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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61.7]
하계수련특집
지성당 양이제의 삶과 신앙(1)
- 수련과 포덕활동을 중심으로
이상임_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1. 들어가는 말
지성당 양이제는 종법사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여성 도정이었다. 천도교에서 종법사란
최고의 우대직으로서 현재까지 여성 종법사는
모두 4명이 있었다. 즉
수의당 주옥경, 지성당 양이제, 법실당 차기숙,
지흥당 최시영 종법사이다.
그들 종법사들 중에서 지성당 양이제는
현재까지 유일무이한 여성 도정이다
지성당 양이제는 380여 호를 포덕하여
도정으로 인준 받았다고 한다.
물론 도정직을 받은 이후에도 지성당 양이제는
포덕을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천도교의 연원제도에서는
일단 같은 연원 안에서 누군가가 도정직을 부여받으면
실제로 자신이 200호 포덕을 성취하지 않아도
그 다음 사람이 전 사람의 도정직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한다.
놀라운 점은 지성당 양이제는 시원포연원에서
누군가에 의해 도정직을 선수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포덕 결과로 도정직을 인준받았다는 점이다
지성당 양이제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딸, 부인, 어머니로서의 길을 걸었으며 그 가운데 도정으로 인준될 수 있는 여성의 자력적 능력을 실현했고 진정한 남녀평등을 증명해보였다는 점이 매우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다.
본고는 무엇보다 먼저 지성당 양이제의 일대기와 그녀의 신앙의 발자취를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양이제의 일대기를 활자화된 자료와 용담교구 탐방 자료를 근거로 재구성해 보았다.
2. 지성당 양이제의 삶과 신앙
1) 전반기: 출생부터 50대 중반까지
지성당 양이제는 포덕 33년(1892) 8월 10일 평안남도 중화군 양정면 문정리에서 부친 양정현, 모친 노씨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독실한 동학신자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으로부터 글과 경전을 배웠다고 한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주문공부를 하였고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서 한문과 한글 공부를 하시면서 천도교 경전공부와 신앙을 철저히 실행하셨다.
운정(雲亭), 「모범여성 교역자탐방: 선도사 성지당 양이제할머니」,『신인간』통권 290호, 신인간사, 포덕 112년(1971), 76쪽.
지성당 양이제가 한문과 한글 공부했다는 것은 경전을 읽고 수도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신앙 도약의 중요한 기점이 된다. 그 당시 여성으로서 글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이러한 것이 여성이 남성과 평등을 이루는데 걸림돌이 되었던 시대인 만큼 양이제가 직접 경전을 읽고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은 그녀가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시너지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보여진다.
그 당시 풍습에 따라 10세 때 ‘비(非)교인 신이순(申利淳)’씨와 정혼하게 된다. 그러나 지성당 양이제는 “왠지 시집가기가 싫어 더욱 더 수련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13세 때 결혼을 권하자 이것을 피하여 아직 날씨가 추운 2월 29일 근처에 있는 산중에 들어가 “이틀을 계속 주문만을 읽고 시집을 가지 않게 하여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이 때 지성당 양이제는 기도로 인한 이적을 체험하게 된다. 수옥당 김옥희는 「독신자를 찾아서: 양이제 할머니의 수도 생활」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그 회고담을 소개하고 있다.
