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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몸을 숨기는 악소채
소영은 알고 있는 방법의 모든 해혈법(解穴法)은 다 사용했다. 그러나 무위도장은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소영은 단념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소. 우리는 그들을 구명할 방법이 없을 것 같소."
이때 상팔이 살며시 손을 내밀어 무위도장의 가슴에 얹었다. 그의 심장이 가늘게 뛰는 것을 느낀
그는 입을 열었다.
"이들은 모두 살아 있습니다."
소영은 상팔을 바라 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무위도장만을 가지고 논한다면 그의 체내에는 몇 군데 맥이 통하지 않고 있소. 그러나 심목풍이
무슨 수법을 썼는지 모르겠소. 우리는 그의 혈도를 풀어 낼 수 없으니....."
"각 문파의 혈도를 찍는 초술은 모두 틀려 참파(斬派), 진혈(震穴), 불혈(拂穴) 등의 각종 수법이
있습니다. 이들의 숨만 끊어지지 않았다면 아직 구할 수 있으니 형님께선 너무 초조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차근차근 생각하면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곁에 서 있던 전엽청이 말을 받았다.
"만일 이들 여섯 사람의 혈도를 풀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들을 모두 업고 가야 되겠지요?"
상팔이 전엽청의 말에 무엇이라고 대꾸하려는 찰나에 어디서인지 퉁소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
는 매우 부드럽고 가느다란 곡조였는데 가물가물 들리는 그 소리에 소영을 비룻한 여러 사람은
섬뜩함을 느꼈다.
소영은 손을 흔들어 두 사람에게 말을 못하도록 한 다음 귀를 기울였다. 퉁소소리는 흐느끼는 듯,
하소연하는 듯했다. 커다란 원한과 슬픔을 구구절절이 터뜨리어 상심을 일으키게 하는 슬픈 가락
이었다.
소영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이에 가물가물한 퉁소소리는 물결이 급히 흐르듯 어지러워지더니
갑자기 뚝 끊어지고 말았다.
소영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매우 비통한 소리군. 듣고 있자니 처량한 마음 금할 수 없소."
상팔이 미간을 찌푸리며 소영의 말을 받았다.
"그 소리는 비록 가늘고 부드럽지만 그 우아함과 뚜렷한 음색(音色)으로 보아, 퉁소를 분 사람은
무림의 고수임에 틀림없소.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가락 속에 힘이 들어 있을 수는 없지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파소리가 흐른 뒤에 퉁소소리가 따르니 비파를 탄 사람과 퉁소를 분 사람은 분명 부근에 있을
것 같소."
상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파소리가 먼저 들리고 퉁소소리가 곧 이어졌으니, 퉁소소리가 비파소리를 따른 것이지요."
상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연 비파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시조를 읊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
가 끝난 뒤 다시 시조가락이 들리고, 비파소리와 노랫소리가 범벅이 되어 들려 오기도 했다.
비파소리는 한 많고 사연 깊은 심정을 누구에게인가 호소하는 듯한 처량한 곡조였다. 그 소리는
소영의 마음에 알 수 없는 슬픔을 끼얹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게 했다.
돌연 비파소리가 끊어졌다. 꿈에서 깨어난 듯 소영이 머리를 들었다. 상팔의 얼굴에도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상팔이 긴 한숨을 섞어 말했다.
"나는 어머님의 제사를 지낼 때 한 번 울었던 적이 있고, 오늘 두 번째로 눈물을 흘렸소이다."
상팔의 말에 전엽청도 손등으로 눈두덩을 문지르며 말했다.
"나도 비파소리가 하도 처량해서 눈물을 금할 수 없군요."
"그 탄금(彈琴)소리는 너무도 절실한 슬픔을 안겨다 주는구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르
겠소."
소영의 말에, 전엽청이 무위도장을 힐끗 바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만일 이 여섯 명의 부상자만 없었다면 오늘밤 우리는 그 탄금의 주인공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전엽청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다시 퉁소소리가 울려 왔다. 퉁소소리 역시 비파소리에
못지 않게 처량한 곡조였다.
퉁소소리가 다시 들려 오자 소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가서 저 퉁소를 부는 사람과 비파를 퉁기는 사람을 보고 오겠소."
상팔이 말했다.
"형님께서 혼자 가시겠소?"
"이곳엔 여섯 분의 부상자가 있으니 이분들을 놓아 두고 함께 갈 수는 없소. 두 분께서는 이분들
을 보살피고 계시오. 내가 가서 보고 올 테니....."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오. 만일 적을 만나게 되면 휘파람을 부시오. 그럼 우리가 곧 달려 갈
테니....."
"퉁소와 비파를 다루는 사람이 우리의 적이라면 우리를 돕지는 않았을 것이오."
소영은 말을 끊고 무엇인가 신중히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건 나의 사부께서 일러 준 말씀인데.... 몸에 절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괴상한 성질
을 갖고 있다더군요. 만일 내가 저 사람들을 충동시킨다면 그들은 노해서 나를 상하게 할는지도
모를 일이오. 그 때엔 두 분께서 쫓아 온다 하더라도 내가 생각하기엔 조금도 나를 도울 수 없을
것 같소. 그러나....."
"......."
"이것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인데.... 한 시간쯤 기다려도 내가 돌아 오지 않거든 두 분
께서는 이곳에 더 머물러 있지 마시오. 지체 없이 손노선배님을 모시고 약속한 곳으로 돌아 가시
오. 절대로 나를 찾지 말고....."
