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이하 PO)가 야닉 네제 세갱과 함께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어요. 이번 아시아 투어 일정은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거쳐 한국에서는 각각 다른 프로그램으로 이틀간 이어졌는데 저는 둘쨋날 예당 공연을 보았습니다.
PO가 선택한 첫 곡은 리스트의 교향시 '프로메테우스'입니다. 비교적 좀 더 많이 알려진 3번 전주곡과 6번 마제파 대신 5번 프로메테우스를 선택한 것은 첫날 연주곡이 베토벤의 프로메테우스 창조물이기 때문일까요? 암튼 흥미로운 구성입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문학과 음악의 융합이라는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 장르가 리스트의 교향시일 것입니다. 인간의 복잡한 감정이 살아있고, 비장미와 숭고미로 승화되는 13곡 중 5번은 프로메테우스의 고통과 회한, 속죄와 호소가 드러나는 곡인만큼 짧지만 변화무쌍한 흐름이 꼭 영화OST같다는 느낌이었어요. 야닉 네제 세갱과 PO의 첫인상을 각인시켜 줄 수 있는 선곡으로 충분했다는 생각입니다.
1부의 두번째 프로그램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Op.64. 너무도 유명한 곡이라 연주자의 부담이 적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협연을 맡은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비드 김은 PO의 악장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분이고, 우리나라에서 두번정도 마스터클래스를 열어서 알고 있었지만 연주는 처음 들어봅니다. 우선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협연자와 지휘자의 소통이 매우 긴밀하고, 협연자와 오케스트라의 신뢰가 매우 돈독해 보인다는 점이었어요. 아마도 같은 조직에 몸담고 있어 연주를 많이 맞춰본 경험의 결과겠지만, PO구성원들 모두가 순간순간 주파수를 맞춰 바이올린 독주에 최적화된 소리를 들려준다는 점이 놀라웠어요. 특히 목관악기 중 플릇, 오보에 소리가 좋았어요. 바이올린 등 현파트도 상당히 부드럽게 받쳐주어 유진 올먼디 시절의 필라델피아 벨벳 사운드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반면 오케스트라 연주에 비해 데이비드 김의 연주는 특별히 인상적이지는 않았어요. 섬세하고 여린 소리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열정적이고 깊이있는 소리는 내내 아쉬움이 남더군요. 이 곡은 멘델스존 말년의 작품이라 인생을 돌아보는 이의 양가적인 감정이 잘 들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온화하고 섬세하다가도 격정에 휩싸이고 감정이 분출되는 시시각각 대비를 이루어야 하는데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정경화 스타일의 정열적인 해석보다 하이페츠의 날카롭고 이지적인 해석이 더 마음에 들지만 이날 데이비드 김은 이 둘의 어느 지점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게다가 3악장 후반부에서 '탁' 소리가 나면서 바이올린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부수석과 바이올린을 교체하는 해프닝도 있었구요.
2부의 연주곡은 베토벤 교향곡 제5번 C단조 Op.67번, 일명 운명교향곡입니다. PO는 시작부터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끝날 때까지 한치도 느슨하지 않게 팽팽한 긴장감을 놓지 않았어요. 템포를 빠르게 이끌어 가긴 했지만 곡이 언제 끝났나 싶게 휙 지나가더군요. 독특했던 부분은 1악장 장중하고 무거운 동기의 마지막 끝을 살짝 끌어올려 한없이 가라앉는 정서에 리듬감을 넣어 주었다는 점인데 마치 추녀 끝이 살짝 지켜 올라간 한옥 지붕이나 버선코의 곡선을 연상하시면 될 것 같아요. PO의 사운드가 다소 어둡고 둔중하다는 세간의 평을 의식한 처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인 추측일 뿐입니다. 2악장과 3악장에서는 프레이징과 다이내믹 레인지를 넓게 설정해 주제의 변화를 매우 다채롭게 표현한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이제껏 다른 운명교향곡 연주에서 듣지 못한 소리들의 향연이었으니까요.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연결점에서는 잔향을 길게 빼서 이행을 자연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신비감과 생동감이 살아나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구요, 저현과 목관이 특히 그랬습니다. 4악장에서 절정으로 상승하는 에너지의 폭발력은 실로 대단했는데 음표로 한편의 장대한 서사시를 써내려가는 것 같은 감동이랄까요. 여기서는 금관과 팀파니의 역할이 도드라졌는데 앙상블의 극한을 체험하는 전율이 있었습니다. 시종일관 절도있는 비팅과 섬세한 디렉션으로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앙상블을 만들어낸 야닉 네제 세갱과 어매이징한 열정과 집중력을 보여준 PO단원들에게 청중 모두가 감동스런 기립박수를 보내는 장면은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어요. 앵콜곡은 멘델스존의 한 여름밤의 꿈 중 스케르초로 멋지게 마무리해주었습니다. 첫날 공연을 못본게 두고구고 아쉬운 밤이었어요.
(마지막 사진 두 분의 친필 사인은 아는 지인께서 보내주신 거에요. 그분 말씀으로는 연주 후 지휘자와 연주자가 유일하게 해준 사인이라고 하네요^^)
첫댓글 오랜 기간 악장에 충실하다 솔로를 하게되면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입니다. 악장이 내야하는 소리와 솔리스트가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와 만드는 소리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지 못하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2011년 파산 신청이후
비싼 돈이 드는 솔리스트를 쓰지 못하여 아마도 한국계 악장을 겸사 겸사
솔리스트로 투어한 것 같은데 안타깝습니다. 교육과 문화를 국가가 책임지는
독일을 비롯하여 많은 유럽국가와 자본주의 잣대로 방치하는 미국, 문화를
존중하는 국가가 참 국가의 모습이겠지요. 필라델피아 사운드를 창출한 이 악단은
미국에서 독일 오케스트라와 같은 깊고 무거운 소리를 만듭니다.
세강이 이 오케스트라를 맡은 후 pure님이 느끼신대로 다양한 변화가
있어 참신한 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작은 변화이지만 그것을
인지하신 pure님의 좋은 귀가 대단합니다. 좋은 글 감사 드립니다.
근자에 똑같은 베토벤 교향곡을 또 다른 시각으로 조명하여
발표하는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들이 많이 있어 무척 기쁩니다.
@sangyoung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소견인데 늘 공감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같은 공연을 보셨던 분들 중 데이비드 김의 연주가 섬세해서 매우 좋았다 하는 분도 계시니 확실히 음악감상은 주관적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PO가 세갱 덕분에 활기를 찾는 모습을 보니 우리나라 서울시향도 어서 빨리 적임자를 만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저또한 베토벤교향곡의 다양한 해석을 듣게 되어 즐겁습니다. 다음 주에는 필립 헤레베레와 샹젤리제 오케스트라가 내한하여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연주할 예정인데 어떤 사운드를 들려줄 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