그때 미친 듯이 생각도 아니한 산중기도를 하게 된 것은 단순히 시집가기 싫어서 취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너무나 지나치게 기도에 빠지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적이 나타나 하늘에서부터 하얀 무명필이 주루루 펴지더니 자기는 흰말을 타고 펴지는 무명필과 함께 휩쓸려 어디론가 떨어져 내려감을 깨닫고 놀라서 눈을 떠보니 그 곳은 처음 주문을 외우던 곳과 달리 수십 길 낭떠러지 바위위에 처음 자세 그대로 떨어져있는 사실을 느끼자 이러다가 내가 정말 미치겠구나하고 무서워서 집으로 돌아오셨답니다. 하여간 그때에 나타난 신기한 이적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초인간적인 능력은 지극한 수도로서 이룰 수 있다는 확신만은 분명히 자각했으며 이것이 첫 기도인 동시에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 수도의 왕 독신교인이라 이름을 갖게 된 것일 거라고 말씀하시며 무궁무궁한 우리의 무극대도는 도무지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왈 수도요 이왈 수도라고 자신 있게 역설하시며 특히 내수도가 부족함을 자못 개탄하시고 비록 바가지에 청수를 모시는 한이 있더라도 지극한 정성과 끊임없는 노력만으로 청수를 모시고 수련에 임한다면 반드시 한울님이 감응하실 것은 명명한 일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천도교 시원포: 90년의 발자취』, 509쪽.
이 사건은 지성당 양이제의 첫 번째 기도 체험으로서 ‘수도’의 중요성을 깊이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그녀의 삶의 신앙적 지표를 세워준 사건으로 평가된다. 또한 후일 그녀가 앞의 인용문에서 보이듯이 ‘수도의 왕 독신교인’이라 불리게 된 계기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14세에 지성당 양이제는 정식으로 천도교에 입교한다.
16세에 지성당 양이제는 10세에 정혼했던 비교인인 신이순씨에게 출가하였다. ‘이제(利濟)’라는 이름은 결혼 후 남편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라고 한다. 비교인 집안에 시집을 감으로써 지성당 양이제는 종교생활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이제는 주문 읽고 청수를 모시는 등의 오관실행을 철저히 하였는데 특히 “시집에서는 청수를 모실 수가 없어 물동이 채로 <동이청수>를” 모셨다고 한다. 이러한 신앙 태도는 해월의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삼경사상(三敬思想)” 등을 위시한 실용적인 신앙관을 일상생활에 잘 적용해 실천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정성스런 자세는 시집살이 8년 만에 전 가족을 감화시켜 입교시키는 놀라운 가정 포덕을 이루어내었다고 한다
가정포덕 이후 지성당 양이제는 드디어 ‘마음 놓고 기도생활’을 하게 된다.
이 때 여러 종류의 기도를 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즉 “특별기도로서는 밤1시부터 5시까지 3·7일기도, 49일기도를 누차 해왔고, 단식기도도 21일간 하여 보았고, 수마(睡魔)기도도 1년 반 시행하여 보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효과가 있었던 것은 수마기도라고 그녀 스스로 말하고 있다.
수옥당 김옥희는 지성당 양이제의 수마기도 체험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수마기도는 시작하여 3일부터 7일사이가 가장 힘이 들었으나 그 후는
상상외로 정신이 맑아짐을 느낄 수 있으며
지금도 딴사람에 비하여 기억력이 특수한 것은 26세에 시행하였던 수마공부의 덕이라고 자부심을 가지십니다.”
포덕 60년(1919) 28세 때 3·1독립운동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지성당 양이제 역시 천도교인으로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3·1만세 운동 당시 “28세의 젊은 부인의 몸으로 평양에서 어린 자식을 등에 업고 만세 시위의 선두”에 섰다고 한다.
이 일에 대해 운정(雲亭)은 「모범여성 교역자탐방」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포덕60년(1919) 己未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선언문을 광우리에 담아 이고 강동 일대에 전달하고 직접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 이송되어 14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왜경의 모진 고문에 의해 늑골이 두 개나 부러져서 지금도 그 상처가 몹시 아프시다고 한다.
운정(雲亭), 「모범여성 교역자탐방: 선도사 성지당 양이제할머니」,『신인간』통권 290호, 신인간사, 포덕 112년(1971), 76-77쪽. 신성당 김태화는 16개월 동안 옥고를 치뤘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도교 시원포: 90년의 발자취』, 513쪽 참조.
지성당 양이제가 언급한 ‘강동 일대’에 대한 회고는 『천도교약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시 고문을 당하고 평생 휴유증에 시달렸는데 어떻게 젊은 여성으로서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그때는 모두들 그랬다”고 담담히 회상하였다고 한다.
