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논산·공주시 답사 안내문
향토문화탐방반 10월 논산·공주시 답사 안내문 | 2023. 10. 10(화) |
< 답사 일정 >
- 07 : 30 서울 시청역 출발 - 07 : 50 죽전 간이 정류장 출발 - 07 : 50∼10 :00 논산시 돈암서원 도착 - 10 : 00∼11:00 ❶ 논산시 돈암서원 답사 - 11 : 00∼11:15 관촉사 이동, 도착 - 11 : 15∼12:15 ❷ 관촉사 답사 | - 12 : 15∼13:00 ❸ 공주시 ‘세이학 가든’식당 - 13 : 05∼14:00 <점심 식사> *공주 국밥(11,000원) - 14 : 00∼15:20 ❹ 공산성 답사 - 15 : 20∼15:30 무령왕릉 이동, 도착 - 15 : 30∼16:30 ➎ 무령왕릉 답사 - 16 : 30~19: 00 서울 이동 및 도착 |
◈ 관촉사(灌燭寺) : 보물 제232호
- 동양 최대의 불상인 ‘은진미륵’이 있는 사찰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관촉사는 고려 광종 19년(968)에 혜명(慧明)이 불사를 짓기 시작하여 1006년에 완공하였다. 옛날 중국의 지안(智安)이라는 명승(名僧)이 이 절에 세워진 은진미륵을 보고 미간의 옥호(玉毫)에서 발생한 빛이 “마치 촛불을 보는 것같이 미륵이 빛난다” 하면서 예배하였다. 이런 연유로 관촉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경내에는 석조 미륵보살 입상(보물 218호)을 비롯하여 석등(石燈: 보물 제232호)·사리탑(舍利塔)·연화배례석(蓮花拜禮石: 충남 유형문화재 제53호)·사적비(事蹟碑)·관음전(觀音殿)·삼성각(三聖閣)·사명각(四溟閣)·해탈문(解脫門)·현충각(顯忠閣)·기미독립운동기념비 등이 있다. 절 입구에는 1914년에 만든 반야교(般若橋)라는 현대식 구름다리도 있다.
◇ 논산 관촉사 석등 : 보물 제232호
이 석등은 석조 미륵보살 입상과 함께 고려 광종 19년(968)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남한에서는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를 보여준다. 특히 화사는 물론 기둥에 이르기까지 전형적인 8각 석등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석등 조성 양식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석등이다.
◇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 보물 제218호
‘은진미륵’으로 더 많이 알려진 석조 미륵보살 입상은 높이 l8.12m나 되는 커다란 불상이라는 점과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 대표적인 불상이다.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삼각형이며 옆으로 길게 째진 눈, 넓은 코, 한 일(一)자로 꼭 다문 큰 입이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목은 굵고 삼도(三道)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매달린 느낌이다. 이 불상은 고려 광종 19년(968)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 관촉사 배례석 : 충남 유형문화재 제53호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배례석은 조각이 정교하고 장중한 맛이 풍기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논산 돈암서원(遯巖書院) : 사적 제383호
- 유학자 사계 김장생을 모신 서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물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이 선생을 추모하며 기리기 위하여 사우(祠宇)를 건립한 뒤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내려오다가 사당 앞에 강당을 세우고, 선생의 학문을 배우며 그 뜻을 이어 왔다.
돈암서원은 인조 12년(1634)에 창건하였으며, 현종 원년(1660)에 사액(賜額)되어 사계 김장생 선생을 주향으로 하고,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선생 네 분을 모시고, (음력) 3월, 8월에 문묘 석전(釋奠)의례에 따라 제향하고 있다.
그 당시 원우(院宇) 서북쪽에 돈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어서 서원의 이름을 돈암(遯巖)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의 지대가 낮아 홍수 때 뜰에까지 넘쳐들자 고종 18년(1881)에 현재 자리로 옮겨지었다. 그 당시 응도당은 구조가 오랜 옛 가옥제도를 본 따서 지어 너무 웅장하고 크고 넓어 옮겨 짓기가 어려우므로 사당 앞에 모형을 세운 것이 현재의 강당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흥선대원군 때에 47개 서원만을 남기고 600여개소의 서원을 모두 철폐하였으나 돈암서원과 광석의 노강서원은 남아있었다.
◇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凝道堂) : 보물 제1569호
응도당(凝道堂)은 학문을 갈고 닦던 강당으로 서원 옛 터에 남아있던 것을 1971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돈암서원이 현재의 위치로 1880년 이건될 당시 응도당은 옛 터에 남아 있다가 1971년 이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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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公山城) : 사적 제12호
-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 -
공산성은 백제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웅진성(熊津城)이라 하였다. 이 성은 문주왕 이래 성왕 때까지의 수도였던 웅진(熊津)을 수비하기 위하여 축성을 많이 한 동성왕 때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웅진 천도 이전에 이미 성책의 시설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538년(성왕 16년)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도읍지를 지켜온 성곽이다.
둘레 2,200m. 면적 21만 8,717㎡의 이 성곽은 금강변의 야산에 계곡을 둘러싼 포곡식 산성으로, 진남루(鎭南樓)·공북루(拱北樓)의 남북 문루와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게 만든 성문)·치성(雉城 : 성벽에 돌출시켜 쌓은 성벽)·고대(高臺)·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이 있으며,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 있다. 성곽의 명칭도 고려시대 이후에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산성은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임진왜란 직후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보이며, 동쪽과 서쪽에 보조 산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은 백제 때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백제가 멸망한 직후 의자왕이 일시 거처하기도 하였으며, 또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라말 822년(헌덕왕 14)에 일어났던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되었으며, 1623년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피난하였던 역사적 일화가 얽혀 있다.
◈ 무령왕릉(武寧王陵) : 국보 제156호~12종목 17건
- 삼국시대 국왕 중의 유일하게 주인공이 밝혀진 왕릉 -
무령왕릉은 22년간 재위한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의 합장릉이다. 무령왕은 동성왕(東城王)의 차남, 또는 개로왕(蓋鹵王)의 동생인 혼지(混支)·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도 전한다. 그의 계보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으나, 1971년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따르면 그는 462년에 출생하여 40세에 즉위하였다. 키는 8척이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한다.
이 능은 송산리 제6호 벽돌무덤 북쪽의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송산리 고분군이 조사되면서 무령왕릉이 제6호 벽돌무덤의 현무릉(玄武陵)으로 인식되어 처음에는 왕릉으로 주목되지 않았다. 1971년 7월 5일, 제6호 벽돌무덤 내부에 스며드는 유입수를 막기 위하여 후면에 배수를 위한 굴착공을 파면서 왕릉의 입구가 드러나 발굴 조사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무령왕릉은 도굴과 같은 인위적 피해는 물론 붕괴 등의 피해가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조사된 것이다. 현재 송산리고분군 내 무령왕릉은 제7호분으로 분류되어 있으나, 무덤의 주인공이 명확히 확인된 무덤이므로 무령왕릉이라고 부른다.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이 정확하게 밝혀진 몇 안 되는 고대의 무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피장자가 백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훌륭한 군주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무덤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소중할 뿐만 아니라 절대 연대가 확인된 유물로서 백제사는 물론 한국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벽돌무덤이라는 중국 남조계통의 무덤 형식과 중국제 도자기, 일본산 금송(金松)을 사용한 관재 등의 존재를 통하여 당시 중국·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한 백제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다.
무령왕릉과 출토유물을 통하여 웅진기 백제문화는 중국 남조(南朝)문화의 직접적 영향 관계에 있었으며,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볼 때 백제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