상팔이 나서며 입을 열려는데 소영은 눈짓을 해 저지하더니 몸을 돌려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상팔과 전엽청은 그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영의 신경은 퉁소소리에 쏠렸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얼마쯤 가자 퉁소소리는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 왔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 보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커다란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소영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시력을 집중해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곳은 황량한 벌판이며 저 만큼에 울퉁불퉁 솟아 오른 야산(野山)이 보였다. 소영은 일부러 어
흠! 기침소리를 냈다. 그러나 퉁소를 부는 사람은 가락에 도취된 듯 돌처럼 굳은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았다. 여전히 처량한 음률만 토해 내고 있었다.
'내가 낸 기침소리는 진력을 집중했기 때문에 굉장히 강한데, 저 사람은 조금도 듣지 못한 듯 꿈
쩍도 않고 있으니.....'
소영이 의아한 생각을 하며 그 사람을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외마디 물음이 튀어 나왔다.
"누구냐?"
이 소리는 매우 강하고 갑작스럽게 튀어 나왔으며, 퉁소를 불던 사람의 음성이 아닌 딴 사람의
목소리였다.
소영이 흠칫하며 시선을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 뒤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매우 귀에 익은 음성 같은데, 누구의 목소리일까?'
소영은 그 음성이 귀에 익다고 느꼈으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소영이 대
답을 하려고 멈칫거리는데 속삭이는 듯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말을 하지 마시오. 가능한한 얼굴을 가리고 당신의 신분을 나타내지 마시오."
아주 가까이에서 귓전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이는 듯한 음성을 들은 순간 소영은 흠칫하여 하마터
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소영은 마음의 격동을 누르고 급히 복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나무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발끝으로 땅을 발으며 사뿐사뿐 바위 앞으로 다가 갔다. 이때 퉁소소
리가 끊어지더니 차갑고 날카로운 음성이 퉁소를 불던 사람의 입에서 굴러 나왔다.
"옥당이오?"
바위 앞으로 걸어 가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며 대답했다.
"그렇소. 바로 소제요."
퉁소를 불던 사람은 약간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 동생이 사방으로 아우를 찾아 다니는 것을 알고 있나?"
"그 동생은 성미가 너무 급해서 나는 그녀의 팔팔한 성질을 당해낼 수가 없소. 나는 그녀를 만나
지 못하겠소. 아무리 이종사촌간이라 하지만....."
소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한때 나를 흉내내던 남옥당이구나. 그리고 남옥당과 저 퉁소를 불던 사람은 이종사촌
간인 모양이지?'
퉁소를 불던 사람은 코웃음을 가볍게 치더니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가 어떤 속셈을 품고 있는지, 형이 되는 내가 모를 것 같나?"
"종형! 이 일은 형과 이 아우가 결정할 수 없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 옳
지요."
다급한 어조로 남옥당이 말하자, 퉁소를 불던 사람이 몸을 일으켜 그의 앞으로 다가 갔다. 그 사
람은 장삼을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긴 옥퉁소를 쥐고 있었다. 옥퉁소를 든 사람은 지극히 빠른
동작으로 남옥당의 앞으로 다가 섰다.
이때 하늘을 가리웠던 구름이 약간 흩어지며 하늘의 한 조각을 드러냈다. 남옥당과 옥퉁소를 든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서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소영이 갑갑증을 느낄 즈음에 옥퉁소를 든 사람이 차갑게 말했 다.
"지금부터 나는 너와 이종사촌 형제라는 인척관계를 끊어 버리겠다. 오늘부터 네가 계속 내 뒤를
미행한다면.... 내 손이 너무 무정하다고 탓하지는 말아라."
옥퉁소를 든 사람은 말을 마치더니 몸을 휙 돌렸다. 그의 몸이 몇 번 공중으로 솟았다 내렸다 하
더니 찬 바람을 남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소영은 두 사람을 지켜 보며 대화를 귀담아 듣고 있다가 옥퉁소를 든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의 관계가 묘하군. 맺어진 인척관계를 말 한 마디로 끊을 수 있을까? 무엇인지 깊은 관
계가 있긴 하겠지만....'
옥퉁소를 든 사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남옥당은 굳어진 자세로 서 있더니 무거운 한숨을 쉬
며 몸을 돌렸다.
그는 소영을 힐끗 바라 보더니 천천히 다가 왔다.
소영은 남옥당의 검술이 뛰어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계태세를 갖추며 그를 주시했다.
'남옥당이 자기 종형에게 기분을 잡치고 나에게 분풀이를 할는지도 모르겠다. 제발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소영이 잔뜩 경계하고 있는 사이에 이미 상대방은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소영의 서너 걸음 앞에 다가 선 남옥당은 커다란 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깊은 밤중에 이곳은 무엇하러 왔소?"
소영은 대답을 않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되먹지 않은 소리를 하고 있군. 이곳은 너의 영토가 아닌데, 네가 올 수 있다면 나도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냐?'
남옥당은 소영이 대답을 않자 화난 표정을 지으며 차가운 어조로 다시 물었다.
"당신이 만일 지금 대답을 않는다면 아마 다시는 대답을 하고 싶어도 할 기회가 없을 거요. 거듭
묻겠는데, 당신은 누구이며 이곳에 무엇하러 왔소?"