포덕 62년(1921)에는 천도교 여성단체의 효시가 되는 「천도교 평양여자청년회」의 창단에 힘썼고, ‘천도교교리를 연구’하고 “여자교리상습회” 등을 열어 “여성의 인권신장”을 꾀하였으며 “타지방의 여자 청년회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포덕65년(1924) 4월 5일에 「천도교내수단」이 창단된 이후에 평양지방 내수단은 1924년 5월 11일에 설립되었는데 지성당 양이제는 평양지방 내수단의 간부로서 활동했다. 특히 “여성운동을 적극 전개하여 여성의 사회적 사명을 고취하고 남녀평등사상을 널리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생활개선운동에 앞장”섰다고 한다. 포덕 72년(1931)에 천도교 내성단이 결성된 후에 지성당 양이제는 “평양시 대표”직을 맡았고 더불어 교회에서는 “전교사 여성순회 교사”로서 일하면서 포덕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신앙생활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포덕 79년(1938)에는 내성단 평양지부 포덕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포덕 79년(1938) 36세에 지성당 양이제는 부군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맞게 된다. 혼자서 가정을 책임지면서도 “남은 여생을 교회에 받칠 결심으로 교회활동을 더 열심히 하셨다.”고 한다. 그러는 도중 지성당 양이제는 원인불명의 실명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할머니는 4남매의 어머니로서 36세에 미망인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그 슬픔과 외로움을 여기 표기할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양 할머니는 평소 수도의 비범한 힘을 얻어 남편이 남긴 사업상 부채와 가산을 정리하고 방 한 칸에 홀시어머니와 어린 자녀들을 책임지고 그야말로 피나는 생활고, 정신고에 시달리면서도 더욱 더 수심정기하여 수도에 극전하여왔으나 설상가상으로 눈의 광명을 잃어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무언가 자신의 수도가 부족하다고 단정하여 천일기도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끝에 눈의 광명을 잃은 슬픔보다는 천일기도를 시행함에 기쁨을 갖고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해오던 중 8개월이 지나자 차츰 광명을 찾게 되고 1년 반이 지나자 옛날의 광명을 완전히 되찾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한울님의 무궁조화의 위력(偉力)을 체험하였으며 천도를 믿는 신앙심은 더욱 굳건하여졌다면서 우리 도인들이 비교인과 다른 점을 곧 역경에 처했을 때 남과 다른 신앙심과 수도력으로 어떠한 난관이고 물리칠 수 있는 도력을 배양함에는 일왈, 이왈, 삼왈 수도 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다시 한번 역설하셨다.
『천도교 시원포: 90년의 발자취』, 510쪽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지성당 양이제는 기도의 힘으로 실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시력을 되찾게 되는 극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또 한 번의 개인적인 큰 체험을 하면서 그녀는 신앙심을 더욱 굳히게 되고 세상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도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수도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음을 강조하게 된다.
포덕 86년(1945)년 43세에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평양은 북한 공산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공산독재에 항거하면서 통일자주정부의 수립과 교회재건을 위해 비밀리에 금붙이 등을 바꾸어 서울의 중앙총부에 보내는 일들을 하시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양이제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신앙 활동뿐만 아니라 반공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매진하였다. 그 이후 그녀는 가족과 더불어 월남하게 된다.
해방 후에는 교회발전을 위하여 종횡무진한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공산당의 압력 때문에 항상 불만을 품고 있던 중에 교회로부터 반공비밀조직인 「영우회」가 조직되자 문숙되시는 구암 楊봉진선생과 함께 가입하여 가지고 동지규합에 비상한 활동을 하시다가 그 사건이 공산괴뢰에 의해 탄로되어 수많은 동지들이 체포 투옥되는 통에 다행히 몸을 피하여 계시다가 一·四후퇴시에 가족을 인솔하고 월남하셨다.
운정(雲亭), 「모범여성 교역자탐방: 선도사 성지당 양이제할머니」,『신인간』통권 290호, 신인간사, 포덕 112년(1971), 77쪽.
