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개봉한 영화 <사도>는 사도세자(유아인 분)의 비애와 최후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는 사도세자가 뒤주, 즉 쌀통에 갇힌 뒤 숨을 거둔 8일간의 상황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 영조(송강호 분)와 사도세자 사이에 생긴 애증의 기억을 중간 중간에 끼워 넣었다.
영화는 천재성을 타고 태어난 아들에게 큰 기대감을 가졌던 영조가 점차 아들에게 실망하다가 결국에는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일부 장면에서 픽션을 가미한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역사 기록을 충실히 반영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내면도 기록에 근거해서 비교적 잘 묘사했다. 두 배우의 표정이나 대사는 사료에서 도출되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실제 내면을 상당히 잘 반영했다. 특히 배우 송강호의 경우, 영조와 너무나 딴판인 외모로도 영조와 꽤 흡사한 내면을 보여줬다.
영화 속의 사도세자는 물론이고 실제의 사도세자도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사랑받으려 애쓰다가 나중에는 반항적인 아들로 돌아섰다. 사도세자는 그런 아들이었다. 그렇다면,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에겐 어떤 아버지였을까?
정조에 대한 사도세자의 마음은, 아들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고 죽는 아버지가 가질 법한 '미안한 마음'이었을까? 물론 그런 마음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훨씬 더 복잡·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 외에 또 다른 마음도 분명 자리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그다지 강조되지 않은 부분이지만, 아들에 대한 사도세자의 정확한 심리는 그의 주변 환경에서 도출될 수 있다.
사도세자는 갓난아기 때부터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감 속에서 성장했다. 영조는 아들이 학자 같은 군주가 돼 조선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길 희망했다. 그래서 영조는 아들을 독하게 키웠다. 영조의 며느리이자 사도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쓴 회고록인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는 아들이 생후 100일이 되자 부모의 품에서 떼어내 보모의 손에 맡겨졌다.
그것도 모자라 영조는 경종을 모셨던 궁녀들이 아들의 곁을 지키도록 했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영조는 경종과의 경쟁을 거쳐 왕이 됐다. 거기다가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까지 받았다.
그런 영조가 경종의 궁녀들을 일부러 모아서 아들을 맡겼다. 자신이 경종을 독살하지 않았음을 입증하고자 그렇게 했을 수도 있지만, 자기 후계자가 될 아기를 적대적인 궁녀들의 수중에 넘긴 것만 봐도 영조가 얼마나 독한 마음을 품고 아들을 키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군다나 아기 시절 사도세자의 음식을 준비하는 장소는 과거에 장희빈(희빈 장씨)이 살던 곳이었다.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은 영조가 태어나기 전에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빈(숙빈 최씨)에게 위해를 가했던 사람이다. 그런 장희빈의 거처에서 자기 아기의 음식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영조는 생후 석 달밖에 안 지난 사도세자가 그런 적대적 환경에서 살아남아 훌륭한 군주로 성장하기를 희망했다. 참 지독한 아버지였다. 그만큼 아들에 대한 영조의 기대감은 남달랐다.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빈은 서민 출신이다. 원래 무수리였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공노비 출신이다. 그런 어머니한테서 태어났기 때문에 영조는 원래 임금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임금이 된지라 영조는 자기 아들만큼은 최고의 엘리트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좀 과하다 싶은 기대감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마음 속에서는 아버지가 차지하는 공간이 남들보다 훨씬 더 넓을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만을 쳐다보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곧 주군이요, 고용주인지라 그는 아버지의 칭찬을 받기 위해 더욱더 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생모인 이영빈(영빈 이씨)은 후궁인 까닭에 세자의 양육에 깊이 개입할 수 없었다. 후궁의 아들로서 세자가 된 사람은 왕비의 양자가 되기 때문에, 후궁과 세자 사이에는 법적 모자관계가 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인 후궁이 죽는다 해도 세자는 어머니의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왕실은 이영빈과 사도세자를 갈라놨고, 두 사람은 정상적인 모자 사이가 될 수 없었다. 어쩌다 한 번씩 부딪히는 서먹서먹한 사이였다.
보수파 노론당의 압박을 받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는 과정에서 이영빈의 동의가 결정적 기능을 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영빈은 정상적인 모성애를 가진 여성이 아니었다.
영조 38년 윤 5월 13일 자(1762년 7월 4일 자) <영조실록>에서는 "영빈은 세자를 낳은 이씨다, 그런데도 주상께 (세자에 대해) 밀고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이렇게 어머니와의 관계가 정상적이 아니었기에, 사도세자는 더욱더 아버지한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심리적 경향은 결혼으로도 바뀌지 않았다. 혜경궁과 사도세자의 결혼은 이른바 정략결혼이었다. 정략결혼이라고 표현한 것은 혜경궁 집안이 대단한 권세가라서 그런 게 아니다. 여기서 말한 정략결혼이라는 것은 애정 없는 결혼이라는 의미다.