소영은 속으로 웃음을 깨물었다. 다시는 대답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 으름장을 놓는 것이 우스웠
던 것이다.
소영이 입을 굳게 다문 채 대답을 않는 것을 본 남옥당은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무서운 눈으로
소영을 쏘아 보았다.
소영도 지지 않고 그를 쏘아 보았다.
두 사람은 거리가 매우 가깝게 마주 서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눈동자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똑
똑히 살펴 볼 수 있었다.
'강적을 만났구나!'
남옥당은 상대를 깔보던 기가 죽으며 칼자루에서 손을 내렸다. 그는 약간 부드러운 음성으로 소
영에게 물었다.
"당신은 악낭자의 일파요?"
소영은 상대가 겁을 집어 먹는 것을 보고 다시 웃음이 솟구쳤으나 깨물어 삼키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악소채의 일파라고 대답하는 것도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남옥당은 거만스럽던 자세를 허물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는 품 속을 뒤지더니 한 통의 편지를 꺼내 소영에게 내밀었다.
"수고스럽겠지만 악낭자에게 이 편지를 전해 주고 말씀드려 주시오. 남옥당은 일생 동안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이며 한 번 만나게 해 달라고 말이오."
편지를 건네주는 남옥당의 얼굴은 몹시도 처량하고 초라하게 보였다.
그것을 본 소영은 마음이 움직였다.
'무엇이라고 위로의 말이라도 한 마디 해 주고 싶구나.'
생각했으나 입을 열면 자기의 신분이 탄로될 것 같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소영이 편지만 받고 말은 하지 않자 남옥당은 약간 서운한 듯한 표정을 보이더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노형께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억지 부탁은 드리지 않겠소. 하지
만 노형이 악낭자에게 나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해 주시길 바라겠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나는
노형의 은혜를 잊지 않겠소."
'너와 너의 종형이 어떤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는지 나하고는 상관도 없으며 또 내가 악소채에게
너를 추켜세울 이유도 없다. 내가 어떻게 너를 좋게 얘기한단 말이냐?'
소영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본 남옥당의 얼굴에 약간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그
표정에 곧 처량한 그림자가 덮이며 입에서는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 나는 물러가겠소. 모쪼록 노형의 수고를 기대합니다."
남옥당은 소영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의 어깨
는 축 늘어져 있었고 걸음걸이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이구나. 남옥당은 그 지니고 있는 무공이 지극히 높고 성질이 굳고 강하면
서 호탕하여 그 이름이 널리 퍼졌는데.... 지금은 저토록 초라한 기색이니 그의 패기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어둠 속으로 느릿느릿 사라져 가는 남옥당의 뒷모습에 시선을 쏟으며 소영은 깊은 동정심을 느꼈
다.
남옥당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소영은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들여다 보았다. 겉에
는 <악낭자에게 옥당이 드림>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러나 안에는 편지 이외에도 다른 것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참! 악누님이 뒤에 있을 텐데.'
소영은 급히 머리를 돌려 뒤를 살펴 보았다. 그러나 두꺼운 어둠의 장막만이 덮여 있을 뿐 사람
의 그림자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상하다. 조금 전 분명히 악누님의 음성이 들렸는데.... 나에게 신분을 나타내지 말라고 이르더니
피리를 불던 사람도 남옥당도 모두 가 버렸는데 누님은 왜 모습을 숨기고 있을까?'
소영은 큰소리로 부르려고 했으나 아직 멀리 못 갔을 남옥당을 격동시킬까 봐 입을 다물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 소영은 가슴이 답답했다.
'퉁소를 들고 있던 사람과 남옥당과의 절교는 악누님이 틀림없이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대강은
짐작할 수 있지만.....'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한동안 기다렸으나 악소채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구름과 별들
이 숨바꼭질을 하고 이따금 산들바람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나타나지 않을 셈인가! 왜 몸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아요! 나를 이곳에 두고 어디로 사라진 것일
까?'
소영은 더 참을 수 없어 어둠 속을 향해 나지막한 음성을 날렸다.
"누님, 지금 어디에 있어요? 왜 몸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아요? 이 동생을 만나기가 싫은가요?"
소영의 말이 끝나자 어디서인가 웃음소리가 아주 약하고 짧게 들려 왔다. 그러나 소영에게는 그
소리가 크고 자세하게 들렸다.
'누님이 숨어서 웃고 있구나.'
소영은 설레는 가슴을 안고, 방금 웃음소리가 들려 온 방향으로 시선을 부었다. 그의 앞 사 장쯤
떨어진 곳에 큰 바위가 있었다.
'저 바위 뒤에 숨기고 있구나.... 내가 못 찾을 줄 알고.....'
소영은 진기를 모아서 몸을 날렸다. 해연략파(海燕掠波)의 경공술을 발휘하여 공중을 날며 반가움
에 소리쳤다.
"누님! 나....."
그는 뒷말을 얼른 끊어 버렸다. 바위 뒤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것은 악소채가 아니었다.
"소공자, 저는 소공자의 그런 칭호를 감당할 수 없어요."
말하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치렁치렁한 머리에 댕기를 드리운 소녀였다. 얼른 보아 열 대여섯 살
쯤 되어 보였다.
낯선 소녀가 나타나자 소영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몸을 세운 후,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며 물었
다.
"낭자는?"