윗글에서 지성당 양이제가 1·4 후퇴(1951년)때 월남했다는 말은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용담정으로 들어간 것이 포덕 92년(1951)년 봄, 구체적으로는 ‘정초’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천도교 시원포: 90년의 발자취』에 나타난 지성당 양이제의 ‘약력’에는 포덕 89년(1948)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포덕 91년(1950)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도 있다.
2) 후반기: 50대 후반 용담정으로 들어간 이후부터 환원하기까지
남한으로 월남 후 포덕 92년(1950)에 지성당 양이제는 부산으로 피난을 간다. 다음해 포덕 92년(1951) 봄에 피난살이를 하던 중 뜻한 바가 있어 지성당 양이제는 용담정으로 들어가 독공수련 천일기도를 하게 된다. 이 때 지성당 양이제가 용담정으로 간 것을 수옥당 김옥희는 “꿈에 그리던 용담정”을 찾아갔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만큼 양이제가 용담으로 간 것은 즉흥적인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도하며 준비해왔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당 양이제 스스로도 “용담에 들어간 것도 사실은 한울님 명에 의하여 시행한 일”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용담의 역사는 지성당 양이제가 용담에 가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운과 해월 사후 동학도들에 대한 박해로 인해 용담에는 최씨 일가들이 있었지만 동학과의 관계를 전혀 언급하지 못하고 모두 숨죽이며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옥인당 이영례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친정) 할머니는 경주 최씨이신데... 동학이야기를 하시면서 그때는 그거 한다고 하면 쌀도 뺏고, 사람도 죽고 했다고 이야기하셨어요.”라고 증언하고 있다. 현재 용담교구에 있는 원암 이원벽의 말을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 ‘시천교’를 믿으면 탄압을 받지 않았기에 시천교를 믿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천도교’에 대해서는 전혀 말조차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운정(雲亭)이 지성당 양이제를 탐방하여 쓴 글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월남하신 후에도 의지할 곳 없는 역경 속에서도 자기의 천직인 포덕 사업은 조금도 늦출수 없다고 생각하신 나머지 어린 자식들을 서울에 남겨두고 대신사님이 득도하신 용담으로 포덕 92년 1월 2일에 찾아가서 인근사람들에게 용담정을 물어보니 용담정은 모르고 용담절이라고 가르쳐 줄 뿐 천도교는 알지도 못하고 있더란 것이다. 용담정을 찾아가니 해월신사의 따님이신 「최운계」할머니께서 낡은 집을 지키고 계시기에 그를 만나 서로 의지하고 포덕을 시작하셨다고 하신다.
운정(雲亭), 「모범여성 교역자탐방: 선도사 성지당 양이제할머니」,『신인간』통권 290호, 신인간사, 포덕 112년(1971), 77쪽.
지성당 양이제가 용담에 도착했을 무렵 용담지역 사람들은 “용담정은 모르고 용담절이라고 가르쳐 줄 뿐 천도교는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용담정에는 해월신사의 따님인 최운계(후술에는 최윤으로 명기함)이 ‘낡은 집’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지성당 양이제가 오기 전에 해월신사의 따님이신 최윤 사모님께서 54세(포덕 72년, 1931)에 용담성지를 지키려는 굳은 각오를 가지고 용담으로 들어오셨으나 생활이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데 상제교(上帝敎)의 교주인 김구암장(龜菴: 金演局)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김구암장은 해월신사의 데릴사위였던 최윤 사모님의 형부이다. 이렇게 상제교에서 경제적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최윤 사모님은 천도교를 천도교답게 제대로 전파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월신사의 손자 검암 최익환(崔益煥)의 부인 홍창섭(洪昌燮)은 대담을 통해서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대신사 순교 이후 방치되어 있던 용담정을 “1914년에 황해도 두목인 오응선(吳膺善) 선생과 교인 이계하(李啟夏)씨가 용담성지에서 105일간 기도를 드린 후 용담정을 중건했다고 되어있어요. 그 후 1922년에 시천교에서 마루 2칸과 온돌 1칸짜리를 지었는데, 최윤 사모님께서는 바로 그 건물에서 기거하시고 계셨습니다.