두 사람은 단순히 정 없는 부부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경쟁적 혹은 적대적 관계였다. 사도세자는 보수파의 중심인 노론당을 비판하고 노론당의 일원인 왕실 사돈들을 비판했다. 사도세자의 비판 대상에는 자기 처가인 홍씨 가문도 포함돼 있었다.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서고, 사도세자 사망일에 혜경궁의 작은아버지인 홍인한이 너무 기쁜 나머지 한강에서 뱃놀이를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혜경궁 입장에서는 사도세자가 남편인 동시에 정적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아내로 살기보다는 아버지 홍봉한의 딸로 살기를 원했다. 혜경궁은 남편의 동정을 친정집에 귀띔해주는 스파이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부부는 속마음을 감춘 채 겉으로는 별일 없는 듯이 사는 부부였다.
또 혜경궁은 남편이 죽임을 모면할 기회마저 차단했다. 사도세자가 죽기 전에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한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혜경궁은 얼른 정조를 데리고 궁궐을 빠져나갔다. 영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도세자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을 궁에서 없앤 것이다. 이렇게 부인마저 정적 못지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향한 사도세자의 마음은 한층 더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는 정조에게 어떤 아버지였을까
▲ 사도세자의 사당이 있었던 경모궁 터.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의 서울대학교병원 뒤편에 있다. 대학로에 있는 혜화역 인근이다.
사도세자의 마음 속은 온통 아버지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아들 정조와의 관계 역시 온전할 수 없었다. 물론 사도세자는 아들에게 좋은 아버지로 기억됐다. 정조는 아버지를 동정하고 존경했다.
이 점을 보면 사도세자가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제한적 범위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도세자와 정조 사이에도 상호 충돌하는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자신이 아들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중록>에 따르면, 다가오는 비극을 예견한 사도세자는 부인 앞에서 "(나는) 아마도 무사하지 못할 듯하니, 어찌할꼬?"라고 하소연했다. 혜경궁이 속마음을 감춘 채 "(아바마마께서) 설마 어찌하시리까?"라고 대답하자, 사도세자는 "세손(정조) 만큼은 귀하게 여기시니, 세손이 있는 한 나를 없앤들 상관 있을까?"라고 내뱉었다.
사도세자는 자신이 사라져도 정조라는 대안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 영조가 자기를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후계자인 자신한테 아들이 없다면, 아버지가 자기를 죽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대하는 사도세자의 마음에는 처량하고 씁쓸한 느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로서 품기 힘든 생각을 입 밖으로 발설한 것으로 보면, 아들을 바라보는 사도세자의 시선 속엔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복합적으로 담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시선 속에는 아버지의 시선 이외에 다른 것도 분명히 담겨 있었다.
아버지 영조가 자신보다 아들 정조를 선택할지 모르겠다고 염려한 것을 보면, 사도세자에게는 '정조의 아버지'라는 위치보다 '영조의 아들'이라는 위치가 더 소중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정조의 아버지로 살기에는 사도세자의 처지가 너무 각박했음을 의미한다. 그는 영조의 아들로만 살기에도 벅찬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정조는 그런 아버지를 사랑하고 동정하고 존경했다는 점이다. 정조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복수를 이루겠다는 꿈을 품고 살았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즉위식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한 뒤 아버지의 개혁 의지를 실현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게다가 정조는 아버지가 태어난 창경궁 집복헌과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한 건물인 영춘헌에서 평소 독서를 즐겼고 인생 최후의 순간을 맞았다. 참고로, 정조가 사망한 후에 집복헌과 영춘헌이 지금처럼 한데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가 정조에게 부성애와 경쟁심을 동시에 느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조의 아버지 사랑은 어쩌면 짝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아버지 영조를 짝사랑한 사도세자의 마음병이 아들 정조한테도 대물림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도세자는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가정적으로도 가슴 아픈 사연의 주인공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직후에 '생각하다, 그리워하다'를 뜻하는 사(思)와 '슬퍼하다'를 뜻하는 도(悼)라는 글자로 아들의 시호를 제정했다. 이때부터 영조의 아들은 사도세자로 불리게 됐다. '사도'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처량함과 서글픔처럼, 아버지 영조에 대한 사도세자의 정서 못지않게 아들에 대한 영조의 정서도 처량하고 서글픈 것이었다.
첫댓글 한가지 문의 하겠습니다
경종임금이 20대(재위:1720년6월~1724년8월까지 재위 후 영조임금이21대(재위:1724년월~1776년3월)까지 재위를 하게 되었는데 어떻해 경종과 겨루어 왕위를 재위 하게 되었는지? 이내용이 궁금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