그 소녀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소녀는 악낭자의 계집종입니다. 우리는 한 번 만났던 적이 있었는데, 소공자께서는 벌써 잊으시
고 기억 못하세요?"
소영은 소녀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한 마디로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소영이 말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자 소녀는 생글 웃으며 말했다.
"이미 얼굴을 숨겨야 될 사람들은 다 갔는데 아직도 가면을 쓰고 무엇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소영은 그녀의 말에 멋적은 미소를 흘리며 얼른 가면을 벗었다. 그것을 품 속에 간직하며 소녀에
게 말했다.
"나는 낭자를 어디서 만났는지 영 기억해 낼 수가 없군요. 분명하지 못한 점을 용서하시오."
소영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떤 계곡 속에서 남해오흉....."
소영은 주먹으로 머리를 쳤다.
"아! 그렇구나, 바로 낭자께서 청의동자로 가장해서 남해오흉의 옆으로 스며 들었지."
소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때 낭자께선 남장을 하고 있었으니, 어찌 내가 쉽게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소영은 소녀의 얼굴을 다시 바라 보았다. 소녀는 수줍은 듯 눈을 살짝 흘기며 생긋 웃었다.
소영은 급히 소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나의 누님은 어디 있소?"
"누님이라니요?"
"악소채 누님 말이오."
소녀는 잠깐 침묵을 지킨 채 소영의 얼굴을 바라 보다가 대답했다.
"가 버렸어요."
"가다니..... 어디로 갔단 말이오? 낭자는 알고 있지요?"
"알기는 알지만....."
소녀는 말꼬리를 흐리며 미간에 가벼운 주름을 잡았다.
소영은 바짝 타는 듯한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안다면, 가르쳐 주시오."
"글쎄요. 악아가씨께서 소공자를 만나 주실는지 의문이군요."
"무슨 말이오? 누님은 반드시 나를 반길 것이오. 빨리 나를 데려다 주시오. 나는 이미 오륙 년 동
안이나 누님을 뵙지 못했소."
소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만나 주지 않을 거예요. 남옥당과 옥소랑군이 얼마나 애를 태우며 줄곧 악낭자의 뒤를 따랐는지
아세요? 하지만 아가씨는 한 번도 그들을 만나 주지 않았어요. 어떤 애원이나 협박도 유혹도 모
두 다 헛수고였어요. 그런데 소공자라고 꼭 만나 줄 이유도 없잖아요?"
"그것과는 다르오. 악누님과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오. 누님은 나를 끔찍이 아끼며 함께 놀고 식
사하며 옷 입는 것까지 거들어 주었소. 누나는 나를 반기며 만나 줄 것이오."
소녀는 눈꼬리를 휘며 배시시 웃었다.
"그 때와 지금은 달라요. 그것은 소공자께서 어렸을 때의 일이고 지금은 이미 어른이 다 되었잖
아요?"
"다르긴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나는 믿고 있소. 누님은 나를 만나 줄 것이오. 만일 낭자가 끝까
지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가서 물어 보시오."
소영이 한사코 자기 주장을 내세우자 소녀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더
니 이렇게 대답했다.
"정 그러시다면 소녀가 가서 물어 보고 올 테니 소공자께서는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세요."
그녀가 몸을 돌리려 하자 소영이 황급히 제지하며 물었다.
"무엇 때문에 나를 데리고 가지 않고 이곳에 남겨 두려는 것이오?"
"소녀가 소공자를 모시고 가면 악낭자께선 소공자를 만나 주지 않을 거예요. 소녀만 괜히 욕을
먹게 되고 소공자도 일이 난처하게 될 테니 이곳에서 잠자코 기다리세요. 소녀가 다시 이곳에 나
타날 때에는 적어도 한 가지 대답은 가지고 올 거예요. 만나 주겠다든가 아니면 만날 수 없다든
가..... 만일 악낭자가 소공자를 만날 수 없다고 하면 소녀가 오지 않고 다른 연락방법을 취할는지
도 몰라요. 그리고 만일 소공자를 만나 주겠다면 모시러 오겠어요."
소영은 소녀를 따라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소녀의 말을 듣고 보니 역시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좋소. 여기서 기다리지요."
소녀는 애교스럽게 눈을 한 번 찡긋해 보이더니 몸을 돌렸다.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 어깨가
으쓱하더니 이미 삼 장이나 멀리 날아갔다. 눈깜짝할 사이에 이미 그녀의 모습은 어둠에 잠겨 버
리고 말았다.
'의외로 누님을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구나. 어떤 표정으로 나를 맞이할까? 매우 기뻐서 눈물을
흘리겠지? 그동안 어떻게 모습이 달라졌을까?'
소영은 악소채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설레이는 마음을 끌어 안고 바위 위에 올라 앉았다.
황량한 벌관의 차가운 돌 위에 어둠을 잔뜩 마주하고 앉아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외롭거나 무서
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악소채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이 가슴을 벅차게 할 뿐이었다.
밥 한 그릇을 먹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소영은 차츰 지루한 생각이 들었다. 초조한 마음에서
약간 짜증까지 일었다.
'왜 여태껏 나타나지 않을까? 만일 그녀가 누님의 답변을 가지고 이곳에 나타나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할까? 사면 팔방으로 찾아 다닐까? 여기서 언제까지나 기다릴까?'
소영은 초조한 마음을 누를 수 없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이때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의 앞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나타났구나!'