홍창섭,「그때 그 이야기 용담할머니 <대담>」, 『신인간』통권 357호, 신인간사, 포덕 119년(1978), 71쪽. 수운 생존 시 용담정은 9칸짜리 기와집으로 ‘안방 4칸, 사랑 2칸, 마루 1칸, 주방 1칸, 고깐 같은 방이 1칸’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용담정은 시천교 소유로 되어있었다. 그 시점에서 최윤 사모님은 그저 용담을 지키고 계셨을 뿐 시천교나 상제교 어느 교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성당 양이제가 용담으로 온 후에 당시 용담교구인들은 비로소 천도교를 알게 되었다고 현재 용담교구민(원암 이원벽)은 증언한다. 이것은 또 『천도교 시원포: 90년의 발자취』에 기록되어 있다.
이 때는 6·25동란이 한창 때였는데 해방 전부터 시천교인 몇 사람이 있었을 뿐 사실상 천도교의 불모지였던 이 지방에 정식으로 천도교가 포교되기 시작한 것은 양이제 할머니의 초인적인 정성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성당 양이제가 경주 용담에 간 후에도 최윤 사모님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고 최윤 사모님의 환원(포덕 97년, 1956, 3월 1일, 79세) 이후에 비로소 지성당 양이제는 천도교를 의절에 맞게 바로잡으면서 적극적인 포교에 나서게 된다: “일년에 두 번 치성 드리던 것이 오관 실행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 것은 최윤 사모님 환원하신 후 양이제 사모님이 천도교 의절에 맞지 않는다고 폐지시킨 후부터였다.”
또한 자신이 직접 포교하는 것 이외에 지성당 양이제는 초청 강도회도 주최하였다. 경주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성당은 천도교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김용문’ 선생을 초청하여 5일간 강도회를 실시하였고 그때 수십 명이 “교리, 교사, 천덕송, 천도교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만약 지성당 양이제가 그 때 용담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용담성지 일대의 동학·천도교의 포덕교화는 훨씬 더 늦어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최윤 사모님이 “23년 동안 용담정에 기거하면서 쌓아온 수도와 덕화의 힘”이 지성당 양이제의 포덕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지성당 양이제는 용담에 와서 맨 먼저 일체의 육식을 금하고 천일기도를 하고 쉬임없이 매일 같이 포덕전교를 하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붙여진 별명이 “양보따리”라고 한다. 지성당은 용담정이 있는 가정리는 물론 경주일대에 포덕활동을 펼쳤으며, 이렇게 성지인 용담수호를 위해 포덕에 힘을 기울인 지성당 양이제를 김태화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부지런하신 지성당께서는 끼니를 굶어가면서도 대신사의 득도지인 용담성지 일대에 천도교의 종자를 심어 놓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불철주야 포덕과 수련에 힘쓰시던 그 광경은 지금도 생생하게 눈 앞에 떠오릅니다. 지성당께서 입산수도하실 때 따라 가 보았는데 일거수일투족이 교회를 위한 것이었고 한 말씀 한 말씀이 교리 해석이었습니다.
『천도교 시원포: 90년의 발자취』, 514쪽.
지성당 양이제는 용담에 와서 포덕을 할 때 당시 한글이나 한문으로 된 경전들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일 때는 이러한 경전을 외우고 해석하여 가르쳐주었다고 현 용담교구의 원암 이원벽은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한 때 이곳 부녀 동덕들은 양이제 할머니와 같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모두 암송할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초기에 교당이 갖춰지지 못했을 때는 교인들의 집을 돌아가며 마당에서 시일식을 하고 지성당 양이제는 주로 설교를 하였다고 한다. 지성당은 여름에는 마당, 겨울에는 집안에 둘러앉아 경전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자신의 신앙 체험도 들려주었다고 한다. 양이제의 평소말씀은 늘 수련, 수도, 포덕을 강조하었다고 현재 용담교구인들은 회고한다. 또한 동덕들에게 일할 때 교훈가를 외우라고 권하기도 하셨다고 한다. 현 용담교구의 관암 최영관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제대하고 나서 고향 마을에 돌아왔을 때 양이제 사모님이 용담에 와 계셨습니다. 그때는 이 일대 사람들이 천도교를 많이 했습니다. 당시에 수련을 했었는데, 지금처럼 수련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 마당에 모여 주문을 한 시간씩 외우곤 했습니다.
