던에 가서 집회를 하고 메시지를 전해야 했기 때문에 주된 인도 직분이 뉴턴에게 있었다.
런던에서의 다비의 일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인근에 있는 도시들에서도 앞 다투어 그에게서 성경안에 있는 예언에 대한 해설을 들으러 왔다. 그중의 한 사람이 나중에 형제회에 가입하여 《성경 헬라어 콘코던스》와 《성경 히브리어 콘코던스》의 발행을 도왔던 위그램(G, V, Wigram)이다.
다비가 인도한 모임에는 계급 제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서로를 형제라 불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형제회"라 칭했다. 형제회는 몇 가지 주된 관점과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1. 주의 상을 세우기 위해서 성직자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고 성직자가 없을 경우에도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일 수 있다.
2. 어디에서든지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신다.
3. 모든 믿는 이들에게 다 제사장 직분이 있고 성직자 계급은 조금도 성경에 부합하지 않다.
4,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믿는 이들은 서로 교통할 필요가 있다.
5. 성경 안에 있는 예언들, 특히 아직 성취되지 않은 부분들을 연구한다.
6. 주님께서 받은 모든 사람들을 받고 그들과 함께 떡을 떼고 모임을 갖는다.
7. 다른 단체에 가서 말씀 전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성경 해석에 대한 차이점 때문에 형제들 가운데 점차적으로 분열이 들어났다. 이 분열은 주로 성경 예언에 대한 다른 해석에서 비롯되었다. 다비는 믿는 이들이 대환난 전에 전체가 휴거될 것으로 여겨졌고, 뉴턴은 믿는 이들이 반드시 대환난을 거쳐야 하고 대환난이 끝나기 전에 모두가 휴거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로브스는 오직 이기는 믿는 이들 만이 천년왕국에 참여하고 그것을 상으로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뿐 아니라 그들은 교회 본질과 부르심 받음과 교회 치리(治理)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다비는 한 지방 교회에 대한 책임과 징벌은 전체 교회가 결정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고, 그로브스는 교회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다스림을 받아야 하며 서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벤자민 뉴턴은 각지 교회가 자체적으로 장로를 세우고 각 지방별로 행정적인 사무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46년 다비는 "사건의 진상(A Narration of Facts)" 을 발표했는데, 그 안에는 뉴턴을 질책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듬해 2월에 다비를 주동으로 한 잉글랜드 각지 형제들은 런던에서 모여 같은 목소리로 뉴턴의 가르침을 '프리머스에서 나온 악한 교훈' 이라고 질책하면서 그들과 절대 분리를 주장했다.
이때에 뮐러와 크레이크의 인도 하에 있는 베데스다(Bethesda) 형제회는 플리머스의 가르침이 이단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면 그들을 거절할 이유가 없고 교리적인 차이 때문에 그들을 격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비는 베데스다 형제들이 뉴턴의 무리와의 교통을 즉각 단절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도 격리하겠다고 말했다. 다비의 강한 주장 때문에 형제회는 다비를 주동으로 하는 '폐쇄파 형제회(Closed Brethren)', 뮐러와 크레이크를 주동으로 하는 '공개파 형제회(Open Brethren)' 로 나뉘었다.
분열된 후 형제회는 각각 자신의 노선을 발전시켜 나갔다. 공개파 형제회는 푸저우(福州)에서 복음전파에 힘을 쏟았고 그 범위는 중국, 인도, 아프리카. 뉴질랜드 등에까지 미쳤으며, 그들에 의해 전도지를 배포하는 많은 문서기관이 세워졌다.
폐쇄파 형제회도 <구원, 기쁨, 확신>의 저자인 조지 커팅(George Cutting)과 같은 소수의 능력 있는 전도자가 일어났지만, 대부분 그들의 주된 일은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었다. 그들 가운데 윌리엄 켈리(William Kelley)와 매킨토시(Mackintosh)와 같은 몇몇 저명한 성경 교사들이 나왔다.
3). 왕국 진리에 대한 회복
형제회 가운데 많은 유명한 해설가들이 일어났는데, 그중 한사람이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이다. 고벳은 1813년에 태어나 1830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졸업 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44년 그는 유아 세례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성공회를 떠나 서리 채플(Surrey Chapel)을 세웠다.
모이는 인수가 점차 많아지자 부득불 빅토리아 홀(Victoria Hall)을 집회 장소로 삼게 되었다. 1854년에 서리 채플은 다시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고 고벳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목회하였다.
고벳은 뛰어난 사고 능력과 진리에 대해 항상 깊이 연구하는 성격을 가졌다. 그는 세상 끝 날의 심판과 천년왕국의 관계를 연구하다가 천년왕국이 하나님께서 충성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보상이라는 것을 보았다.
비록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생활로써만 하나님 앞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은 생명의 문제이지만 보상은 생활의 문제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천년왕국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충성을 다하고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과 대환난 전에 모든 믿는 이가 휴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고 충성된 믿는 이들만이 천년왕국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벳에게는 데이비드 팬톤(David M, Panton)이라는 조력자가 있었다. 팬톤은 자마이카(Jamaica)에 있는 성공회 가정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고 케임부리지(Cambridge)에서 법률 학위를 받았다.
팬톤은 매우 뛰어난 성경 교사였으므로 많은 이들이 매료되어 그가 인도했던 기도 모임이나 성경 연구반이나 주일 학교에 참석했다. 그는 또한 《여명(The Dawn)》이라는 잡지의 편집자 중 한 사람으로서 그 잡지에 성경 해설에 관한 많은 글들을 발표했다.
형제회에 고벳과 동시기에 저명한 또 한사람의 성경 교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펨버(G, H, Pember)이다. 성경의 예언에 관한 많은 저작을 펴낸 그는 백여 년 동안 가장 위대한 성경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휴거에 대한 그의 관점은 고벳과 팬톤의 관점과 일치했다.
그는 오직 이기는 믿는 이들만이 대환난 전에 공중으로 휴거되어 주님을 만날 것으로 여겼다. 일찍이 폐쇄파 형제회에 가입했던 조지 랭(George H, Lang)은 후에 공개파 형제회에 가입하여 펨버와 스펄전과 조지 뮐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지 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노르웨이, 독일,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이집트, 수리아, 파키스탄, 인도 등지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 성경의 예언에 대한 형제회의 해석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그 시기의 사람들은 왕국의 예언에 대해 중요시하게 되었다.
한국 복음서원 교회사 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