소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앞으로 다가 오는 사람은 조금전 나타났던 그 소녀가 분명했다.
소영은 반가운 마음에 급히 몸을 날려 소녀의 앞으로 달려 갔다. 그리고는 숨돌릴 사이도 없이
물었다.
"악누님이 나를 데리고 오라고 했지요?"
소녀는 걸음을 멈추고 소영의 얼굴을 딱하다는 듯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소공자의 믿음이 너무 컸어요."
그 음성에 동정하는 마음이 담긴 것을 깨달은 소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는 한 걸음 소
녀에게로 다가 서며 다급하게 물었다.
"믿음이 컸다니.... 누님이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말이오?"
소녀는 말없이 머리만 끄덕였다.
이를 본 소영은 화난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가 무어랍디까?"
소녀는 얼굴을 들고 소영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맑은 시선이 소영의 눈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오더니 땅으로 푹 떨어졌다.
그녀는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녀는 소공자가 몹시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했어요. 아가씨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이 없더니 한
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는데... 만나지 않겠다고 전하라더군요."
소영이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질렀다.
"왜 만나지 않겠다는 거요?"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조용히 말씀하세요."
"미.... 미안하오. 그런데 그녀는 무엇 때문에 만나지 않겠다고 했는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소영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노여움과 서글픔이 함께 치밀었다. 그것은 다시 서글픔이 되어 가라
앉았다. 그는 힘없는 음성으로 소녀에게 말했다.
"나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 주시오. 나는 꼭 그녀를 만나야겠소."
"악 아가씨가 만나지 않겠다는데 소녀가 감히 어떻게 모시고 가겠어요?"
소영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몸을 흔들며 묵묵히 서 있다가 반신반의하는 표정
이 되었다.
"정말 말을 전하긴 했소?"
소녀의 눈이 세모꼴로 변하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소영을 쏘아 보았다. 소영은 그 시선을 정면으
로 받았다.
소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믿지 못하겠어요?"
"정말 믿기 어렵소."
소녀는 소영을 바라 보더니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소공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아가씨를 만나려고 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했어요. 너무
상심치 않는 것이 좋겠어요."
"이해되지 않는 일이로군."
소영은 먹구름에 덮인 하늘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리더니 품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 소녀에게
주었다.
"이것은 남옥당이 악소채에게 전해 달라고 준 것이오. 수고스럽지만 이것을 그녀에게 전해 주시
오."
"소공자도 뭐 전할 말이 있어요?"
"나는 그녀가 나를 만나기를 꺼리는 이유를 모르겠소."
"그녀가 소공자를 만나지 않는 것은 소공자께서 모르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낭자는 그 이유를 아시오?"
"모르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소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불똥이 이는 듯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는 단호한 음성
으로 이렇게 말했다.
"좋소 가서 악누님에게 전해 주시오. 나 소영은 이후로 어떤 곤란과 역경에 처하더라도 결코 그
녀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다만 과거에 나를 구해 주었던 은혜는 여기서 감사드리겠다고...."
소영은 말을 마치더니 두 손을 모아 쥐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소녀는 급히 소영의 앞에서
몸을 비키며 물었다.
"우리 아가씨에게 감사를 드린다면서 왜 소녀에게 절을 하지요?"
"이 절도 그녀에게 낭자께서 전해 주길 바라오."
소녀는 너무도 어린애 같은 소영의 태도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렸다가 얼른 지워 버렸다. 그녀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녀는 소공자께서 이르신 말씀을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낭자에게 폐를 끼쳤던 것, 이 자리에서 감사드리겠소."
소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 보며 소녀는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소영은 한 번도 뒤를 돌아 보지 않았다.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하군. 그러면서도 어린애처럼 단순한 사람....."
소녀는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다가 몸을 들렸다.
소영이 나씨의 사당으로 돌아 오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던 상팔과 전엽청이 반색을 하며 다
가섰다.
전엽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소. 소대협의 신상에 어떤 일이 생기지나 않았나 하고....
무슨 일은 없었지요?"
"미안하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사고도 없었소. 손 노선배님들은 좀 어떠시오? 정신이 드셨소?"
상팔이 대답했다.
"그분들의 혈도는 이미 풀렸소. 또한 해독재를 복용시켰습니다."
"정말이오?"
소영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묻자 상팔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손불사의 음성이 대청 안에서 들
려 왔다.
"나는 깨었소. 소제는 어서 들어 오시오. 심중에 많은 의혹이 쌓였는데 이것을 어서 풀고 싶소."
소영은 손불사의 음성을 듣고 급히 안으로 들어 섰다. 과연 무위도장, 손불사 그리고 무림의 사대
현인들도 모두 깨어 있었다.
소영이 들어 서는 것을 보고 손불사가 다급하게 물었다.
"소제!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어찌된 일이라니요? 나도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소영은 손불사에게 시선을 떼어 따라 들어 온 상팔을 향해 말했다.
"누가 이 분들의 혈도를 풀었소?"
"형님은 모르시오?"
"아니, 나는 이곳에서 나간 뒤에 한 번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럼 이상한데......"
상팔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본 소영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오? 빨리 얘기해 보시오."
"형님이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한 분의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이곳에 나타났었소. 그는 형님의
명령을 받고 이분들의 상처를 치료하러 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요? 그 사람의 모습은 어땠소? 남자요? 아니면 여자요?"