양이제 사모님은 주문과 성미를 정성껏 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또 중국 고사 이야기나 동학 때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셨어요.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해월 신사님은 총을 맞아도 아무런 흔적이 없었는데, 의암 성사님은 옷이 노름노름했었다는 이야기도 해주셨지요.
『천도교 시원포: 90년의 발자취』, 767쪽.
포덕 104년(1963) 용담교구 교당을 마련하고 후에 다시 교당을 신축(포덕110년, 1969)할 때에도 지성당 양이제는 성금을 모아왔으며 교인들 역시 물심양면의 희생 봉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같은 해에 용담교구 산하의 안강지구 ‘전교실’이 ‘직접 전교실’로 승격되고 포덕이 확산되었다.
이렇게 지성당 양이제는 용담교구를 중심으로 동학정신을 깨우치고 천도교의 교리를 전하고 오관실행을 정착시켰으며 실제로 한울님과의 감응을 동덕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지성당 양이제와 함께 했던 용담 교구인들은 이 각인된 체험을 아직도 생생히 지니고 있는 듯하다.
특히 포덕 101년(1960) 대신사 탄신 100주년을 맞아 용담수도원(현 용담정)을 다시 지을 때 지성당 양이제는 총감독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성절당 권태화 등 몇 사람과 함께 적극적으로 성금을 모았는데 이 때 자신이 끼고 있던 반지 등 패물까지 팔아서 보탰다고 한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용담 교구인들은 낮에는 농사일을 하면서도 밤에는 지게로 집 짓는 데 필요한 재료를 용담정까지 직접 날랐다고 한다. 지금도 깊은 산속이라고 느껴지는 (큰 길에서도 2km 정도 올라가야 함) 용담정까지 건축 재료를 교인들이 직접 날랐다고 하는 점은 정말 깊은 신앙심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천도교 중앙총부 중앙도서관장 지암 이창번(芝菴 李昌蕃)님은 용담정 1차 준공 기념식(포덕 116년, 1976. 10. 28) 때 지성당 양이제를 처음 보았는데 그 때의 에피소드를 필자에게 들려주었다. 지암 이창번님은 그 당시 서울에서 행사 준비물을 가지고 용담정으로 내려갔는데 어떤 할머니가 “이 몹쓸 사람들이 나무에 상처냈다”고 하시면서 용담정 앞의 깨어진 소나무를 쓰다듬고 계셨다고 한다. 그 당시 공사 차량 때문에 용담정 앞의 소나무가 일부분 깨졌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그 분이 누군가하고 교무관장 이종웅에게 물어보니 ‘저 분을 모르면 천도교인이 아니지’ 하면서 ‘지성당 양이제’라고 알려줬다고 한다. 지암 이창번님은 지성당 양이제를 그 당시 ‘용담할머니’라고 칭했으며 ‘수도만 하시는 분’으로 알려졌었다고 회고한다.
평소 지성당 양이제는 저고리에 단추를 달고 여미지 않는 통치마를 치렁거리지 않게 입으셨다고 한다. 이것은 여성으로서의 전통성이나 아름다움보다는 활동성을 높이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직 수련과 포덕만을 염두에 둔 양이제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의복은 대체로 하얀 저고리, 겨울에는 무명으로 만든 회색저고리를 입으셨다고 한다.