"그는 가면을 썼으며 남자의 복장을 했더군요."
"말투는?"
"완전히 남자의 목소리였소."
소영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럴 만한 인물을 떠올리려고 했으나 기억나는 사람
이 없었다. 그는 갈등을 느끼듯 다시 물었다.
"그 뒤는 어떻게 되었소?"
"나하고 전형은 그의 행동이 수상하다고 생각되어 막으려고 했었소. 그런데 그가 잠자기 손을 뻗
치더니 빠르기 이를 데 없는 동작으로 우리의 혈도를 찍어....."
"계속하시오."
소영의 재촉에 상팔은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혈도가 찍혀 그를 막을 수 없었소. 그는 안으로 들어 서서 이분들의 혈도를 풀어 주고
환약 하나씩을 주더니 다시 우리 두 사람의 혈도를 풀어 주었소."
"그는 자기의 신분을 밝혔소?"
"밝히지 않았소."
"무슨 말이든 묻지는 않았습니까? 자세히 얘기해 보시오."
상팔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곁에 서 있던 전엽청이 한 발 나서며 말했다.
"그는 가기 전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소. 나는 항시 강호의 일을 묻지 않으며 무림 속에서의 생
과 사에 대해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는 한 사람이 열여덟 명의 무림인물을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으나 역시 참견을 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소대협에게 꼭 전하라 는 말을 마치고 그는 홀연히
사라졌소."
소영은 전엽청의 말을 듣고 탄식하듯 말했다.
"그 사람의 성격은 매우 냉혹하고 괴상한 것 같군."
"그 사람의 성격은 매우 냉혹했소. 듣고 있자니 소름이 끼칩니다. 그러나 그는 소대협을 몹시 존
경하고 있는 듯했소."
이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손불사가 말참견을 했다.
"듣자하니, 그는 소제에게서 어떤 도움을 받았거나 아니면 도움을 바랄 만한 일이 있는 모양이군
요."
소영은 손불사의 말을 듣고 다시 머리를 쥐어 보았으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나에게서 도움을?"
"아마 틀림없을 것이오. 그가 말하기를 손선배님과 우리 사형, 그리고 무림 사대현의 생사에 대해
서 자기는 무관하며, 자기가 이분들을 구해 준 것은 모두 소대협을 위해서이니 자기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고 했소. 모든 공을 소대협에게 돌리며 그는 또 이런 말을 했소."
전엽청의 말에 소영이 얼른 물었다.
"어떤 말을?"
"후일 소대협에게 도움을 청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소영은 도무지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도움을 받겠다는 것인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모든 사람
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린 것을 알아 챘다.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해서 이익될 것은 없겠다. 나 혼자 속으로만 멍청해지고 겉으로는 아는 척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음. 그래서, 그는 또 무엇이라고 말했소?"
"그 몇 마디만 하고 곧 사라졌소."
소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악소채에게 무시를 당한 일에 울분이 치솟고 마음이 처량해져서 상팔과 전엽청을 붙들고 이
울분을 터뜨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곳으로 들어 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그 동안에
어리둥절할 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제기랄, 비를 피하려다가 홍수를 만난 격이로구나. 이렇게 된 이상 내 울분은 속으로 가라앉혀
나 혼자 삭이는 수밖에 없겠군.'
겉으로는 우울한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가슴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생각은 복잡했으나
그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손불사에게 말을 걸었다.
"손 노선배님은 좀 어떠십니까?"
"그 사람이 준 약은 효능이 매우 신비롭구려. 심목풍이 내 뱃속에 넣은 독이 말끔히 해소된 것
같소이다."
손불사의 대답에 소영은 다행이란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잘 되었어요. 도장께선 어떻습니까?"
"나도 많이 나아진 것 같소이다."
무위도장의 대답에 소영은 다른 네 사람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네 분의 상처는 좀 어떻소?"
맨 앞에 앉아 있던,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손을 모아 쥐며 대답했다.
"낙양의 주문창(朱文員)은 소대협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두 번째 노인이 일어서며 역시 공손하게 읍을 하더니 말했다.
"제남(濟南)의 진사정(秦士廷)이 소대협에게 감사 드리오."
세 번째 노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금릉(金陵)의 우자청(尤子淸)이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에 감사 드리오."
네 번째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말했다.
"강주(江州)의 허시당(許時棠)은 대은을 입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깊은 마음으로 은혜에 감사드립
니다."
소영이 네 사람의 표정을 살펴 보니 그들은 조금도 수치스럽거나 비굴하거나 하는 기색이 없이
조용하고 엄숙했다.
'과연 이들 네 사람이 무림의 사대현이란 것은 과장된 칭호가 아니었구나. 수양도 이런 경지에
다다르려면 많은 수업과 시련을 겪어야 하겠구나.'
소영은 속으로 감복하며 그들의 인사에 답하였다.
"미거한 몸이 무슨 은공을 베풀었다고 할 수 있겠소? 천운이 현인들을 도운 것 뿐이지요. 헌데
네 분의 현인께서는 강호의 은원(恩怨)관계에 발을 딛지 않은 줄로 알고 있는데 어찌하여 심목풍
과는 원한관계를 맺게 되었지요?"
주문창이 씁쓸한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우리는 그 심목풍과 아무런 원한도 없소이다."
"그렇다면 그건 좀 이상하군요. 심목풍은 당신네 현인들의 혈도를 찌르고 독약을 먹인 것으로 보
아 죽일 의사가 있었던 모양인데.....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람을 어찌 무참히 죽이려 들었겠습니
까? 제 소견이 좁아서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진사정이 대답했다.
"탁자자탁, 청자자청(濁者自濁, 淸者自淸)이라, 마음이 흐린 사람은 근본부터 흐리고, 마음이 깨끗
한 사람은 근본부터 깨끗하다. 이런 말이 있지만, 우리는 그 심목풍과 아무런 은원관계도 없는 것
이 확실하오."
소영은 이들이 똑같은 말을 하자 속으로 고소(苦笑)를 삼켰다.
'이 사람들은 너무도 완고하구나. 죽어서도 저런 말을 할까? 원한관계가 없는데 어떻게 죽임을
당할 뻔했단 말인가?'
소영은 이런 생각을 했으나 겉으로는 전혀 나타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심목풍이란 사람의 잘못이 크군요. 이유도 없이 네 분을 한 곳에 모아 놓고 혈도를
찌르고 독약을 먹이다니....."
우자청이 입을 열었다.
"문심본무귀(問心本無鬼)요, 하필상길흉(何必相吉凶)이라. 자기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거늘 무엇 때
문에 길흉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소?"
소영은 다시 웃음을 삼켰다.
'어렵쇼?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들은 심목풍에게 원한을 끼 친 일이 추호도 없다고 하며,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마음에 두지 않고 약속대로 왔을 뿐이라는 얘기인데. 무슨 잠꼬대인지 통 모
르겠군.'
소영은 일종의 장난기섞인 즐거움을 속으로 맛보며 다시 말을 던졌다.
'내가 생각해 보니, 네 분의 현인께서 너무 도량이 넓고 선하시기 때문에 심목풍이 해치려고 든
것 같군요."
이번에는 허시당이 소영의 말을 받았다.
"군자흉회, 명월청풍(君子胸懷, 明月淸風)이오. 생불부인, 사이하감(生不負人 死而何感).... 군자의
품은 뜻은 밝은 달이나 맑은 바람과 같고, 살아서 남에게 부담이 없으니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
외다."
소영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후훗! 정말 사람 배꼽 빠지겠군. 이 사람들은 도무지 감정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군. 원수진
일이 없고 빚진 일이 없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그러나 소영은 다시 생각했다.
'아니. 웃을 일이 아니야. 이 사람들은 확실히 현인군자이다. 심목풍이 이들을 정말 죽여 버렸다
해도 눈꼽만큼의 원한도 품지 않겠구나. 인간이 이런 도에 다다르려면 얼마나 수련을 쌓아야 하
는 것일까? 성인 공자(孔子)도 희비애락의 감정을 지니고 있었을 텐데 ......"
이때 네 현인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던 손불사가 입을 비쭉거리더니 신랄한 어조로 말을 토했
다.
"흥, 네 분은 과연 성인군자시요. 이 늙은 거지와 무위도장이 목숨을 걸고 모험을 감행하여 구하
러 갔던 것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헛수고였군요. 진작 이럴 줄 알았다면 심목풍이 네 분의
현인을 죽이든 살리든 그대로 놔 둘 것을.... 그랬으면 나도 혈도를 찍히고 독을 복용하는 수치와
고통을 면했을 텐데...."
주문창이 감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섞이지 않은 밝은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손불사의 말에 대꾸했
다.
"수은당지보, 적원응조소(受恩當知報, 積怨應早逍)라.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해야 하고 원한이 쌓였
으면 일찌감치 없애 버려야 하는 법, 우리는 손대협과 무위도장께서 목숨을 걸고 구해 주신 은혜
를 입었으니 영원히 가슴 속에 새겨 두겠소이다."
손불사가 불쾌한 듯 말했다.
"이 늙은 거지가 은혜를 보답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 같소?"
곁에 있던 무위도장도 역시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네 분은 무림에서 수십 년 동안 강호의 일에 참견치 않고 사대현인의 칭호를 얻었으니 과연 현
인답다고는 할 수 있겠소. 그러나 자기의 처신만을 생각하고 시비를 가리기를 꺼리는 것 같소이
다."
소영은 생각했다.
'오랫동안 사대현인의 무공은 매우 강하다고 들었다. 이들이 만일 무림의 정의를 위해 발벗고 나
서서 심목풍과 대항한다면 우리에겐 적지않이 힘이 증가될 것이다. 또한 은거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무림의 고수들을 초빙해서 심목풍을 상대해 싸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진사정이 무위도장의 말에 답변했다.
"옳고 그름은 원래 옛부터 있어 온 기정사실이거늘 우리가 시비에서 벗어난 것이 무엇이 그릇되
었단 말이오?"
손불사가 차가운 조소를 띄며 말했다.
"여러분께서 시비의 밖으로 멀찍이 벗어났다면 심목풍은 무엇 때문에 여러분에게 억지로 독약을
먹여 죽음으로 몰아 넣으려고 했을까요?"
대답을 듣지 않고 무위도장이 손불사의 말끝을 이어 비꼬았다.
"네 분께서는 무림의 정의와 화(禍)를 수수방관하며 산수의 경치에 묻혀 세월을 잊고 풍류에 도
취하면서 오히려 의기양양한데 한 번 자신에게 물어 보시지. 당신들은 과연 현인다운가? 아니면
졸장부인가....."