또한 지성당 양이제는 자신을 위한 특별한 거처도 마련하지 않고 용담정이나 교인 집에 머물렀으며, 교인 집에 머물더라도 자신의 식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스스로 지어서 드셨다고 한다. 이렇게 지성당은 포덕에 온 힘을 쏟았을 뿐 자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점은 포덕의 과정에서도 나타나는 데 지성당 양이제가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포덕하는 데 썼다는 아래의 인용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가정리를 위시하여 경주, 양일 옥산, 안강, 영천, 금천등지를 매일같이 다니시면서 노력한 결과 380여호의 포덕은 내었으나 당신의 유일한 밑천인 50만원(구화)을 우체국에 저금하였던 것을 교통비로 다 쓰고 없어졌더라는 것이다.
운정(雲亭), 「모범여성 교역자탐방: 선도사 성지당 양이제할머니」,『신인간』통권 290호, 신인간사, 포덕 112년(1971), 77쪽.
평양에서부터 가지고 나온 32돈이나 되는 금붙이를 모두 팔아 포덕비로 쓰면서까지 하루 6~70리씩 걸어 다니며 인근 10여 개 마을을 포덕한 결과 천도교인이 한 사람도 없던 용담성지 일대에 5백여 명의 신자를 입교시켜 우리 교단 최초의 여성 도정(道正)으로 추대되기에 이른 것이다.
『천도교 시원포: 90년의 발자취』, 512쪽. 김옥희가 쓴 「양이제 할머니의 수도생활」에서는 “용담정에 들어가시어 하루 7, 8리 장거리를 도보로서 헌신 노력한 결과 1년 동안 390명을 포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책, 511쪽.
이러한 노력의 결과 지성당 양이제는 드디어 포덕 103년(1962) 5월 25일 천도교 첫 번째 여성도정으로 인준 받게 된다. 현재 용담교구인들의 회고에 의하면 그 당시 용담정 근처의 마을은 주민의 80%이상이 천도교를 믿었으며, 일요일이면 온 마을에 궁을기가 펄럭였었다고 한다.
그 후 또 한 번 놀라운 일은 지성당 양이제가 80세에 종신직인 도정 직을 젊은 세대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지성당은 자신이 20여 년간 포덕한 결과로 이루어진 시원포 연원의 도정 직을 10여 년간 수행한 후에 종신직인 도정 직을 좀더 활동력이 있는 법암 김근오(法菴 金根五)동덕에게 선수하셨다. 이러한 행동은 비록 여성이지만 교회를 위해 과감히 전통을 깨는 좋은 선례로서 귀감이 될 만한 것으로 칭송되고 있다.
평소 지성당 양이제는 “굉장히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셨고 “장부같은 기질”이 있었다고 한다. 반면에 지성당은 매우 분명한 성품이어서 “칼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며, 그래서 아주 간혹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현 용담교구인은 말한다. 이러한 양이제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바를 운정(雲亭)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五尺단구의 이 녹두할머니는 그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기에 누구도 이 할머니의 성미를 건드리지 못하는 노익장한 투사이시다. 그러기에 일제 때에는 반제투쟁에 여성으로서의 앞장섰고 해방 후에는 반공투쟁에 앞장섰든 여성애국투사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도 내 한 생명을 받쳐 교회가 잘 될 수 있다면 쾌히 앞장서겠다고 힘 있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운정(雲亭), 「모범여성 교역자탐방: 선도사 성지당 양이제할머니」,『신인간』통권 290호, 신인간사, 포덕 112년(1971), 78쪽.
이러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이러한 순명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이렇게 천도교에 한 평생을 바쳤던 지성당 양이제는 포덕 121년(1980) 4월 5일 여성으로서 2번째로 천도교 종법사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지성당 양이제는 포덕 125년(1984) 5월 21일 환원하였으며, 포덕 126년(1985) 5월 21일 지성당 양이제 종법사의 묘비제막식이 포천 천도교묘지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현재 포천 천도교묘지에 지성당의 묘가 후손에 의하여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곳으로 이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아직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다음호에 계속)