무위도장의 말 속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 들었다면 벌컥 화를 내며 대들었을 것이
다. 그러나 네 사람은 시종 얼굴에 아무런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주문창만이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비꼬고 조소를 퍼부어도 네 사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본 손불사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
더니 입을 열었다.
"네 분이 무공의 절학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대현인이라 불린 것은 무림의 은원 속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기 때문이오. 무림 속의 공명과 무림 개인의 원한관계와 이해타산을 외면하고 은거생활
을 즐기신 것은 확실히 존경할 만하며 대현인이란 칭호를 얻을 만하오. 하지만, 이번 심목풍이 네
분을 해치려고 독수를 뻗쳤던 것은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성질이 매우 다릅니다."
진사정이 물었다.
"어디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이오?"
"심목풍은 무림을 손아귀에 틀어 쥐고 마음대로 흔들려는 야욕을 품고 있는 것이오. 그래서 평소
에 무림의 어느 누구와도 아무런 원한관계가 없는 네 분의 현인들까지 해치려고 한 것이외다. 그
가 현인들을 해치려는 것을 네 분께서 따지지 않겠다고 치더라도, 무림의 정의가 풍전등화가 되
어 간악한 무리에게 짓밟혀도 외면만 하실 수 있소이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중하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표정이 네 현인의 얼굴에 비쳤다.
이윽고 우자청이 손불사를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손대협의 의견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 오?"
"간단하고 당연한 방법이 있소이다. 네 분께서 무림의 대의를 위해 몸을 내세우는 것이외다. 그
흉악한 심목풍과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것이오."
이 말을 들은 허시당이 말했다.
"손대협의 뜻은 무림의 살벌하고 치사한 돌풍 속에 우리들이 쉽쓸려 들어 가야 된다는 것이 아니
오?"
무위도장이 손불사 대신 입을 열었다.
"지금 강호는 정의가 소멸당하고 악당이 판을 치고 있소 네 분은 모두 무림의 인물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소이다. 현인과 악당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며, 네 분의 현인께서는 종횡으로 날뛰며 무
림의 기강을 흐리고 있는 악당들을 그대로 누워서 보고만 계시지는 않겠지요?"
네 현인들은 다시 침묶을 지켰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 속에 젖어 있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주문창이 진사정, 우자청, 허시당을 돌아 보며 물었다.
"세 분 현제(賢弟)께서는 손대협과 무위도장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물론 나는 이 두 분의
말씀이 매우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지만....."
진사정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의 이치는 틀림 없으나, 우리들로 하여금 무기를 들고 피비린내 나는 무림에 뛰어 들게 한다
는 것은 마음 속이 불안스럽고 꺼림 직함을 금할 수가 없군요."
진사정의 말이 끝나자 우자청이 뒷말을 이었다.
"소제의 생각으로도 손대협과 무위도장의 말이 이치에 합당하다는 것은 인정하오. 심목풍이 우리
의 혈도를 찍고 독을 강제로 복용시킨 것을 따질 수는 없소. 그러나 그 심목풍이 그릇된 야욕을
품고 강호의 기강을 흐리며 악행을 감행하는 것을 보고서도 못 본 척 방인한다는 것은, 후세의
무림 질서를 생각해서라도 좀 생각해 볼 문제인 줄로 알고 있소."
허시당이 그 뒤를 이었다.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줄곧 우리의 일만 하면서 강호의 시비에 관여치 않았었소. 지금 우리가 새
삼스럽게 강호의 시비에 끼어든다는 것은 좀 어떨까 생각되는군요. 다시 말하자면 어리둥절하단
말이외다."
무위도장은 네 사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사람들의 마음은, 반은 우리에게 동조할 뜻을 보이고 반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결단을
못 내리고 망설이는구나. 고삐도 너무 바짝 잡아 당기면 끊어지는 법. 일단 늦추어 주는 것도 괜
찮겠다.'
이런 생각을 한 그는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네 사람에게 말했다.
"네 분께서는 너무 조급히 결정지으려고 하시지 말고 천천히 상의해 보십시오. 우리들은 결코 억
지를 써서 네 분들을 곤란하게 할 생각이 없소이다."
이 말을 들은 주문창은 진사정, 허시당, 우자청에게 눈짓을 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무위도장과 손불사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우리가 일단 상의를 한 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는 것이 어떻겠 소?"
"언제쯤 회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무위도장의 질문에 주문창이 반문했다.
"글쎄요.... 언제쯤이 좋을까?"
"삼일 후 점심 때 이곳에서 만나면 어떻겠소? 삼 일이면 충분히 상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데....."
손불사가 기한을 제시하자 주문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좋겠소. 삼 일이면 충분하오. 그럼 우리는 한 마디로 약속하겠소. 삼 일 후에 이곳에 오
겠소. 그 때에 우리가 상의한 결과를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소."
주문창은 약속하는 대답을 하더니 소영에게 목례를 해 보이고는 밖으로 향해 걸어 나갔다.
그가 나가자 진사정, 우자청, 허시당, 세 사람도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는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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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ㄹ봅니다,,
즐감합니다..~~
감사 합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즐독
즐감^^
대단히 감사합니다.
감사
아무리 현인 이라도 무림이 망해가는 판국에~~
감사
가
감사합니다....................
즐감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